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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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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살펴보고 있는 드네프르 강 유역의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무덤인 가이마노바 유적은 하나의 봉분 아래에 2개의 큰 무덤방(1번, 2번 무덤방)과 작은 무덤방 2개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깊은 곳에 만들어진 무덤은 2번 무덤방이다. 무덤방은 수직으로 판 입구 아래에 있지 않고 입구를 파고 연도(무덤방과 연결되는 복도시설)를 통해서 동굴처럼 생긴 무덤방으로 연결되도록 만들어졌다. 무덤방은 네모반듯한 것이 아니라 천정이 둥그스럼하게 생겼고, 무덤방의 입구도 타원형이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전통이어서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그 전통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깊은 구덩이를 파고 동굴과 같은 무덤방을 만드는 것은 쿠르간의 구조에서부터 발견된다. 쿠르간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지만, 동유럽 초원의 동석기시대부터 쿠르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드네프르강 유역과 볼가 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스레드니스톡 문화(Среднестоговская культура, Srednestogovskaya culture) 인 기원전 4000년기 전반을 쿠르간 I기라고 하며,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이행하는 동석기시대에 해당된다. 쿠르간 III기가 되면서 얌나야 문화 공동체(기원전 3000년 기 전반)가 되는데, 동유럽부터 시베리아 초원에서도 얌 문화가 발견된다. 동유럽의 동석기시대 마지막시기이다. 

[문화공동체는 문화권과 같은 개념이다. 암나야 문화 (Ямная культура, Yamnaya culture). 얌(Ям)은 구덩이라는 의미이다.]

 

쿠르간의 대표적인 연구자인 마리야 킴부타스는 ‘무덤은 자궁이다’라고 하는 이론을 유럽의 신석기(그림 1) 및 동석기시대  무덤에 대입했다.

 

그림 1. 아일랜드 신석기시대 널길무덤문화 기원전 4천년기 후반

 

무덤은 자궁이다라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구의 학자들 사이에 있었다.

 Dames(1977)는 무덤은 실제 주검을 묻는 방과 긴 회랑 같은 통로로 구성되는데 자궁과 질을 나타낸다고 했다. 무덤을 만드는 자의 목표는 가능한 어머니의 몸에 가깝게 가는 것처럼 만들었을 것이고 그 개념이 무덤의 배치에도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보았고, 마리야 킴부타스는 이를 인용했다(1989). 무덤을 자궁으로 보는 시각은 구석기시대라고 르로이 구르한(1967)이 생각했다. 구석기시대에 지형적으로 좁튼 통로나 타원형 지대 또는 절개된 틈새나 동굴속 작은 구멍들에 표시한 흔적들이 이미 무덤을 자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비슷한 생각이지만 좀 더 정확하게는 무덤은 자궁을 의미하며 만들었을 테지만, 어느 순간 부터는 그 의미가 약간 다르게 변질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무덤을 자궁이라고 생각한 시점이 구석기시대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쿠르간에서 발견되는 입구의 모양이나 통로 및 땅에 주검을 매장하는 의미가 자궁의 형상화 했다는 생각은 필자가 늘 생각해 오던 바이다.  필자가 경험한 장례식에서 가족들이 하는 모든 말과 행위는 다음에는 더 좋은 곳에 태어나라고 빌어주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히는 이런 말과 행위는 남아 있는 자들이 스스로 위안을 삼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러한 의미를 담은 무덤 구조가 스키타이 시대 들어와서 어마어마하게 커진 것은 단순히 주검매장을 위한 공간으로만 보기에는 경제적이지 못하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사상적인 의미(+알파)가 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 포스팅에서 마리야 킴부타스를 약간 비판한 적이 있는데 쿠르간에 대한 연구방향이 처음과 달라서 개념이 불분명해졌기때문이다. 소비에트 연구자 이지만 원래는 리투아니아 연구자였고 마지막에는 미국학자로 생을 마감했다. 그 전 포스팅에서 라트비아라고 했는데 그녀는 리투아니아 사람이다.

 

더보기

필자가 어렸을 때 중3쯤에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대유행했던 것이 외국사람들과 펜팔하는 것이었다. 다들 미국 혹은 영국사람들과 펜팔 신청을 했지만 나는 동유럽사람을 신청했다. 원하는 것은 러시아였지만 원하는 국가로 러시아를 신청할 수는 없었고 퉁쳐서 동유럽이라고 되어서 적었는데, 우연하게 당첨된 것이 리투아니아의 또래 여학생이었다. 거의 2년 동안 한달에 한번쯤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어느 순간에 끊기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나는 리투아니아 사람과도 인연이 있었네....ㅋ

 

참고문헌

Dames, M. 1977 The Avebury Cycle. London: Thames and Hudson

Leroi-Gourhan, A. 1967 Treasures of Prehistoric Art. New York: Harry N. Abrams.

Gimbutas Marija ,1989. The Language of the Goddess: Unearthing the Hidden Symbols of Western Civilization. San Francisco: Harper & Row.

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의 베르흐 칼쥔 II 유적 3호분의 기마전사는 20~25세의 남성으로 추정된다. 미라로 제작되었으며 오른쪽 어깨에 우제류(머리없는)와 그리핀이 함께 표현된 문신(그림 1,2)이 새겨져 있었다.

 

문신은 파지릭 2호분의 남성미라,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에서도 확인되었다. 이 남서의 문신이 가장 간단한 편이다. 러시아학계에서는 이 세 명을 문신한 타투이스트가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이테 연대측정법의 결과 이 세 유적을 매장한 시기는 거의 비슷하다. 특히 파지릭 2호분의 남성미라 오른쪽 어깨(그림 2-1)에 새겨진 문신 가운데 첫 번째 문신인 우제류(머리없는)와 그리핀이 결합된 그림은 동물의 자세와 구도가 거의 비슷하다.

 

 

얼음공주를 분석한 고병리학자들에 따르면 미라로 제작시 방부처리와 복원하는 부분은 주로 보이는 부분에 집중되었다고 한다.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젊은 전사는 배를 가른 부위를 아주 대충 말총꼬리로 마감했다(그림 3). 이 남성은 아주 큰 모피 코트를 입고 있어서 대부분이 가려져서 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성도 미라로 만들어지고 방부처리를 할 당시에 발삼처리를 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남성 전사를 보면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얼음공주를 얼마나 정성스럽게 미라로 만든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림 1. 베르흐 칼쥔 II 유적의 3호분 남성미라

 

그림 2. 베르흐 칼쥔 II 유적의 3호분 남성미라의 문신

 

 

그림 2-1. 파지릭 유적 2호분의 남성미라 오른쪽 어깨 문신

 

그림 3. 베르흐 칼쥔 II 유적의 3호분 남성미라의 복부 기운흔적

 

얼음공주는 옷 밖으로 드러난 머리, 목, 손 부위가 집중 방부처리 대상이 되었고, 가슴도 복원되었다. 반면에 가장 신경을 덜 쓴 부위가 배이다. 얼음공주는 복부를 절단하고 내장과 함께 연골 및 갈비뼈를 제거하고, 가슴과 골반에 식물섬유로 채워넣었다(이 부분은 앞선 포스팅 참고). 하지만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은 식물로 미라를 채우지 않았다.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전사는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어린아이와 유사한 유물이 많았다. 청동거울, 주머니, 칼과 투부, 화살, 목걸이, 모자 등이 그러한데, 필자가 찍은 사진도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전사의 것이지만 필자가 헤깔린 것도 있을 정도이다.

 

그림 4.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어린아이(왼쪽)와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기마전사(오른쪽). 흐릿한 기억을 되살리면 아크 아라하 1유적의 어린아이는 성인의 무기를 어린아이 사이즈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림 4에서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기마전사는 모피코트를 입은 모습이지만, 벨트는 무문양이었는데, 호랑이 문양 장식이 그려져 있다. 그림5는 모피코트를 벗고 기마 탄 모습이다.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무 덤에서 하의는 출토되었지만, 모피만 입고 있었고, 그 안에 상의는 실제로 입고 있지 않았다. 남성의 상의가 발견된 경우는 파지릭 2호분인데 이를 참고로 복원한 것이다. 이 남성의 무덤에서 발견된 남성의 타이즈 끝에 가죽으로 덧댄 것을 참고로 해서 셔츠의 어깨도 복원한 것이다.

 

그림 5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기마전사 복원도

 

참고문헌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Полосьмак Н.В., Баркова Л.Л. 2005 : Костюм и текстиль пазырыкцев Алтая (IV-III вв. до н.э.).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 2005. 23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의 2700년 전 무덤인 아르잔-2호는 직경이 80m나 되는 거대한 무덤이다. 무덤을 둘러싼 경계석 아래에서도 무덤이 발견되었다. 22호 무덤에서는 여성의 두개골에 구멍이 4개나 뚫린 채로 매장된 것이 확인되었다. 호석아래의 무덤은 24호를 포함해서 5기인데, 24호에서도 투부에 머리를 맞아서 구멍뚫린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주인공 무덤방 5호외에도 유적에는 여러 시설물이 무덤 경계석 안에 있다.

 

그림 2에서 아르잔-2호의 평면도에는 호석 담벼락을 따라서 특히 동쪽벽에 노란색 점들이 발견된다. 그 곳은 호석 사이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매납지 혹은 ‘퇴장’지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주로 마구가 출토되었다.

 

 

 

그림1. 아르잔-2호 출토 유물퇴장지1호

 

 

아르잔-2호는 매우 간단하게 구조를 설명하면 무덤구덩이를 파고 벽을 두른 후, 점토로 단을 쌓고, 가장 마지막에 돌을 쌓아서 채운 구조이다. 그림 2에서 각 지점의 벽 구조를 알 수 있다.

 

 

 

 

그림 2. 아르잔-2호, 무덤 경계석의 구조

 

5호 무덤을 중심으로 무덤의 경계에 두 줄로 높이 1m가량의 벽을 쌓았다. 그림 1-2~6에서 각 지점의 벽 단면도인데, 벽을 쌓는 방법을 알 수 있다. 그림 1-4는 그림 1-3과 같은 지점의 사진이다.

 

그림 2-6은 A-G라인을 찍은 사진인데, 납작한 판석을 빼곡히 채워서 무덤을 덮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3-2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아르잔-1호와 비교해보면, 무덤방을 지상으로 쌓은 점은 아르잔-2호와 가장 큰 차이점 이지만, 납작한 판석을 채워서 무덤상부를 덮었다는 점은 같다.

 

그런데 그림 2에서 보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 물론 필자가 아직 모든 무덤을 다 설명하지 않았다. 아직 설명하지 않은 부분은 말무덤과 무덤방 13호, 무덤방 20호 등은 좀 설명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주인공 5호 뿐만 아니라 구조상 알아야 할 부분은 다 설명을 했다.

 

왜 이렇게 빈 공간이 많을까?

 

아르잔-1호에서는 주인공 무덤방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뻗어가는 구조이기 때문에 대부분 무덤과 관련된 시설물이 있고 그 위를 판석(납작한 돌)으로 덮었다. 아르잔-2호는 무덤의 경계 안에 주인공 무덤 및 여러 무덤을 제외하고 공간이 너무 많이 남는다.

 

그림 3-1에는 필자가 붉은색 화살표와 주황색 화살표를 표시해 놓은 곳이 있다. 붉은색 화살표가 가르키는 곳은 점토가 짙은 색을 띄고, 주황색 화살표는 흙색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무덤평면도를 보면, 무덤 평면도 안에는 점선으로 된 라인이 있는데, 1번은 점토가 바닥에서 확인된 라인이다. 2번 라인은 무덤의 단면상에서 확인된 점선라인이다. 1과 2번 점토라인이 다른 이유는 무덤경계벽이 무너지면서 점토로 채운 구조물이 허물어지면서 생기게 된 차이로 볼 수 있다.

 

 

 

그림 3.아르잔-2호, 무덤의 구조

 

즉, 무덤은 단순히 무덤경계에 벽을 쌓고 납작한 돌을 채워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점토를 쌓았던 구조물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굴책임자인 추구노프가 생각하는 무덤의 완성된 모습은 그림 4의 첫 번째이다. 기억하시겠지만 무덤 경계벽 바깥에 있던 동그랗게 돌아가는 돌도 무덤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1단계에서는 북쪽 가장 안쪽에 위치한 주인공 무덤이 만들어졌다.

 

2단계에서는 만들어진 무덤방 안으로 주인공이 들어가고 이때 많은 무덤이 동시에 만들어졌다. 무덤방 9호와 무덤방 10호도 같이 만들어졌다. 무덤방 9호와 10호는 아직 설명을 하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아르잔-2호에서 도굴되었던 무덤이다. 이 곳의 위에는 사슴돌이 있었는데, 아마 도둑에게는 표지석처럼 보였을 것이다. 원래 사슴돌은 마운드의 중앙에 있었고, 무덤벽이 무너지면서 사슴돌도 이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덤방 9호에는 남서쪽에 복도처럼 터널이 있고, 무덤방 10호 부근에서 인골과 호박제 구슬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 인골은 무덤 15호의 것으로 도굴당하는 과정에서 생겼다.

 

 

 

 

 

그림 4. 아르잔-2호 의례복합체의 장례식 단계 및 복원도(추구노프)

 

 

3단계는 장례식이 끝나는 단계로 무덤의 중앙에 직경 45m로 점토구조물을 쌓아올렸다. 가장 높은 사슴돌을 중앙에 배치했고, 중앙의 제단을 둘러싸나 원주모양에도 다른 사슴돌을 세워서 표시했다. 이 단계에서 무덤방 11호의 9달 된 아이의 매장(순장)이 이루어졌다. 추구노프는 어린유아는 희생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3단계에서 여러 무덤방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네 번째 단계에는 말이 의식이 있었는데, 이 위해서 남동쪽 벽을 일부 허물어뜨리고 다시 재건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 단계에서 말을 매장을 위한 무덤방 16호를 만들었다. 내부는 나무로 된 무덤방이고 그 위를 점토와 돌로 덮었다. 말 매장을 끝낸 후에 무덤전체를 판석으로 둥글고 납작한 모양이 되도록 채웠고, 그 위를 점토로 덮고, 다시 돌로 마지막에 마무리했다(그림 5-1). 그 중앙 상부에는 사슴돌을 배치했다. 아르잔-2호는 이후의 시대에도 무덤으로 이용되었다(무덤배치도의 녹색 점은 이후의 시대 무덤이다.) 하지만 후대의 무덤이 스키타이 시대 무덤을 파손하지는 않았다.

 

 

 

그림 5. 아르잔-2호의 단면도

 

아르잔-2호는 단계별로 장례를 치뤘던 흔적이 확인되고, 단순히 무덤 뿐만 아니라 의식과 관련된 구조물(제단)이 발견되어서, 의례복합체라는 용어를 쓴다.

 

참고문헌

Чугунов, К. В. “Аржан-2: реконструкция этапов функционирования погребально поминального комплекса и некоторые вопросы его хронологии.” Российский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ежегодник . СПб: Издательство СПб ГУ, 2011, С. 262-335(추구노프 2011, 아르잔-2호: 무덤의 축조과정 복원과 절대연대에 대한 질문)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갑자기 어제 오늘 이 키워드로 많이 찾아오셔서 ....

시베리아 카테고리의 신석기시대, 순동시대, 청동기시대가 다 채워져야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이 문화에 대해서 자세하게 포스팅 할 예정인데, 머 하나씩 해 두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아시다시피 스키타이문화라고 불리는 시베리아의 철기시대문화에서는 미라가 확인된다.

필자가 대학교 입학하던 해인 1995년에 한국에 알타이 미라전을 국립중앙박물관과 부산에서도 순환전시를 한 적이 있다. 너무 전시가 어둡고 유물전시물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해 놓아서 미라의 얼굴은 생각이 안난다. 내가 그때는 러시아 유학갈꺼라고 생각도 안했다. 여담이지만.

 

먼저 알타이 미라의 복원문제를 접근 하기 위해서는 이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알타이 미라를 복원했는데, 유럽인이라더라...아니다 등....

(역사와 정치의 문제이다)

 

알타이는 산맥의 이름이다. 알타이의 굽이굽이 산맥은 사람이 안 살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이 살았던 흔적 즉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대부분 산 위가 아니라 산과 산 사이에 유적이 위치한다. 이런 지형을 러시아어로는 돌리나долина라고 하고, 우리나라 말로는 계곡이 가장 적당하다. 그런데 한국어로 계곡이라고 번역하면 그 뉘앙스가 아주 좁은 계곡에 물이 흘러내리는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 알타이의 그 산 사이의 그 분지 같은 계곡을 단순히 계곡이라고 번역하기 힘들다.(초창기에는 그렇게 번역을 많이 했다.)

 

하여간 산과 산사이의 평탄지, 낮은 곳으로 완전한 분지는 아니지만 아늑한 곳에 유적이 많다. 알타이 산맥 사이에서는 특히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이 많이 남아 있는 돌리나 곳이 ‘우코크’이다.

 

https://www.google.co.kr/maps/place/Ploskogor'ye+Ukok/@47.2032452,86.9194223,5.46z/data=!4m5!3m4!1s0x42b77554a0669b95:0x2fcb81f24cd72647!8m2!3d49.3333333!4d87.5?hl=ko

 

Google 지도

Google 지도에서 지역정보를 검색하고 지도를 살펴보거나 운전경로 정보를 검색합니다.

www.google.co.kr

이 우코크(Укок, Ukok)고원의 무덤에서는 여성미라가 출토되었다. 우코크 고원의 무덤에 관해서는 너무 많은 내용이라서 올해 차차 해 보도록 하겠다. (사실 필자는 신석기시대부터 차례대로 하고 싶은데,)

 

그런데 이 여성은 살아서도 매우 인기가 많았겠지만, 죽어서도 인기가 너무 많아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여성이 발견된 무덤이 있는 유적의 이름은 아크 알라하-3(Ак-Алаха-3,Ak-Alakh-3) 유적이다. 1993년 폴로시막(Наталья Викторовна Полосьмак)이라는 여성 고고학자가 책임을 맏아서 발굴을 하였다. 이 유적은 기원전 5~3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필자가 앞에서 포스팅한 사진은 직접 찍었는데, 그때가 2008년인가 였다. 이 미라는 그 때까지 폴로시막 박사가 연구하는 연구소의 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2012년에 알타이공화국의 고르노-알타이 시(г. Горно-Алтайск, Gorno-Altaysk)의 아노히나 박물관(музея имени Анохина, Anokhin National Museum)으로 옮겼다.

 

즉 필자가 사진을 찍은 연구소박물관은 노보시베리스크 시의 연구소 박물관에서 찍은 것이고 2012년은 알타이공화국의 박물관으로 옮겼다. 미라 입장에서는 알타이에 쭉 매장되었다가 연구소에서 발굴해서 노보시베리스크로 갔다가 다시 알타이로 돌아온 곳이다.

 

2018/05/02 - [북방항로 따라 역사기행] - 무덤과 집

 

무덤과 집

앞에서 과거의 무덤은 살아 생전의 집을 옮긴 것에 대해서 신석기시대의 사례를 예로 들고 살펴보았다. http://eastsearoad.tistory.com/122?category=714181 그런데 또 필자가 알고 있는 그런 사례를 설명하고자..

eastsearoad.tistory.com

 

알타이공화국은 중국으로 치면 소수민족자치구이다. 러시아는 소수민족을 인정해주기 때문에 각 지역에 공화국을 인정한다. 러시아연방소속이지만 자기네들의 자치법도 있도 자부심이 대단하다. 알타이 사람들 신화에는 땅 밑에 있는 공주를 건드리면 재앙이 닦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20년간 알수 없는 지진과 홍수 등이 모두 알타이 미라를 꺼내면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해서, 알타이로 다시 돌아온 공주를 땅속에 뭍기로 결정했다.

알타이의 영적 센터에서 회장은 샤먼인데, 이 분과  몇몇 사람이 알타이 법원에 박물관을 상대로 소송까지 불사 했으나 졌으나, 국제법으로 소송할 수 있다고도 한다.

 

이상한건 예전에 필자가 본 미라의 얼굴복원 모습은 유럽인도 아니고 아시아인도 아니었다.

스키타이 문화의 사람들은 인도-유럽인종이라는 생각 혹은 연구가 팽배했었다. 그런데 위의 일이 있은 이후로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모든 알타이 미라의 복원된 얼굴은 유럽인에 가까웠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의 몰로딘 박사는 우코크 고원에서 발굴된의 미라는 공주도 아니고, 중간계급정도이고 어쨌든 이제 알타이에 있다......그리고 알타이의 모든 자연재해가 이 우코크 고원에서 발굴된 미라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이전에 알타이의 다른 유적인 파지릭 무덤에서 미라가 발굴이 첫 번째이고, 그가 계급적으로도 더 높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현재는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에르미타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인터뷰가 신문에 실린적이 있다'.(«Эксперт Сибирь» №19(161)

https://web.archive.org/web/20070525114358/http://www.expert.ru/printissues/siberia/2007/19/interview_arheolog_molodin/

 

*참고로 인터뷰한 몰로딘 박사는 러시아과학아카데미의 대표적인 책임수석연구원의 자격으로 인터뷰 했지만 사실은 우코크 고원 발굴책임자인 폴로시막 박사의 남편이다^^

 

미라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계속 포스팅 해 드리겠다. 최근에 떠 돌아다니는 여성미라의 얼굴복원에 관한 내용도 정보를 좀 더 수집해서 말씀드리고자 한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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