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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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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2. 09:22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암각화 유적에서는 여러 곳의 유적에서 배 그림이 발견된다. 아무르강 하류의 사카치 알리안 유적 및 우수리강변의 칼리노프카 유적, 세레미체보 유적 등에는 배 그림이 발견되었다. 특히 칼리노프카 유적에는 마스크형 암각화와 함께 그려져서 배 그림의 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필자는 아무르강 하류에서 마스크형 암각화(그림 1)가 그려지기 시작한 시점은 대략 9000년 전으로 판단했다. 그 이유는 중국의 쌍탑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 편에 똑같은 그림(그림 3)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림 1. 사카치 알리안 암각화의 마스크

 

그림 2. 사차키 알리안 암각화

그림 3. 눈강 유역의 쌍탑 유적

 

마스크형 암각화는 동심원을 기반으로 한 그림이다. 그래서 동심원문양도 마스크형 그림과 동시기에 제작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두만강 유역에서 발견된 지초리 유적에서는 동심원문양만 잔뜩 그려져 있다.

 

그림 4. 세레미체보 유적

 

그림 5. 지초리 유적

 

우수리 강변의 세레미체보 유적에서도 마스크형 문양과 동심원문양이 함께 그려진 것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세레미체보 유적이나 두만강 유역의 지초리 유적 등에서 발견된 동심원문양은 9000년 전까지 올려 보기 힘들다. 이 때의 신석기시대 유적 자료 특히 마을 유적이 발견된 예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리노프카 유적, 세레미체보 유적이나 지초리 유적은 연해주의 뚜렷한 신석기문화인 루드나야문화의 그림일 가능성이 크다(김재윤 2019). 배 그림도 이 시기에 그려졌을 수 있다. 대략 6500~6000년 전 이다(김재윤 2021).

 

 

 

참고문헌

 

김재윤, 2019, 「선사시대 동심원문 암각화를 통해서 살펴본 환동해문화권의 범위와 교류영역 - 고아시아족과 퉁구스족문제를 겸해서」, 『한국상고사학보』,제 104호

김재윤, 2021a, 「반구대암각화와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배 문양 암각화 비교검토」, 『인문사회과학연구』,제 22권 제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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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발해~여진시대의 교통로 



시호테-알린 산맥의 영동지역 중부지방에서 청동기시대 바닷길과 발해~여진시대 바닷길이 다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첫 번째는 지형학적인 특성상 길이 달라졌을 리도 없고, 두 번째 이 바닷가에 위치하는 이유는 바로 항구 때문이다. 당연히 주민들은 이웃한 지역과 접근성이 좋은 곳을 택했을 것인데, 비단 교통로 뿐 만 아니라 상업적 교류, 외교적인 교류, 적의 침입 방지 등에서도 이러한 곳에 반드시 길이 있었을 것이다


북위시대(386~534)에 말갈인의 길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강을 이용한 수로이다. 477년에 乌鸡의 외교관은 담판을 쉽게 짓기 위해서 말 500필을 선사하였는데, 그는 먼저 길이 얼마나 복잡한가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다. ‘먼저 강의 상류를 배를 타고 건넜는데, 배안에 물이 차서, 다시 육지에 내려서, 무렌강을 건너서, 호란 까지 걸어서 왔다(보로비요프 1994)’라는 기사가 있다. 퉁구스-만주족 국가 발해는 바다의 해상활동을 아주 활발하게 하였는데, 배와 큰 합선도 있었다. 장슈안(1960)이 쓴 『Мореходство в древнем Китае(고대 중국의 해상활동)에서 발해는 무역배와 군함 등이 많았다고 기록되었다. 중국에서 발해로 가는 길은 登州 西港에서 출발해서 동북방향으로 大謝道(현재: 장산열도)龜歆島 (현재 砣磯島)를 지나서 북쪽의 烏湖海(오호해에서 북쪽으로 있는 바다)를 건너서 都里鎭(여순과 가까운 곳)馬石山(현재 老鐵山)까지 간다.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배를 타고 남쪽으로 靑泥浦 항구(현재의 대련만 부근)), 桃花浦, 杏花浦(대련만에서 동쪽으로 류리하의 하류까지로)까지 건넜다. 그리고 石人汪(현재 石城道에서 북쪽에 있는 해협)에서 藁駝灣(현대의 鹿島에서 북쪽으로 大洋河의 하류), 烏滑江(현대의 丹東부근)을 걸쳐 남쪽으로 압록강 하류까지 간다. 다음 방향은 압록강 강의 상류와 발해 王城(현대 흑룡강성의 녕안현에서 남서쪽으로 70km 떨어진 곳)에서 육로를 따라서 가는 것이 발해의 길이고, 다른 길은 신라로 가는 것이다(쟝슈안 1960). 



발해인이 바닷길을 이용한 것은 항상 평화적인 목적만이 아니었다. 732년에 발해의 무왕은 당나라의 큰 항구 등주를 공격하기를 명했고, 수군이 배를 타고 가서 그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발해의 배는 노를 저어서 가는 것인데, 이를 이용해서 정기적으로 일본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727년에 발해의 무왕은 일본에서 보낸 외교 사절단을 받아 들였고 이 관계는 920년까지 지속되었다. ‘발해는 29명의 사신을 파견하고, 일본은 6명을 파견하였다. 796년에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홋카이도에서 발해 사절단이 거의 모두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보통은 발해의 동경성에서부터 일본으로 사절단을 보냈다(보로비요프 1994). 동경성은 바다와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샤프크노프에 의하면 일본도는 러시아 연해주의 남부로 현재의 엑스페드치야 만과 가까운 크라스키노 항구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곳에는 발해의 항구이자 염주의 중심부이다. 이곳에서부터 출발해서 한반도 동해을 따라서 가다가 남동쪽으로 돌면 쓰시마 섬과 이끼 섬으로 발해의 배가 갈 수 있다(발해와 러시아 극동의 종족 1994).

연해주 중부 영동지역의 바닷가 길의 존재는 그간 지역학계에서는 외면되어 온 주제이다. 이 문제는 이 교통로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주제와 관련해서 아르세네프 연구 외에는 거의 연구되지 못하다가, 필자가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발해 및 여진시대의 성곽은 동해바다의 강의 하류 혹은 바다의 만에 위치하고 있는데 연해주 영동지역과 북쪽 타타르 해협까지 바닷가 길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제르칼나야 계곡에는 발해와 멸망 이후의 성곽(보고폴, 고르노레첸스코예-1~3) 등이 있고, 마을 유적(시네고르예-1,2, 우스티노프스키예 폴예 등)도 있지만 강 하류에는 방어하는 성곽은 없다. 활발한 해상 활동은 루드나야 만의 북쪽에서도 확인되는데, 이 만을 지키는 바시코프스코예 성곽으로 알 수 있다. 평지성인 프리스탄스코예 성곽은 바다와 가까운 강의 하류에 위치하면서 항구의 역할을 했다. 그 보다 북쪽의 드지기토프카 강의 하류에 위치한 클류치 성곽은 교통로를 통제하는 역할을 하며, 남쪽과 연장되는 바닷길을 연장하는 역할이다. 바다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 발해 시기의 크라스코예 오제로 성곽이 위치한다. 시호테알렌 산맥의 포드네베스노이 고개를 넘어서 그 곳을 지나서 드지기트토프카 만 까지 오는 육로가 있다. 이 크라스노예 오제로 성곽은 항구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주변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뻘인데 발해시기에는 해수면이 이곳까지 상승해서 바다가 성 가까이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보다 북쪽 발해의 바닷길은 말라야 케마, 켐스코예-모르스코예, 켐스코예-돌리노예로 이어진다. 이 성들은 말라야 케마 강과 케마 강 하류에 축조된 것이다. 방어용 보다는 부두와 같은 역할이었다. 탈니코바야 강의 하류에 위치한 우스티 일모 성지에서부터 출발해서 말라야 케마 성곽으로 향하는 해안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바닷가 길을 지켰을 것이다


이곳 보다 더 북쪽의 켐스코예-모르스코예와 켐스코예-돌리노예 성곽이 있는데, 스토르모바야 만과 케마 강 하류의 입구를 지키고 있으며 또한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경사면에서부터 내려오는 육로를 지키고 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바닷가 길은 북쪽의 야수 성지를 지나서 암구 강의 하류에서 방어적 기능을 한다. 암구 만에는 중세시대 성지가 없는데, 가장 이른 시기의 중세시대 성지는 미스 테플르이로 이는 말갈문화의 것이다. 이 성지는 바다의 곶 위에 위치하는데, 이는 해상로를 통제하고 있고 직접적으로는 바닷가 길을 살피는 것이 확실하다. 암구 강에서 발해시대 성곽으로 알려진 것은 없다. 대신 동하국시기의 것이 있는데, 여진족은 주변 전체지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소프카 류브비 성곽이다. 해안로와 바닷가 길을 지키는 역할이며 국경을 지키는 곳이다. 이곳에는 시호테 알린 산맥으로부터 넘어 오는 육로가 없지만 여진족들은 이 지역을 연해주 남쪽에서부터 올라와서 바닷가 길을 이용했거나 혹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에서부터 포드네세브느이 고개와 드지기토프까 유역까지 넘어 갔을 가능성도 있다. 북쪽 해안로로도 이어진다. 이동을 위해서는 말이 필요했는데, 그들은 우수리스크 주에서 풀을 베어가면서 길을 만들었다. 세레브랸카 강 유역, 말라야 케마와 케마 강 유역에는 여진의 유적이 없고 암구 강 하류에서 보인다. 이곳에 위치한 말라야 카르마 성곽과 카르민스크 흐베르트 성곽도 동하국의 북쪽 경계에 있는 성곽으로 해안로와 바닷길을 방어한다. 아마도 암구 강 북쪽의 여진 유적이 앞으로 확인될 가능성은 있지만, 지보피스나야 강 유역, 쿠즈네쵸바 강 유역, 에딘카 강 유역, 사마르가 강 유역 등에서 현재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암구강 이후에는 지보피스나야 강 하류까지는 바닷길이 있고, 소욘스코예 성곽이 이를 증명한다. 이것과 연결되는 중세시대 바닷길의 지점은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성곽으로 말갈의 것이다


발해이후의 바닷길은 연해주 동북지역에서부터 타타르 해안가까지 아주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강 하류에는 배가 닿는 항구로 추정되는 말갈의 성곽(미스 테플르이, 우스티-소볼레프카)도 축조되었다. 해안가를 스스로 통제하고 누군가 이 곳으로 들어오려고 해서 이를 방어하기 위한 기능도 있다. 아마도 일 천 년 기 즈음에는 고구려인, 일본인 그 다음은 발해인이었을 것이다. 이곳 말갈영토에는 상업적 목적 뿐 만 아니라 영토 확장을 위해서 발해인이 들어왔을 것이고, 해상활동에 아주 활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호테 알린 산맥의 중부 영동지역에 입지한 청동기시대부터 발해, 말갈, 여진시대의 고고유적들로 보아서 교통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거리 재는 방법은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낮 기간 동안의 갈 수 있는 거리를 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요양에서 말갈의 땅까지 기록에 의하면 대략 2700km이다. 요녕 천산산맥을 따라서 이 길의 거리는 53일 정도 걸린다. 이 거리는 대략 4단계 정도로 나누어서 계산 된 것인데 13+7+15+18일을 합한 것이다(보로비요프 1994)

연해주 영동지역 동해부터 타타르 해협까지 영동과 영서를 넘는 육로가 강을 따라서 형성되어 있다. 제르칼나야 계곡, 드지기토프카, 세레브랸카, 타요즈나야, 케마, 에단카, 사무르가강 계곡 등을 통해서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길이 나 있다. 청동기시대부터 발해를 걸쳐 여진시기까지 바닷길은 동해 중부지역부터 타타르해협까지 있는 길로, 제르칼나야 만에서 사마르가 강 하구까지이다. 이 구간에서 배를 데기 쉬운 곳으로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는 항구시설이 있었다. 강의 하류에는 해안과 주변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한 방어와 감찰 시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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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닷길



필자는 고대의 바닷길은 바다와 만나는 강 하류에 항구로 사용하기 좋은 곳에 축조된 성곽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판단한다. 시호테 알린 산맥의 중부지역에서 확인된 고대 성곽을 지도에 표시하면 제르칼나야 강에서부터 사마르강 강의 하류까지 600~650km에 가까운 바닷가 길을 복원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바닷길은 바다에서 해안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을 이야기 한다. 극동의 동해 바다를 따라서 교통로를 복원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지만 앞으로도 해결할 것이 매우 많다(그림 135).

  

그림 135. 연해주 청동기시대 해안로와 

 

 

1). 청동기시대의 교통로


 동해의 제르칼나야 강에서 타타르 해협의 사마르가 강까지 모두 15기의 토성 및 석성(우스티-제르칼노예, 두브로빈스코예, 클류치, 미스 스타라시느이, 우스티-벨렘베, 켐스코예-스칼리스토예, 우툐스노예, 미스 알렉산드라, 소프카 류브비이, 쿠댜, 데두시킨 클루치, 미스 테플리이(중간층), 소욘스코예(아래층), 지보피스노예, 사마르가-6(댜코바 2005) 유적이 확인된다


 모두 강의 하류에 축조되는데, 이는 리도프카 문화 가운데서 쿠날레이스코예 그룹으로 드물게 확인되는 것이다. 가장 남쪽은 제르칼나야 강 하류의 우스티-제르칼노예 성곽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80~90km 떨어진 곳에 두브로빈스코예 성곽이 위치한다. 여기서 다시 북쪽으로 80~90km 떨어진 곳에 디지기토프강 하류에 클류치 성곽이 축조되어 있는데, 상층은 발해시기, 아래층은 청동기시대이다. 클류치 성에서 북쪽으로 55~60km 떨어진 곳에 세레브랸카 강의 하류에 미스 스타라시니이 토성이 있는데, 항구 역할을 했던 곳이다. 여기서 북쪽으로 30~40km 더 가면 타요시나야 강의 하류의 우스티-벨렘베 성곽이 있다. 20~30km 떨어진 곳에 켐스코예-스탈리스토예 석성, 20~25km 떨어진 곳에 페르바야 우툐스나야 강과 페세라 강의 하류에 우툐스코예 토성과 미스 알렉산드라 2중벽이 있다. 북쪽으로 70~80km떨어진 암구강 하류의 소프카 류브비(아래층), 쿠댜 토성, 데두시킨 클류치 성벽이 축조되었다. 미스 테플리이 토성은 암구 강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 아주 작은 만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 10~15km 떨어진 곳에 소욘스코예 토성(아래층)이 있다. 해안으로부터 얼마간 떨어져 있지만, 육로로부터 강의 하류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북쪽으로 6~7km 떨어진 곳 타타르 해협 방향으로 사마르가-6 토성이 위치한다. 바다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만 성곽에서는 사마르가 강의 하구와 해안교통로를 잘 지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보피스나야 강과 사마르가 강 사이에는 새로운 성곽이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현재까지 조사된 바는 없다.


 위의 성곽유적은 곶 위에 위치하면서 해안로와 강의 하류를 모두 통제하는 기능을 한다. 대체적으로 단일 문화층이다. 우스티-제르칼노예 성곽과 가까운 곳에 제르칼노예-4 유적이 있는데, 두브로빈스코예 성곽으로 리도프카-1 유적을 방어한다. 미스 스트라시느이 토성 뒤에는 세레브랸카 평지성이 있고, 암구 강 유역에는 리도프카 문화 유적이 있으며, 사마르가-6 토성은 사마르가-5 마을 유적을 조망하기 위에 높은 곳에 축조되었다(그림 135).

 가장 중요한 것은 방어와 감시 기능으로 해안로와 항구를 감시하는 것이다. 대치상황은 적 뿐 만 아니라 해적의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해적 활동을 한 종족에 관해서 역사 기록이 남아 있다. 그들은 바다에서만 활동하지 않고 육지에서도 해적질을 하였다. 우스티-제르칼노예, 클류치, 미스 스트라시느이, 켐스코예-스칼리스토예, 소프카 류브비, 미스 테플리이, 지보피스노예, 사마르가-6 유적은 해안로와 해로 모두를 감시한다. 당연히 상업적 항구에는 지역생산물과 지역 주민들이 이용하는 수입물품 등이 있었을 것이고, 이는 고고학적 유물로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이 지역에서 유명한 녹색 마노의 석재를 사고 팔았을 것이다. 항구 역할을 하는 성은 앞서 방어역할을 하는 성곽 중 클류치 토성을 제외하고 모두 해당된다.

 특히 연해주의 남부 바다가를 얀콥스키 문화인등이 장악했을 것인데, 내륙에 리도프카 문화인들과는 차이가 있는데, 고고학 유적에서 이러한 정황이 발견된다. 얀콥스키인은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데 아주 능하였다. 시호테 알린 중부의 영동지역 해안가에는 리도프카 문화인들이 거주하고, 얀콥스키 문화인들은 살지 않았다.

하지만 쿠날레이코예 그룹의 유적들은 기원전 10세기 가량에 양 문화의 접촉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발굴된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에 얀콥스키 문화 중기와 리도프카 문화 특징이 함께 발현되기 때문이다.

 리도프카 문화인들이 해안로를 자신의 교통로로 이용했다는 것은 이 시기의 토성이나 석성으로 입증되지만, 직접 건조한 배는 확인된 바 없다. 하지만 아마도 얀콥스키 인들의 배를 이용했으며, 혹은 다른 문화도 배를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리도프카 문화 중에는 일본 구주 지방에 리도프카 문화 토기 특징이 나타나는데, 그들이 건너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거주한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기원전 10세기 가량 연해주의 동해와 타타르 해협에서는 정확하게는 제르칼나야 강의 하류에서 사마르 강 하류까지 교통로 역할을 하는 해안로가 있었다. 강으로부터 들어가고 나가기 쉬운 항구시설이 있어서 편지한 장소에 위치한 토성과 석성이 이를 입증하며 그 곳과 주변 지역을 모두 통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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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드지기토프카 강 유역.


드지기토프카 강 유역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과 서를 연결하는 해서 동해로 들어가는 길목이 있는 중요한 집수구역이다. 이곳에는 2개의 길이 있고, 체레무호바야 집수지에서 하나로 연결된다. 첫 번째 길은 루드나야 강 유역에서부터 고루부샤 고개를 넘어서 체레무호바야 집수지로 들어오는 길이다. 이 강의 중류역에는 체렘샤니 발해 성곽이 위치하고 있다. 또 다른 길은 아무르 강 유역과 관련되었는데,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과 연결되고, 연해주의 대륙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산의 문지 역할을 하는 곳은 포드네베스느이 성곽이다. 이 길은 볼쇼야 우수르카 강과 이르티스 강과도 관련되어 있으며, 거의 드지기토프카 강의 상류와도 연결된다. 체레무호바야 강 하류는 루드나야 강의 지류와 합쳐져서 드지기트 만의 바다로 들어간다. 이 강 유역의 전체 길이는 70km 정도이다. 이 강의 길에는 발해 성곽과 동하국 성곽이 (포드네베스나야, 드지기토프스코예, 쿠날레이스코예, 크라스노예 오제로, 클류치 성곽) 지키고 있다


왜 드지기토프카 강의 좌안으로 길이 지나갔을까? 고개성 산지성인 포드네베스느이 성곽에서 출발한 도로는 지금도 이 강의 좌안을 따라 나있기 때문이다. 이 곳에는 드지기토프스코예 성곽과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이 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에서 출발한 길은 드지기토프카 강 하류에 위치한 크라스노예 오제로와 일종의 등대 역할을 한 클류치 성곽까지 강을 따라서 갈 수 있었는데, 가장 짧은 길이다. 그 길이가 8km를 넘지 않는다. 그 길은 지금도 일부구간이 남아 있다. 클류치 성곽은 드지기토프카 강의 좌안에 위치하는데, 드지기트 항구를 지키는 역할을 하며, 강의 하류를 통제하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발해시기 까지 바다와 가까운 언덕의 아래쪽에 성지를 축조하기도 했는데, 현재는 석호가 확인되는 곳이다.

따라서, 드지기토프카 강 유역의 교통로는 선사시대 부터 확인된다. 남쪽의 루드나야 강은 체레무호바야 고개를 통해서 연결되었고, 서쪽은 포드네베스카야 고개를 넘어서 아무르 강 쪽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림. 드지기토프카강과 세레브랸카강 유역의 위치



 http://세레브랸카 강 유역의 석성 1.

위를 참고하면 세레브랸카 강 유역의 성곽 위치를 좀 더 자세히 알수 있다.


4)세레브랸카 강 유역


아르세네프는 하룻밤에 테르네이 항구에서 시호테 알린 산맥을 넘어 아무르강 유역의 이만 강 까지 갈 수는 있지만 매우 힘들었다고 기록했다. 세레브랸카 강은 세 곳의 고개에서부터 출발한 강이 하나로 합쳐진다. 시호테 알린 산맥의 콜룸베 수원지는 볼샤야 우수르카 강의 우안 지류로서, 이곳도 교통로라고 하는데,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첫째로 고개에는 성곽이 없고, 두 번째 주변의 대부분 고고학 유적과 성곽은 세레브랸카 강 유역의 중류와 하류역이나 좌안 지류인 자볼로첸나야 강 유역에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2개의 석성 유적(자볼레첸나야 성곽과 스미리코프 클류치 성곽), 세레브랸카 강 하류에는 청동기시대의 취락마을 유적인 미스-스트라시느이 유적이 있다. 고고학 유적을 바탕으로 교통로를 복원해 본다면 세레브란캬 강의 하류에서 출발해서 자볼레체나야 강 하류쪽을 돌아서 북쪽으로 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사할린 고개를 넘으면 콜룸베 강에 다다르고, 그 다음 볼쇼야 우수르카 강과 아무르강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르세네프는 세레브란캬 강의 하류에서 타요시나야 강의 하류까지 가는 길이 있다고 했다. 이 길은 산을 넘어가는 것으로 현재에도 바다로 통하는 길이 있다. 이 길의 흔적은 아마도 터널, 보초시설, 표식 등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세레브랸카 강 유역에는 2개의 육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하나는 세레브랸카 강의 하류에서 자볼레첸나야 강을 지나 사할린 고개를 통해 아무르 강까지 연결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세레브란캬 강 하류에서 타요시나야 강까지 연결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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