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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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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28. 19:30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백성 쌍탑 유적은 1, 2, 3기로 구분되며, 그 중 신석기시대는 1기와 2기이다. 1기에서는 회괭과 묘광, 회구 및 기둥구멍 등이 확인되었다. 1기의 주요한 유물은 융기문토기이다. 2기는 무덤 4기가 발굴되었다.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 (유적의 위치는 링크참고)


토기의 기형은 다양한데, 발형토기(그림 6-1,5,6,8), 잔발형토기, 고배형토기(그림 6-4) 등이 확인된다. 토기의 문양은 주로 융기문과 무문양이 주요하고, 구연단에 구순각목이 확인되며, 일부 토기에는 침선으로 그린 것도 있다.

토기의 문양은 구연부근에 융기띠가 횡방향으로 부착된 것이 주를 이룬다. 주로 여러 줄 부착되었거나 혹은 종방향과 함께 시문되었다. 융기띠에 각목이 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구연단에 각목된 토기도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무문양토기도 출토되는데, 저부의 바닥이 오목하게 들어간 것이다.문양토기(그림 6-5,6) 가운데는 점토를 접한 한 흔적이 단을 이루는 것이 남아 있는 토기도 있고, 단순한 무문양도 있다.

 

그림 6. 눈강 유역의 백성 쌍탑 1기 출토품과 아무르강 중류의 토기(1~15: 백성 쌍탑1, 16,17,18: 그로마투하 출토, 19: 노보페트로프카-3출토)


사진1. 쌍탑 유적의 얼굴모양토기

사진2. 노보페트로프카 유적(아무르강 중류)의 융기문토기


이외 침선기법으로 동심원 사람얼굴문양이 남아 있는 토기는 2(그림 6-10,11)있는데, 동심원문이 눈을 표현하고, 수염 밑 코구멍, 입이 있다. 융기띠를 부착한 토기도 침선얼굴문 토기와 유사한 형태가 있는데, , , 수염을 표현했다(그림 6-4). 얼굴문양토기는 내몽고와 통요 등지의 암각화와 비교되기도 했으나(吉林大學邊疆考古硏究中心·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13), 이 유적은 융기문토기가 새롭게 조사된 후투목알(後套木嘎) 유적의 2기와 같은 성격이고, 아무르강 중류의 노보페트로프카 문화와 같은 것으로 평가되었다(왕립신 2016).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아무르강 중류의 노보페트로프카문화와 오시포프카문화가 관련성이 있다는 연구(셰프코무드·얀쉬나 2012)로 보아서 백성 쌍탑 1기의 성격은 내몽골보다는 아무르강 중류 및 하류역과 관련성이 더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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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8. 17:30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19세기 말에 처음 확인되었고, 19681970, 1978년도에 오클라드니코프가 조사했다. 암각화는 아무르강의 지류인 우수리강의 강가에 세레미체보 마을 보다 약간 하류에 위치한 절벽에 원래 살던 주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3개의 지점으로 나누어져 암각화가 그려져 있는데, 각 지점은 6, 20, 7개의 표현이 그려져 있다. 표현물은 0.3~1cm가량 깊이로 쪼기 기법으로 표현된 것이다. 몇 개는 음각한 것도 있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사진1. 우수리강의 세레미체보 유적(위치는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의 지도 참고)


세레미체보 유적의 1지점(오클라드니코프 1971)

세레미체보 유적의 2지점(오클라드니코프 1971)




세레미체보 유적의 3지점(오클라드니코프 1971)


대부분은 사람과 동물과 관련된 주제이다. 가장 많은 것은 얼굴만 표현된 것인데, 단독으로 그려진 것이 대부분이고, 쌍을 이루는 것은 1개소(그림 4-5,6) 확인된다.

 

그림 4.  사카치알리안(1~3, 7~9,11,12,14,17~23)과 세레미체보 유적(4~6, 10, 13, 15, 16)의 동심원문눈 얼굴모양


타원형, 달갈형, 하트형, 상단은 타원형, 하단은 사각형이니 것, 원숭이 혹은 거북이 모양의 것도 있다. 눈은 둥글거나 끝이 뾰족한 째진 눈을 표현한 것(그림 5-4,7,8)이 있다


사진2. 세레미체보 유적의 째진 눈 얼굴모양마스크


그림 5. 사카치알리안과 세레미체보 유적의 째진 눈얼굴모양마스크(1~3, 5,6,9~13: 사카치알리안, 4,7,8-세레미체보 유적)


얼굴내부를 충진했는데, 이마의 주름, 눈 등은 사카치알리안과 유사하다. 일부 표현에서는 얼굴의 외곽선에 방사선의 모양으로 그려놓아서 을 형상화 하였지만(그림 4-4,5), 사카치알리안과 달리 머리 위쪽으로만 표현되었다. 목이 길고 발가락이 세 개 인 것은 백조 혹은 거위인데, 이는 사카치알리안과 다른 시기의 것이다.



오클라드니코프는 사카치 알리안과 마찬가지로 얼굴형 암각화 중 동심원문(그림 4-4~6, 10, 13, 15,16)을 기반으로 한 것은 6000~5000년 전으로 보았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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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8. 10:00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암각화가 그려진 바위는 바로 강가에 위치하며 화산암에 암각화가 새겨졌다(그림2). 이 유적이 발견된 것은 19세기 말에 발견되었다. 최초의 학술조사는 1950~60년대 오클라드니코프가 조사했고, 2000년대에 새로이 조사되었다. 6지점에서 103개의 돌에서 각 돌에 1~12개의 표현물이 확인되었다



  사진1. 사카치알리안을 조사하는 오클라드니코프

 

그림 2. 사카치알리안암각화의 위치변화도(라스킨 2007)(사카치알리안은 아무르강의 범람으로 인해서 보고될 당시와 현재의 암각화가 그려진 돌의 위치가 다르다. 화살표 방향은 보고당시와 2000년대 들어선 위치의 변화도이다)


암각화는 선사시대의 것은 대부분 쪼기 기법으로 표현되었는데, 외곽선을 돌리고 내부에 표현을 한 것도 확인된다. 홈의 깊이는 0.3~1cm가량이다. 전반적으로 사실적인 표현이 대부분 많고 기하학적인 표현은 드물다. 경우에 따라서 몇 개의 표현물이 그룹을 이루는 경우도 있는데, 그 중에는 얼굴과 새가 그러하다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 의 표 1


암각화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인물을 표현한 것인데, 그 중에서도 얼굴이다. 전신상(그림 9-1,2)3곳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도면은 2개만 확인가능하다. 사람의 얼굴은 타원형, 달걀형 타원형, 하트형, 사다리꼴형, 삼각형이 있고 원숭이 혹은 거북이 등도 일부 확인된다. 얼굴은 다른 문양에 비해서 대부분 불룩한 돌을 선택해서 시문해서 윤곽을 드러나게 하였다. 그 외 짐승, , , (), 태양상징, 성혈과 동심원문양 등이 있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얼굴의 내부는 비교적 간단한 문양으로 충진되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눈을 동심원으로 표현한 후 얼굴을 그렸다. 유적 곳곳에서 동심원이 확인되며, 동심원문과 코, 입만 그려진 미완성품도 확인된다(그림 3-1~4). 즉 동심원문을 기반으로 얼굴모양 마스크를 그린 것이 많다. 그 외에 단독의 동심원문, 회오리 문양(그림3-5~7)도 확인된다


사진1. 사카치알리안 유적 전경도(바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음)


사진2. 동심원문을 기반으로 한 얼굴모양 마스크

 

사진3. 얼굴모양마스크2

 


사진4. 얼굴모양마스크3



그림 3. 동심원문과 회오리 문양(1~7: 사카치알리안, 8: 세레메체보 유적)


동물문양은 두 가지 표현법이 있다. 사슴의 내부는 동심원이나 나선으로 채워진다. 오클라드니코프는 이것은 동물의 내장을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창자, 심장, 신장, 간 등이다. 이러한 표현법을 렌트겐 기법 혹은 해골기법이라고 한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여기서 고식의 동물문양은 기하학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그대로 표현되는데, 특히 사슴이 그러하다. 맹수의 동체부를 표현하는 방법과는 차이가 있다. 맹수는 등이 둥글게 굽은 것으로 표현되는데, 머리가 매우 크다. 다리선은 동체부에서 연장되는데, 가로 방향의 선이 두 부분을 구분한다 (오클라드니코프 1971). 한편, 맹수는 반구대암각화의 표현법과 유사하다는 의견이 있다(김재윤 2017b).

 

사카치알리안 연대는 인접한 곳의 발굴에서 출토된 유물과 암각화의 비교로 알려졌고, 여러 시기에 걸쳐서 제작된 것으로 보았다(1). 사카치알리안 유적의 12000~10000년 전 당시 후기구석기시대의 플라이스토세 유적에서는 새모양으로 추정된 석제품이 출토되었는데, 새그림이 가장 이른 시기로 생각되었다(1, 오클라드니코프 1971). 또한 6000~5000년 전 신석기시대 토기 가운데 콘돈포취타유적에서 타래문토기가 확인되며 이 토기의 문양과 유사한 방법으로 그려진 동심원문암각화의 얼굴모양마스크도 이때 그려진 것으로 보았다. 또한 하트모양의 얼굴문양은 보즈네세노프카 문화 토기와 비교해서 이 시기의 것으로 보았다(1).

최근 연구에서는 12000~10000년 전은 오시포프카문화에 해당한다고 정정했고, 얼굴문양은 신석기시대 발달단계(4000~3000년 전)로 보아서 오클라드니코프와 연대차이를 보인다(1).

신석기시대 이외의 중세시대 그림은 음각으로 그린 것으로 보았고, 전쟁에 참가한 말, 사냥하는

 장면 등이 그려진 것으로 대략 8세기 가량 그려진 것으로 보았고, 라스킨은 철제도구로 그어진 것으로 철기시대부터 중세시대(4~13세기)까지 내려갈 가능성도 상정했다(라스킨 2015)


* 표1은 위의 링크 참고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7. 21:00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아무르강 하류에 위치한 사카치알리안은 강변의 화산암에 그려졌다. 주제는 동심원문양 뿐만 아니라 새, 사슴, 호랑이, 전쟁에 참가한 말, 사냥하는 장면 등 아주 다양하다. 그 중 동심원문을 기반으로 한 얼굴형마스크 등 여러 모양의 얼굴주제는 연대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아무르강 하류의 나나이족 얼굴로 소개되면서 집중적으로 조명받았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그림 1 유적의 위치. 사카치알리안, 2. 세레미체보, 3. 쌍탑, 4. 지초리, 5. 영천보성리, 6. 포항 대련리, 7. 대구 진천동, 8. 대구 천내리, 9.고령 앙전동, 10. 고령 안화리, 11. 밀양 안인리, 12, 함안 도항리, 13. 동래 복천동(김재윤 2018)


사카치알리안의 연대는 주변에서 발굴된 유적출토 유물과 암각화 주제를 비교하면서 이루어졌다. 최초의 조사자인 오클라드니코프(1971)는 대략 네 시기정도에 걸쳐서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최근에는 신석기시대 연대 조종으로 세 시기 정도에 걸친 것(라스킨 2015)으로 보기도 한다(1).

 



사카치알리안의 주제와 유사한 암각화가 우수리강에 위치한 세레미체보 유적에서도 확인되며, 사카치알리안과 동시기의 것으로 판단되었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두만강 유역에서는 동심원문만 집중된 유적이 지초리에서 확인되었는데(서국태 2004), 동심원 및 회오리문양, 뇌문 등은 과일군 청룡리유적, 염주군 반궁리 등지에는 뇌문과 타래문이 함께 출토되고, 서포항 유적에서는 타래문이 번개문 보다 이른 시기에 출토됨으로 지초리의 암각화는 신석기시대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중간 정도에 위치하면 기원전 5000년 전반기의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서국태 2010).

 

종합하면 동심원문 암각화는 유사한 문양주제이지만 러시아의 사카치 알리안, 세레미체보 유적, 지초리 등은 신석기시대, 한국에서는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본다. 또한 동심원문과 다른 문양이 복합된 양전동 암각화는 삼국시대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암각화 제작시기의 직접적인 증거는 발굴을 통한 유물에서 나온 문양과 암각화의 문양을 비교 한 방법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사카치알리안, 세레미체보 유적 등도 연대추정되었다(1, 오클르다니코프 1971). 반구대암각화가 신석기시대부터 제작되었다는 주장(하인수 2012)도 동삼동 유적에서 출토된 사슴문양토기 와 비교에 의한 것인데, 비슷한 추정법이다. 이러한 연구법은 암각화가 밀집된 알타이 및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많이 사용된다(블라지미르 D. 쿠바레프 2003)

 

필자는 사키치알리안의 동심원문 및 얼굴모양마스크가 이미 앞서서 연구한 오클라드니코프나 라스킨 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그려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일까?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게 된 근거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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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7. 13:45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한반도 영남에 위치한 순수한 동심원문만 그려진 고령 안화리, 진천동 입석, 밀양 안인리, 함안 도항리 등지에서 확인되고 있다(그림 7). 뿐만 아니라 검파형 암각화와 함께 그려진 고령 양전도, 영천 보성리, 고령 안화리 등도 확인된다(그림 8). 동심원문 암각화는 대부분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는데 지석묘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울산반구대암각화박물관 2011,2012).

동심원문암각화가 대부분 지석묘관련 시설에서 확인된다 하더라도 이를 암각화의 제작시기로 단정할 수 없다. 밀양 안인리 4호는 묘역식지석묘로 암각화는 중앙상석이 아닌 가장 자리의 돌에서 확인되었다. 석검과 함께 그려져서 청동기시대로 추정되었지만(그림8-7) 두 그림이 겹쳐져서 그려진 것이 아니라 각각 그려져서 다른 시기 일 가능성도 있다.




그림 7. 1. 무산 지초리, 2. 함안 도항리, 3. 대구 진천동, 4. 복천동, 5.6대구 천내리, 7. 밀양 안인리(신안)4호(김재윤 2018에서)


지석묘와 관련된 동심원문 암각화는 축조될 당시에 이미 암각화가 그려져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지석묘 시기를 암각화가 그려진 시기로 단정할 수 없다. 복천동(그림 7-4)에서도 이미 그려진 돌을 석곽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청동기시대로 추정된 것은 수영천변에서 청동기시대 유물이 채집되었기 때문인데, 만약 신석기시대 유물이 채집된다면 그 연대는 또 변동의 가능성이 있다.

동심원문 암각화 및 일명 검파형암각화가 그려진 고령 양전동 유적은 청동기시대 설과 삼국시대 설로 나눌 수 있다. 청동기시대는 양전동암각화가 보고된 당시에 유적 주변에서 무문토기와 마제석부 등이 발견됨으로 청동기시대~초기철기시대로 편년되었다(이은창 1971). 영일 인비리 유적의 마제석검이 그려진 손잡이 부분을 양전동형암각화의 조형으로 보는 의견은 청동기시대 설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송화섭 1994). 그 이후에도 경주 안심리에서 확인된 유사한 주제로 그려진 암각화가 지석묘의 상석에서 확인됨으로 청동기시대 설이 더 확고해졌다(이상길 1996). 석장동 암각화가 발견되면서 마제석검과 양전동형암각화의 사다리꼴 모티브의 중간모습, 사다리꼴 모티브 등이 확인되면서 인비리 보다는 석장동 유적이 가장 이른 양식으로도 꼽히기도 한다(장명수 1995·2001). 분류기준을 달리한 연구자는 인비리가 석장동 보다는 이르다고 보았지만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다는 설은 변함이 없다(이하우 2011). 


그림 8. 1~4: 고령 양전동, 5. 고령 안화리, 6. 영천 보성리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5a1161a


반면에 양전동형암각화가 삼국시대에 해당될 것이라는 의견을 낸 것은 三上次男(1977)이다. 일본 구주 고분문양와 비슷한 점이 그 근거이다. 고령지산동고분30호분의 개석에서 양전동형암각화의 사다리꼴 모티브 일부가 확인되면서 이 유적의 연대를 양전동형암각화의 하한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전호태 2013, 강봉원 2017). 이를 확대해서 양전동형암각화 가운데 양전동암각화를 영남의 다른 유적과 구분해서 고령이라는 특성과 연결시켜 가야 건국신화와 연결시키고 국가제의가 이루어진 장소로 보는 관점(전호태 2017)은 그간 양전동형암각화가 청동기시대의 것이라는데 대부분의 연구자와는 차이가 있다. 강봉원은 전호태의 의견과는 차이가 있는데 5세기까지 내려올 수 있는 유적은 지산동고분군30호분의 개석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다른 유적들은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강봉원 2017).


 만약 양전동암각화가 삼국시대의 것이라면, 일명 검파형암각화가 그려진 암각화 유적 뿐만 아니라 동심원문이 같이 그려진 유적도 여기에 포함 될 수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동심원문 암각화는 이곳에서만 확인될까? 그리고 언제 그려졌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위해서 다른 지역의 암각화와 비교고찰할 필요가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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