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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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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레르메스'에 해당되는 글 2

  1. 2021.12.18 고대 이란의 지비예 유적
  2. 2021.12.01 기원전 8세기 절벽 위의 무덤

 

코카서스 북쪽에 위치한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중에는 원형맹수장식이 달려 있는 유물이 있다. 원형맹수장식은 켈레르메스 유적 발굴 전에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 수집품 가운데서도 발견된 바 있어서 스키타이 문화의 상징으로 생각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라루투의 남쪽에 위치한 현재 이란의 삭키즈(Saqqez) 부근의 마을에서 1947년 화려한 황금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은 별 다른 유구는 발견되지 않은 퇴장지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유적의 유물구성은 어떤 특정 지역의 것만 출토된 것이 아니다. 앗시리아, 우라르투, 초기 이란양식(고대 오리엔트 특징+유라시아 스텦지역 특징) 등이 복합되어서 많은 연구자들에게 회자되었다.

 

그림 1. 켈레르메스 유적의 청동거울

 

이 유적에서도 원형맹수장식이 발견되어서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 연구자도 있다. 왜냐하면 기원전 9세기 유적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인데, 하지만 발굴품이 아니라 20세기 초반 유적들의 운명처럼 우연하게 발견된 것이었다. 전문적인 발굴이 아니라 농민들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시장에서 구입해서 고고학자들이 입수한 것이다.

 

그림 2. 지비예 출토 원형맹수장식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지비예 유물을 처음 알린 것은 1948년에 프랑스 고고학자 앙드레 고다르인데, 유물을 판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고 약간의 유물을 박물관 카달로그에 게시했다.  농민들이  요새가 있는 높은 언덕의 큰 청동용기 안에서  금, 은, 청동, 상아 및 토기 등의 유물이 있었다고  고다르에게 전해 주었다. 그 다음해인 1949년에 유적의 위치가 지비예 마을인 것을 확인했고, 유물들은 ‘지비예 보물’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수십년 동안 지비예의 유물로 추정되는 것들이 이란의 상점에서 팔려나갔고, 미국, 유럽 및 기타 지역의 개인 수집가와 박물관 그리고 다수 특별 전시회에 전시되었다(Muscarella, 1977)

 

그런데  ‘지비예의 보물’이라고 주장하는 유물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특히 프랑스고고학자인 Ghirshman는 지속적으로 이 유적의 유물이라고 주장하면서 30여개체나 늘여갔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근동 미술실에도 지비예 유물이 소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 유적의 유물을 최초로 알린 고다르는 1950년에 하나의 용기에서 유물이 뭉치로 출토되었다고 했지만, 1951년에는 이를 부정했다. 과연 하나의 용기에서 수백점에 달하는 유물이 전부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지비예의 보물이라고 알려진 유물 중에 아주 많은 양이 위조품일 가능성이 있다고 Muscarella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 유적에서 여러 나라의 유물 특징이 한꺼번에 위조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인정된다.

 

참고문헌

O. W. Muscarella, “‘Ziwiye’ and Ziwiye: The Forgery of a Provenience,” Journal of Field Archaeology 4, 1977, pp. 197-219.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에 스키타이 세계와 교류하던 우라르투는 기원전 764~735년에 현재의 터키 국경에 있는 반 호수에 인접한 절벽 위에 성을 만들었고 그 곳이 당시의 수도로 알려졌다. 투쉬파 라고 하는 곳인데, 여러 국가에서 이 곳을 발굴했지만 가장 운 좋은 것은 1915~1916년의 러시아제국고고학위원회였다. 사르두리 II세의 비문을 발견해서 여기가 그의 도시라는 것을 밝혀 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왕실 포도원이 인접한 곳에 있었다고 한다. 20세기 초까지 이 곳의 주요 산업 중에 하나가 와인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코카서스 북쪽의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은제 각배(여성이 새겨져 있는)가 그냥 출토된 것은 아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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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뿐만 아니라 액체로 된 음료는 어울리는 그릇이 있다. 커피도 잔이 따로 있고, 차도 찻잔이 있고, 맥주도 회사 마다 자신의 로고가 있는 잔이 있다.

 

반 절벽은 높이 80m로 바위가 자연적으로 가파른 상승을 했기 때문에 천혜의 자연 요새이다.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서쪽 끝은 반 호수와 접하고 있다.

 

왕실로 추정되는 공간은 남쪽 절벽에 입구가 있는 곳이다(그림 1).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면(그림 2) 큰 홀이 있고, 옆에는 작은 방 3개가 붙은 구조이다. 절벽을 동굴처럼 파서 공간을 마련했다.

 

그림 1. 남쪽 절벽에 입구가 있는 큰 방과 작은 방의 평면도(가장 위)와 단면도

 

우라루투 석공들이 다양한 목적을 위해서 내부 공간을 인공적으로 조각해서 만든 것이다. 일부는 슐츠가 발견한 공간도 있다. 모든 인공 동굴의 용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왕실의 매장을 위해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남쪽 경사면의 위쪽에 위치한 방은 천장이 매우 높은 곳인데(그림 1), 궁전의 특징이고,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 중세 아르메니아 역사가 Movses Khorenatsi가 이 건물을 앗시리아 건물로 생각했으나, 러시아 연구자들이 찾아낸 바와 같이 우라루투 왕 사루두이 II세의 비문이 발견되었다.

 

그림 2. 왕의 계단

 

그림 3. 남쪽 절벽 위의 입구, 왕의 방이라고 불리는 곳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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