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필자의 이력은 좀 희한하고, 특이하다.

러시아에서 유학한 것. 러시아과학원 혹은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어릴 때부터 러시아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냥 웬지 끌리고,,, 훨씬 미국보다 있어보였다.

왜냐하면 차이코프스키, 칸딘스키 같은 내가 좋아하는 작곡가와 화가의 나라니깐.

미국은 돈만 많치......라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현재 러시아에서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6명인데, 내가 다섯 번째이고, 앞의 네분은 경희대학교, 목포대학교.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강릉원주대학교에서 재직중이시다. 나머지 한명은 학위는 했다는 걸로 아나 전혀 학계에서 활동이 없다. 또 한 두어명 지금 러시아에서 학위준비중이라는 것도 안다. 활동하는 다섯명 중 한분 빼고는 모두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출신이다.

 

오늘은 러시아과학아카데미에 대해서 약간 소개하고자 한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는 대학의 상위기관이다.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북한사회과학원은 모두 러시아과학아카데미를 모방한 것이다.)

학부과정은 없고, 대학원 과정만 있으며 전문가 양성기관이다.

러시아가 매우 큼으로 우랄분소, 시베리아분소, 극동분소로 나눠져 있다. 원래 극동분소는 시베리아에 포함되었는데, 해양학과 태평양의 중요성 때문에 극동분소를 나눴다.

물론 본원은 모스크바에 있다.

가장 큰 곳은 시베리아분소인데, 노보시베리스크라고 하는 도시에 있다. 이 도시안에 아카뎀가라독이라고 하는 일종의 과학원도시인데, 그 안에 수백개의 연구소가 있고, 거기에 러시아첨단과학이라고 하는 모든 기술이 집중된 곳이다. 우주기술, 핵물리학 기술 등등

극동분소는 그에 비해서 작은데, 해양학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역사 혹은 고고학연구소는 가장 중요한 곳으로 꼽힌다.

이건 러시아시험에 그대로 녹아 있는데,

러시아에서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세 개의 국가시험을 통과해야한다. 그런데 본인이 무엇을 전공하든 반드시 쳐야되는 시험이 역사철학이다. 나머지 두 개는 언어와 전공시험이다. 그래서 역사전공자나 고고학전공자는 어떤 연구분야 보다 힘이 있었고, 그 연구소의 소장은 박사 수만명이 살고 있는 아카뎀가라독을 죄지우지 한다.

이건 아마 공산주의 특유의 교육시스템 때문일 것이다.(누군가 이 블로그 보는 사람중에 나를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공산국가의 교육은 내가 볼 때 꽤 좋다. 적어도 사람을 위아래로 가르고, 우열반을 나누고, 학교를 서열화 시키지 않는다. 모두가 공평하고, 그리고 인간적이다...한때 우리나라에 국사와 세계사를 수능에서 제외한다는 소리가 있었는데, 나라가 미쳤다는 생각을 했다. 아 그땐 나라가 없었지? 아마?)

 

우리시각에서 보면 모스크바에서 있는 러시아과학원이 제일 좋다고 하겠지만.

러시아에서는 그냥 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이다. 그 중에서 어디 소속인 것이지.

대학의 상위기관이며, 연구자 중에 좀 못한 사람이 대학교수로 가고, 실력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러시아과학원의 선임연구원이 되는 것이 가장 큰 명예로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러시아도 예전 같지는 않아서, 러시아과학아카데미가 많이 손질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안타깝다. 러시아의 보석인데.

그 잘난 미국식 때문에 대학이 더 중심이 되고, 대학교수가 되고 싶어한다고 들 한다.(예전 소련때는 3D업종이 의사, 대학교수였다.)

그리고 역사학이나 고고학도 전공을 많이 안하고, 돈되는 학문에 사람이 몰린다고 한다.

사람이 몰린다 인기가 없다. 이런 말은 돈의 흐름과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역사학과 고고학 연구비를 지원을 많이 안한다는 그런 말이다.

 

 

학부부터 유학을 하고 싶은 사람은 러시아대학으로 가면 된다.

한국과 가장 가까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도 우리나라로 치면 국립대학이 있다.

물론 러시아에는 모두 국립이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거점국립대학 같은 곳이 블라디보스톡에서는 러시아연방극동대학(https://www.dvfu.ru/)이다. 영어로도 사이트를 운영한다.

만약에 학부부터 유학을 한다면 꼭 거점대학으로 가는 것이 좋다. 그 외는 너무 이상한 학교도 현재 러시아에 넘쳐난다. 거점대학이 매우 유서도 깊다. 극동연방대학도 100년이 넘은 걸로 안다.

우리나라는 너무 투자를 안한다. 극동연방대학은 일본에서 아주 공을 들이고 있어서, 친일성향은 깊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모스크바대학 아니면 여기라고 생각된다. 혹은 노보시베리스크연방대학.

 

언어는 가서 배울 것을 권한다.

러시아어를 배우기 위해선 모든 것을 버려야한다. 머리를 한번 개조한다는 표현이 맞다.

우리나라에서 러시아어를 배우는 건, 아마도 일본문법책 베낀거를 설명하는 수업듣는 것일텐데. 그거 아무소용없다.

필자도 그냥 알파벳 정도만 알고 가서 배웠다. 러시아연방극동대학에서 어학코스를 하는 쉬콜라가 있는데 잘가르친다. 필자도 그곳에서 배웠다. 아마 사이트에서 확인가능할 것이다.

약간 나의 자랑을 하자면, 그 쉬콜라에서 한 4달 정도 공부하고,

필자는 러시아과학원의 여름 발굴을 따라갔다가 다시 등록했다.

내가 듣던 반의 사람들이 모두 떠나서 다시 시험쳐서 레벨테스트 해서 들어가야 했다.

그 결과 같은 레벨로 측정된 사람은 모두 4명인가였다. 일본인 1사람-일본에서 러시아어4년 전공했고, 몇 달째 어학연구수중, 한국인 1사람-수녀였는데, 2년 넘게 러시아에서 어학연수중. 그리고 한명도 몇 년 째라고 했던거 같은데. 난 러시아어 배우기 시작한지 4달째였고, 발굴2달갔다온 게 다 였다. 그런데 말은 내가 제일 잘했다.(재수없으시겠지만..)


 

그래서 러시아어를 배우는 건 한국에서 안된다(물론 개개인이 다르니 이렇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러시아어는 한국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이고, 영어와도 매우 다르다.

 그런데 러시아어를 알면, 아주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다. 세상의 반 넘는 땅이 러시아 아닌가? 그리고 지금의 중앙아시아에서도 학위를 따려면 러시아어를 해야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독립하면서 자국언어를 쓰기는 하지만, 자국언어로 소련당시의 연구된 자료들이 모두 치환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언어때문에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요즘 젊은중앙아시아사람들은 러시아어를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앞으로 올 미래를 생각하면, 러시아어는 매우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진지하게 배우고 싶다면, 러시아에서 어학코스를 권한다. 본인이 원하는 도시에서.

러시아의 낭만과 문화를 느끼고 싶다면 상트페체르부르그를 권하고, 가까운 곳은 블라디보스톡, 시끌벅쩍하고 난 수도가 아니면 싫어 하시는 분은 모스크바에 가면된다. 시베리아에는 노보시베리스크가 있다.

나라면? 상트페체르부르그를 갈 것이다


김재윤


*그리고 첨언하면, 문법책 보고싶으시면, 차라리 미국이나 영국에서 출판된 것을 구해 보시기 바란다. 그게 훨씬 더 유용할 것이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아마 한국어로 된 러시아어문법책은

일본책 베낀걸 재판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우리나라말과 러시아말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영어와 러시아어는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그 차이가 우리나라와 러시아어같지는 않다. 

'미래의 인디아나존스를 위해서.. > 고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 수업...  (0) 2019.04.16
러시아과학아카데미?  (0) 2019.03.27
한국의 고고학 관련학과  (0) 2019.02.17
실측  (0) 2018.05.11
고고학 전공에서 배우는 것 2  (0) 2018.02.21
posted by 김재윤23
2017. 8. 25. 15:39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이 내용은 2017년도 복천박물관에서 특강한 것입니다.

울산 반구대 바위그림은 태화강의 상류에 위치하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의 암각화가 유라시아에 비해서 적은편이지만 바위그림 가운데 가장 사실적으로 고래, 인간, , 어로도구, 사슴, 호랑이, 멧돼지, , 토끼, 여우 등 300여점의 도상이 아주 잘 묘사가 되어 있어서 흥미로운 점이  많다. 한국의 바위그림은 가운데서 가장 사실적인 표현으로 다른 바위그림이 기하학적인 문양이 주를 이루는 것과 차별된다.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만과의 거리는 직선으로 약 2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울산대학교 박물관의 조사(울산대학교 박물관 2000)에 따르면 그림 중에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이 동물상(65.2%)이고, 확인되지 않는 미상의 것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인물상(4.7%) 등의 순으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동물상 중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이 고래(30%)이며,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사슴(29.5%)도 그려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고래는 무리를 지어서 그려져 있는데, 위에서 내려 본 모습, 옆에서 본 모습 등 그림의 관점도 다양하며, 표현된 고래도 물을 뿜는 고래의 모습(그림 1-A), 새끼를 업고 이동하는 모습, 작살이 몸속에 박힌 고래 등 여러 모습을 그렸다(그림 1). 고래는 주로 쪼기 기법으로 면을 음각으로 처리한 것이 대부분이다(김호석 2008, 이상목 2011).

사슴은 쪼아서 전면을 음각한 것(그림 2-A)과 외곽을 선 새김 한 후 내면에도 모양(그림 9-B)을 그려 넣은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가 우세하다. 하지만 후자의 방법으로 그려진 것이 사슴 뿐만 아니라 멧돼지(그림 3-C), 호랑이(그림 3-A·B) 등 여러 동물을 그리는 데 이용되고 있다.


고래는 무리를 지어서 그려져 있는데, 위에서 내려 본 모습, 옆에서 본 모습 등 그림의 관점도 다양하며, 표현된 고래도 물을 뿜는 고래의 모습(그림 1-A), 새끼를 업고 이동하는 모습, 작살이 몸속에 박힌 고래 등 여러 모습을 그렸다(그림 1). 고래는 주로 쪼기 기법으로 면을 음각으로 처리한 것이 대부분이다(김호석 2008, 이상목 2011). 


사슴은 쪼아서 전면을 음각한 것(그림 2-A)과 외곽을 선 새김 한 후 내면에도 모양(그림 2-B)을 그려 넣은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가 우세하다. 하지만 후자의 방법으로 그려진 것이 사슴 뿐만 아니라 멧돼지(그림 3-C), 호랑이(그림 3-A·B) 등 여러 동물을 그리는 데 이용되고 있다.





반구대 바위그림의 인간 그림이 모두 14점 있는데, 그 중 12점은 전신상이며 2점인 인면문이다. 그 중 전신상(그림 1-B)을 샤먼으로 본 견해(장석호 2007, 이필영 1988)와 샤냥꾼(정동찬 1988)으로 본 견해로 나눌 수 있다. 샤먼으로 본 견해는 남성의 상징으로 보이는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은 해부학적으로 인간과 일치하지 않으며, 샤먼의 특수한 무복이라고 보거나, 바다사냥 중 물을 담은 물통이거나 비상식량주머니를 허리에 찬 모습으로 고래사냥하는 샤먼이라는 것(이필영 1988)이다. 반면에 이를 완전 배제하고 허리에 튀어나온 부분이 성기가 아닌 사냥꾼의 활과 같은 도구를 허리에 찬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박정근 2001).


하지만 유라시아 대륙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호주 등 전 세계에서 확인되는 바위그림의 주요 주제는 성(), 식량, 영토이며(엠마누엘 아나티 2003), 알타이, 카자흐스탄, 몽골 등지에서 확인되는 바위그림에도 남자와 여자의 성기, 성교장면 등은 늘 등장하는 주제이다.
반구대 바위그림은 다른 바위그림 등과 마찬가지로 제작 연대의 문제, 제작 집단 등 여러 가지 논쟁이 되는 것이 많다. 반구대 바위그림의 제작 연대는 신석기시대 설과 청동기시대 설이 있는데, 주변에서 이를 증명할 만한 유적이 없는 점이 안타깝다. 러시아의 바위그림은 주변에서 바위그림과 관련된 유적 등이 확인되어서 연대 추정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반구대 바위그림의 가장 주요한 소재는 고래와 사슴인데, 앞서 살펴본 페그티멜 바위그림과 사카치 알리안 바위그림에서도 본 듯 하지 않은가? 공통점과 차이점을 추출해 보자.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2017. 8. 24. 19:45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이 내용은 2017년도 복천동박물관 특강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2. 사카치 알리안 바위그림


사카치 알리안 유적은 아무르강 하류의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매우 잘 알려진 곳이다. 사카치 알리안 마을에서부터 상류쪽으로 말리셰보 마을까지 아무르 강가의 5km 범위 내에 화산암 바위 위에 그림이 남겨져 있다. 페그티멜 유적과 반구대가 절벽위에 그려져 있다면, 사카치 알리안은 강가에 바로 위치하고 있어서 접근성은 좋지만 유적파괴도 극심하다. 이곳은 아무르 강 하류에서 500 km 떨어진 곳으로 바다보다는 훨씬 내만 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바위그림은 인간의 얼굴 혹은 마스크를 쓴 얼굴, , 사람, , 사슴-, 사공이 탄 배, , 원심원 및 동심원 문양 등 기하적인 것도 백 여점 이상으로 그려져 있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원심문양이나 동심원문인데,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은 인간의 얼굴모양(그림 2)을 형상화 한 것이라는 설이 크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메드베제프 2005) 또한 태양 주술과 관련되었다는 형상학적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인면문은 다양한데, 얼굴만 그린 것과 몸통까지 다 표현한 것이 있다. 얼굴형만 그린 것은 얼굴의 기본형태가 타원형, 하트형, 역삼각형, 그 내부를 눈, 입만 표현한 것, ··입 다 표현한 것이 있다. 또한 얼굴에 마스크를 쓴 얼굴을 표한한 것도 있는데, 마스크의 표현방법도 단순한 것은 아니다.


공이 탄 배도 사람의 수가 4~9명 등 다양해서 선사시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사차키 알리안 암각화의 사슴은 외곽의 선 새김을 내면에도 선을 새겨서 내면에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이다. 또한 사카치 알리안 암각화에는 맹수도 그려져 있는데, 호랑이로 추정된다(그림 3-3). 호랑이는긴 꼬리를 치켜들고 있고, 앞 다리를 들고 있으며, 귀가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몸통에는 격자문양이 시문되어는 모습이다. 호랑이와 함께 그려진 동물 역시 격자문으로 몸통이 그려져 있고, 다리는 4개이다(그림 3-2). 




이곳의 바위그림은 인간의 얼굴 혹은 마스크를 쓴 얼굴, , 사람, , 사슴-, 사공이 탄 배, , 원심원 및 동심원 문양 등 기하적인 것도 백 여점 이상으로 그려져 있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원심문양이나 동심원문인데,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은 인간의 얼굴모양(그림 2)을 형상화 한 것이라는 설이 크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메드베제프 2005) 또한 태양 주술과 관련되었다는 형상학적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인면문은 다양한데, 얼굴만 그린 것과 몸통까지 다 표현한 것이 있다. 얼굴형만 그린 것은 얼굴의 기본형태가 타원형, 하트형, 역삼각형, 그 내부를 눈, 입만 표현한 것, ··입 다 표현한 것이 있다. 또한 얼굴에 마스크를 쓴 얼굴을 표한한 것도 있는데, 마스크의 표현방법도 단순한 것은 아니다.


공이 탄 배도 사람의 수가 4~9명 등 다양해서 선사시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사차키 알리안 암각화의 사슴은 외곽의 선 새김을 내면에도 선을 새겨서 내면에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이다. 또한 사카치 알리안 암각화에는 맹수도 그려져 있는데, 호랑이로 추정된다(그림 3-3). 호랑이는긴 꼬리를 치켜들고 있고, 앞 다리를 들고 있으며, 귀가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몸통에는 격자문양이 시문되어는 모습이다. 호랑이와 함께 그려진 동물 역시 격자문으로 몸통이 그려져 있고, 다리는 4개이다(그림 3-2). 





posted by 김재윤23
2017. 8. 23. 16:28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내용은 2017년 5월에 부산복천동박물관의 특강 내용입니다.


1. 페그티멜암각화
추코트카는 가장 북쪽인 동시베리아해와 인접하고 있으며 바위그림은 시베리아해로 흘러가는 페그티멜 강의 하류의 지류인 카이쿨 강에서 확인되었다. 이 지점은 동시베리아해와 거리가 50km 정도이며, 페그티멜 강과 카이쿨 강 사이 1000m~1200m가량 떨어진 곳에 바위그림이 존재한다. 1965~1967년에 걸쳐서 1차 조사가 실시되고, 1968년에 1차 조사보다 약간 하류에서 2지점을 발견하였다


페그티멜 바위그림에 관련된 보고서가 출판된(디코프 1971) 1971년에는 아무르강 하류의

사카치 알리얀 등 몇 몇 유적도 보고되었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페그티멜 바위그림은 당시 소련에서는 시베리아 초원지대 및 알타이 지역에서 잘 알려진 바위그림이 아무르강 하류 및 추코트카 까지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당시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페그티멜 바위그림에는 머리에 모자를 쓴 사람(그림 2)이 그려져 있는데, 알타이에서도 이 주제가 큰 논란이 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큰 호응이 있었다.

페그티멜 바위그림은 미사암계 점판암의 높이 25~30m가량의 암반위에 제 1지점에는 모두 11 곳의 암벽에 그림이 모두 104장면이 그려져 있다. 크게 깊은 선각과 쪼기를 해서 면을 음각으로 처리하는 방법(그림2)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 주제는 다양하며, 11곳의 장소마다 그리는 대상물의 차이가 있는 것도 있고 공통적인 것도 있다.

가장 많이 그려진 주제는 생활습관이 그대로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사냥하는 장면이 가장 많은데, 대상물은 고래, 사슴, 곰 등이다 또한 성공적인 사냥을 기원하는 것인데, 배에 타서 사슴을 끄는 마술과 같은 그림도 있는데(그림 3-1) 사실 이 그림은 실제 추코트카에서 행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와 함께 그려진 인간의 생활모습도 반영되어 있다. 한 그림은 배를 타고 가면서 순록을 몰던 유카리 족이 그려져 있고, 눈이 내릴 때 스키를 타고 개와 함께 걷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그림 3-2).
뿐만 아니라 머리에 버섯모자와 꼬리가 달리거나(그림 3의 가장 우측) 장화를 쓴 신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알타이나 중앙아시아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람이다. 대규모의 성소로 알려진 바이칼 유역의 엘란가쉬 유적에서도 십여 점이 확인된 그림이다. 사람인데, 꼬리가 달린 것은 흔치 않은 것이어서 더 관심이 간다.


가장 많이 그려진 주제는 생활습관이 그대로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사냥하는 장면이 가장 많은데, 대상물은 고래, 사슴, 곰 등이다. 사슴도 무리를 지어 있는 도상이 있고, 혼자 있는 도상이 있다. 또한 성공적인 사냥을 기원하는 것인데, 배에 타서 사슴을 끄는 마술과 같은 그림도 있는데(그림 3) 사실 이 그림은 실제 추코트카에서 행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와 함께 그려진 인간의 생활모습도 반영되어 있다. 한 그림은 배를 타고 가면서 순록을 몰던 유카리 족이 그려져 있고, 눈이 내릴 때 스키를 타고 개와 함께 걷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그림 3-2).



뿐만 아니라 머리에 버섯모자와 꼬리가 달리거나(그림 3-1의 가장 우측) 장화를 쓴 신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알타이나 중앙아시아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람이다. 대규모의 성소로 알려진 바이칼 유역의 엘란가쉬 유적에서도 십여 점이 확인된 그림이다. 사람인데, 꼬리가 달린 것은 흔치 않은 것이어서 더 관심이 간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고래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그림 4). 한 바위그림에는 고래가 실제로 물을 뿜어 내고 배에 탄 사람들이 이 고래를 잡은 것을 묘사한 것이 있다. 매우 사실적인데, 고래는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떠오른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 때 사람들이 고래를 포획하는 것을 바위그림에 그대로 그려놓은 것이다. 극동에서 고래 그림이 그려진 바위그림은 이곳과 울산의 반구대 바위그림 뿐이라는 점이 눈에 띄며 고래잡이가 생업의 한 축임을 이야기 한다.
페그티멜 바위그림에는 배가 아주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배의 모양, 배에 탄 사람의 수 등에 차이가 있다.




이 바위그림은 언제 그려진 것을 까?



페그티멜 바위그림은 한 시기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서 형성되었다. 이 유적을 조사한 디코프 박사는 추코트카 근방(북극해)의 생업과 관련을 지어서 많은 점을 해석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고래 등 해양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기원전 1000 년 기(기원전 10세기) 이전에

는 올라가지 않아서

, 바위그림에서 고래 등을 사냥하는 장면도 그 이 상 올라 갈 수 없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추코트카에는 캄차트카에서처럼 순록유목업이 예전에는 없었다는 점에 주목해서, 그림 가운데서 순록이 무리를 지어서 있는 것은 유목업으로 인해서 생긴 늦은 시기의 것이고, 사슴이 홀로 그려진 것이 사슴사냥을 하던 선사인이 남긴 것으로 보았다. 최소한 해양동물 사냥이 이 지역에 기원전 10세기 쯤에 생겼는데, 순록 사냥은 그 보다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으로 보았다(디코프 1971).


 그런데 바위그림 가운데 9번 암각에 79번 주제 중에는 순록이 선각기법(그림 6)으로 그려진 것인데, 이는 앙가라 강의 신석기시대 유적 바위그림에서 확인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순록의 크기는 추코트카의 것이 조금 작다. 그렇다면 바위그림의 순록 그림은 앙가라 강의 신석기후기 연대를 참고해서 기원전 20세기 보다 약간 늦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았으나, 디코프 박사는 이 연대에 대해서 자신감은 없어했으며, 기원전 1000년 기 전반(기원전 9~6세기)까지도 연대가 내려 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 뒤에 페그티멜 바위그림의 연대는 그림의 양식으로 연대가 재고되었다. 시베리아의 것과 비교해서 순록의 굽 가운데 사람 발처럼 그려진(그림 7)이 가장 이른 것으로 보았다. 시베리아 바위그림의 연대는 암각화 주변에서 발굴을 통해서 그 유적에 산 사람이 바위그림을 남긴 것으로 보았고, 유적의 연대와 바위그림 연대가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순록의 굽 모양이 사람 발처럼 그린 것은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3300년 전(기원전 13~14세기 가랑)으로 여겨졌다(피툴코 2002).

버섯 모양의 모자나 장화를 신고 있는 사람은 이 보다 더 늦은 연대로 알타이나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의 연대와 비교해서 기원전 14~8세기 정도로 생각된다. 가장 늦은 그림은 순록의 그림을 묘사한 형태로 결정되는데, 몸통이 삼각형이며, 다리가 막대기처럼 쭉 뻗거나 아래로 벌어진 것인데, 발이 방사상으로 표현된 것 등이다. 왜냐하면 이는 베링해 주변에서 번성했던 고대 베링고모르스카야 문화에서 확인되는 방법과 같기 때문이다. 이 문화의 연대는 대략 기원전 8~5세기로 여겨진다(디코프 1971).
이처럼 암각화는 어느 지역 이든지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연대문제이다. 제일 좋은 것은 발굴을 통해서 객관적 자료를 확보하는 것일 텐데, 모든 암각화가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쉬운 점이 많다.


posted by 김재윤23
2017. 8. 22. 13:31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이 내용은 2017년 5월에 있었던 부산 복천동박물관 특강의 내용입니다.

예술은 러시아어로는 исскуство라고 하며, 이의 형용사형은 исскуственны 라고 하는데, 그 뜻에 인공적인이라는 뜻도 포함한다. 같은 의미로 영어의 ’artificial’이 있는데 ‘art(예술)’라는 용어가 들어 있다. 즉 인공적인 것은 모두 예술로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 예술은 시작되었을까?
유럽이나 동아시아에서 모두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그 자취가 보인다. 유럽은 가장 오래된 동굴에 벽화 그림이 남겨진 유적은 프랑스의 쇼베-퐁다르크 동굴(사진 1, 2)인데, 36천년 전으로 평가된다. 이 동굴 벽화가 세상에 공개된 것은 19951월인데, 2 만년 전에 암벽이 붕괴되면서 동굴전체가 진공포장된 것처럼 발견되기 전(1994)까지 보존되었다.



동아시아의 알타이 지역의 우코크 고원에서는 칼구타 유적에서 말을 그린 벽화(사진 3)가 확인되었다. 쇼베 퐁다르크 동굴의 그림은 화려한 채색화(암채화)이지만, 칼구타의 그림은 동굴 벽을 쪼아서 표현한 바위그림라는 차이점이 있다.


현재 고고자료로 보아서 예술품 혹은 예술로서 부를 수 있는 것은 동서 공히 후기 구석기시대 부터로 생각된다. 현생 인류는 왜 이런 것을 남기게 되었는가? 남겨진 자료에 대한 해석의 문제는 이런 그림벽화 뿐만 아니라 모든 고고자료를 보고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질문이지만 답은 간단하지 않다.
여러 학자들의 의견에 의해면 예술은 종교 혹은 자신의 믿음과 관련된 것이다. 구지 선사시대가 아니라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불교와 관련된 유물들은 학술적 자료이기도 하지만 종교적 상징 혹은 의례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대로 종교와 관련이 없다고 해서 예술품이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 생활에는 종교와 관련 없는 예술품도 많다. 따라서 적어도 예술의 시작에 있어서는 믿음, 주술, 샤머니즘 혹은 종교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구석기시대의 유물가운데는 이미 유적에서 토제로 만들어진 토우가 제작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비너스 상인데 우크라이나의 후기구석기시대 가가리노 유적(사진 4)에서 발견되었다. 인간이 토제로 만든 최초의 물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비정상적으로 부풀리게 표현된 가슴과 배 등은 풍요의 상징으로 알려졌다. 즉 토제나 석제 혹은 골제로 만들어진 형상물 등은 일반적인 움집에서 출토되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물건으로 제의성이 담긴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본 강좌에서는 극동의 선사시대 예술을 인류 보편적으로 남겨진 고고유적 가운데서 바위그림(암각화)과 유적에서 확인되는 토우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동아시아에서 바위그림과 토우가 널리 퍼져 있지만 태평양을 매게로 하고 백두대간으로부터 시호테 알린 산맥까지 이어 지는 대 산맥을 접하고 있는 지역인 극동은 선사시대부터 발해까지 한반도의 역사와 관련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본고에서도 한반도를 포함한 극동을 중심으로 바위그림과 토우를 중심으로 선사시대의 예술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posted by 김재윤23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