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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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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2: 연해주 영동지역 고대 부터 발해및여진의 성곽연구'에 해당되는 글 64

  1. 2018.05.10 연구사 3: 파라랄디(카파로프)의 연구
  2. 2018.05.09 연구사 2: 베뉴코프 및 향토학자의 연구
  3. 2018.05.05 연해주 고대와 중세시대(발해및여진시대) 성곽 연구사1
  4. 2018.05.04 연해주의 토루와 석성연구 1: 프롤로그

현재까지도 파라랄디(카파로프) 신부(1817~1878)의 역사-민속학적 연구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다. 그는 1870~1872년에 연해주, 아무르, 만주 지역 지질학회 회원이었다(그림 4, 5). 그는 러시아 동방학자 가운데서 기록된 최초로 고고학 유적을 찾았던 학자이다(카파로프 1871, 파노프 1898). 우수리스크 지역에 처음으로 카파로프가 왔을 때, ‘어떤 중국 책’에 적힌대로 레푸 강(현재 일리스타야 강)과 다우비헤(현재 아르세네프카 강)의 수계를 따라서 잔존한 성벽을 찾았다. 이 성은 치키르-무둔이라는 중국 사람이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는 둔다스 만과 포시에트 만에서 고대 항구의 흔적을 찾았다고 적었다(카파로프 1871, 파노프 1898). 그 외에도 크레포치나야, 케드로프카, 라드돌라야 강, 페레보조치나야, 크라스노야르스크, 니콜라예프스코예 성의 성벽을 연구했다.


그림 4. 카파로프가 발견한 라즈돌나야 강(중국명: 수분하)의 토루

그림 5. 카파로프 신부


상트-페제부르그로 돌아가는 길에 신부는 죽고, 그의 연구 결과물은 일부는 도난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그의 출판물은 사후에 출판 되었는데, 고고학적 유적과 민속학적 문화적인 해석에 대한 것이다. 카파로프는 수분하의 북쪽 성지들을 관찰했는데, 이 성지들은 한국사의 프리즘과 같은 존재라고 언급하고 있다. 성의 일부분은 고려인이 축조한 것이고, 일부는 여진의 것이라고 하였다. 수분하의 우안에 남은 성벽은 트랙터에 의해서 많이 파괴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성의 대부분은 발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역사적인 사실과 지역적 위치 등으로 보아서 유즈노-우수리스크 지역에 남아 있는 고대의 유적들은 만주에 있던 발해의 중요한 행정관청 중에 하나로 생각된다. 그 뒤 이 지역에서 고려와 여진(중원에 금을 세우게 됨) 사이에 충돌이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흔적은 전쟁과 관련된 유적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아르히만드르트 파랄랄디 1871).


이.페. 나다로프는 연해주 성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1882~1883년 동안 극동지역에서 이만 강 하류 부터 아르세네프카 강까지 조사하였는데, 노보포크로프스키의 2개 성지, 예카테리노프스크, 파브로프스키 성지, 바라바쉐프카 강의 고대 도로 등이다. 나다로프의 보고서(나도로프 1887)에는 ‘이만강가에는 고대 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기술되었다. 나파로프가 언급한 것은 고대석성으로 생각되는데, 부정형의 평면형태 이며, 성벽과 해자의 크기를 측량하였고, 성벽이 3중이었던 것으로 밝혔다. 그는 이 성지가 지금으로부터 1000년 이상 올라간 고려의 것으로 보았다. 지역주민들 사이에도 옛날 석성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흙으로 구운 기와와 전돌 등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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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두 번째 단계는 향토사학자의 연구에 의한 연구이다. 제정 러시아 때 극동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고, 19세기 중반부터 연해주의 중세시대 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무르 주에 파견된 군인이나 기술자에 의해서 이러한 것들이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공식적으로 이 지역의 성곽 연구에서 제일 처음 시도한 사람은 젊은 러시아 장교 엠. 이. 베뉴코프(1832~1901)로, 그는 1858년에 정부의 명령에 따라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르 지역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그림 2).

그림 2. 베뉴코프


 26살의 청년은 아무르에서부터 우수리강을 따라서 해안지대인 동해안까지 가는 탐험을 책임감, 프로의식, 호기심 등으로 우수하게 마무리 하였다. 베뉴코프는 처음 탐험에서 어느 것도 쉽게 지나치지 않았지만 아쉽게도 연해주의 사람들과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필요한 정보를 얻고 그것을 평가하기 위해서 올바른 질문을 할 필요가 있었다. 우수리스크 지역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성곽과 요새 등을 남긴 사람과의 교류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1970년 하바로프스크에서 발간된 베뉴코프의 책 『아무르, 중국, 일본의 여행』에 대해서 스테파노프는 서평을 다음과 같이 했다. ‘러시아의 우수리 지역을 관찰하였다. 아주 육중한 시호테 알린 산맥을 지나서 바다에 이르는 고개를 찾았다’ 

마시모비치 학술위원은 베뉴코프의 책에 서평을 남겼는데, 과거에 자신이 갔던 길에 대해서 아주 정직하게 수정을 하였다. ‘도비하 강의 하류에서 남동쪽으로 우리는 내려왔는데 그곳에는 아주 드물게 고등교육기관이 있는 큰 취락지역이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22~45〬경도로 무너지고 오래된 성지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성지는 아마도 금 혹은 청왕조의 처음 시기에 만들어진 12경이 중 한 곳이다’(베뉴코프 1970).

  베뉴코프가 왜 오래된 여진의 성을 보았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기억 속에 힘센 여진족에 대한 이야기나 전설 등이 항상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제외하고는 베뉴코프는 중국 역사서에 남아 있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언급하곤 하였다.

 또 다른 연해주의 고대 성곽에 대해서 연구를 한 사람은 지질학자 이코켄틴 알렉산드로비치 로파틴이다. 극동 탐험 당시에 첫 보고서로‘ 고대 아무르 지역의 49개 수혈’을 쓰고, 고고학회 회원이 된다. 이 자료는 현재 상트 페체르부르그에 물질문화연구소에 남아 있다(로파틴 1869). 그는 현재 우수리스크 시에 남아 있는 성에 대해서 기술했는데, 그 성지의 이름은 「자파드노-우수리스크 성지(우수리스크 서쪽 성)」로 평면형태가 방형이고, 12세기~13세기 초반에 축조되었다. 「유즈노-우스리스크 성지(우수리스크 남쪽 성)」는 부정형 평면형태로 8~13세기 초반으로 비정된다. 크라스노야르스코예 성은 라즈돌나야 강(수분하)의 우안 높은 절벽위에 위치하는데, 평면적은 1,550,000~1,600,000㎡이고, 너비 3~5m, 길이 8m정도의 성벽이 현존한다. 노보고르디예프스코예 성지(별칭은 쿠루글나야 소프카: 역자 주둥근언덕)로 노보고르데예프카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단독 언덕 위에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다. 「베르흐네 -미하일로프스코예 성지」는 우수리강의 우안에 위치하는데, 베르흐네-미하일로프카 마을에서 남쪽으로 3~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부정형이고, 삼중의 성벽과 해자가 돌아가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외 이노케틴 알렉산드로비치는 처음으로 고고학 건축물의 그름과 특징 등을 자세하게 그렸다. 1858년부터 라파틴과 거의 동시에 우수리스크 지방의 성지를 전문 지도제작자인 프로렌스키가 지도에 표시하였다.

10년 뒤에 우수리스크 지방의 성지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계속 찾아왔는데 그 중 한명인 여행가 프리세발스키 (1839~1888)(그림 3)도 이곳에 들러서 니콜스크-우수리스코예마을의 성지를 보고 연해주의 고대 도시에 대한 베뉴코프의 이야기를 확인해 주었다(프리체발스키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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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지난 150년 동안 연해주에서는 150개가 넘는 성곽 건축물을 발견 및 발굴 조사하였다. 건축물에는 성곽, 성벽, 해자 등을 다 포함하며 남쪽의 해안가부터 북쪽의 산악지대와 타이가 지역에 걸쳐 있다.

연해주의 성곽연구는 세 단계에 걸쳐서 발전한다. 첫 번째 중국문헌 분석, 두 번째 향토학자에 의한 연구, 세 번째 고고학자에 의한 본격적인 야외조사이다.

첫 단계- 당연히 연해주 성곽 조사의 첫걸음은 현대에 들어와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은 당시에 주위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 하기 위해서 축조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오랑캐를 무찌르는데 익숙한 중국문헌에서 정보를 얻어서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 연구의 첫 시발점이다. 이에 관해서는 역사서에 아주 많이 남아 있고, 실제 남아 있는 건축물과 허물어진 성지 등도 이를 방증한다.

실제로 직간접 적으로 획득한 인접한 주민들에 대한 일상생활, 전통, 민족의 수 나아가서 국가의 지형, 도로, 성지, 마을, 도시, 방어시설 등도 그 국가에 대한 정보이다. 획득된 정보는 지도, 보고서, 연대기 등을 작성할 수 있고, 이것들은 그 지역에 대한 정치적 상황 등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비추린(1777~1853)(그림 1), 바실레프, 고르키, 로조프, 쿠네르 등이 기술한 동방의 이방인에는 중세 퉁구-만주족의 다양한 성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있었다. 그래서 북서(북서)’94편에는 연해주, 아무르, 만주 등에서 사는 우쯔이 종족에게 성곽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에서 일 천 년기 전반(역자 주1~4세기)·에 각 도시와 마을은 특징적인 고유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비추린 1950). 


그림 1. 비추린(1777-1853). 17세기 부터 동방정책으로 인해서 러시아는 중국 및 만주를 연구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졌고, 18세기에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청나라와 수교하면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그림의 비추린은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북경교회사절단을 파견하게 되면서 중국에서 복무했고, 중국정사25사에 기록된 동아시아역사를 번역하였다. 그의 연구는 러시아 동방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가 번역한 책은 러시아가 한국을 배우는 기본교재이다. 현재도 러시아에서 발해와 여진과 관련된 논문에서 그의 이름은 늘 거론된다. 


말갈족과 그 성지에 관해서는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의 기록에는 ‘645년 당과 고구려가 전쟁을 했다. 고구려 쪽에는 말갈인이 참가하였고, 중국에서는 투르크 인이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곳은 안시성 부근이다. 고구려의 북부욕살 고연수 및 남부욕살 고혜진과 말갈인은 50,000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도왔다. 중국 황제는 만약에 그들이 안시에 들어간다면, 높은 산을 파고, 도시로부터 식료품을 조달받아야 한다. 그러나 말갈인이 우리의 소와 말을 훔치게 둔다면, 우리 쪽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비추린 1950).

여러 역사서에는 여진의 성 축조 기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들에게는 강한 조상이 있는데, 안시라 불리고, 성지를 축조하였다. 후툰장에서 아무르 까지 북쪽으로 80m떨어져 있다(바실레프 1857). 좀 더 늦은 역사서 명나라(1368~1644) 집의 역사(러시아과학원 동양서체연구소 문서국)에도 성에 대한 기록이 있다. 행정관청 중 국가 수입담당기관, 인사기관, 사법기관 등은 성곽 안에 두도록 하고 도로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역사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성곽, 도시, 마을, 국경선, 국경의 항구 등이 구분되어 있을 때이다. 군사-정치-경제적 상황 등이 악화될 때는 국가 안이나 종족 내에서 성을 지어야 했다. 역사서에는 일본 유민이 해안가에 59개의 도시를 짓고 약 58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 거기에 성벽에 대해서 약간 기술되어 있는데, ’...군인들은 성벽위에 터널을 묻었고....’밤에 물을 길어서 도시성벽을 다듬었다. 밤에는 얼어붙어서 그곳에 올라가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러시아과학원 동양서체연구소 문서국).

10~20세기 극동 사람들은 성지축조와 마을 축조 뿐 만 아니라 방어적인 요새나 도로를 만드는 데 아주 능했다. 말갈, 발해, 여진, 고구려 인 들은 성을 축조하였는데, 중국의 역사서에는 아주 정확하게 그들의 입지 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많은 세월이 흘러서도 러시아 연구자들은 이 역사서에 따라서 성지를 찾을 수 있다.

러시아 연구자들은 고대와 중세시대 성지의 입지는 생업과 방어가 용이한 곳을 택한 것으로 생각했다. 높은 입지는 넓은 영역을 관망할 수 있었고, 봉화대의 역할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댜코바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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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최근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all history is contemporary.

 

지난해 출간된 번역서를 쉽게 푸는 작업을 잠시 멈추고 있지만..이도 곧 다시 실행할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몇 년 전에 우연하게 번역한 러시아 책이 있는데,,,

 

연해주 동해안가에 위치한 청동기시대 토루와 고구려 석성에 관한 러시아 학자의 책이다.

번역서를 출판하는 것은 스폰서가 없이 힘들다. 출판사에서 저작권문제 때문에 쉽게 하려하지 않는다.

사실 작년의 것은 거의 오더 형식이었기에 가능하였지만, 필자가 출판하고 픈 것은 이번에 소개할 책이다.

  ..기왕에 내가 번역한 거 누군가에게 도움이나 되었으면 한다.

 

디야코바(Ольга Васильевна Дьякова) 박사의 연해주 동해안 시호테 알린 산맥의 영동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성곽에 대한 연구(Дьяква О.В. 2009)이다. 대상 시기는 대략 기원전 10세기 리도프카 문화의 토성 부터 발해와 여진의 동하국(1217~1234)까지이다. 이 가운데는 디야코바 박사가 생각한 발해와 관련된 유적도 포함되어 있는데 한국학계에 소개되어 관련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판단된다


이 연구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로 문제제기 할 수 있다. 먼저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Лидовкаская культура)의 토성(그림 1)이다. 이를 연접한 중국동북지방으로 넓혀서 살펴보면 요서지역의 하가점하층 문화(夏家店下層文化)과 비교할 수 있다. 이 문화에도 성이 있으며 이의 존재를 두고 고대국가를 언급하고 있다(궈다순장싱더 2008) 그러나 선사시대 성의 성격 및 용도가 리도프카 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가 서로 유사하다는 점은 하가점하층문화의 성이 고대국가단계를 언급할 만큼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할 수 있다.


그림 1. 리도프카 문화의 토루

그림 2. 연해주 해안가의 발해~여진시대 석성


 또한 시호테알린 (Сихотэ-Алиня)산맥의 영동지역은 발해 관련유적이 거의 국내에 소개되고 있지 않다(그림2). 디야코바 박사는 이 지역 유적 가운데서 몇 개의 유적은 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발해의 성곽 축조기술로 이용해서 쌓은 성곽이라고 하고 그 시대는 발해 시기라고 주장하였다(그림2, 그림3). 또한 현재 러시아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로는 이 지역은 발해영역에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만약에 이 성이 디야코바 박사가 주장하는 대로라면 발해 영역문제와도 관련이 있어서 한국학계에서도 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림 3. 연해주 발해석성 1: 시미리코프 석성, 2~4: 자볼로첸나야 석성


디야코바 박사의 주요 발굴지인 연해주 동북산악지역은 그간 미조사지 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대부분 연해주 고고학의 종사자들이 한--중의 국경지역인 연해주 남부지역에 집중하는 데에 반해 디야꼬프 夫婦는 수 십 년간 리도프카 유적, 쿠날레이스코예(Куналейскоэ) , 사마르가(Самрга)성지 등 고립무원의 산악지역에서 꾸준히 연구를 해왔다.

이 책(Дьяква О.В. 2009)은 크게 기원전 10세기의 리도프카 문화의 토성과 중세시대의 석성을 중심으로 동해안가를 따라서 해안로를 상정했다. 필자는 해안로의 시작이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디야코바 박사는 1949년 러시아의 알타이 주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시베리아고고학의 산실인 시베리아과학원 소재 노보시비르스크 국립대학을 졸업하고 남편인 디야코프(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Дьяков)와 함께 1972년부터 극동으로 이주해 블라디보스톡 소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분소 역사고고민속학연구소에 근무한다. 디야꼬바 박사는 특히 극동의 중세시대 토기에 대한 많은 연구업적이 있다. 1980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1991년에 소련 극동지역 중세시대문화의 기원형성과 발전으로 국가박사학위를 취득했다(Клюев И.А. 2003)


김재윤의 고고학 특강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