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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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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7. 8. 09:22 사르마트 문화

 

유라시아 초원의 스키타이 문화 이후에는 기원전 4세기 경에 사르마트 문화로 변환된다. 이 두 문화는 여러모로 문화적 특징이 이어지지만 새로운 유물들도 생긴다. 그 중에 하나는 그릇의 재질에 변화가 있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발견된 그릇의 재질은 토제, 목제, 청동제 등이 있다. 금과 은으로 된 그릇은 기원전 4세기경부터 나타나서 사르마트 문화 까지 이어진다. 기원전 4세기 이전의 그릇에도 금이 사용되기도 한다. 나무그릇에 금판을 붙여서 사용했다.

 

하지만 기원전 4세기경에 금과 은으로 된 그릇이 생겨난다. 유명한 유물이 스키타이 신화가 표현된 쿨 오바 유적에서 나온 금제 항아리와 차스티예 유적의 은제 항아리가 이 시기의 유물이다.

 

 

그림 1. 기원전 4세기 쿨-오바 유적의 금제 항아리

 

 

그림 2. 기원전 4세기 차스티예 유적의 은제 항아리

 

사르마트 문화에서는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토기에 동물장식을 붙이는 모양이 생기는데,동물장식은 금과 은으로 된 그릇에도 부착이 된다.

 

그림 3. 호흘라치 유적의 금제 그릇

 

그림 4. 주토보 유적의 은제 그릇

 

사실 무덤 속에 가장 오래된 부장품은 그릇이다. 스키타이 시대 이전, 청동기시대, 신석기시대 무덤에서도 발견된다. 물론 재질과 그릇의 모양은 차이가 있다.

 

그래서 그릇은 가장 오래된 장송의례품이고 이를 신성시 하는 문화는 각 지역마다 있었을 것이다. 사르마트 문화의 대표적인 무덤인 코비야코프스키 유적에서 나온 목걸이에도 그릇을 소중히 손에 쥐고 있는 가부좌를 튼 남성이 표현되어 있다. 일종의 그릇 숭배라고 보고 있다.

 

 

참고문헌

Засецкая И.П. 2011 :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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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동부의 기원전 4세기 이식 유적에서는 십대 남성이 매장되었다. 그는 화려한 고깔모자 및 의복을 착용하고 토기와 그릇 등에 둘러쌓인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가 입었던 모자와 의복은 여러 지역의 스타일을 복합한 것이었다(앞의 포스팅 참고).

하지만 토제 항아리와 나무로 된 쟁반과 접시를 매장하는 장법은 알타이에서 발견되는 특징이다. 물론 각종 재질로 만든 그릇의 형태와 수는 알타이와는 다르다. 예를 들면 알타이에서 발견되는 나무쟁반은 둥근 것으로 가장자리에 테를 돌린 것인데, 경우에 따라서 다리가 달린 것이 있다. 다리가 낮은 아크 알라하-3 유적의 유물은 쟁반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만 다리가 높은 파지리크 유적의 유물은 쟁반이라기 보다는 목제 테이블에 가깝다. 알타이 투엑타 유적에서는 루덴코가 ‘테이블’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큰 네모꼴의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

 

 

그림 1. 아크 알라하-3 유적

 

그림 2. 파지리크 유적

그림 3. 투엑타 유적

 

카자흐스탄 동부의 이식 유적의 남성은 자작나무로 만든 네모꼴의 목제 쟁반 4점이 우측에 놓인 채 발견되었다. 남아 있던 상태가 좋은 쟁반은 2점(그림 4, 5)으로 크기가 다르다(67.5×37.3×3cm, 46×29×3cm).

 

그림 4. 이식 유적의 목제 쟁반

 

그림 5. 이식 유적의 목제쟁반과 바가지

 

사진으로는 붉은색 칠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물질인지는 전혀 보고되지 않았다.

 

스키타이 문화권의 무덤에서 무덤 안의 그릇 재질은 흙, 뿔, 나무, 금속 등이 있는데, 나무로 된 유물은 현대의 기준에서 볼 때 접시모양과 컵모양이 있고, 금속제품은 청동으로 만든 솥과 여러 형태의 항아리가 있는데, 스키타이 문화의 동부와 서부지역에서 모두 발견되는 것은 청동솥이다. 금속제 그릇은 주로 스키타이 문화의 서부지역에서 발견된다. 이식 유적에서 발견된 은제 그릇은 다른 지역에서 보고된 예가 없다.

 

나무로 된 재질의 용기 중에는 음식이 아닌 피장자의 물건을 담기 위해서 나무상자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카자흐스탄 서부라고 하지만 우랄 강변에 위치해서 유럽과 매우 가까운 지역으로, 필리포프카 유적과 인접한 곳이다. 탁사이-1 유적에서는 무덤 구덩이의 북서편에서 가래나무 판자를 5개를 이용해서 만든 목제 쟁반(50×80)이 발견되었다(그림 6).

보고자는 이를 ‘상자’라고 보았으나 뚜껑이 없고, 높이가 낮아서 일종의 쟁반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아마도 음식용이 아니어서 상자라고 칭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늑대 송곳니와 이빨, 절구와 절굿공이, 돌, 골제 손잡이가 달린 칼, 새 머리 모양의 투구 및 목제 빗이 발견되었다.

 

그림 6. 탁사이 1유적의 목제 쟁반

 

그림 7. 탁사이 1유적의 목제 쟁반 위에서 나온 목제 빗

 

목제 쟁반이 음식용이 아닌 다른 유물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탁사이 1 유적에서 나오는 유물의 출토양상은 이 지역이 스키타이 문화 동부권에 속한 유적들과는 다르게 피장자의 몸에 걸친 것과 그릇 외에도 여러 유물을 넣는 서부권과 애매하게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Сдыков М.Н., Лукпанова Я.А. Ранние кочевники Западного Казахстана (на примере комплекса Таксай I). – Уральск: Полиграфсервис, 2013. – 292 с (스디코프, 루크파노바 2013, 카자흐스탄 서부의 이른 유목민(탁사이 1유적)

Акишев К.А. 1978 : Курган Иссык. Искусство саков Казахстана. М.: «Искусство». 1978. 132 с.(아세세프, 1978, 이식 쿠르간, 카자흐스탄 사카 사람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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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동부에 위치한 황금인간의 무덤이 있는 유적은 ‘이식’이라고 불리는데 기원전 7세기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황금인간이라고 불리는 소년의 무덤은 기원전 4~3세기로 사카 문화(스키타이 문화권에서 카자흐스탄 동부의 지역문화)에서는 늦은 시기이다.

 

무덤의 바닥(그림 1)에서는 소년의 복장을 제외하고 토제로 만든 그릇(그림 2), 나무로 만든 그릇(그림 3), 은으로 만든 그릇(그림 4)과 숟가락(그림 5)이 발견되었다.

알타이에서 토제 항아리를 1~2점 부장했지만 이식 유적에서는 16점이나 묻었다. 물론 토기의 기형에도 차이가 있지만 실제로 보고된 사진(그림 2)외에는 다른 정보가 없어서 꼼꼼하게 살피기에는 부족하다. 알타이 토제항아리는 ‘쿱신’이라고 불리며 유제품을 담았던 것으로 1~2점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카자흐스탄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그림 1. 이식 유적의 황금 인간 쿠르간 무덤바닥

 

그림 2. 이식 유적의 황금인간의 쿠르간 출토 토기

 

 

나무로 만든 그릇은 쟁반과 국자(그림 3)가 발견되었는데, 쟁반의 개수도 역시 이곳이 많다. 이곳에 고기를 담았던 것으로 생각한다면(그림 1의 좌측면의 네모모양이 목제쟁반을 의미한다) 매장당시에 소년의 무덤은 생고기의 썩는 냄새가 진동했을 것이다.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이나 아크 알라하-3 유적에서 목제로 만든 잔에는 손잡이가 한쪽으로 붙은 것(포스팅)이 나오는데, 그에 비하면 이식 유적의 유물은 ‘국자’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정도로 앞 부분은 작고 손잡이가 길다(그림 3).

 

2020.01.1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아크 알라하 3 유적(여성미라,'얼음공주')] - 2500년 전 여성미라 무덤의 뿔, 나무, 흙 그릇

 

2500년 전 여성미라 무덤의 뿔, 나무, 흙 그릇

투르크-몽골 계통의 민족들에게는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특별한 그릇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반적인 그릇에 특별한 음식과 음료를 담았다고 한다. 야쿠트인들은 신에게 거대한 가죽조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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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4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파지릭 유적 2호분] -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2500년 전 알타이 산의 파지릭 2호분 유물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2500년 전 알타이 산의 파지릭 2호분 유물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 위치한 2500년 전 무덤에서는 나무로 된 무덤방 안에서 통나무관 1개가 확인되었다. 통나무관은 나무를 파서 만들었는데, 뚜껑까지 잘 제작된 것이었다. 무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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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이식 유적의 황금인간의 쿠르간 출토 나무 쟁반과 국자

 

은제 그릇(그림 4)은 2점이 나왔는데, 소년의 머리맡에서 나온 것이다. 그릇의 형태가 다른 2개인데, 그 중에 한 점은 바닥에 글자 혹은 기호가 적혀 있다(그림 4-2). 숟가락은 손잡이 끝이 구부러지고 끝에 날카로운 새가 표현되어 있다(그림 5).

 

그림 4. 이식 유적의 황금인간의 쿠르간 출토 은제 그릇

 

그림 5. 이식 유적의 황금인간의 쿠르간 출토 은제 숟가락

 

사카 문화의 유적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 그릇류는 개수가 알타이에서 나온 것 보다 훨씬 많다. 뿔로 만든 항아리도 보이지 않는다. 뿔로 만든 항아리를 무덤속에 넣는 의미를 가장 중요한 동물을 상징한다고 보았다(폴로스막 2001).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의미를 담는 그릇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사람들은 소년이 입고 있던 복장에 더 관심이 많다. 황금으로 장식된 붉은 옷과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Акишев К.А. 1978 : Курган Иссык. Искусство саков Казахстана. М.: «Искусство». 1978. 132 с.(아세세프, 1978, 이식 쿠르간, 카자흐스탄 사카 사람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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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권에서는 유기물질로 만들어진 그릇 외에도 금속제 그릇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청동솥 외에도 금제와 은제 그릇 등이 발견되는데, 흑해와 볼가강 유역 등 서부지역에서 종종발견된다.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에서도 금속제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스키타이 시대와 동 시기의 페르세폴리스 궁전벽화에 남아 있다. 이들 유물은 이르티스강과 오비강의 합류점 및 알타이 부근에서 도굴에 가까운 방법으로 18세기에 채취된 것이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켈렉션 중에서. 페르세폴리스의 아케메니드 궁전에 그려진 금속그릇과 비슷한 형상, 기원전 5~3세기 유물로 추정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은 시베리아 총독 이었던 가가린이 보낸 선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 번에 걸쳐서 보냈는데 차르의 명명에 따라서 상트페테르부르그로 보내졌다. 가가린은 토볼스크에서 유물들을 수집했다고 알려졌는데, 현재는 이르티시 강 상류와 오비강의 합류점 및 알타이 부근으로 알려졌다(그림 2).

표트르 1세에게 무덤에서 캐낸 금제품(표트르 1세의 유물 컬력션)을 보내기 전(1715년)에 1712년에 가가린은 금, 은, 구리 및 기타 등등을 모았다. 주자시의 임부는 금생산에 관련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 주제와 관련된 문서는 거의 없는데, 아마 큰 비밀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금제품의 발견과 모든 금과 관련된 정보는 고대 유적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718년 2월 13일 차르는 ‘오래되고, 비범한 것을 모으라는 칙령을 내렸으며 보상을 약속했다. 1721년에 가가린은 교수형을 당했다.

 

 

그림 2. 18세기 황금 유물이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

 

죽기 전에 가가린은 3번에 걸쳐서 표트르 1세에게 소포를 보냈는데, 1번째는 10점(1715년), 2번째는 122개의 유물이 들어 있었다. 2번째 소포는 1716년 12월 토볼스크에서 가가린이 표트르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으나, 소포가 도착할 무렵에 차르는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없어서 모시코프(П. И. Мошков, P. I. Moshkov)가 소포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편지에는 각 물건의 무게를 표시해 두어서 식별이 가능하다. 2번째 소포중에서 20점은 표트르 1세의 아들인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에게도 같은 유물이 보내진 것으로 편지에 적혀있었으나, 행방은 묘연하다. 세 번째 소포는 1717년 10월에 60개의 금제품과 2개의 은제품을 보냈다고 알려졌다. 세 번째 소포에 들어간 유물에 대해서는 혼란이 있었으나 최근 튜멘 지역에서 발견된 문서로 그 존재가 확실해 진 듯하다. 이 문서에는 가가린이 보낸 소포에서 보낸 유물과 동일한 물건의 유물 무게가 일치하는 품목이 적힌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시베리아의 금제품은 용광로에서 녹여서 동전으로 제작되는 일이 흔했는데, 표트르는 칙령 1718년으로 이를 막았고, 러시아에서 일종의 문화재보호법이 생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김재윤 2018) .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Федоровна K.E. 2006, Золото кочевников. О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НАУКА из первых рук(표드로브나 2006, 유목민의 황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 대해서)

김재윤 2018, 러시아의 발굴 -연해주 철기시대 얀콥스키 문화의 바라바시 3유적을 중심으로-, 야외고고학, 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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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17. 12:55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현재 타지기스탄과 아프카니스탄 국경의 아무다리야 강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전 5세기~기원전 3세기의 유적은 그리스-박트리아 유물, 페르시아 유물, 스키타이 유물이 출토된다(제이말 1979). 그 중에서 동물문양장식 가운데 8점은 스키타이 금제품을 제작하는 기술로 만들어졌다(Scythians 2017).

 

인간형상물 가운데 평면판 속에 고깔모자를 쓰고 막대기를 들고 있는 스키타이인(그림 1)이 발견된 바 있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평면판속의 인물은 43명으로 모두 무엇가를 들고 있다. 그 중 23명은 막대기를 들고 있다. 막대기를 들고 있는 이들이 모두 같은 손동작은 아닌데, 한 손으로 들고 있는 사람, 막대기를 두 손으로 든 사람, 막대기를 한 손으로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받치고 있는 사람 등 다양하다. 막대기를 들고 있는 사람 가운데 2인은 다른 손에는 그릇을 들고 있다. 그 중에 한명은 고깔모자를 쓰고 아키나케스 검을 찬 스키타이 인이다.

그는 왼손에는 막대기, 오른손에는 뚜껑이 있는 잔을 들고 있으며, 마스크를 쓰고 있다. 스키타이 남성들이 턱수염을 길게 길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입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를 쓰고 있는 점은 특이하다(그림 2). 오른손에만 막대기를 들고 있는 스키타이 남성도 턱을 가리고 있지만 입을 가리지는 않았다(그림1). 양손에 물건을 들고 있는 스키타이 남성(그림 2)에는 고깔모자 위에 V자 모양의 매듭이 있고, 마스크는 모자 위로 연결되어 있다. 이 남성이 들고 있는 잔은 한쪽에만 손잡이가 붙은 것이다. 이 남성의 오른쪽 종아리에는 새가 3마리 스타킹(기억하시겠지만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펠트제 스타킹은 남성도 착용했다.)(그림 3-227, 그림 2와 동일) 에 새겨져 있다.

 

그림 1.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 출토된 스키타이 남성 1

 

그림 2.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 출토된 스키타이 남성 2

 

그림 1과 그림 2의 두 남성이 스키타이 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고깔모자와 아키나케스 검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남성과 유사한 모자와 복장을 한 사람은 6~7인(그림 3-217, 218, 221, 223 224?, 그림 4-237, 239)인 정도 더 있다. 평면판 위에 그림이 선명하지 않은 것은 제외했다. 그림 4-236은 턱수염이 아니라 콧수염이어서 스키타이 사람에서 제외했다.

 

 

그림 3.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 출토된 평면판 1

 

그림 4.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 출토된 평면판 2

 

먼저 포스팅에서 이야기 했지만 이 평면판의 용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정면이 아닌 측면을 표현했고 두 손에 들고 있는 기물등은 동일한 사건? 혹은 동일한 상황을 연출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마스크를 쓴 남성은 궁금하다. 아마 1년 전만 해도 이 유물에 관심이 가지 않았을 텐데...지금 우리처럼 마스크를 쓴 스키타이 남성은 왜 마스크를 썼을까?

 

 

참고문헌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12~319 p.

Е.В. Зеймаль 1979,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제이말 1979, 아무다르리아 퇴장지: 전시도록, 에르미타주 박물관)

J. Curtis, N. Tallis. Forgotten empire: the world of ancient Persia (неопр.).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

Артамонов М.И. 1973 : Сокровища саков. М.: 1973. 280 с.(아르타모노프 1973, 사카족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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