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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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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알타이의 우코크 전사는 2500년 전 어느 날 미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얼음공주 미라(아크 알라하-3)와 매우 가까운 곳에 묻혔고, 다행히 완벽하게 미라의 모습이 남아 있었으나, 세간의 관심은 덜 했다. ‘얼음왕자’이런 별명도 없고, 그는 얼음공주에 비해서 주목을 받지 못한 것 같다.

 

유적은 1994년에 발견되었고 1995년에 발굴되었다. 1995년 얼음공주가 부산에 왔을 때 그는 이제 막 사람들이 무덤 속에서 끄집어 내었다.

 

 

앞에서 소개한 파지릭 유적과 아크 알라하 1, 3 유적과 마찬가지로 말은 무덤방 북쪽에 매장되었다. 무덤방의 크기는 그림 1에서 목제의 돌출부를 제외하고는 실제 무덤방은 164×113m가량이다. 나무는 통나무를 반으로 나누어서 사용한 것이다. 바닥의 나무는 4개만 깔렸고, 목기와 토기 등의 그릇이 놓은 부분에는 나무가 깔려 있지 않았다. 나무방의 벽은 통나무를 2층으로 올린 것이다.

 

나무방 덮개를 열자 나타난 것은 남성 미라가 무릎을 굽힌 채로 잠들어 있었다. 미라로 제작된 아크 알라하 3유적, 파지릭 유적 2호분, 파지릭 5호분과는 달리 통나무관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자세는 이제 까지 설명된 무덤에서 줄 곧 확인되는 자세이다. 쭉 뻗고 하늘을 쳐다보는 (앙신직지) 시신처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림 1. 시베리아 알타이의 우코크 고원의 남성미라 무덤,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

 

무덤방의 유물은 여느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처럼 많지 않았다. 더욱이 부장된 말의 수와 출토된 유물도 적은 편이어서 전체 적으로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림 2. 시베리아 알타이의 우코크 고원의 남성미라 무덤,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에서 출토된 유물

 

그림 2에서 이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의 종류를 알 수 있다. 목제 쟁반 위의 양뼈(엉덩이뼈), 그 옆의 칼, 그곳에서 떨어진 곳에서 출토된 토기 1점, 목기 1점 등 실제로 사용했던 유물이다.

 

그런데 이 남성은 관이 없었지만 미라로 제작되었고, 문신이 있었으며, 모피코트를 입고, 고깔모자를 쓰고, 펠트로 된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특히 남성이 쓰고 있는 고깔모자는 먼저 발굴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남성전사 무덤에서 발견된 동물문양장식이 어떤 용도로 씌인 것인지 알게 했다. 이 유적이 발굴되기 전에는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 발견된 남성전사 머리 위의 동물문양장식이 용도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말의 수는 적지만 출토된 마구는 아크 알라하 3유적과 비교되었다.

 

그림 3. 시베리아 알타이의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1: 얼음속의 미라; 2: 미라를 발굴하는 장면)

 

참고문헌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몰로딘, 폴로스막, 치키세바 2000, 알타이 미라 현상, 2000)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의 얼음이 녹자 드러난 무덤의 구조를 살펴보기로 하자.

여성샤먼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무덤을 발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구조를 알아야 한다. 

 

 

 

아크-알라하 3 유적은 3m(지표에 드러난 돌에서부터)로 네모 구덩이(3.6×4,4m)를 파고 가장 바닥에 나무로 무덤방(목곽)을 만들고 그 안에 나무관(목관)을 넣었다. 그리고 구덩이는 돌로 채워 넣었다. 구덩이 뿐만 아니라 지상에도 직경 10m 범위로 높이 50cm가량으로 둥글게 돌을 쌓았다.

 

 

 

 

 

무덤의 단면도(그림 2)에도 표시가 나지만 목곽의 주변에는 지표와 가까운 곳 보다 큰돌과 작은 돌을 사이사이에는 작은 돌을 섞었으며, 지표와 가까운 쪽은 작은 자갈을 채웠다. 지표의 흙을 제거하고 나자 무덤의 가장 상층 중앙부를 채운 돌이 반쯤만 남아 있다(그림 3). 왜 일까? 무슨 흔적일까?(답은 조금 있다가...)

 

그림 3. 

 

이 중앙의 돌을 제거하고 나자, 무덤의 경계로 볼 수 있는 호석이 드러났다.(그림4) 호석의 직경이 10m였다. 

 

그림 4. 무덤의 둘레를 표시하는 돌(호석), 그림1의 사진을 조감도로 그려놓은 모습이다.

 

무덤구덩이를 채운 돌을 드러내자 바닥에서 깊이 1m 가량에서 무덤구덩이의 동쪽에서 말 3필이 확인되기 시작했다. 말 2마리는 두향이 동쪽이었고, 완전히 옆으로 뉘웠으며, 말 한 마리는 이 말의 다리 부위에서 확인되었다. 이 말은 배를 바닥에 깔고 확인되었다(그림 5) 3필을 드러내자 그 아래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있었다(그림 6). 이 무덤은 뭘까? 여성샤먼은 그 보다 아래에 있다.

그림 5.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 가장 상층 말 3필

그림 6. 말 3필을 드러내자 확인된 카라-코바문화의 추가장(b,c). b-추가장의 덮개돌, c-추가장의 덮개돌을 드러낸 목관, d-추가장의 덮개돌을 들어낸 모습, 가장 아래쪽의 나무는 주인공 무덤의 천장이다.

 

말을 드러내자 이 무덤의 덮개인 납작한 판돌이 확인되었고(그림 6-b), 나무판자로 제작된 목관(2.2×1m)(그림 6-c)이 확인되었다. 이 무덤의 덮개돌과 목관은 원래 무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여성샤먼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 무덤은 알타이 고원의 살던 카라-코바 문화의 것으로 밝혀졌다. 추가장의 흔적이다. 알타이에서 종종 확인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카라-코바 문화의 무덤에서는 시신이 흩어진채 확인되었고, 유물자체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그림 6-c).

왜? 그 당시에 이미 도굴되었다고 한다. 발굴자들은 시신의 살이 붙어 있을 때 이미 도굴되었다. 어떻게 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에서 설명한 추가장의 무덤이 목관이 네모반 듯 하지 않고, 마름모꼴에 가까우며, 인골의 뼈가 흩어진 흔적들은 무덤이 얼어 붙기전에 도굴되었을 꺼라고 생각한다.

 

카라-코바의 무덤 때문인지, 카라-코바의 무덤을 도굴할 때 생긴 것인지 모르지만, 표토를 벗겨내자 무덤의 경계선(호석)안을 채운 돌이 반쯤만 남아 있던 이유( 그림 3)도 그 때문이다.

 

그 덕분에 여성샤먼, 주인공의 무덤은 전혀 도굴당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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