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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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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영남이 환동해문화권의 교류지역임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이미 필자가 연구한 바를 토대로 환동해문화권의 범위와 그 교류지역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선사시대 환동해문화권의 교류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중심으로 연해주와 우리나라 강원도를 중심으로 연구되었다(2,3). 


표2. 환동해문화권의 동심원문암각화와 극동전신상토우(김재윤 2018)



3. 시간에 따른 환동해문화권의 범위와 교류권(김재윤 2018)



연해주와 동해안의 교류는 신석기시대 루드나야 문화의 세르게예프카 유형과 오산리 유적의 A,B지구 및 오산리 C지구의 III~V층에서 확인되는 오산리식토기와 융기문토기를 근거로 논의 되었고, 그 시점은 6000~5800년 전이다[각주:1](김재윤 2015, 2017). 이후부터 강원도에는 첨저토기가 출토되는 5100년 전[각주:2] 동안은 동해안에 유적이 확인된 적이 없다. 만약 동해안에서 유적이 확인된다면, 연해주와의 문화권은연대가 좀 더 길어질 수 있다.

  즉 5800~5100년 전 환동해문화권의 범위는 불투명하며, 5100년 전께는 연해주와 강원도의 생업권은 끊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점은 자이사노프카문화가 시작되는 시점과도 비슷하다(3, 김재윤 2017a).


   다시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흥성문화(김재윤 2004, 강인욱 2017) 및 시니가이문화가 강원도 영서지역을 통해서 진주 남강의 평거동 유적까지 내려온 흔적이 청동유물, 토기, 석기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었는데, 시니가이문화가 내려온 연대는 3100~2900년 전께이다(김재윤 2018a).

  그런데 연해주와 강원도의 신석기시대 문화권이 형성되기 이전에 아무르강 하류의 문화가 동해안까지 확인된 정황도 있다. 오산리C지구의 신석기시대 최하층인 VI층 및 문암리, 망상동 유적에서 확인되는 적색마연토기가 아무르강 하류의 말리셰보문화에서 전해졌고 관련이 있는 연대는 6500~6000년 전을 확인한 바 있다. 오산리C지구의 VI층은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 토기 제작이 없었던 동해안에서 갑자기 적색마연토기가 확인되는 것은 이미 토기문화가 있던 곳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해서 아무르강 하류의 말리셰보문화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김재윤 2015, 2017).

  그런데 토기 뿐 만 아니라 아무르강 하류에서 출토되는 말리셰보 문화 및 보즈네세노프카 문화의 극동전신상토우를 근거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아무르강 하류도 환동해문화권에 속할 가능성을 했는데 환동해문화권으로 생각했다(김재윤 2008).

 하지만 앞서 본고에서 고찰한 아무르강 하류의 동심원문암각화로 보아서 연해주와 아무르강 하류와의 문화권은 9000년 전 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 이 때부터 6000년 전까지는 아무르강 하류가 환동해문화권에 포함될 수 있으며, 북부지역일 수 있다.

  또한 9000년 전께는 쌍탑1기와 노보페트로프카 문화가 유사하기 때문에 아무르강 중류 및 눈강 유역도 환동해문화권의 북부지역인 아무르강 하류와 관련성이 있다(3). 그러나 아무르강 중류 및 눈강 유역은 환동해문화권에 속한다기 보다는 환동해문화권의 북부와 교류한 간접적인 영향권으로 볼 수 있다.

  6000~5800년 전 환동해문화권은 앞서 보았듯이 연해주와 강원도 오산리 부근이다. 그러나 오산리 유적 이남인 태백산맥이 끝나는 죽변유적의 토기는 오산리 및 한반도 남부지역과의 관련성이 더 크다[각주:3].

 

 따라서 영남 동심원문암각화의 유적은 남해안 신석기문화가 자리잡은 가운데(6910B.P. 이후, 3) 환동해문화권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연해주 및 아무르강과 관련 있는 6000~5800년 전이다. 이 지역은 환동해문화권의 간접영향권으로 교류했을 가능성이 있다.

 환동해문화권의 신석기시대는 9000~6000년 전에 아무르강 하류가 환동해문화권의 가장 북부지역에 속하며, 그 이후 6000~5800년 전 연해주와 동해안만이 문화권일 가능성이 있다(3). 5800년 전 이후로 동해안에서 유적이 확인된다면 이 시점은 더 지속적일 가능성이 있다.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환동해문화권은 두만강 유역의 흥성문화 및 연해주 시니가이문화가 연해주와 강원도가 직접적인 관련성을 보이는데, 강원도 영서지역을 통해서 소백산맥이동의 진주 남강 유역에서 확인된다. 현재로서 확실한 연대는 시니가이문화의 이동성이 보이는 3100~2900년 전이다. 환동해문화권은 신석기시대와는 다른 경로인 강원도 영서지역으로 소백산맥 동쪽의 영남 남강 유역까지 환동해문화권과의 교류한 흔적이 남아 있다. 토기, 석기, 청동기 등 구체적인 양상이 확인되어서 신석기시대보다는 더 뚜렷한 관련성을 보인다. 하지만 진주 남강을 환동해문화권의 남부지역으로 결정하기에는 좀 더 확정적인 증거가 답보되어야 할 것이며, 현 상황에서는 간접적인 영향권으로 일단 두고자 한다[각주:4].

 따라서 3100~2900년 전 청동기시대에는 환동해문화권으로 한반도와 강원도 영서지역이 포함될 수 있다(3).

 

 신석기시대 환동해문화권의 형성배경은 태백산맥 및 시호테알린산맥과 태평양을 매개로 한 생업권이 문화권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필자가 생각하는 아무르강 하류 및 연해주와 강원도의 관련성은 생업권을 의미하며, 고고학적으로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김재윤 2017). 전파론적인 해석과는 차이가 있다. 신석기시대 여러 기간에 걸쳐서 아무르강 하류 오시포프카문화 및 말리셰보문화의 모습이나 연해주의 세르게예프카 문화양상 이 동해안에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연환경에 따른 생업권 때문이며, 동심원문 암각화가 태백산맥에서 분기된 소백산맥이동에서 주로 확인되는 것은 환동해문화권과의 교류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이 산맥과 바다를 매개로 한 생업권임을 알 수 있는 것은 5000km [각주:5]이상 떨어진 곳 추코트카의 페그티멜 암각화에서 신석기시대 그려진 사슴문양과 청동기시대에 그려진 고래그림이 반구대암각화와 같은 방법으로 그려지고, 사카치알리안의 호랑이 문양은 반구대암각화와 비슷하게 그려졌다는 것은 같은 생업권을 의미하며, 반구대암각화도 환동해문화권의 영향이 일정부분 있다(김재윤 2017b, 2-12,18, 19,22).

  

https://eastsearoad.tistory.com/272?category=77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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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2018년 12월에 있었던 제 49회 한국상고사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1. 이 연대는 양 지역의 문화가 시작되는 시점이 아닌 서로 관련된 시점이다. [본문으로]
  2. 중동부지역 신석기문화는 오산리식토기 출토된 오산리C지구 3,4,5호 주거지(5750±15B.P.)(소상영 2016) 이후부터 첨저토기가 확인될 때까지 공백이 있다. 문암리의 중기유물층(5120±36B.P.)(소상영 2016의 표 13) [본문으로]
  3. 죽변 유적에서 확인되는 토기는 연해주 보다는 오산리와의 비교우위를 점한다(임상택 2012). [본문으로]
  4. 이는 청동기시대 형성배경은 신석기시대와는 다른 생업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별고로 고찰코자 한다. [본문으로]
  5. 이 경로는 야쿠티아지역을 통해서 아무르강 중류, 하류 및 동해안을 따라서 내려온 경로를 계산한 것이다. 만약 해안선만을 따라서 추정하면 10,500km가량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김재윤23


5. 고르노레첸스크-3 성곽
 고르노레첸스크 마을의 동쪽부에 위치하는데, 사도바야 거리 11번지의 집 맞은편 다리에서 150m 덜어진 곳에 위치한다. 언덕은 동서로 길게 늘어진 타원형으로 곳곳에 말라버린 강줄기 등이 확인된다. 언덕의 남쪽부는 절벽으로 높이 17m이다. 언덕 가장자리에 석벽과 해자가 있다. 석벽은 많이 허물어져 있는데, 돌의 크기는 대략 5~45cm로 다양하다.성의 직경은 3~3.5m이고, 높이는 0.5m이다. 성의 평면형태는 모서리가 여러 곳인 부정형이다. 남북의 길이는 49.5m, 동서의 길이는 43m이다. 성의 평면적은 20,200㎡이다(그림 24, 표2).


그림 24. 고르노레첸스코예-3 유적의 성곽 평면도(댜코바 작성)


 1996년에 볼딘 붸.이. 니키틴 유.게. 에 의해서 조사되었다 . 2002년 러시아과학원 역사`고고학`민속학 연구소의 아무르-연해주 고고학탐사단에 의해서 조사되었는데, 성의 토층은 다음과 같다.

시굴1
1. 표토층
2. 인공적으로 부순 돌이 섞인 부엽토가 혼입된 녹색의 사양토
3. 작은 돌이 혼입된 편상 갈색 점토
 가장 밑바닥은 검은 사양성 사질토로 종종 흰색의 석회화로 제작된 석기박편 등이 확인되는데, 중석기시대층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석기박편은 제르칼나야 강 유역에서 아주 많이 확인되는 석기박편이다.
 유적에서는 문화층은 2개 확인되는데, 아래층은 녹색의 사양토층으로 중석기시대층, 상층은 표토층인데, 발해시대로 생각되며, 성곽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성곽을축조하는데 급급했던 것으로 보이고, 크게 이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성곽의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은 확인되지 못했다.


● 고르노레첸스크-3 성곽은 곶 성으로 평면형태는 부정형이다. 성벽은 돌로 만들어졌고, 크기는 작은 편이다. 성은 매우 단순한데, 성 내부에는 마을이나 방어시설 등이 확인되지 않았다. 육안으로 주거지의 흔적도 확인되지 않고, 치와 같은 시설이나 문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성은 방어시설로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성의 평면형태로 보아서 발해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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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II. 제르칼나야 강 유역(구지명: 타두시 강)


제르칼나야 강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 집수지에서부터 시작해서 타투시 합류점에서 합쳐져서 큰 강이 된다. 길이는 82km, 합류점의 너비는 420km이다. 이 강이 시작하는 산 계곡부 정상의 높이는 600~1300m이고, 하류의 높이는 250~400m이다. 강 계곡은 좁고 구불구불하고, 평균 너비는 1~2.3km이다. 합류지점에서는 곳에 따라서 3.6km까지 넓어지는 곳도 있다. 산의 경사가 아주 가파르고, 여러 곳에 낭떠러지가 있다. 제르칼나야 강의 왼쪽 지류는 높은 곳에서부터 기원하는 카바레로프카 강이다. 오른쪽 지류는 우스티노프카 강(시바이고우), 사도바야 강이 있고, 종착지는 동해의 제르칼나야 만이며, 강의 하류는 아주 넓다. 제르칼나야 강은 시호테알린 산맥에서 영서와 영동을 연결하는 동맥과 같은 곳이다. 이 강 유역의 전체가 인간이 거주하기 편했던 곳으로 생각된다.
제르칼나야 강 유역에서는 8개의 성, 2개의 환호, 1개의 자연 방어시설이 있다. 성지 유적에는 고르노레첸스코예 1~3 성, 시바이고우 성, 보고폴예 성, 우스티-제르칼닌스코예 성, 사도븨 클류치 성 등이다. 그 외에 제르칼나야 환호, 시로코예 계곡 환호 등이 있고, 데르수 바위 자연방어시설 등이 있다(그림 17). 

그림 17. 제르칼나야 강 유역의 성곽위치도, 2-베뉴코프스코예 성곽, 3- 데르수 바위 자연방어시설, 4~6-고르노레첸스코예 1~3, 7-시바이고우 성곽, 8-사도븨 클류치 성곽, 9-보고폴 성곽, 10-제르칼나야 환호, 11-우스티 제르칼노예 성곽, 12-쉬로코예 계곡의 환호


 
1, 베뉴코보 성곽
베뉴코보 고개에 위치하며, 카발레로프 마을의 북서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 유적이 위치한다(그림 17, 사진 2). 성벽은 현재 3면만이 남아 있는데, 장방형 평면형태로 추정된다. 성의 북쪽 벽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달네고르스크 시로 가는 도로에 의해서 파손되었다.
성벽의 서면 길이는 344m, 동면은 198m, 남면은 244m이다. 성벽의 내면의 높이는 0.7~1.8m, 외면에서는 1.3~2m인데, 가장 높은 부분은 동벽이다. 성벽의 상부는 편평하며, 대략 1~1.4m 너비이다. 성벽의 기저부 너비는 10m이다. 성벽을 따라서 해자가 둘러져 있는데 해자의 너비는 3~7m이다. 동쪽 성벽의 중앙에 너비 5m의 절개면이 있는데, 해자가 이 곳을 따라서 성 밖에서 안쪽으로 흘러 들어오고 해 둔 것으로 생각된다.
성의 내부는 비교적 편평한데, 전체적으로 북동방향이다. 성의 내부 면적은 80000㎡이다. 이 성은 1907년 시호테 알린 산맥을 따라서 조사하던 아르세네프가 제일 처음 발견하였고, 평면도를 완성하였다.
그는 이 성곽에 대해서 ‘타투시 강의 푸진나 지류로부터 시호테 알린 산맥을 가는 곳에 요새가 하나 있다. 그 요새는 아주 크고, 남쪽길에는 사원지가 현재 남아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서 이 고개에는 사방에서 오는 적으로 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요새를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아르세네프. 『1907년 여행기』)’.
 
아르세네프가 조사한 베뉴코보 성은 평면형태가 ‘ㄷ’자 모양이고 남쪽의 성벽이 없고, 문지도 표시 되지 않은 채 그려져 있다. 성의 북쪽은 제르칼나야 강이 위치하고, 언덕 위에는 절이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그림 18). 

처음으로 극동을 탐험한 러시아인(베뉴코프 1970)의 설명에 의하면, 이 암자는 장방형의 목제 가옥으로 맞배지붕 구조이며, 한쪽 벽면의 길이는 한 아르신으로 알려져 있다. 절은 높은 절벽위에 위치한다. 대체적으로 암자는 도로나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에 가까운 곳에 설치되었다. 잠시 들르는 길손들, 전쟁에 참가하거나 쫒기는 사람과 장사 하는 사람에게 숙식을 제공해야만 했다.
1983년 갈락티오노프가 새로 평면도를 작성하였다. 그 작성도에 의하면 아르세네예프가 그린 것과 달리 북벽이 결실 된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 평면도가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2002년에는 러시아과학원 극동분소 역사·고고학·민속학 연구소의 아무르-연해주 고고학 발굴대가 이곳을 새로 조사하였고, 보다 정확한 평면도를 작성하였다(그림 19).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성곽의 평면형태나 특징으로 보아서 발해 혹은 더 늦은 시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 18. 1907년에 아르세네프가 작성한 베뉴코보 성곽


그림 19. 베뉴코보 성곽 평면도


베뉴스코보 성곽은 산성으로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작은 성이다. 성벽은 토성이고, 치와 같은 시설물은 없다. 평면이 매우 단순한데 성의 내부에 마을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성은 제르칼나야 강 계곡의 남과 서쪽의 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길을 통제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 곳에는 시호테 알린 산맥의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큰 도로가 있었을 것이고, 이곳에 암자가 위치해서 긴 길을 떠나는 여행객의 영혼의 안식처 같은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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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지난 150년 동안 연해주에서는 150개가 넘는 성곽 건축물을 발견 및 발굴 조사하였다. 건축물에는 성곽, 성벽, 해자 등을 다 포함하며 남쪽의 해안가부터 북쪽의 산악지대와 타이가 지역에 걸쳐 있다.

연해주의 성곽연구는 세 단계에 걸쳐서 발전한다. 첫 번째 중국문헌 분석, 두 번째 향토학자에 의한 연구, 세 번째 고고학자에 의한 본격적인 야외조사이다.

첫 단계- 당연히 연해주 성곽 조사의 첫걸음은 현대에 들어와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은 당시에 주위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 하기 위해서 축조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오랑캐를 무찌르는데 익숙한 중국문헌에서 정보를 얻어서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 연구의 첫 시발점이다. 이에 관해서는 역사서에 아주 많이 남아 있고, 실제 남아 있는 건축물과 허물어진 성지 등도 이를 방증한다.

실제로 직간접 적으로 획득한 인접한 주민들에 대한 일상생활, 전통, 민족의 수 나아가서 국가의 지형, 도로, 성지, 마을, 도시, 방어시설 등도 그 국가에 대한 정보이다. 획득된 정보는 지도, 보고서, 연대기 등을 작성할 수 있고, 이것들은 그 지역에 대한 정치적 상황 등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비추린(1777~1853)(그림 1), 바실레프, 고르키, 로조프, 쿠네르 등이 기술한 동방의 이방인에는 중세 퉁구-만주족의 다양한 성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있었다. 그래서 북서(북서)’94편에는 연해주, 아무르, 만주 등에서 사는 우쯔이 종족에게 성곽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에서 일 천 년기 전반(역자 주1~4세기)·에 각 도시와 마을은 특징적인 고유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비추린 1950). 


그림 1. 비추린(1777-1853). 17세기 부터 동방정책으로 인해서 러시아는 중국 및 만주를 연구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졌고, 18세기에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청나라와 수교하면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그림의 비추린은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북경교회사절단을 파견하게 되면서 중국에서 복무했고, 중국정사25사에 기록된 동아시아역사를 번역하였다. 그의 연구는 러시아 동방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가 번역한 책은 러시아가 한국을 배우는 기본교재이다. 현재도 러시아에서 발해와 여진과 관련된 논문에서 그의 이름은 늘 거론된다. 


말갈족과 그 성지에 관해서는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의 기록에는 ‘645년 당과 고구려가 전쟁을 했다. 고구려 쪽에는 말갈인이 참가하였고, 중국에서는 투르크 인이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곳은 안시성 부근이다. 고구려의 북부욕살 고연수 및 남부욕살 고혜진과 말갈인은 50,000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도왔다. 중국 황제는 만약에 그들이 안시에 들어간다면, 높은 산을 파고, 도시로부터 식료품을 조달받아야 한다. 그러나 말갈인이 우리의 소와 말을 훔치게 둔다면, 우리 쪽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비추린 1950).

여러 역사서에는 여진의 성 축조 기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들에게는 강한 조상이 있는데, 안시라 불리고, 성지를 축조하였다. 후툰장에서 아무르 까지 북쪽으로 80m떨어져 있다(바실레프 1857). 좀 더 늦은 역사서 명나라(1368~1644) 집의 역사(러시아과학원 동양서체연구소 문서국)에도 성에 대한 기록이 있다. 행정관청 중 국가 수입담당기관, 인사기관, 사법기관 등은 성곽 안에 두도록 하고 도로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역사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성곽, 도시, 마을, 국경선, 국경의 항구 등이 구분되어 있을 때이다. 군사-정치-경제적 상황 등이 악화될 때는 국가 안이나 종족 내에서 성을 지어야 했다. 역사서에는 일본 유민이 해안가에 59개의 도시를 짓고 약 58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 거기에 성벽에 대해서 약간 기술되어 있는데, ’...군인들은 성벽위에 터널을 묻었고....’밤에 물을 길어서 도시성벽을 다듬었다. 밤에는 얼어붙어서 그곳에 올라가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러시아과학원 동양서체연구소 문서국).

10~20세기 극동 사람들은 성지축조와 마을 축조 뿐 만 아니라 방어적인 요새나 도로를 만드는 데 아주 능했다. 말갈, 발해, 여진, 고구려 인 들은 성을 축조하였는데, 중국의 역사서에는 아주 정확하게 그들의 입지 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많은 세월이 흘러서도 러시아 연구자들은 이 역사서에 따라서 성지를 찾을 수 있다.

러시아 연구자들은 고대와 중세시대 성지의 입지는 생업과 방어가 용이한 곳을 택한 것으로 생각했다. 높은 입지는 넓은 영역을 관망할 수 있었고, 봉화대의 역할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댜코바 2009)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니가이 문화의 동부지역에서는 1유형과 2유형 모두 타제석기가 서부지역에 비해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 이전 시기인 마르가리토프카 문화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동부 1유형(루드나야 프리스턴 2층)에서도 타제석기와 함께 마제석부(http://eastsearoad.tistory.com/145 의 그림 2 참고)도 확인되었다.


 동부 2유형 석기는 타제(때려서 만드는 방법)로 제작된 석촉(그림 1-1), 뚜르개(그림 1-2), 긁개(그림 1-3) 등은 1유형에서부터 계속 확인되며 석부, 석촉형 석기, 석촉, 석창, 석도 등 마제(갈아서 만드는 방법)석기의 종류가 늘어난다. 석부(그림 1-4)는 단면이 거의 직사각형에 가깝게 각이 져 있다. 석촉형 석기는 끝부분이 둥글게 처리되었으며, 단면은 편평하다. 반면에 석촉(그림 1-6)은 중앙에 석촉의 중앙에 홈이 파져 있으며 끝부분이 들어가 있다. 석도(그림 1-7)는 반파된 것으로, 호선모양에 날이 마연되어 있다. 석창(그림 1-8)은 슴베가 부러진 것인데, 중앙에 능이 있다.

(그림 1. 시니가이 문화 동부지역의 석기, 1유형-상단, 2유형-하단)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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