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 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블라디미르 크라브디예비치 아르세니예프 (1872~1930)가 남긴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는 1900년에 젊은 장교로 블라디보스톡에 처음으로 왔다. 그는 사냥단의 대장으로 그가 맡은 임무는 극동 영토에 대한 조사연구였다(그림 7), 당시 러시아는 새로운 자신의 영토의 지도가 필요하였다. 시호테 알린 산맥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교통로가 되는 고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길을 낼 수 있는 곳, 원주민들이 사는 장소와 인구 수, 습관과 사상 등 모든 것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식물상과 동물상, 방호참을 파기 쉬운 편한 장소 등도 조사에 포함되었다. 그는 연해주에서 수집한 정보로 평범한 군인장교가 아니라 만물박사로써 학자로 통하게 되었다.
그림 7. 아르세니예프
아르세니예프는 우수리스크 지방에서 30년간 살면서 거의 모든 학문 분야의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 1906년에는 러시아 지질학회의 아무르 지역분소의 과업으로써 시호테-알린 산맥의 연구를 위해서 탐험대를 구성하게 된다. 시호테 알린 산맥과 해안선을 따라서 올가 만에서 우수리와 볼샤야 우수리 강의 상류까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 내용은 그의 첫 번째 탐험기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는 ‘우수리스크 철도 시마코프카 역에서부터 출발해서, 우수리 강, 울라헤, 푸드진 강을 따라서 시호테 알린 산맥을 지나서 아브바쿠모프카 강까지 인데, 북쪽 올가 만 쪽이다. 그리고 북위 45〬 에 위치한 테르네이 항구에서 부터 다시 산호베 강을 따라서 시호테-알린 산맥을 넘어서, 이만 강을 따라 이 역까지 다시 오는 것이 그 계획이다(아르세네프 1906)’고 기술되었다.
많은 성지 중에서 시호테-알린 산맥의 푸드진(파블로프카) 고개에서 타투수(제르칼나야 강)까지의 조사된 성지들은 지금까지도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하게 조사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세 번째 탐험기의 내용은 아주 흥미롭다. 이오드지헤 강(드지기토프카 강)에서 아주 이상한 토성을 보았는데, 여기에서 뻗은 길은 산호베까지 이른다고 (아르세네프. 베. 케., 『세 번째 탐험기: 1906년 탐험』-1906년) 기록되었다.
그 다음해 그는 시호테 알린 산맥의 중부지역과 연해주의 동해안가를 계속 조사하였다. 1907년 답사에서는 린드 만에서 해안가를 따라서 북쪽으로 나하타후 강까지, 그리고 투수쿠 강을 따라서 시호테 알린 산맥을 넘어서 비킨 강까지 조사하였다. 그 결과 아르세네프는 ‘유적은 아무르 강 하류의 계곡을 따라서 티르스키 절벽까지 유적들은 계속 발견되었다’고 밝혔다. 올가 해안가에는 고대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올가 해안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유적이 많고, 북쪽으로는 드문 편이다. 소수노 절벽 부근까지 유적이 끊어진다(아르세네프 1927).
1908~1910년까지 아르세네프는 19개월 동안 가장 힘든 조사를 단행하게 되는데, 시호테 알린 산맥의 북쪽 지역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 조사구역에는 테튜헤 강의 북쪽, 디오드지헤(드지기토프카 강), 시치(세레브랸카), 콜룸베(페쉐르나야), 암구(암구 강), 소요나(지보피스나야), 쿠즈네초바, 샤오 케마(말라야 케마), 타케마(벨리카야 케마), 사마르가 강 등이 포함되었다. 아르세네프는 강에서 몇 개의 성곽들을 발견하였고, 그 곳으로 가는 길과, 그곳으로 넘어가는 고개, 고대에서부터 이용되었던 길 등을 조사하였다(그림 8).
그림 8. 1908~1909년 사이에 아르세니예프가 조사한 연해주 영동지역의 성곽 위치도(지도의 점선표는 아르세니예프가 추정한 옛날도로)
1911~1912년 아르세네프는 우수리스크 타이가 지역으로 가면서 고대 유적 연구를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그 유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남기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러한 유적들이 곧 파손될 것이다. 빨리 서둘러야 한다. 비록 허술한 유적의 평면도라도,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고 썼다. 그리고 탐험기록에 많은 성의 입지와 그 특징들을 기록해 두었고, 이들 중 많은 것들이 그의 기록에만 남아 있다. 많은 수의 성곽들이 파괴되거나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오늘날 연해주 북동지역의 타이가 삼림지대에서 찾기 힘든 것이 많다.
아르세니예프는 극동에서 12번의 조사를 한 유일한 학자로써 시호테 알린 산맥을 25번 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우수리 지역의 전체 영역을 거의 모두 조사했다. 매우 열악한 조사조건이었지만, 그는 사진을 찍고, 평면도를 작성하고, 유적의 크기를 재고 기록하였는데, 모두 128개의 유적이고, 그 중에서 수십 기의 성지가 포함되었다. 베뉴코바 고개의 성, 소프카 류보비, 예디킨스코예, 쿠즈네초프스코예, 드지기토프스코예, 쿠날레이스코예,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부르리보예, 소욘스코예, 리스벤노예, 말라야 케마, 켐스코예 평지성과 산지성, 페세르노예 성 등 모두 지도에 표시되었다.(러시아지리학회 연해주 분소의 기록, 『아르세네프 대장의 탐험 보고서(1900~1910년 우수리 지역에 대한 여행기)』 1927, 『아르세네프 도시에서 작성한 시의회 보고문에서』. )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우스리스크 지역의 고대 유적의 겨우 10분의 일 정도라고 평가하였다.
1916년 아르세니예프는 하얼빈에서 개최된 러시아 동방학자 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하였는데, 연해주의 고대유적에 대한 것이었다. 그 발표에서 연해주의 유적을 모두 10개 유형으로 분류하였는데, 거기서 4번째 유형이 본 연구와 관련된 것이다.
1. 12~13세기의 성지로 만주인과 원주민의 전쟁 시 축조된 것
2. 산지성과 평지성, 12~13세기
3. 고대도로
4. 경계를 표시하는 장성(아르세니예프 1947)
물론 당연히 후대에 그의 유적 유형화에 대한 내용은 수정되었는데, 제일 첫 번째가 유적의 연대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유적에 대한 지형이나 위치적인 것은 거의 아직까지도 인용되고 있고, 장성이라 불리는 용어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아르세니예프는 연해주 지역 선사시대부터 여진시대까지 고고학 유적을 시대구분 하였다. 선사시대-8~12세기까지, 발해-14세기까지, 여진제국-19세기까지 문명의 쇠퇴기로 편년된다(아르세니예프 1922). 그는 ‘이러한 나의 짧은 이야기가 좋은 연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아마도 전체 역사연구에서는 거의 없어질 지도 모른다. 이것은 미래의 역사-고고학자들의 연구를 위한 하나의 밑바탕 정도이다’(아르세니예프 1912)라고 자평하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아르세네니예프가 죽은 후에 그가 남긴 고고학 유물과 그림들은 그의 아내 마르가리토프카 니콜예프카가 동방학연구소(레닌그라드 소재)로 전달하였다. 아무르 지역 연구회의 재단 소속의 댜코프와 사크마로프는 우연하게 아르세니예프의 연구물을 받았다는 카자케비차의 메모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1937년 카자케비차는 남편을 죽이고 카자흐스탄에서 1940년에 죽었다고 그 뒤에 알려졌고, 업적물은 행방물명 되었다(댜코프˙사크마로프 1996).
역자주:
아르세니예프(В. К. Арсеньев, 1872-1930)는 19세기 초반에 러시아가 극동을 개발하기 위해서 중앙에서 파견한 군인신분이지만 지리 및 지질학 조사를 하면서 고고학유적에 대하나 기록을 남겼는데, 극동의 고고학자 1세대로 여겨진다(클류예프 2003).
아르세네니예프가 시호테알린 산맥을 조사하면서 겪은 내용을 소설로 남겼다. ‘데르수 우잘라(Дерсу Узал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나중에 같은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나나이족의 사냥꾼으로 시호테 알린 산맥을 조사하면서 우연히 데르수 우잘라를 만나서 그의 도움 받은 이야기를 그의 일기장에 적어 두었다. 영화 ‘데르수 우잘라’는 이 내용을 일본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가 영화한 것이다. 당시 소련에서 자본을 지원하고 소련 배우가 출현했기에 소련영화로 알려져 있다.
소설 데르수우잘라는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영어책이 아닌 노역한 것이다.
*영화 데르수우잘라는 쉽게 구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네**영화에서도 확인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