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동유럽 최대의 성곽은 스키타이 시대의 성곽으로써 기원전 7세기부터 존재했으며 기원전 3세기 까지 사용되었다. 거의 4000헥타르에 달하는 이 성곽은 20세기 초 모스크바의 크기와 맞먹는다.

 

벨스크 성곽은 동과 서쪽에 각각의 성곽이 따로 존재하다가 기원전 6~5세기경에 이를 통합하는 성벽이 만들어졌고 이를 볼쇼이 벨스크 성곽이라고 부른다. 북쪽에 있는 쿠즈민 성은 이 후에 생겼고, 현재는 성벽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동과 서의 성곽은 모양도 다르고 그 곳에서 발견되는 구조물의 성격도 다르다. 특히 동쪽에는 토기와 청동기를 만들던 노지가 발견되어서 공방을 주로 담당했던 것 같다.

흥미로운 필자에게는 반가운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토제로 된 인간형상물이 발견되었다. 유물은 성을 구부할 수 있는 유물들이 있다. 남성은 성기(그림 1-1,3~10), 여성(그림 1-13~16)은 가슴이 강조되었다. 물론 애매한 유물도 있다.

 

그런데 토우로 된 남성을 연구자들 대부분은 청동으로 된 파파이(그림 1-2, 그림 2)를 연상한다. 파파이(papai)는 헤로도투스가 전하는 스키타이 신화에서 제우스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그림 1. 벨스크 성곽의 동쪽 성에서 발견된 인간형상물

 

그림 2. 청동 파파이, 그림 1-2와 동일

 

그림 2의 청동으로 된 유물은 드네프르강 하류에서 발견된 유물로 기원전 4세기 유물이다.

2020.12.26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흑해의 전사] - 나무 위의 스키타이 신(神) 파파이(Papai)

 

나무 위의 스키타이 신(神) 파파이(Papai)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흑해 지역에서 발견되는 유물 가운데는 지팡이 끝에 꽂는 방울이 있다. 간두령이라고 하는데, 기원전 7세기부터 발견된다. 기원전 7세기 유물은 방울 끝에 새 혹은 동물문

eastsearoad.tistory.com

 

하지만 토제로 된 유물과 청동으로 된 유물이 같은 인물일 수 있을까? 파파이가 이렇게 많을 수 있을까?

 

필자는 시람코의 저서를 읽으면서 그림 1의 남성 인간형상물을 파파이로 생각할 수 있고, 그래서 동쪽 성 안에 ‘신전’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에 매우 놀랬다. 물론 유적에서 그리스 토기가 발견되기 때문에 헤로도투스의 기록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아직 소개하지 않았지만 이 주변에 거대한 성곽 유적이 16기나 더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 지역이 요새화 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라면, 동유럽의 다른 스텝지역보다는 더 특별한 지역일 수 있다.

그래도 너무 쉽게 러시아 연구자들에 비해서 우크라이나 연구자들은 쉽게, 비판없이 헤로도투스의 기록을 믿는게 아닐까?

 

만약 토제로 된 유물이 스키타이 사람들의 남성신이라고 만들었다고 해도 기원전 7세기 경과 기원전 5세기 유물은 다른 생각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벨스크 성곽이 기원전 7세기 경의 유적이라는 점에서 인간형상물도 그 시기의 유물이다. 헤로도투스가 말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유물로 선사시대 이래로 전해져 오는 조상신 개념일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보는 신화 속의 신과는 전혀 다른 이념일 수 있다. 다만 신의 이름은 참고할 수 있다.

 

 

참고문헌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Дараган М.Н., 2017, Городища-гиганты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в Украинской Лесостепи (особенности расположения и фортификации). Вводные замечания(다라간 2017, 우크라이나 삼림스템지역의 스키타이 시대 거대한 성곽배치의 특징)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헬온 도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우크라이나의 산림 스텦지역에는 성곽유적이 꽤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 거대한 성곽 유적은 평면적이 100~4000헥타르 정도되는 유적이 17기가 알려졌다.

 

가장 큰 유적은 벨스크 유적이다. 전체 평면적은 4020헥타르 정도 되고, 동쪽 성은 65.2, 서쪽 성은 72헥타르 이며, 두 성을 연결한 공간인 뵬쇼이 벨스크 성은 3868헥타르 정도 된다. 현재 북쪽의 쿠즈민 성곽은 거의 성벽이 남아 있지 않다(그림 1). 성은 자연적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평면형태는 부정형이다.

 

 

그림 1. 벨스크 성곽의 평면도(다라간 2017)

 

그림 2 벨스크 성곽의 평면도(시람코 1987)

 

동쪽 성에는 마을, 제작공간, 공공 건물들지들이 확인되었다. 그 중에서 마을은 구덩이를 파고 만든 집과 구덩이를 파지 않고 만든 집이 발견되었다.

 

그림 3. 벨스크 성곽의 서쪽 성(1~3)과 동쪽 성의 집자리(4~5)

 

특히 동쪽 성에서는 청동을 제련하던 공간이 발견되었다(그림 4-1). 노(爐)의 주변에서는 청동주괴(그림 4-II)와 청동 슬래그(그림 4-III), 대량의 숯이 발견되었다. 뿐만 아니라 토기를 구었던 가마도(그림 4-2) 확인할 수 있었다. 동쪽 성은 생산을 담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4. 벨스크 성곽의 동쪽 성내에서 발견된 청동제작공간(1)과 토기가마(2), I-점토로 된 노, II-청동 주괴, III-청동 슬래그, IV-돌, V-숯, VI-토기제작을 위한 태토, VII-토기편, 로마자 숫자의 설명은 네모칸 안의 기호화된 표식 설명과 일치한다.

 

벨스크 성곽 유적은 유적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깊다. 성곽 유적에서는 실제로 금속제품을 제작한 공간이 확인되었고 성곽을 제작하는 방법이나 스키타이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벨스크 성곽 유적은 단독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인접한 지역에 거대한 성곽이 밀집해 있고 이를 요새화 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 지역은 스키타이 문화권역에서 서부지역에 포함된다. 스키타이 문화권의 동부지역에 들어가는 알타이를 포함한 시베리아에는 집이 거의 발견된 바가 없다.

 

참고문헌

 

 

Дараган М.Н., 2017, Городища-гиганты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в Украинской Лесостепи (особенности расположения и фортификации). Вводные замечания(다라간 2017, 우크라이나 삼림스템지역의 스키타이 시대 거대한 성곽배치의 특징)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헬온 도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벨스크 성곽은 동과 서의 개별 성곽과 이 두 성을 연결하는 또 다른 성벽 및 북쪽에 위치한 쿠즈민 성으로 이루어졌다. 동과 서의 성곽 이름은 따로 없고, 벨스크 성의 동쪽 성과 서쪽 성이다.

 

동과 서의 성곽은 축조되시 시작한 시점에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거의 비슷한 시점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는 거 같다. 하지만 두 성의 구조차이는 크다.기원전 7세기 경에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기원전 3세기까지 유적에서는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서쪽의 성곽은 지점마다 성벽높이의 차이가 있지만 5~8m이고, 성벽의 가장 아래 너비는 22~32m이다. 해자의 깊이는 6m에 달한다.

 

그림 1. 벨스크 성곽의 서쪽 성

 

1985년에 성벽을 절개조사했는데(어느 지점인지는 정확하지 않음), 성벽을 4번에 걸쳐서 올렸던 것이 확인되었다.

 

그림 2. 벨스크 성곽의 서쪽 성벽의 단면도, 단면도에서 기호가 다른 것은 각 층을 이루는 흙을 설명한는 것이다. 

 

서쪽 성에서는 많은 구덩이가 확인되었는데, 집자리도 있고 토기들이 들어간 구덩이도 있다. 서쪽 성에서는 집은 땅을 파고 만든 집이지만, 동쪽 성은 상황이 다르다. 서쪽성과 동쪽성에서 모두 그리스 토기가 발견되지만, 그리스와 무역이 본격화 된 것은 기원전 5세기 경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필자가 참고하고 있는 책은 1987년에 출간된 것으로 이 후에 좀 더 자세한 자료가 축적된 것으로 보인다. 1987년에는 성의 평면도와 성벽 단면도 그리고 성 내의 구조물들이 보고 되기는 했지만, 성벽의 구조물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못하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헬온 도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드네프르 강의 지류인 보르스클라 강을 끼고 위치한 벨스크 성곽은 동유럽 최대의 성곽유적으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동쪽 성은 기원전 7세기 경 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하지만 가장 북쪽에 위치한 쿠즈민 성곽은 기원전 5~4세기경에 생긴 것이다.

동과 서에 위치한 두 개의 성곽이 하나의 큰 성곽으로 합쳐진 기원전 6세기 말~5세기이어서 그 이후에 쿠즈민 성이 드러섰다.

 

성곽의 위치 상 보르스클라 강과 거의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은 일종의 항구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발굴자는 전한다. 쿠즈민 성의 면적은 15.4헥타르 정도이고, 전체 성벽의 길이는 898m이다. 1987년 보고 당시 이 성의 발굴조사에서는 별 다른 유구는 발견하지 못했고, 다만 성 내에서 기원전 5~4세기 스키타이 토기를 발견했고 기원전 4세기의 암포라(그리스 토기)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성벽 절개조사를 했는데, 해자의 바닥면인 첫 번째 토층에서는 문화적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유물이 한 점도 나오지 않았지만), 두 번째 토층에서는 기원전 4세기 토기편 2점이 발견되었다.

이를 근거로 쿠즈민 유적은 기원전 5~4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본다.

 

그림 1을 살펴보면 볼쇼이 벨스크 성곽의 벽이 만들어진 후에 이 벽을 남동쪽 벽으로 삼아서 북쪽의 성벽 2개를 만들어서 쿠즈민 성곽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1. 벨스크 성곽의 동북쪽 성벽

 

성이 워낙 크기 때문에 쿠즈민 성도 일부만 조사되었을 것이어서 1987년 보고 당시에 쿠즈민 성 내의 다른 건물흔적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성벽 절개조사는 했다. 하지만 쿠즈민 성벽의 절개는 단면을 남겨 놓지 않고 텍스트만 존재했다. 그래서 단면은 없다. 시람코의 인터뷰 혹은 짧은 다큐를 찾을 수 있었는데, 9월이 되면 발굴을 마친다는 이야기로 보아서 여전히 러시아(소비에트때부터 익혀온)와 같은 방법으로 발굴은 진행된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헬온 도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드네프르강의 지류인 보르스클라 강과 접한 벨스크 성곽은 전체 면적은 4021헥타르이다. 2번 동쪽 성은 첫 번째, 1번 서쪽 성이 두 번째로 만들어지고, 두 성이 합쳐진 것은 기원전 6세기 말~기원전 5세기 초인데, 볼쇼이 벨스크 성곽(그림 1-4)이라고 따로 부른다. 쿠즈민 성곽은 두 성이 합쳐진 뒤에 만들어졌는데 기원전 5~4세기에 만들어졌다. 이 성 전체를 벨스크 성곽이라고 하며 기원전 7세기부터 이곳에서는 사람이 살았다.

동쪽 성곽이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7세기경의 유물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이 시점이라고 추측하고, 서쪽 성곽은 기원전 6~5세기 유물이 발견되어서 서쪽 보다 늦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1. 벨스크 성곽

 

어제 15.4헥타르라고 한 것은 동벽과 북벽이 만나는 사이에 있는 3번인 쿠즈민 성곽의 크기이다. <정정합니다.~> 이 성곽의 면적은 20세기초 모스크바의 크기와 맞먹는다. 2017년 부터는 여름에 이 성곽 내에서 페스티발이 열린다고 한다. 1980년대 자료까지는 러시아어로 된 것이 많은데 그 이후 자료는 우크라이나어이다...T T. 이 성은 우크라이나의 자랑거리 중에 하나이다.

너무 큰데, 또 그에 비하면 정보가 러시아어로 된 것이 충분치 않아서 ,,, 뭣 부터해야 할지 모르겠다. 성 안에는 무덤도 있다.

 

성벽은 동쪽과 서쪽에 다른데, 동쪽은 성벽 앞에 해자가 있다. 해자는 성벽을 따라서 있는 구덩이다. 러시아에서는 환호와 해자를 통틀어 같은 용어를 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에는 환호라고 하고 성벽이 남아 있는 삼국시대에는 주로 해자라는 용어를 쓴다.

 

그림 2. 벨스크 성곽(위키페디아 참고)

 

동쪽 성벽에는 성벽위를 편평하게 다듬지 않고 비교적 뾰족하게 처리했고, 그 앞에는 수직기둥이 박혀 있었다. 성의 벽을 절개해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다. 동쪽성벽의 높이는 3~5m(지점에 따라서 다름), 깊이 1.6~3.5m, 너비는 6.3(상부)~24m(하단)이다. 루보틴 성곽은 성벽의 목축물이 남아 있었지만, 벨스크 성곽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단면과 여러 정황들로 만든 것이다.

 

그림 3. 벨스크 성곽의 동쪽벽 단면도

 

 

참고문헌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