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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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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도 우리나라로 치면 용역 발굴이 있다. 러시아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사고’발굴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계획에 없이 우연히 갑작스럽게 유적이 발견되고 급하게 유적을 발굴해야 하는 경우이다. [대개는 도로나 건물을 지을 때 생기는 경우인데, 알타이에서도 이런 발굴이 1984년에 있었다. 러시아학계에서 주장하는 러시아의 문화재보호법은 표트르 1세 이후로 생겼다. 표트르 1세의 칙령으로 시베리아에서 발견되는 황금유물들을 그냥 녹이지 못하게 하고 가져오면 상금을 준다는 그런 내용이다.]

 

엘로-2 유적(엘로마을에서 북서쪽으로 1km, 우르술 강의 좌안 단구대)은 출토된 유물은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인 파지리크 문화에서 출토되는 유물이지만 무덤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돌널무덤이긴 한데, 장방형으로 반듯하지 않고 평면형태가 사다리꼴로 넓은 쪽이 머리쪽(78cm)이다(그림 1-4). 무덤구덩이는 장방형(2.3×1.4m)이다. 관은 납작한 돌 3개와 덩어리돌 6개로 덮었으며 북쪽벽은 작은 돌로 채워진 상태이다(그림 1-3). 하지만 덮개 돌 1개가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도굴의 흔적이다.

 

그림 1. 엘로-2 유적의 무덤과 출토유물, 5-7: 청동검과 청동허리띠, 8-목제칼, 9-멧돼지 송곳니, 10-곰뼈로 만든 펜덴트, 11-철제품, 12-토기

 

무덤내부의 상태는 매우 심하게 인골이 흩어진 상태였고, 관 밖에도 유물이 떨어진 상태였다.

돌널무덤의 형태(평면형태 사다리꼴)는 스키타이시대 인가 의심스럽지만, 출토된 유물 중에 청동검(그림 1-4)은 스키타이 시대 남성들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무덤 상부를 덮은 돌은 3중으로 큰 돌을 돌린 후 그 안을 작은 돌로 채워서 마무리했다. 가장 중심의 직경은 3.5m, 그 다음은 6m, 가장 마지막 원의 직경은 8m이다.

하지만 스키타이 시대의 무덤의 상부 적석은 가장 마지막 호석(직경 8m)이고, 그 중앙에 위치한 2열의 호석은 후대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그 내부에는 불을 피운 흔적이 발견되고, 양뼈, 심지어는 사람의 두개골과 뼈, 청동칼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알타이에서 종종 발견되는데, 아크 알라하-3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무덤방 덮개 바로 위에 후대의 무덤을 썼는데, 엘로-2 유적에서는 좀 다른 양상이다. 출토된 유물도 거의 없기 때문에 언제 무덤인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원래의 무덤에 덮개가 열리면서 흘러 들어간 흙 위에 후대의 무덤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도굴한 사람들이 자신의 조상을 묻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꽤나 귀찮은 후손들이었나보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2007 :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2007. 282 с.(쿠바레프, 슐가, 2007, 추야 강과 우르술 강의 파지리크 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바샤다르 유적은 앞서 살펴본 파지릭 유적 보다 대략 100년 정도 이른 유적으로 생각한다. 대체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를 일종의 지역문화로서 ‘파지릭 문화’라고 한다. 파지릭 유적을 1947년에 발굴해서 이 유적에서 확인된 매장문화의 특징을 파지릭 문화(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라고 했다. 그런데 1950년에 바샤다르 유적을 발굴해 보니 ‘파지릭문화’의 특징이 이 유적에도 많이 확인되어서 이 유적도 파지릭 문화의 한 유적이 된 것이다. 바샤다르 유적이 파지릭 유적 보다 이르다고 해서 문화명칭을 쉽게 바꾸지는 않는다. 이미 다 잘 알려진 것이 ‘파지릭문화’이기 때문이다.

 

헤로도투스가 역사에 기록한 스키타이 사람들의 문화 중에서 왕의 장례식 치르는 장면에 미라처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재밌게도 19세기 말부터 아직 로마노프 왕조가 있을 때(혁명 전) 러시아제국고고학회가 발굴을 시작한(연구하기 시작한)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문화라고 믿던 유적에는 미라가 발견되지 않았다.

 

스키타이 문화권 중에서 내장을 발라내고 피부에 발삼(향료와 오일을 섞은 일종의 연고)처리를 한 미라처리 기법은 시베리아 알타이에서만 확인된다. 스키타이 문화중에서 미누신스크 분지에 위치한 타가르문화에서는 미라 비슷한 기법이 확인되기는 하지만 알타이 미라와는 다르다. (타가르 문화문화도 동물문양장식, 마구, 무기 등이 확인되어서 스키타이 문화권의 일부로 본다. 앞에서 살펴본 아르잔 유적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편이다.)

 

포스팅(표에서 타가르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2020/02/10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1유적] -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그림 1.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전체 모습은 앞의 포스팅 참고 그림 2.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말탄 스키타이 전사의 모습, 투구는 코린트 식 그림 3. 솔로하 출토 �

eastsearoad.tistory.com

 

바샤다르 유적의 2호는 직경이 58m 정도 된다. 1호는 직경이 40m이다. 가장 중심부의 높이는 1.85m, 가장 높은 곳의 높이는 2.7m가량이다. 구글 인공위성지도로 봉분이 보일 정도이니 도굴꾼들에겐 ‘어서 잡수셔’하는 의미로 보였을 것이다. 역시 도굴당한 흔적(그림 3, 그림 4)이 생생하다. [러시아의 알타이나 카자흐스탄, 몽골 등등 봉분이 있는 큰 무덤은 대부분 도굴꾼 들의 표적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금딱지 들을 주워가고 다른 것들은 남겨 놓고 가서 그나마 정보가 남아 있다]

그림 1의 봉분 위의 검은 색 표시는 도굴한 흔적은 아니다. 이는 근현대에 들어서 지역주민들이 봉분위에 자신들의 무덤을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 그 옛날의 무덤 근처는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분문에만 흙으로 덮은 흔적이 있어서 알아 보기 쉬웠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 2호분, 돌로 덮은 부분의 아래에 있는 다른 물질은 땅에서 파낸 흙이다.(위: 평면도; 아래: 단면도)

 

봉분을 덮은 돌을 분해하면서 말의 재갈, 철제도구 및 목제 막대기와 석제로 된 곡물파쇄기(멧돌)?이 확인되었다.

 

 

 

그림 2. 바샤다르 유적 2호분, 돌을 분해하다가 발견된 석제품. 곡물파쇄기로 추정

 

무덤구덩이는 깊이 6.15m, 크기는 5.2× 6.3m이다. 무덤 구덩이는 돌 아래에는 수백개의 통나무로 채워져 있었다. 통나무 아래에는 덤불이 1m정도 눌려져서 확인되었다. 이 덤불은 ‘쿠릴 차’라고 하는 식물이다. 이 덤불은 무덤방 바깥에 매장된 말이 매장된 곳 위에도 16개의 통나무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그 아래에는 자작나무 껍질이 덮여 있었고, 역시 말이 매장된 곳에도 말 사이까지 확인되었다.

 

 

 

무덤방의 바닥에는 두께 17~18cm의 나무 4개를 깔고 그 위에서 두께 6cm의 통나무를 세 개씩 세워서 무덤방의 한 벽은 통나무 4개를 세워서 만든 것이다. 무덤방의 덮개는 8개의 통나무로 아주 조밀하게 만들어졌다. 무덤방의 크기는 2.2×4.15m, 높이는 1.3m이다. 무덤구덩이에서 남쪽은 무덤방이 설치되고 북쪽에는 말이 매장되는데 14마리가 확인되었다.

 

 

 

 

그림 3. 바샤다르 유적의 2호분 단면도(위: 위도방향(남북), 아래: 자오선방향(동서)

 

 

 

그림 4. 바샤다르 유적의 2호분 무덤방의 평면도(위: 무덤방의 덮개와 말, 아래: 덮개를 연 후 무덤방의 바닥)

 

바샤다르 2호의 무덤방에는 통나무관이 2개였다. 가장 남쪽에 안치된 것은 남성의 관이고 그 옆에 여성의 관이 놓여 있었을 것이나 도굴당하면서 관은 제자리에서 확인되지 않고 엎어져서 확인되었다. 여성의 시신도 미라 처리되었는데, 난도질 당해서 무덤방 여기저기에서 확인되었고, 남성의 시신은 아예 없어진 상태였다.

 

 

통나무 덮개에는 1.7×3m의 도굴구멍(그림 4)이 있었다. 이곳을 통해서 들어온 도굴꾼은 높이가 1.3m밖에 되지 않는 무덤방에서 마음대로 행동하기 위해서 도굴구멍 바로 아래에 위치한 통나무관의 뚜껑을 열고 통나무관을 움직여야 했을 것이다. 이 관은 여성의 관이었다.

 

남쪽에 있는 두 번째 관은 나무로 된 못으로 고정된 것으로 제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굴꾼은 말을 매장한 곳도 손을 대었는데, 말 무덤 쪽의 북쪽벽에 구멍을 내었다. 말을 통째로 꺼낼 수 없으니, 말을 잘랐는데, 자른 뼈가 무덤방 안에서 확인되었다. 도굴꾼은 말의 굴레장식에서 금박만 벗겨내고 나머지 나무로 된 부분들은 바닥에 남겨 두었다. 청동제품은 그대로 두고 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서 유물의 위치는 거의 제자리가 아니었고, 말의 장식까지도 거의 많이 흩어진 상태였다. 미라에 대한 정보도 남아 있지 않다. 파지릭 2호분을 도굴한 놈 보다 더 한 놈이 도굴했던 것 같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 만들어진 무덤이 있다. 파지릭 유적이다. 여러 기의 무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1호분의 무덤상황을 설명한다.

 

아시다시피 파지릭 1호분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이 도둑은 무덤 구조를 잘 알았다. 무덤관이 있는 남쪽벽은 그대로 두고 주로 무덤의 빈공간이며, 유물을 두는 북쪽벽을 잘라냈다. 무덤방이 이중이었는데, 바깥에는 통나무 하나만 잘라내고 내부에는 크게 구멍을 냈다(그림 1).

 

그런데 그 도굴은 무덤이 축조된 같은 해에 도굴된 것으로 생각된다. 말 위를 덮은 통나무에서 잔디가 매우 많이 나 있었다. 이 잔디는 목화풀종류로 습지에서 잘 자란다. 이 풀의 이삭상태로 보아서 9월에 무덤이 새로 열렸다는 것을 식물학자 페트로프(В.А. Петров)가 분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9월에 말을 죽였다는 점도 그대로 드러난다. 말의 발굽에 있는 형성된 각질이 없어진 상태였다. 왜냐하면 알타이에서는 주로 눈이 녹기 시작하는 4월이 되면 말을 직접 먹이지 않는다. 직접 풀을 뜯을 수 없을 때 대략 9월 쯤부터 먹이를 준다. 얼음이 얼기시작하기 전에 무덤은 만들어져야 하기에 그때가 9월이다. 대략 5개월간은 말은 방목상태가 되는데 그때가 말 굽의 각질이 없어지는 시점이다. 동물학자인 타라세비치(А.Ю. Тарасевич)가 분석한 결과이다.

 

파지릭 1호분은 9월 어느쯤에 만들어 졌을 것이다. 파지릭 계곡에는 9월 아침에는 서리가 끼고 밤에는 영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며칠이 지나면 무덤은 얼어 붙는다. 도굴은 늦가을 쯤에 행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도굴꾼이 무덤을 열자 아직 덜 얼어 붙은 상부의 흙과 돌이 천장에서 떨어져서 무덤방 안에 원뿔 모양의 더미가 만들어졌다. 그 뒤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무덤안은 눈으로 차게 되고, 그 해 겨울 매우 추웠다면 그대로 얼어붙었을 것이다.

 

그랴즈노프가 처음 발굴했을 때 매장실은 얼음으로 가득 채워졌었다. 통나무관은 이미 열려진 채였고, 뚜껑을 뒤집어 놓은 채였다. 관 안에는 옷에 붙어 있던 장식만 약간 남아 있었다. 어제 포스팅한 유물가운데서 가죽으로 자른 산염소의 머리조각인데, 금박으로 도금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굴꾼은 묻힌 사람을 통째로 꺼내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산염소의 머리모양 조각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파지릭 1호분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은 도굴꾼이 통째로 꺼내어 간 까닭에 없다.

 

다행히 말과 말에 착장된 안장, 굴레장식 등은 그대로 였다. 말은 피부, 근육, 내장 및 내장 안에 소화되지 않은 내용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말이 묻힌 공간은 11㎡가량 된다. 말의 시체와 말 안장 등이 두께 50cm에 아주 조밀하게 매장되었다.

이미 소개된 무덤구덩이의 바닥 그림(어제포스팅)에는 말이 매우 불규칙적이게 들어간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규칙적이었는데, 비트(В.О. Витт) 교수의 도움이 있었다.

 

말은 다리를 배 아래로 넣고 머리를 구부린 채로 정해진 순서대로 무덤에 넣었다. 동쪽에 4마리, 서쪽에 네 마리를 넣고 무덤의 서쪽 끝에는 두 마리 말을 머리가 북쪽을 향하도록 가로방향으로 놓았다. 처음에 말이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것으로 보였던 것은 위에 놓인 통나무와 흙과 돌의 무게로 인해서 눌려서 생긴 현상이다. 무덤방 바깥에 세워둔 기둥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있었고 말은 이동했다.

 

그랴즈노프는 도굴당해서 무덤 주인공에 대한 정보는 없어졌지만, 도굴로 인해서 눈이 무덤 안에 쌓이면서, 무덤은 얼어붙었고, 그 결과 무덤안에서 유기물질로 만들어진 많은 유물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평가를 했다...위기는 기회이다..머 이런..

(도굴당해서 열 받지만, 또 발굴이 괜히 한 것이 아니라고 평가받기 위해서는...필요한 구절이 아니었을까 싶기도하다)

 

파지릭 1호의 책이 출간된 것은 1950년이고, 발굴은 1929년에 했으며, 분석은 그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1993년에 발굴된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도 매장된 말의 상태가 좋았는데, 말 위에서 나온 풀을 분석한 결과 말은 가을에 죽었다. 무덤이 가을에 축조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같은 결과이다.

 

파지릭 유적과 같은 대형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통나무 300개 이상을 끌어와야 하며, 구덩이 파기 등 대역사인 것이다. 유목민들은 흩어져서 살았기 때문에 모여서 대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들의 생계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여름 초지에서 겨울초지로 옮기는 기간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때가 가을이다. 이것은 필자가 생각하는 부분이다. 무덤이 겨울이 되기 전에 만들어져야 하는.

 

그럼 사람도 그때 죽었어야만 했을까?

미라로 만들어져서 여러 달 동안 수레 혹은 마차에 싣고 여러 부족을 돌았다고 전해진다. 눈과 얼음이 있는 기간에는 마차가 이동할 수 없음으로, 이런 장례식을 치르는 기간은 정해진다. 죽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 파지릭 1호분에서 확인된 도굴 구멍-왼쪽 무덤방 천장, 오른쪽-2차(내부)무덤방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50,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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