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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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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탁사이-1 유적의 여성 정체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무덤의 구조이다.

 

탁사이-1 유적에는 무덤이 6개 존재하는데 가장 크고 많은 유물이 출토된 6호분은 낮은 곳에 위치한다. 사실 1~5호분과 다른 계곡에 위치해서, 같은 구성원이 아닐 수 있지만, 발굴자들은 같은 유적으로 묶어서 6호분이라고 명명했다(그림 1).

 

탁사이-1 유적의 다른 유적은 6호가 워낙 유명해서 그런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여성의 무덤인 6호는 이해할 수 없는 구조이다.?!

 

무덤의 중앙구덩이에서도 동쪽벽에 치우쳐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무덤구덩이의 중앙은 비워둔채였다. 그리고 무덤구덩이를 둘러싸고 있는 부분도 열을 아주 많이 받았고 청동이 녹은 흔적이 둘러쌓고 있었다. 일부분만 그런 현상이 발견되었다면 우연?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무덤구덩이를 둘러쌓고 있다는 점에서 우연일 수 없고, 의례행위의 과정중에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덤을 3겹이나 둘러쌓고 있는 붉은색과 황색의 퇴적물도 내용물은 달랐겠지만 그런 행위 중에 한 부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림1. 탁사이-1 유적의 무덤 배치도

 

 

그림 2. 탁사이-1 유적의 6호 평면도

 

탁사이-1 유적의 6호분 여성과 유사한 유물을 많이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 인접한 필리포프카 유적(지도에서 확인가능함)에는 무덤구조는 전혀 다르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3곳이나 있으며 지하통로를 통해서 지하로 들어가도록 된 구조이다. 무덤의 입구는 봉분 위가 아닌 측면이다. 대개 이런 무덤 구조는 한 번 무덤을 만들면 후대에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흑해 지역에서 많이 관찰된다.

알타이 지역에서는 무덤구덩이를 파고 봉분을 만든 후에 따로 입구를 설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도(무덤의 복도)가 있는 무덤구조는 나중에 다시 열 것을 염두해 두었을 가능성이 있거나 혹은 그 전통을 이어받아서 만든 무덤구조일 가능성이 크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탁사이-1 유적과 거리상으로는 필리포프카 유적보다 멀지만 같은 국경 내에 있는 이식 유적은 무덤구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여러 방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으로 나무 구조물 안에서 십대 남성(황금인간)이 발견되었다. 여러 방이 있었다는 점에서 탁사이-1 유적 6호와는 다르다.

 

그래서 유라시아 초원의 중간지대에 위치한 지역에서는 알타이와 비교적 인접한 지역에서 발견되는 무덤을 제외하고는 무덤의 특징들이 일률적이지 않다. 다만 봉분을 높이 쌓는다는 공통점은 있다. 알타이와 흑해처럼 어떤 정형성, 규칙성들이 많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제까지 필자가 소개한 베렐 유적, 실릭티 유적, 이식 유적, 탁사이-1 유적, 타스몰라 유적은 카자흐스탄 국경안에 무덤이지만 각각 다르며, 전체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볼 때 중부지역에 위치한다. [여기서 베렐 유적은 알타이 산의 자락에 위치해서, 알타이 파지리크 문화와 유사하다.]

 

따라서 탁사이-1 유적의 여성은 자신이 살아생전 지녔던 물건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묻힌 무덤도 아마도 재지적이거나 혹은 어떤 특정 계급의 무덤일 수도 있다. 카자흐스탄 연구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여사제(샤먼)의 신분이었을 수 있다. 특히 무덤 안에 불을 많이 썼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에서는 같은 무덤 구덩이에 무덤방과 말을 부장하는 전통이 있다. 2600년 전 부터 시작된 문화가 사라지는 현상은 울란드리크 강의 계곡 유적에서 확인된다. (스키타이 문화의 시작은 아르잔-1호 부터이지만, 무덤구덩이에 말과 무덤방을 만들어 부장되는 현상은 알타이의 파지릭 문화에서 시작된다.)

 

울란드리크 I유적에서도 말이 있는 무덤과 말이 없는 무덤이 구분되지만, 울란드리크 II(2,4,7,8호)유적, 울란드리크 IV유적(1호), 울란드리크 V유적(2호), 타샨타 I유적(2호), 타샨타 III유적(7호)에서도 말이 없는 무덤이 있다.

 

그림 1. 울란드리크 II유적의 유적평면도, 2,4,7,8호의 무덤에는 말이 없다.

 

 

그림 2. 울란드리크 II유적의 8호

 

그림 3. 타샨타 I유적과 II 유적의 평면도

 

 

그림 3. 타샨타 I유적의 2호

 

울란드리크 II유적의 8호와 타샨타 I유적 2호는 통나무관에 묻은 어린아이 무덤이다. 유스티드XII유적에서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어린아이 무덤에는 상대적으로 말이 부장되는 경우가 적었다.

 

울란디르크 강 유역의 유적 가운데 가장 늦인 시기은 유적은 기원전 2세기의 무덤이라고 했다. 그런데 말 없는 무덤이 모두 기원전 2세기의 유적은 아니다. 이 시기의 무덤에도 말이 있는 무덤이 있다. 예를 들면 울란디르크 I유적의 가장 마지막에 있던 13~15호 무덤이다.

말 없는 현상은 기원전 3세기부터 시작된다. 울란디르크 I유적의 3호, 울란디르크 II유적의 8호, 울란디르크 IV유적의 1호는 기원전 3세기 가량의 유적이지만 말은 부장되지 않았다.

 

2600~2500년 전 대형 무덤에서 미라와 함께 수 마리의 말을 부장하던 관습이 2400년 전이 되면서 한 무덤에 들어가는 말의 수가 줄고, 말이 들어간 무덤이 늘어간다. 말의 두수 뿐만 아니라 무덤방에도 변화가 있다. 울란디르크 뿐만 아니라 유스티드 계곡의 무덤방 바닥에는 유물이 놓인 공간에 나무를 1~2개 정도 빼고 만들었다.

 한켠에 나무바닥이 빠진 무덤방, 최대 2~3마리의 말,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유물의 부장은 2500년 전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얼리어덥터 전사 유적에서부터 확인되는 현상이다.  미라만 빼면 유스티드 계곡의 유적이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무덤과 매우 유사하다. 울란디르크 유적은 무덤방 결구하는 방법이 약간 다른 무덤의 비율이 많아졌다.

 그런데 이걸 칼자르듯이 딱 구분하기도 애매하다. 아마도 그런 유적은 따로 있을 듯 하다.

그러고 보면 미라현상은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까지였던 것 같다. 물론 현재의 자료로 판단한 것이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87 : Курганы Уландрыка. Новосибирск: 1987. 304 с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몰로딘, 폴로스막, 치키세바 2000, 알타이 미라 현상, 2000)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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