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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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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세네프는 상트페테르부르그 출신으로 1902년부터 1910년까지 연해주를 조사한 사람이다. 장교이자, 탐험가, 지리학자, 고고학자로 알려져 있다. 1880년에 시데미 패총을 발굴한 얀콥스키 다음 세대의 연해주에서 유적을 찾은 사람이다.

(그림 1. 아르세네프)

1880년 베이징 조약 이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극동으로 사람들을 대거 파견하였다. 서양제국들이 식민지를 찾은것 처럼....

러시아에서 극동은 신비의 땅이었고, 지도도 작성해야 했고, 사람들에 대해서 파악도 필요했다. 이를 담당한 사람 중에 한명이 아르세네프이다.


지도는 아르세네프가 직접 그린 것으로 붉은 선은 그가 탐험한 경로를 그려 놓은 것이다.
우수리강과 시호테 일란 산맥을 직접 다니면서 지질, 지리조사 및 연해주의 성곽 유적을 대거 확인하고 기록에 옮겨 놓았다. 뒤에 책도 저술했는데, 『우수르 지방 탐험기(1921)』, 『데르수 우잘라(1923)』 등이 있고, 그 중 데르수 우잘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소련 자본으로 일인 감독이 제작했으며 소련 배우가 출현해서 소련영화이다. 필자는 이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쉽게 구할 수 있음). 데르수 우잘라는 팩트 소설인데,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그림 2. 아르세네프의 탐험경로, 아르세네프 직접작성)

(그림 3. 영화 데르수 우잘라)

현재 러시아의 연해주 주립박물관 이름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아르세네프 박물관’이다. 블라디보스톡에 가면 중앙광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https://www.google.co.kr/maps/dir/43.1161604,131.8820854/43.1161376,131.8820697/@43.1138917,131.8846935,16.46z

-->연해주 주립박물관 위치)

아르세네프카 조사한 연해주의 중세시대 즉 여진과 발해 성은 최근에 댜코바 박사가 다시 연구해서 저서가 출판되었다(필자가 번역했으나,,, 아직 출판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번역서는 스폰서가 없으면 출판사에서 꺼려한다고 직접들었다)
아르세네프가 확인한 유적은 발해와 여진의 성인데, 발굴을 직접한 것은 아니고, 성곽은 드러나 있는 유적이기 때문에 눈으로 확인해서 지도에 표시하는 정도이지만, 러시아 인들은 그의 연구에 대한 평가를 높이 샀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한반도 두만강 북쪽은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어진다. 언제부터 연해주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을까?
아편전쟁 이후 맺어진 베이징 조약(1860년)을 기점으로 연해주를 포함한 극동을 할양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러시아와 청은 자기네 국경 관리를 시작하였다. 흑룡강의 좌안은 러시아령, 우수리강의 서쪽은 청, 동쪽은 러시아와 청이 공동관리 한다는 다소 애매한 조약을 맺은 적이 있다. 

(그림1. 베이징 조약 당시 러시아 총독으로 참가한 이그나티예프의 초상화와 오른쪽은 베이징 조약 당시를 그린 것이다)


(그림 2. 베이징 조약 이후 극동의 총독이었던 푸탸틴과 러시아의 극동지도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서 러시아 연해주의 고고학 조사는 19세기 후반 부터 시작된다. 아마도 얀콥스키가 해안가의 패총을 발굴하게 되었는데 1880년이다. 그 후에도 20세기 초반에 들어서 모스크바에서 파견나온 지질학자이자 탐험가인 아르세네프가 연해주의 지질조사를 하면서 발견된 성을 기록에 남겨 놓았다. 이것이 연해주 고고학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얀콥스키의 패총발굴이야기와 아르세네프가 남긴 연해주의 발해와 여진 성 이야기는 다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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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사진 1. 고성 문암리 출토, 오산리식토기)

오산리식토기는 한반도 동해안의 오산리 유적에서 최초로 출토되어서 명명되었다.
바닥이 편평한 토기에 구연부(입술주의)에만 문양이 시문되었다. 문양을 그리는 방법은 주로 시문구(문양을 그리는 도구)로 ‘찍는 방법’이다. 시문구의 찍히는 모양이 원형, 삼각형(사진 1) 등인데, 간단하게 비유하면 도장같이 생각하면 된다. 문양이 다른 도구로 찍은 것(사진 2)도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문양 찍는 도구 중에서는 빗처럼 생긴 다치구를 위에서 설명한 도장시문구와 함께 시문한 것(사진 3)도 포함된다.
가장 큰 특징은 바닥이 편평한 토기에 구연부 주변에만 문양을 찍어서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림 2. 고성문암리 출토, 오산리식 토기)

(그림 3. 양양 오산리 유적의 C지구 출토, 오산리식 토기)

오산리식 토기는 동해안에서 융기문토기(http://eastsearoad.tistory.com/97)와 함께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현재는 오산리 유적의 c지구의 예로 보면 융기문토기보다 이르지만.

오산리식 토기는 앞서 포스팅한 바 있는 융기문토기와 함께 한반도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식민주의사관을 깨는 확정적인 물증자료이다.
왜냐하면 시베리아 토기로 생각된 바닥이 뾰족한 토기 보다 아래층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층에서 출토된 것은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는 신석기시대 당시에 크게 바닥이 편평하지 않은 토기를 사용한 한반도 남부와 바닥이 편평한 토기를 사용한 한반도 북부가 있었다. 이 두 개가 시간차를 두고 나타나는 지역이 강원도 고성, 양양 정도이고, 좀 더 내려온 죽변부터 남해안과 훨씬 밀접하게 이어질 것이다. 물론 간접적인 강원도의 영향도 있다.
 물론 고고학개설서에는 5개의 지역구분이라지만, 1980년대 주장을 아직까지 이어오고 있다(이유는...알지만 밝히지 못하겠다. 한국 모든 학문의 근본적 병폐정도로 밝힐 수 있다). 어디서부터 굴비를 다시 엮어야 할지.. 얼마나 많은 논문이 필요할지...

그리고 한반도 남부 중에서도 남해안에서 유적도 많이 확인되며, 밀집되어 있고, 연대도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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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융기문(隆起文)토기는 한반도에서는 주로 남해안과 동해안에서 확인된다.

융기문이라고 다소 생소한 단어를 쓰고 있지만, 국사책에는 덧무늬토기, 영어로 하면  Bowl with Raised Pattern 이다. 당연히 한국어나 영어가 훨씬 더 일반인에게 익숙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한자어가 많은 고고학용어도 고고학이 대중화되지 못한데 큰 몫을 한다. 일본의 영향이 크다.
 왜냐하면 필자도 고고학땅꼬마 시절에는 박물관에서 한자어로 적힌 유물이름이해가 안가면 오히려 영어캡션이 도움이 되기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필자가 그렇게 한자에 문외한은 아니다.....

융기문토기, 덧무늬토기는 말 그대로 토기의 벽면에 점토띠를 붙여서 장식을 한 것이다.
신석기시대토기 문양이 시간이 뒤로 갈수록 여러 방법으로 음각(negative)을 한데 비해서, 비교적 이른 신석기시대에는 문양을 긋거나 찍거나 하는 방법이 아닌 양각(possitive)효과를 낸 점토띠를 덧붙여서 문양효과를 내었다.(*하지만 이 보다 더 이른 시기에는 네가티브 효과를 낸 토기가 제주도에서 출토되고 있다)

남해안에서는 바닥이 둥근 토기(그림1)가 주로 나오고, 동해안에는 바닥이 편평한 토기(그림 2)에 덧띠가 부착된다.

(그림 1. 남해안의 융기문토기)

(그림 2. 동해안의 융기문토기)

이 토기는 주로 남해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6900~5800 년 전(기원전 6000~4500)에 확인되고, 동해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6000~5700 년 전(기원전 5000~4100)에 출토된되는데 이 보다 더 오래된 융기문토기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한반도 중부지역의 동해안보다 북쪽인 동해안북부, 연해주에서도 출토된다. 그 연대는 한반도 보다 약간 이르다.
한때는 이 융기문토기가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신석기시대 토기 였지만,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 고토기가 출토되었다. 고토기(古土器)는 다음 포스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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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에는 유적에서 가장 많이 확인되는 유구는 주거지(집터)이다.

주거지...(住居地), 집터이다.
집이면 집이지 왜 집터? 집은 없고 집을 짓기 위해서 땅을 판 흔적만 남기 때문이다.
국사책에 보면 ‘움집터’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걸 수혈(修穴)주거라고 한다..
수혈은 땅을 판 구덩이라는 뜻이다.

즉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집은 땅을 파서 그 위에 나무 등을 이용해서 집을 지었습니다.
한반도의 토양이 유기물질을 대부분 녹이는 성분이어서 특수한 경우(늪, 패총, 화재)등이 아니면 유기물질이 남아 있을 확률은 거의 제로이다.
그래서 현대에 발굴을 하고 나면 집터만 남아 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방형(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장방형(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원형(청동기시대)이 있다. 방형과 장방형은 모서리를 줄인 말각인 경우가 많다.

(*주거지의 사진에서 하얀색 선은 발굴후에 사진에서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선을 그은 것이다. 원래 남아 있는 것은 아님)

그림1. 신석기시대 방형 집터. 연천삼거리 유적, 화재난 주거지여서 목재가 남아 있다. 중앙에 돌을 두른 위석식노지

그림2. 신석기시대 장방형집터, 송죽리 7호 주거지, 노지와 기둥구멍이 남아 있다. 그림1에 비해서 주거지 깊이가 얉은데 땅의 특성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림 3. 청동기시대  장방형 주거지. 남강 대평유적. 한반도 남부에서 청동기시대 가장 이른 주거지


그림 4. 청동기시대 송국리형 주거지. 원형주거지. 주거지 중앙의 돌이 쌓여 있는 곳은 노지로 보지 않는게 학계의 통설이다. 이 원형주거지의 중앙에는 노지가 아닌 집수시설 혹은 석기작업공과 같은 공간으로 보고 있다.



주거지에는 기본적으로 그 집의 정보를 제공하는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노지이다.
노지는 불땐자리, 즉 화덕자리이다.
노지는 종류가 다양한데, 아무런 시설이 없는 무시설식, 돌을 두른 위석식(그림 1~3), 돌로 만든 상자 같이 생긴 석상 위석식(그림 3) 등 다양하다.

그 외 주거지에서 확인되는 것은 기둥구멍이다.
기동구멍이 잘 남아 있는 경우 집의 구조 파악을 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 외에 주거지 주변을 둘러쌓고 있는 일종의 배수로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주거지도 있다(그림5). 이 주거지는 위의 원형집자리인 송국리형 주거지가 한반도 남부에서 확인될 때, 포항, 울산 등지에서는 원형 주거지가 아닌 배수구가 설치된 주거지가 확인된다.

그림 5. 청동기시대 주거지 배수로 시설이 있는 주거지.


수혈 주거지 이외에 고상건물지(그림 6)가 있다. 건물지라고 하는 것은 사는 기능 보다는 어떤 특별한 기능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수혈주거지 보다 훨씬 큰 건축물이었을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고상건물지는 일종의 원두막을 생각하면 된다. 발굴 후 남은 흔적은 집터 구덩이는 남지 않고 기둥구멍만 일정한 간격으로 남아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규모가 작은 경우는 일종의 창고 같은 역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마을에 있으며 규모가 큰 경우는 일종의 신전이나 회의장소로 추정한다. 예를 들면 사천 이금동 유적이 대표적이다. 

그림 6. 청동기시대 주거지. 사천 이금동(좌). 고상식 주거지 복원도(우)


이 외에도 동굴을 집터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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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