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스키타이 문화권으로 묶이지 않는 아나닌스카야 문화는 스텦지역의 북쪽에 위치한 타이가 지역의 초기 철기시대 문화이다. 하지만 이 문화에는 스키타이 무기인 화살과 전투용도끼, 검 뿐만 아니라 동물장식도 발견된다. 마구는 많지는 않지만 약간 있다.

 

그런데 스키타이 문화권으로 묶이는 스텦지역 가운데 현재 카자흐스탄 동쪽에도 ‘쿠르간’이라고 불리는 유적들이 있다. 카자흐스탄에 있는 스키타이 지역문화는 ‘사카문화’이다. 카자흐스탄의 고분은 알타이에 남쪽에 위치하는데, 평지에 있는 유적과 천산산맥의 자락에 있는 유적들이 있다. 앞서 화살촉이 출토된 실릭티 유적은 평지에 있는 유적이다.

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실릭티 유적도 주변이 평지이고 높이 6m의 봉분 때문에 쉽게 눈에 띄는 곳에 위치해서 도굴당한 유적이었기 때문에 유물이 제대로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이 유적에서는 황금으로 된 동물장식이 많이 출토되어 세간에 관심을 받았다. 도굴때문인지 어쩐지는 정확하지 않은데 무덤 안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무기는 화살촉 외에는 보고되지 않았다(그림 3). 알타이에서는 검집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었고, 투바의 아르잔-2호는 검과 칼이 세트로 부장되어 있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도굴꾼은 무덤의 구조를 없애지는 못했다. 무덤에서도 알타이의 미라가 나오는 파지리크 유적, 아크 알라하-3 유적 등과 차이가 있다. 물론 무덤에 나무구조물을 만들고 봉분을 만들어 덮는 아이디어는 같지만 큰 차이점이 있다.

실릭티 유적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5호무덤이다. 직경 66m, 높이 6m의 외형이다(그림 1). 봉분 안의 무덤구덩이(7.1×8.3m)의 깊이는 가장 깊은 곳이 1m정도 이고, 무덤구덩이의 바닥은 1m가 되지 않게 매우 얕게 팠다.

 

그림 1. 실릭티 유적의 무덤 평면도, 1- 무덤구덩이, 2-연도(무덤입구에서 들어가는 일종의 복도), 3-무덤 구덩이를 판 흙, 4-무덤의 경계돌(호석), 5-도굴입구, 6-발굴범위

 

 

그림 2. 실릭티 유적의 매장주체부의 나무구조물

 

그림 3. 실릭티 유적의 매장주체부 나무방 바닥 모습 1-무덤구덩이와 연도의 범위, 2-통나무, 3-사람뼈, 4-황금 장식판 출토범위, 5-황금 유물, 6-화살통

 

1960년대 발굴한 실릭티 5호분과 근접한 곳에 위치한 실릭티 3유적(82호분)은 2003년에 발굴되었는데, 무덤구조물 자체는 차이가 있지만 구덩이를 거의 파지 않고 땅위에 무덤을 만든 것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Черников С.С. 1965 : Загадка Золотого кургана. Где и когда зародилось «скифское искусство». М.: 1965. 190 с. («Из истории мировой культуры»)(체르니고프 1965, 수수께끼 황금 쿠르간, 언제 그리고 어디서 스키타이 예술은 시작되었을까

Sören Stark and Karen S. Rubinson with Zainolla S. Samashev and Jennifer Y. Chi 2012, Nomads and Networks: The Ancient Art and Culture of Kazakhstan, Princeton University Press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 산의 파지릭계곡에는 크고 작은 고분(봉분이 있는 무덤)이 40여기 정도 존재한다. 무덤의 최상부에 해당하는 봉분은 가장 위는 돌로 마무리되었는데, 그 하부에는 흙과 돌로 채워졌다. 가장 높은 부분은 발굴하면 가장 먼저 확인되는데, 단순히 돌을 쌓은 것이 아니라 무덤의 가장자리를 돌로 두른 후 그 안을 다시 돌로 채운 형태이다.

어제 살펴본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은 무덤 하부에 형성된 영구동토층이라고 부르는 렌즈모양의 얼음창고와 상부에 쌓인 돌의 범위가 거의 일치했다.

 

40여기의 무덤 가운데서 1~5호가 가장 대형으로 계곡의 입구(남쪽) 쪽에는 5호가 위치했고. 가장 북쪽에는 3호와 4호, 가장 남쪽에는 5호가 위치했다.

1호는 그랴즈노프가 1929년에 발굴을 처음 시작했고, 2호는 루덴코가 1947~1948년, 3호와 4호는 1948년, 5호는 1949년에 발굴했다. 소형고분 6~8호는 같은 해에 발굴되었다. 봉분이 있는 구조물이 모두 무덤은 아니고, 그 아래가 비어 있는 경우도 있다.

 

아드리아노프(А.В. Адрианов)는 여러해 동안 알타이에서 6~8개의 둥근돌이 돌아가고 흙을 덮은 흔적이 있는 고리모양의 구조물을 발굴했으나, 어떤 유물도 없어서 어떤 문화인지, 연대 등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파지릭 유적에서 대형고분은 봉분이 있는데, 그 단면은 가장 상부가 편평하게 된 반구형의 모습이다. 봉분의 높이와 직경의 비율은 1:10정도이다.

대형무덤의 경우 중간에 꺼짐 현상이 있는데, 이는 무덤방 속에 비어 있는 공간으로 봉분 위의 흙이 쓸려 들어갔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도굴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무덤방에는 빈공간이 있을까?

앞서서 살펴보았고, 또 앞으로도 살펴보겠지만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방은 유물로 꽉 채우지 않는다(그림1).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얼음공주 무덤과 같이 얼음으로 꽉 차지 않는 경우 빈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으로 가장 높은 곳의 흙이 쓸려 들어간 것이다.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유적이 파지릭 계곡의 무덤이다. 

 

그림 1.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단면도 가운데 무덤방 가장 중앙, 왼쪽-단면도, 오른쪽-상층의 흙이 쓸려 내려오지 않았을 경우를 복원한 모습

 

 

필자가 어제 ‘영구동토층’이라고 무덤아래에 형성된 얼음층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다(그림 2). 파지릭 유적을 발굴한 루덴코의 설명이었다. 영구동토층의 생성원인은 이해가 가는데, 무덤빈 공간으로 최상부의 흙이 바닥까지 쓸려들어가는 현상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나무방과 나무관이 썩으면서 무덤의 봉분 위의 흙이 쓸려 내려갔을 꺼라 생각했는데, 루덴코의 단행본을 읽다보니 약간 모순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영구동토층'이라면 나무방과 나무관은 썩지 않아야 한다. 만약에 오랜 시간으로 인해서 썩었다고 한다면 나무방은 전체적으로 썩어야지 어떻게 가장 중앙에만 썩을까?

 

그림 2.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단면도

 

루덴코의 설명처럼 영구동토층이 무덤의 반을 채운 돌이 열 전도율을 막아서 영구동토층이 생긴건 맞을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틀림없이 그 조건이 바뀌어서 무덤방을 둘러싼 얼음이 녹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 때 봉분의 붕괴현상이 있었을 수도 있다. 17세기 이후에는 소빙기때 이미 예전에 형성된 얼음동토층 모양대로 다시 돌아갔을 수 있다.

 

그럼 파지릭계곡의 도굴도 그때? 그런데 루덴코의 설명에는 도굴은 무덤방까지 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굴로 판 구덩이 덕분에 무덤속에 많은 물이 흘러들어가 무덤방이 다시 얼어붙었다고 루덴코는 설명한다. 결과론 적으로 도굴로 인해서 들어간 외부의 물이 다시 얼어 붙으면서 다시 무덤을 감춘 것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아주 복잡하게 설계된 무덤은 다행히도 우리가 살펴볼 부분은 많다. 필자가 자꾸 무덤의 빈 공간을 이야기 했는데, 무덤의 내부를 보면 알 수 있다(그림 1).

파지릭 유적에서 가장 먼저 살펴보고 싶은 무덤은 2호분이다. 비슷한 시기의 여성무덤, 남성무덤, 아이무덤까지 살펴보았는데, 남녀가 함께 묻힌 무덤은 아직 살펴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무덤의 남성은 문신이 있는 미라로 발견되었다.

파지릭 2호분의 남성의 미라와 우코크 고원의 얼음공주 그리고 또 다른 유적인 베르흐 칼쥔 2 유적의 남성미라에서 확인되는 문신은 같은 사람이 새겼을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이야기 한다. 세 유적은 동 시대로 생각된다. 물론 파지릭 유적이 약간 더 이르다는 의견도 있지만...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