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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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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를 이해하는데 '집'에 대해서는 오해가 있다. 그리스 역사가(헤로도투스) 들이 남긴 기록에는 스키타이 사람들은 방어된 마을과 집이 없이 바퀴달린 집(4륜마차)을 타고 광대한 스텝지역을 옮겨다닌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관념은 꽤 오래 지속된 것 같은데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입성(1812년)시 대화재를 두고 스키타이 인과 비교한 점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러시아 연구자들은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발견된 카멘스코예 성곽(돌 성이라는 뜻) 유적으로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반박했다. 이 유적은 기원전 5세기 유적으로 1200헥타르가 넘는데, 이곳에는 금속제품의 생산흔적(도가니, 주몰용 국자, 노지)이 엄청남게 많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철제품을 생산해서 다른 스키타이 사람들에게 공급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에는 2 줄의 성벽이 있는데(그림 1-19), 스키타이 연구자들은 안쪽의 환호를 ‘아크로폴’이라고 부른다. 그리스 도시와 같이 구획(그림 1-18)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아크로폴에서는 스키타이 귀족들이 살았던 석조구조물 흔적이 조사된 적이 있다.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 뿐만 아니라 돈 강 유역의 엘리자베토프 성도 알려져 있다. 대부분 지상식(그림 1-10, 14)이지만, 땅을 파서 만든 반움집(지하식)(그림 1-11,12,13,17)도 있다.

초원 스키타이는 아니지만 삼림지대의 스키타이 문화를 공유했던 아나닌스카야 문화에서는 목조로 된 집이 발견되기도 했다.

2021.02.22 - [볼가 중류: 아나닌스카야 문화의 동물장식] - 유라시아 타이가 지역의 초기 철기시대 무덤 옆에 집

 

유라시아 타이가 지역의 초기 철기시대 무덤 옆에 집

유라시아 초원 북쪽의 타이가 지대의 초기철기시대문화인 아나닌스카야 문화에서는 동물장식이 스키타이 문화의 것과 유사해서 초원지대와 어떤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유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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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카멘스코예 성곽과 엘리자베트프 성곽 유적, 10~17: 엘리제베트프 성곽(16: 전체 성곽 평면도, 10, 14-지상식 집, 11, 13, 17-지하식 집, 12-지하집복원), 18, 19-카멘스코예 성곽(18: 아크로폴 내부의 집의 구획도, 19: 성의 평면도)

 

두 유적은 기원전 5세기 유적이다. 흑해 부근에서 스키타이 쿠르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세기 혹은 기원전 8세기 까지 올려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럼 그들은 집이 없었을까?

 

러시아연구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스키타이 사람들의 생업경제가 유목적 목축이었기 때문이다. 동물을 위해서 목지를 계속 교체 할 수 밖에 없었고, 주거지도 단기간만 사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이 주요한 철기 공방이었다고 한다면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철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 역할로서 성곽 유적이 존재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기원전 7세기에도 스키타이 철제품은 존재하기 때문에 분명히 이를 생산하던 유적이 존재했을 텐데, 발견되지 않았다. 집은 있었지만 남겨 놓지 않았던가, 아니면 너무 쿠르간 조사에만 목을 매었을 수 있다.

 

헤로도투스가 스키타이 사람들이 집이 없다고 한 것은 비아냥 거린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집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가장 최적화 된 상태로 생업에 맞게 가성비 좋은 집을 가지고 다닌 것이고, 필요하다면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어제 일론머스크가 조립식 집을 스페이스 X근처에 만들었다고 하는  기사를 읽고 한참 웃었다.

 

참고문헌

Степи европей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1989. 46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89, 소비에트 연방 유럽 내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시기, 소비에트 고고학 시리즈)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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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투바에는 2700년 전  무덤(혹은 의례복합체)인 아르잔-2호가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스키타이 문화 가운데서 초기 스키타이문화로 생각된다. 아르잔-1호는 기원전 9세기 정도의 유적이고, 아르잔-2호는 이 보다 늦다. 스키타이 문화권은 시베리아 뿐만 아니라 흑해 북쪽까지 아주 넓은 지역에서 나타나는 유물 때문에 하나의 문화권역으로 설정된 것이다. 동물문양장식, 무기, 마구를 일컬어 스키타이 3요소라고 한다는 점을 이미 여러분은 알고 있다.

 

아르잔-2호에서 나오는 동물문양장식은 호랑이, 염소, 산양, 양, 사슴, 멧돼지가 있다. 염소는 뿔의 모양에 따라서 여러 종류가 있다. 이들은 대부분 금속제품에 새겨졌다. 하지만 금속판 뿐만 아니라 돌판에도 동물이 그려졌다. 

 

돌판?

사슴돌인가? 사슴돌은 대체로 생긴 모습을 ‘비석’을 생각하시면 된다. 비석에는 글이 적혀 있지만 그 대신해서 사슴돌에는 여러 그림들이 그려진 것이다. 아르잔-2호에는 사슴돌도 확인되지만, 더 흥미로운 유물이 발견되는데 그것이 동물문양이 그려진 납작한 돌판이다. 돌판에는 박트리아산 낙타, 사슴, 말 그림이 발견되었다.

 

그림 1. 아르잔-2호 출토 암각화 돌판

 

 

 

그림 2. 아르잔-2호 출토 암각화 돌판(4번이 그림1과 동일)

 

낙타는 기원전 3천년기 초반에 중앙아시아에서 길드여졌으며 운반에 아주 유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트리아산 낙타는 최대 250kg까지 운반할 수 있기 때문에 한번에 물건을 옮길 수 있는 양이 다른 동물과는 비교불가이다. 뿐만 아니라 낙타털과 우유, 고기도 제공하는 아주 유용한 동물로 알려졌다.

사실 낙타는 무덤방 5호 여성의 머리장식에도 새겨진 채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마차를 끄는 장면도 확인된다. 바퀴가 달린 전차 혹은 마차를 세 마리 말이 앞과 뒤에서 끄는 장면이 그려진 것이다. 그런데 돌판의 상단이 결실되어서, 전차의 운전석 모습은 알 수 없다.

 그런데 기원전 5세기의 알타이 파지릭 유적 5호에서는 실제로 마차가 통째로 들어갔다. 아르잔-2호의 돌판 그림으로 보아서도 이 시기에도 마차가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베리아에서는 이미 청동기시대 후기인 카라숙문화의 암각화에서 마차그림이 확인되어서 스키타이문화 이전에 이미 마차는 존재했다.

설마 없는 물체를 상상해서 그린 것은 아니지 않은가 ?

아르잔-2호의 마차그림(그림 3-3 그림 4-3)도 카라숙문화 암각화와 그리는 방법이 같아서 아르잔-2호 이전에 이미 그려진 유물을 설치했을 수 있다.

 

 

그림3. 아르잔-2호 출토 암각화 돌판 3

 

 

그림4. 아르잔-2호 출토 암각화 돌판 4(3번이 그림 3과 동일유물이다)

 

그림이 그려진 돌판은 모두 15점 확인되는데, 무덤에서 동쪽 구역에서 가장자리 부위에서 확인되었다. 돌판에 그려진 암각화는 낙타처럼 동물의 면을 쪼아서 표현한 것(그림 2-4)과 선을 쪼아서 그린 것(그림 2-2~5)으로 구분된다. 면을 쪼은 것 보다 선을 쪼아서 그린 그림이 더 이른데, 이는 신석기시대부터 내려오던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르잔-2호에서 확인된 그림 돌판은 최소 아르잔-1호 시기에 제작된 것과 그 보다 더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아르잔-1호와 유사한 시기라고 하는 것은 그림 가운데서 사슴의 등에 난 혹이 그려진 그림이(그림 4-4) 있는데, 이것은 아르잔-1호에서 확인된 사슴돌 그림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 보다 더 이른 시기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것은 선을 쪼아서 그린 산양(그림 2-2)멧돼지(그림2-3), 사슴(그림 2-5) 등이 있다.

 

2020/05/04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시베리아황금유물컬렉션] -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있는 거울 속의 사슴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있는 거울 속의 사슴

2500년 전 시베리아의 알타이 무덤에서는 인간과 함께 말이 매장되었다. 재밌는 점은 인간과 관련된 유물보다는 말과 관련된 유물이 더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물론 파지릭 1호분은 주인공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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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암각화가 확인되는데, 특히 영남에서는 독특한 주제가 확인된다. 검파형이라고 불리는 방형계통의 암각화 이다. 검파는 동검이나 석검의 손잡이와 유사해서 붙인 명칭이다. 검파라고 해석하면서 청동기시대에 그려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방형계통(검파형)의 암각화와 함께 확인되는 것이 동심원문양인데, 안화리 유적에서는 방형문양 보다 먼저 동심원문양이 그려졌다. 동심원문양이 단독으로 확인되는 유적도 있는데 그 중에서 지석묘 유적인 밀양산인, 진천동 유적에서 확인되면서 동심원문양도 청동기시대에 그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안화리 유적의 예를 보면 동심원문이 이미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지석묘에 그려졌다고 해도 지석묘를 만들면서 이미 그려진 문양이 있는 돌을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동심원문양을 반드시 청동기시대로 볼 수는 없다(김재윤 2019).

 

암각화는 절벽과 같은 곳에 그려지기도 하지만, 작은 돌에도 새겨지기 때문에 유적의 연대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절벽과 같은 큰 도화지에 그려진 그림도 아주 오랫동안 그려지기 때문에 그린 방법을 통해서 연대를 추정한다.

그러나 작은돌에 그려진 그림은 유적의 연대와 일치하면 안되고, 유적의 연대를 가장 마지노선으로 삼아야 된다. 이 유적이 만들어진 이후에 그림이 그려졌을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유적보다 먼저 작은 돌에 그림이 그려졌고, 유적이 만들어지면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러시아에서는 암각화의 연대추정에서 좀 유연하게 대처하는 반면에 한국에서는 유적의 연대와 일치시키는 경우가 많아서 답답하다. 사실 이 정도만 되도 다행이다....너무 허무맹랑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도 있어서...화가 날 때도 있다.

 

참고문헌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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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남부의 알타이 산맥 중에서 해발 1500m가량 되는 파지릭계곡에는 2500년 전 에 만들어진 공동묘지가 있다. 크고 작은 무덤이 있는데, 지상에 무덤을 덮은 돌이 남겨져서 쉽게 눈에 띈다. 지상으로 올라온 부분을 봉분이라고 하는데, 봉분이 있는 무덤을 러시아에서는 ‘쿠르간()이라고 부른다. 파지릭계곡에는 5개의 대형 쿠르간이 있고, 소형 쿠르간도 존재한다. 1호 무덤은 1929년에 그랴즈노프가 발굴했고, 2~5호는 루덴코가 1947~1949년까지 발굴했다.

 

특히 파지릭 5호분은 남녀미라와 함께 4륜의 바퀴가 있는 마차가 확인되어서 특히 주목을 받았다. 무덤구덩이에는 통나무로 만들어진 무덤방이 2중으로 설치되었고 통나무관이 1개 존재했다. 남성과 여성을 함께 묻었다. 파지릭 2호는 도굴이 심해서 남녀 미라가 관 밖에서 확인되었지만, 관은 1개만 확인되어서 같은 방법으로 매장되었을 것이다.

 

파지릭 5호분에 묻힌 남녀는 55~60세 가량의 남성과 40대의 여성으로 몽골로이드이다. 남녀모두 미라처리된 것이다. 미라 처리는 뼈와 피부만 남기고 인간을 인간형상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복잡한 처리과정을 거치고 피부에 일종의 송진과 기름을 발라서 보존처리했다. 5호의 미라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지 않다. 2호에서는 남성에게 문신이 새겨져 있다. 남성은 키가 175~176cm가량이었다.

파지릭 5호분의 미라처리에 사용된 송진은 열대지역에서 자라는 식물에서 채취된 것이었다. 미라는 온몸에 절개면이 아주 많았는데, 지방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미라처리에서 가장 관건은 근육과 지방은 제거하면서 관절은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절이 유지되어야 골격이 흐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파지릭 5호분에서는 말도 9마리나 확인된다. 무덤방의 바깥공간에 차례대로 부장되었다. 가장 나중에 들어간 말을 제외하고는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 외에도 굴레, 안장 등으로 장식되었다. 특히 가장 나중에 들어간 말은 가장 옵션이 좋은 말이었는데, 머리장식까지 있었다. 마차의 선두를 이끌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장 나중에 들어간 말은 아무것도 착장되지 않았다.

 

말의 머리장식은 같은 시점에 만들어진 알타이에서도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3 유적,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말의 옵션이다.

 

말을 부리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인 재갈과 재갈멈치는 고삐로 연결된다. 그러나 기능적인 것과는 약간은 거리가 있지만 말의 얼굴에는 굴레가 씌워지는데, 대부분 동물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말의 이마와 콧잔등 뿐만 아니라 귀 아래와 귀에서 입으로 연결되는 부위에는 사슴, 맹수 등이 전신, 두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맹수는 독수리와 합체 되어서 이 세상에는 없는 동물이다. 그리핀이라고 부른다.

파지릭 5호분에는 굴레장식 뿐만 아니라 안장 및 안장덮개가 출토된다. 특히 가장 나중에 들어간 머리장식이 있던 1호 말은 안장덮개로 중국산 실크가 출토되었다.

 

뿐만 아니라 펠트로 제작된 대형 벽걸이 캐노피가 확인되는데, 남녀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남녀의 얼굴형태가 다르고, 남성은 알타이에서 확인되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지만, 말과 관련된 도구와 고리트(활과 화살을 함께 담는 통)는 알타이 식이다.

마차는 4개의 바퀴가 있는데, 살이 있는 바퀴이다. 마차에는 차양덮개가 있었으며 꼭대기에는 새모양의 펠트로 만든 인형 4마리가 붙어있었다. 백조의 모습이지만, 날개는 독수리이다.

특히 화려한 1호말, 마차, 대형 벽걸이 캐노피에서 확인되는 외래적인 요소(페르시아적인 요소)들 덕분에 파지릭 고분은 특히 5호분은 러시아학계에서는 당대의 가장 높은 사람들의 무덤으로 생각한다.

 

페르시아적인 요소는 안장의 덮개 중 일부인 고들개에 표현된 그리핀이 사자머리 그리핀이 확인되는데,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 왕조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페르시아적 요소와 그리스적인 요소는 흑해북안의 스키타이 무덤에서 자주 확인되는 특징인데, 이곳 알타이에서도 엿볼 수 있다.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확인되는 인간과 말이 상주하는 무덤은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데 이름해서 파지릭 문화라고 한다. 파지릭 유적에서 유래되었다. 파지릭 문화는 스키타이 문화의 일원이다. 스키타이 문화는 흑해북쪽부터 시베리아 남부지역까지 동물문양을 상징으로 공동체를 이루었다. 좀 더 넓게는 중국의 황하상류 지역인 오르도스 및 만주의 일부인 요서지역까지 그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유적에서 스키타이 문화의 동물문양장식이 확인된다. 그쪽에서 수입한 것이든, 이미테이션 했던 어쨌든 접촉이 있었다.

 

이제까지 저의 블로그를 계속 읽으신 분은 다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직업에서 오는 노파심에서 정리해보았다(선생님들은 잔소리를 많이 한다). 아직도 파지릭 유적에는 더 소개해야 할 무덤이 남아 있고(파지릭 1호분), 파지릭 유적 보다 백여년 빠른 바샤다르 유적과 약 삼백 년 정도 더 빠른 아르잔 1유적도 소개해 드려야 한다. 그리고 하도 많이 빽빽거렸던 했던 흑해 북쪽의 유적도 소개하고 싶은데,,.

 

앞으로는 좀 속도감 있게 진행할 것이다(스키타이 문화의 유물 중 파지릭 유적과 흑해북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컬렉션 등은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구경하실 수 있다. 꼭 가보시기 바란다. 워낙 크고 화려한 박물관이라서 그림만 보다 오실수 있으나 고고학방은 지하에 있다. 고고학 유물이 싫으면 다빈치 그림 부터 근현대 화가의 그림까지 그리스, 이집트 등등 너무 많아서 피곤하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다.

비행기 값만 빼면 루블값이 거의 바닥을 기고 있어서 크게 비싸지 않다. 운하에서 배를 탈 수 있는 여름이 좋다..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음으로 유럽의 휴가철이 끝나는 8말이 더 좋을 듯도 하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얼음공주미라는 고르노-알타이 시 박물관에 있는데, 진열을 해 놓았는지는 모르겠다..워낙 주민들의 반발이 심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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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시베리아 파지릭 유적의 5호에서는 마차가 해체된 채 무덤에 부장되었다. 마차는 4바퀴가 달린 마차이다. 해체되었지만 마차는 대부분 복원되었다.

 

그런데 파지릭 5호분의 무덤 단면도를 다시 보시기 바란다. 무덤 단면도에 있는 유물은 대부분 필자가 설명했다. 하지만 아직 설명하지 않은 유물 가운데서 펠트로 만든 백조모양의 새인형이 있다(그림1). 모두 4점 출토되었고, 분해된 마차 위의 대형 벽걸이 캐노피 위에 놓인 채 출토되었다.

 

 

그림 1.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백조모양인형. 펠트제. 

 

위와 같은 유물, 에르미타주 박물관 특별전(아즈벨레프 2019)

 

 

백조모양 새 인형은 펠트를 꿰매어 만든 것으로 속은 사슴털로 채워졌다. 처음에 백조는 흰색 몸통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누렇게 변했다. 꼬리는 붉고, 날개의 끝은 검고 아래로 쳐지게 표현했다. 모두 4점이 출토되었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실크로 만든 안장 덮개와 함께 중국기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 유물로 인해서 마차도 중국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 것이다. 무덤 전체가 스키타이문화의 것이지만, 이렇게 백조 때문에 다른 것들도 의심을 받게 되었다.

 

루덴코(1953)는 이 유물을 마차의 장식품으로 마차의 지붕위에 부착했던 유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랴즈노프는(1958) 무덤의 가장 높은 곳을 장식하던 유물로 생각했다(그림 2). 그리고 두 사람의 의견은 현재까지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최근에 좀 더 과학적인 방법으로 백조인형이 마차와 관련있다는 설득력이 더 큰 힘이 실리게 되었다(아즈벨레프 2019)

 

 

그림 2. 그랴즈노프가 생각한 파지릭 5호분의 내부, 필자의 전 포스팅에서 무덤방 크기와 벽걸이 캐노피의 크기가 맞지 않음을 언급했다.

 

그랴즈노프가 주장한 백조가 벽걸이 장식의 상단을 차지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벽걸이 캐노피를 지지 하는 막대기의 각 때문이다. 약간 안으로 기울어져서 기둥을 세워서 착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그림 2).

 

 

그림 3. 그래픽 복원에 의한 파지릭 5호분 벽걸이의 착장복원(국, 니콜라예프 2011)

 

그런데 파지릭 유적의 5호분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남아 있는 캐노피를 3D 그래픽 복원한 결과 캐노피가 직각으로 그림2와 같이 직각으로 서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국, 니콜라예프 2011), 펠트(벽걸이 캐노프)를 지지하는 막대기는 피라미드 구조와(그림 3)과 비슷해서, 무덤 천장의 꼭대기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아즈벨레프 2011).

 

백조인형은 벽걸이 장식과는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벽걸이 캐노피가 아닌 펠트 조각 중에서 검은색 펠트가 있었는데, 이는 마차의 천장덮개 크기와 일치한다. 백조모양 새 다리에 긴 막대기(그림 1의 하단)가 연결된 것이 있는데 , 백조를 천장에 착장하기 위한 장치로 판명했다(니콜라예프 ,국 2017). 결국 백조모양 펠트인형은 마차의 상부덮개에 달렸던 유물이다(그림 4)

 

 

그림 4.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마차의 복원(아즈벨레프 2019)

 

 

그리고 ‘백조모양’은 말 그대로 백조모양이다. 앞에서 백조는 원래 흰색펠트로 제작되었다고 말씀드렸다. 흰색백조의 날개는 완전한 순백색이고 저렇게 길지 않다(그림 1). 그림 1의 새 날개는 백조날개가 아닌 독수리 날개이다 독수리의 날개는 아주 길고 갈색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 1이 백조이고,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드문유물로 생각했다면, 아니다. 이 새 조차도 독수리와 합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지릭 5호분 보다 더 이른 기원전 7세기 아르잔 2 유적에서는 마차가 그려진 암각화가 무덤 내에서 출토되었고, 기원전 13~8세기의 카라숙문화(시베리아 청동기시대)에서 마차의 부속품이 출토되어서, 이미 시베리아에는 마차가 존재했다.

 

참고문헌

아즈벨레프 2011, Азбелев П.П. 2011, Пят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в экспозиц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Методическое пособие.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1. 32 с.(아즈벨레프 2011, 에르미타주 박물관 파지릭 5호분 특별전)

아즈벨레프 2019, Азбелев П.П. 2019 : Пазырыкские лебеди. // Актуальные вопросы истории кыргызского народа: прошлое, настоящее и будущее. Сб. статей в честь 70-летия кыргызского историка и востоковеда Мокеева А.М. Бишкек: 2019.(아즈벨레프 2019, 파지릭 유적의 백조)

국, 니콜라예프 2011, Гук Д.Ю., Николаев Н.Н. Замечания к реконструкции погребального шатра из пятого Пазырыкского кургана. // Методика междисциплинарных археологических исследований. Омск: 2011. С. 49-61.(국, 니콜라예프 2011,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벽걸이 캐노피의 복원)

니콜라예프, 국 2017, Николаев Н.Н., Гук Д.Ю. 2017, Проверка гипотезы на 3D модели находок из Пятого Пазырыкского кургана. // V (XXI) Всероссийский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съезд [Электронный ресурс]. / отв. ред. А.П. Деревянко, А.А. Тишкин. Электрон. текст. дан. (36,739 Мб). Барнаул: ФГБОУ ВО «Алтай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2017(니콜라예프, 국 2017, 파지릭 5호분 출토 유물을 3D그래픽 복원으로 검증)

그랴즈노프 1958 Грязнов М.П. Древнее искусство Алтая. Л.: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Эрмитаж. 1958(그랴즈노프 1968, 알타이의 고대 예술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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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파지릭 5호에서 출토된 마차. 바퀴는 바퀴를 구성하는 프레임 2개로 제작되었다.

 

 

그림 2. 파지릭 5호에서 출토된 마차의 견인 막대기(1)과 바퀴(2)

 

 

2500년 전 시베리아의 알타이 파지릭 유적 5호분에서 출토된 마차가 출토되었다. 마차는 원시적인 형태가 아니라 바퀴가 4개 달려 있고, 바퀴는 바퀴살이 있는 구조이다.

 

마차의 바퀴는 자작나무로 제작되었다. 바퀴가 달린 두 개의 축은 6개의 축으로 연결된다. 견인하는 막대기와 멍에가 있다. 마차의 기본 축은 세로 두 개의 세로 방향 막대기가 중심을 잡는데 하단 막대기는 지지역할을 하며 126cm, 상단은 92cm이다. 앞 뒤 바퀴를 연결하는 막대의 길이는 178cm이다. 이 막대는 흔들림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바퀴의 직경은 160cm가량이고, 바퀴의 프레임을 만드는 가장자리는 길이 66cm이고, 불규칙적인 원통형 모양이다. 바퀴의 가장 중앙 직경은 12cm이고, 이곳에서부터 고정해서 바퀴의 프레임과 연결되는데, 그 곳의 바퀴 살의 간격은 24cm이다. 바퀴의 프레임은 두 개의 구부러지는 막대(각각 290cm)로 구성되는데, 폭은 7cm이고, 두께가 5.6 cm이다. 바퀴 둘레가 겹쳐지는 부분은 30~40cm에 막대기와 벨트로 고정된다(그림 1). 프레임에는 길이 5cm, 너비 1cm로 바퀴살을 넣는 구멍이 있다.바퀴의 살은 모두 34점으로 길이는 70~71cm가량이다.

 

 

그림 3.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마차의 구조

 

바퀴가 큰 데 비해서 마차의 크기가 작은 편이기 때문에 앞 바퀴와 뒷바퀴 사이의 거리는 약 6cm가량이다. 견인바를 묶는 곳에는 앞 차축 쿠션에 3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마차의 몸체는 다소 복잡하다. 상 하단 두 개의 프레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단은 128× 238cm, 상단은 128×206cm이다. 상하단은 작은 기둥처럼 생긴 발러스터 연결되어 있는데, 높이는 27cm이다. 모두 21개이다.

 

하단프레임에는 세로 막대에 4개의 발러스터가 착장되어 있다. 3개는 앞쪽에 1개는 뒤쪽에 위치한다. 상단 프레임에는 6개의 가로 막대가 운전석 뒤쪽에 세로 방향의 막대기 안쪽으로 착장되어 있다. 발러스터는 가로 방향의 상하 막대기에 삽입되어 구성되는데, 운전석 뒷자석의 프레임은 마차 길이방향의 막대기 안으로 끼워넣게 설계 되었다.

하부프레임의 운전석 뒤쪽에는 길이 22cm의 발러스터가 3개 삽입되어 있다. 직경이 1cm이다. 발러스터는 가로방향의 막대기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데, 이 발러스터 사이는 끈으로도 고정된다.

 

운전석 바로 뒤쪽부터 상단프레임이 시작되는데, 길이가 27cm인 가로 막대가 사이에 6개의 납작한 막대기가 삽입되어 있다. 운전석 바로 뒤쪽의 가로 막대기는 발러스터 3개 및 끈으로 연결되었다. 상부 프레임에는 세로로 14개의 막대기가 세워져서 선반과 같은 구조인데, 막대기 사이는 벨트와 같은 역할을 파는 격자판이 하단을 고정하고 있다. 이 격자판의 전체 둘레는 3.5m이고 탄성이 좋은 막대를 이용했다. 직경 6-7mm의 나무막대기를 세로로 고정해서 격자 모양이 되도록 했고, 격자 간의 길이는 4~4.5cm이다. 세로방향의 막대기는 짧게 끊어져서 가로 방향의 막대기와 패드로 연결되었고, 어떤 곳은 천으로도 연결시킨 부위도 있다. 격자판은 전체가 붉은 색으로 칠해졌다.

운전자의 좌석에서 다리를 놓는 난간과 상단의 지붕은 두께 1cm가량의 널빤지로 덮여 있다. 측면에는 구멍을 통해서 끈으로 묶었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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