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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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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알타이의 추야 강과 그 지류에 위치한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알타이 버전인 파지리크 문화에서는 해발 1500m이상에 있는 파지리크 유적, 투엑타, 바샤다르 유적과 해발 2500m 이상의 아크 알라하-3 유적,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에서는 동물문양장식이 대단히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들 유적에서는 가족 혹은 동료 등의 무덤이 일렬로 생기는 현상은 없다.

 

기원전 5세기 이후에 해발 2000m이상의 유적(바르부르가지 I, 울란드리크 유적(I~V), 유스티드 (I, XIII,XII) 등에서만 확인되고, 해발 1000m가량의 유적(보르탈1,2, 코르-케수, 발르익-소오크 1, 2) 등에서는 아직 산발적으로 무덤이 배치된다. 해발 1000m가량의 유적이 1500m이상 유적보다 이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무덤은 높이 올라가고 일렬로 배치되는 현상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해발 1000m가량의 유적(발르익-소오크 1, 발르익-소오크 2, 코르-케수, 보르탈 1 유적, 엘로-2 유적에서는 동물문양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발르익-소오크 1유적에서 출토된 목제 테이블의 다리 싸개에 붙은 그리핀은 매우 독보적? 이상한? 눈에 띈다.

 

반면에 해발 2000m가량의 유적에서는 거대고분이 아니라도 동물장식이 많이 발견되는데 주로 머리맡에서 출토되어서 모자의 장식이다. 유스티드 XII유적 7호, 울란드리크 III유적, 울란드리크 II유적 등에서 출토되었다.

 

비슷한 환경(해발 2000m 이상, 일렬로 된 무덤군)이지만 약간 다른 현상의 무덤도 있다.

아크- 코비 II유적에서는 무덤이 7기 발견되었는데, 1호 무덤은 어린아이(2~4세)가 매장된 곳인데 통나무관이 설치된 곳이다. 상부에 드러난 돌을 깐 범위는 5×4m(높이 40cm)로 매우 작다. 무덤 구덩이에는 납작한 나무로 무덤구덩이 전체를 덮고 돌로 고정했다(그림 1-3). 그 아래에는 통나무 관이 매장되어 있었고, 무덤구덩이와 통나무관 사이에는 화산돌을 넣었다.

 

그림 1. 아크-코비 2유적, 1-무덤 배치도, 2-통나무관 안, 3- 나무덮개 관, 4-나무 잔, 5-나무 쟁반, 6-목제 단추, 7-목제 단추, 8-철제 칼, 9- 목침

 

통나무관에는 어린아이가 매장되었고, 머리 위에는 목침, 나무쟁반, 나무잔이 차례대로 배치되었다. 나무쟁반 위에는 양의 꼬리뼈와 목제 단추 장식 및 철제 칼이 놓여 있었다.

 

시신을 미라처리한 파지리크 유적, 바샤다르, 투엑타 유적, 아크 알라하 3 유적을 제외하고 통나무관이 설치된 어린아이의 무덤은 유스티드 유적 등에서 확인된 바 있지만 관 안에 나무쟁반과 나무잔이 세트로 확인된 예는 흔치 않다.

물론 고고학적으로 나무잔의 형태를 따지면 손잡이가 하나만 붙은 형태는 아르잔-2 유적, 아크 알라하 3유적 등에서 변형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어린아이를 통나무관에 묻어서 부활의 의미를 살린 것은 울란드리크 I유적 6호분, 울란드리크 I유적 4호분과 같다.

2020.10.1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울란드리크 강의 유적] - 알타이 스키타이 문화 통나무관과 부활의 의미

 

알타이 스키타이 문화 통나무관과 부활의 의미

알타이에서 고대로부터 자연교통로가 된 추야 강에는 북쪽으로 유스티드 강, 남쪽방향으로는 울란드리크 강이 흐른다. 울란드리크 강 유역에는 8개의 스키타이 문화 유적이 남아 있다. 그 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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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코비 II유적의 나머지 무덤은 스키타이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발굴되지 않아서 정확하지 않다. 울란 드리크 유적 등에서도 어린아이의 무덤이 열의 가장 첫 번째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이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초기 투르크 시대의 무덤은 인접한 지역에서 따로 확인되는데, 아크-코비 유적, 아크-코비 III유적이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2007 :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2007. 282 с.(쿠바레프, 슐가, 2007, 추야 강과 우르술 강의 파지리크 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 시베리아의 투바공화국에 위치한 곳에서는 일명 태양의 사원이라고 불리는 ‘울루그-호루움’ 이라는 명칭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곳에서는 직경 66m에 달하는 돌로 만든 둥근 유구가 발견되었는데, 제사유적으로 생각되는 곳이다. 매장주체부가 없다.

그라치는 이 유구가 태양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2021.06.06 - [시베리아 투바와 몽골의 유적/투바의 유적] - 기원전 5세기 시베리아 태양의 사원

 

기원전 5세기 시베리아 태양의 사원

기원전 5세기 시베리아 사글리 바쥐 VI유적에서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유구가 발견되었다. 무덤과 함께 발견되었지만 유적을 발굴한 그라치는 ‘울루그-호르움’이라고 따로 명명했다. 모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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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알타이에서도 평면형태가 비슷한 유구가 발견되었다. 유스티드 I유적과 인접한 곳에 위치하는데, 쿠바레프는 무덤 유적과 함께 ‘의례복합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의례복합체를 구성하는 제사유구에는 원형의 돌 쌓은 유구가 발견된다. 중앙에 원형은 돌로 채우고 그 외곽을 2열로 돌을 돌렸고, 가장 중앙의 원형 유구와 2번째 고리 사이를 직선의 돌로 열을 만든 것이다(그림 1-1~5, 6). 울루그-호루움과 원형의 모티브를 사용했고, 방사선으로 원형 사이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직경 66m의 투바 울루그-호루움에 비해서는 현저히 작은 크기(직경 1.2~1.3m)이다.

 

뿐만 아니라 원형의 제사 유구 사이에는 방형으로 돌을 돌린 그룹의 알 수 없는 유구도 발견되었다(그림 1-1). 원래는 키가 높은 석주(돌기둥, 높이:100cm)는 세워져 있었으나, 발견되었을 당시에는 쓰러진 상태였다. 세워진 상태의 석주도 발견되었다(그림 2).

 

그림 1. 유스티드 I유적의 의례복합체, 1: 방형제사유구, 2의 부분. 2: 유스티디 I유적의 의례복합체

 

그림 2. 유스티드 I유적의 방형제사유구

 

유스티드 I유적에서는 10기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열을 이루는 무덤은 4기였고, 나무무덤방을 사용했지만, 말은 없는 무덤이었다.

 

투바의 태양을 상징하는 울루그-호루움 유적(기원전 5세기)와 비교하면 시간상으로는 알타이 유스티드 I유적(기원전 4세기)이 약간 늦다. 하지만 알타이에서 원형과 방형의 의례복합체를 만든 시기를 유스티드 I유적으로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알타이에서 늦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없다. 투바에서 거대 유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저지대의 평원이고, 알타이에는 계곡마다 유적이 만들어지는 지형적 특징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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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태양, 금 등 반짝이는 것에 집착했을까?

 

참고문헌

Грач А.Д.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1980(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2007 :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2007. 282 с.(쿠바레프, 슐가, 2007, 추야 강과 우르술 강의 파지리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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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에도 우리나라로 치면 용역 발굴이 있다. 러시아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사고’발굴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계획에 없이 우연히 갑작스럽게 유적이 발견되고 급하게 유적을 발굴해야 하는 경우이다. [대개는 도로나 건물을 지을 때 생기는 경우인데, 알타이에서도 이런 발굴이 1984년에 있었다. 러시아학계에서 주장하는 러시아의 문화재보호법은 표트르 1세 이후로 생겼다. 표트르 1세의 칙령으로 시베리아에서 발견되는 황금유물들을 그냥 녹이지 못하게 하고 가져오면 상금을 준다는 그런 내용이다.]

 

엘로-2 유적(엘로마을에서 북서쪽으로 1km, 우르술 강의 좌안 단구대)은 출토된 유물은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인 파지리크 문화에서 출토되는 유물이지만 무덤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돌널무덤이긴 한데, 장방형으로 반듯하지 않고 평면형태가 사다리꼴로 넓은 쪽이 머리쪽(78cm)이다(그림 1-4). 무덤구덩이는 장방형(2.3×1.4m)이다. 관은 납작한 돌 3개와 덩어리돌 6개로 덮었으며 북쪽벽은 작은 돌로 채워진 상태이다(그림 1-3). 하지만 덮개 돌 1개가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도굴의 흔적이다.

 

그림 1. 엘로-2 유적의 무덤과 출토유물, 5-7: 청동검과 청동허리띠, 8-목제칼, 9-멧돼지 송곳니, 10-곰뼈로 만든 펜덴트, 11-철제품, 12-토기

 

무덤내부의 상태는 매우 심하게 인골이 흩어진 상태였고, 관 밖에도 유물이 떨어진 상태였다.

돌널무덤의 형태(평면형태 사다리꼴)는 스키타이시대 인가 의심스럽지만, 출토된 유물 중에 청동검(그림 1-4)은 스키타이 시대 남성들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무덤 상부를 덮은 돌은 3중으로 큰 돌을 돌린 후 그 안을 작은 돌로 채워서 마무리했다. 가장 중심의 직경은 3.5m, 그 다음은 6m, 가장 마지막 원의 직경은 8m이다.

하지만 스키타이 시대의 무덤의 상부 적석은 가장 마지막 호석(직경 8m)이고, 그 중앙에 위치한 2열의 호석은 후대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그 내부에는 불을 피운 흔적이 발견되고, 양뼈, 심지어는 사람의 두개골과 뼈, 청동칼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알타이에서 종종 발견되는데, 아크 알라하-3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무덤방 덮개 바로 위에 후대의 무덤을 썼는데, 엘로-2 유적에서는 좀 다른 양상이다. 출토된 유물도 거의 없기 때문에 언제 무덤인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원래의 무덤에 덮개가 열리면서 흘러 들어간 흙 위에 후대의 무덤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도굴한 사람들이 자신의 조상을 묻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꽤나 귀찮은 후손들이었나보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2007 :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2007. 282 с.(쿠바레프, 슐가, 2007, 추야 강과 우르술 강의 파지리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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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 추야 강변의 스키타이 문화와 관련된 수 많은 유적 가운데 말 7마리가 매장된 유적이 있는데 보르탈 1 유적이다. 파지리크 유적, 아크 알라하-3 유적과 같이 많은 수?의 말이 매장되었다. 울란드리크, 유스티드, 바르부르가지 유적 등에서는 1~2마리가 매장되었고, 말이 매장되지 않는 무덤(석관묘)도 많다.

 

보르탈 1 유적에는 백기 이상의 무덤이 확인되었는데, 크기는 다양하고 그중에서 6기가 스키타이 시대 무덤으로 확인되었다. 1974년과 1975년에 발굴했다.

 

그림 1. 보르탈-1 유적의 무덤 배치도

 

백 기 이상의 무덤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은 7호이며, 직경 32×30m 정도이고 높이는 0.5~1m가량으로 넓고 편평한 보기 드분 형태이다.

 

7호 무덤에는 무덤의 북벽과 서벽에 말이 7마리 무덤구덩이에 매장되었다.

역시 통나무를 이용해서 무덤시설(5,7×4.7m, 깊이 5m)을 만들었고 바닥에도 통나무를 깔았다. 특이한 점은 무덤방의 바닥에서 청동못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3점은 못의 두께가 12×12mm로 매우 두껍지만 부러진 채 발견되었다. 그 외에도 8개 이상의 청동못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청동못은 바샤다르 유적에서 발견되었는데, 통나무관에 사용된 것이다. 보르탈-1 유적 7호에서 통나무관은 이미 없어졌지만 원래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은 남성의 무덤으로 오른쪽으로 눕고 다리를 굽은 채 확인되었다.

 

 

그림 2. 보르탈-1 유적의 7호분

 

그림 3. 보르탈-1 유적의 7호분 출토유물

 

유적을 발굴한 쿠바레프는 이 유적은 발르익-소오크 1 유적보다 약 100년 정도 늦은 바샤다르 유적곽 같은 시기의 유적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화살촉(그림 2-2) 때문이다. 앞서서 이야기 했지만 쿠바레프는 화살촉의 형태로 유적의 편년했다.

 

보르탈-1 유적은 정확한 지점은 아직 못 찾았는데, 아크시 마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발르익-소오크 1 유적과 바르부르가지 1 유적 중간 지점 쯤에 위치한다. 발르익-소오크 1 유적보다 100년 정도 늦으며, 유적을 만든 고도가 높아지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보르탈-1 유적의 7호분은 파지리크 유적, 아크 알라하-3 유적등과 같이 말이 여러 마리 들어가는 점은 같지만 무덤의 북벽에만 말을 매장하는 방법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에 통나무관을 쓰는 드문 무덤이다. 통나무관은 파지리크 유적, 아크 알라하 3유적,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 바샤다르, 투엑타 유적 등 미라 처리된 시신에 사용되었는데 성인의 무덤이다. 반면에 유스티드 유적 등에서 몇몇 무덤에서는 미라 처리되지 곳에 통나무관을 쓰는 경우는 어린아이가 매장되었는데, 이 유적에서는 성인 남성의 무덤에 통나무관이 쓰는 경우가 확인된 것이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2007 :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2007. 282 с.(쿠바레프, 슐가, 2007, 추야 강과 우르술 강의 파지리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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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의 추야 국도변에 위치한 발르익-소오크 1유적은 스키타이 시대의 무덤은 4기만이 발견 되었지만 필자의 눈을 쏙 끄는 유물 때문에 머릿속에 맴돌았다.

 

3호는 발굴된 무덤가운데 가장 작지만(직경 8m, 높이 30~40cm) 매우 인상?적인 유물이 출토되었다. 인상적이라는 표현은 주관적이지만....

그리핀이라는 동물표현은 늘 말과 사람을 장식 할 때 주로 드러나는 유물이다. 하지만 발르익-소오크 1 유적의 3호에서는 목제 테이블(밥상)의 다리 끼우개(청동제)로 활용된 것이 발견되었다.

 

그림 1. 발르익-소오크 1 유적의 목제 테이블의 복원도, 그리핀 머리(청동), 테이블 자체는 파지리크 유적 2호 출토품을 참고로 했음.

 

목제테이블은 파지리크 유적과 바샤다르 유적 등에서 출토된 바 있다. 그러나 울란드리크, 유스티드, 바르부르가지 유적 등에서는 목제 쟁반(다리가 짧음)은 확인적은 있지만 목제 테이블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물은 파지리크 유적, 바샤다르 유적 등에서만 출토되었다. 얼음공주 무덤(아크 알라하-3)에서는 쟁반의 다리가 잘린 채 나왔는데, 파지리크 유적 보다는 낮지만, 일반적인 쟁반 치고는 높은 그런 유물이었다. 목제테이블의 윗판과 다리는 도굴구덩이로 인해서 없어진 상태이다.

파지리크 유적에서 나온 목제 테이블의 다리는 대부분 문양이 있는 것이었고, 동물장식으로 조각된 유물도 많이 나왔다.

발르익-소오크 1 유적은 기원전 7~6세기 가량의 유적으로 쿠바레프 박사는 생각하기 때문에 목제 테이블의 다리를 단순하지 않게 만들기 시작하는 것은 (파지리크 유적 보다) 이 유적에서먼저 확인된다고 할 수 있다.

 

3호는 이미 도굴된 상태여서 무덤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200여편 이상) 금박종이가 서쪽 모서리와 도굴로 인해서 파손된 부위에서 나왔다. 대부분 의복과 머리장식에 달았던 것인데, 파지리크 유적 2호분의 여성 무덤에서 나온 금박편들과 비슷하다. 무덤구덩이 북쪽에 위치한 말도 장식된 상태였다. 목제로 만든 조각품을 금박으로 싸는 방법이다. 목제품은 잘 남아 있지 않고, 금박만 찢어진 상태로 남아 있었다. 금박 가운데는 파지리크 유적 1호분의 말의 갈기 장식에 달았던 수탉과 비슷한 유물도 있다(그림 2).

 

그림 2. 발르익-소오크 1 유적 말의 굴레장식, 금박, 1~10: 발르익-소오크 1 유적, 11- 파지리크 유적 1호분

 

파지리크 유적 1호분의 말 장식

 

 

 

발르익-소오크 1유적의 1, 3, 21, 27호분 모두 공통적으로 무덤에 사용된 나무는 거의 잘 남아 있지 않다. 단순히 도굴 때문은 아니다.

 

왜 일까?

 

이 유적의 무덤 아래에는 결빙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 3. 발르익-소오크 1 유적 3호분, 1-단면도, 2-평면도, 3-5: 옷(?)에 달린 장식(금박), 6-버클장식(뿔제) 혹은 끼우개, 7-재갈편(청동), 8-철제로 된 머리장식, 금박의 흔적이 남아 있음. 9-목제 못이 밖힌 나무판, 10-13: 못(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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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빙층은 해발 1500m이상 무덤(파지리크, 아크 알라하-3,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에서만 남아 있다. 1000m정도 되는 무덤(바샤다르, 투엑타)에서는 미라도 잘 남아 있지 않고, 무덤구조물도 잘 남아 있지 않다. 유스티드 유적은 무덤 아래에 결빙층은 없지만 해발 2000m이상 높은 곳으로 무덤구조물이 잘 남아 있다.

 

알타이에서 시간이 갈수록 무덤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현상이 발견된다. 기원전 5세기 경에는 해발 1500m의 파지리크 유적 뿐만 아니라 해발 2500m의 아크 알라하-3유적,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도 만들어진다. 기원전 5세기 이후로 거대 무덤은 아니지만 해발 2000m높이에서 무덤이 만들어지는데, 유스티드, 울란드리크, 바르부르가지 유적 등이 생겨난다. 이들 유적에서만 무덤이 일열로 서는 현상이 발견되는데, 파지리크 문화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발생했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2007 :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2007. 282 с.(쿠바레프, 슐가, 2007, 추야 강과 우르술 강의 파지리크 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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