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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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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서는 한 가족 혹은 친족의 무덤이 함께 만들어진 것이 확인된다.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과 그 안에는 관을 두고, 무덤방 밖에는 말을 여러 마리 묻었다. 계곡의 모든 무덤이 같은 크기는 아닌데, 파지릭 유적에서는 대형 고분은 5기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1호는 가장 먼저 발굴된 것이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무덤 구덩이에서도 유물이 발견된다. 1호에서는 나무 삽 조각, 이미 깨진 말뚝 4점, 말뚝을 박는데 사용된 일종의 나무 망치와 마차의 부속품이 확인되었다. 이음쇠 2개, 쐐기, 끝이 뾰족한 막대기 2개 등이다.

 

무덤방 안에서는 통나무관과 통나무관을 장식한 수탉 아플리케 장식(가죽)(어제 포스팅 참고), 산양머리조각(가죽)(그림1-6,7), 무덤방 벽에 붙었던 사자머리 아플리케(그림2)이 있다.

뿐만 아니라 양모로 제작된 그릇 받침대로 둥근 고리모양이다. 숫양의 꼬리뼈도 출토되었는데, 고깃덩어리를 부장했을 것이다. 목제 상의 다리(그림3-1), 목침(그림4-a), 목제 손잡이 달린 망치(그림 5-1,2), 토기 파편, 나무와 금제 잎으로 장식된 가죽 끈 등이 출토되었다.

 

그림 1.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산양머리조각(6,7)

 

그림 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사자머리아플리케

 

그림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목제 상다리(1)

 

그림 4.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목침(1). 루덴코는 이를 나무의자로 보았으나 목침이다. 이것은 서양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그림 5.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목제망치(1,2)

 

무덤방의 바깥에는 말이 매장되었다. 모두 10마리이다. 말은 좁은 공간에 10마리가 부장되기 때문에 잘 정리되어 들어갔는데, 앞선 포스팅에서 말의 매장순서를 간략하게 모식화 한 것을 이미 공개했다.

말은 10마리 모두 재갈 뿐만 아니라 고삐를 연결하고 말 얼굴을 둘러싼 굴레와 안장이 모두 착장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면장식을 쓴 말은 2개 확인되었다. 같은 유적이라도 파지릭 2호와 5호에서 출토된 말은 모든 말에 장식이 착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랴즈노프는 10마리를 모두 복원해 놓았다(그림 6~23).

 

그림 6.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번 말

 

그림 7.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번 말의 굴레장식, 그림 6과 동일

 

 

그림 8.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2번 말

 

그림 8.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3번 말

 

그림 9.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3번 말의 굴레장식, 그림 8과 동일

 

그림 10.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4번 말

 

그림 11.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4번 말의 굴레장식, 그림 10과 동일

 

그림 1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5번 말

 

그림 1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5번 말의 굴레

 

그림 14.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5번 말의 굴레의 굴레장식, 그림 13과 동일

 

그림 15.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6번 말의 굴레

 

그림 16.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7번 말

 

그림 17.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7번 말의 굴레와 안장, 그림 16과 동일

 

그림 18.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말의 굴레, 그림 16과동일

 

 

그림 19.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8번 말, 이 말의 굴레장식은 이미 공개되었음

 

그림 20.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9번 말

 

그림 21.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9번 말의 굴레, 그림 20와 동일

 

그림 2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9번 말의 굴레, 그림 20와 동일

 

그림 2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0번 말

 

그림 2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0번 말의 굴레

 

그림 24.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0번 말의 굴레, 그림 23와 동일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50,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파지릭 계곡에는 2500년 전 무덤이 발견되었다. 한 계곡에는 여러 기의 무덤이 확인되는데, 주로 가족 혹은 친족들이 같은 공간을 차지했다. 이 시절 이 곳에는 매우 큰 무덤구덩이를 파고 구덩이 안에는 무덤방과 통나무관을 안치했다. 하지만 그렇게 큰 무덤은 아니고 소형무덤도 있다. 파지릭계곡에서 큰 무덤은 모두 5기이다. 어제 소개한 1호 무덤은 상부에 드러난 돌의 범위가 직경이 47m,높이는 2.2m정도이다. 그 안에 무덤 구덩이 크기는 7.2×7.2m가량이다.

 

무덤 구덩이 안에 무덤방 안은 관을 넣어두는 공간을 빼고는 빈 공간이 대부분이고, 무덤구덩이를 통나무 300개와 흙, 돌을 차례대로 채워 넣었기 때문에 대단히 계획적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무덤방안에서 관은 한쪽 벽에 치우치게 배치되어 정중앙은 비어 있는 상태가 된다. 아마도 파지릭 인들은 무덤 구덩이가 내려앉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미 만들어진 그들 조상의 무덤을 보아서도 관은 한쪽 벽으로 부쳐두었을 것이다. 이 유적은 2500년 전으로 멀지 않은 곳에 바샤다르 유적이 있는데, 파지릭 유적보다 약 100여년 빠르다. 파지릭 유적에 매장된 혹은 무덤을 만든 사람들은 바샤다르 유적을 알았을 것이다.

 

 

그림 1. 파지릭 유적 1호 통나무 관

 

 

그림 2. 파지릭 유적 1호 통나무 관 복원

 

1호 통나무관은 관은 길이가 371cm, 너비 65-78cm, 높이가 58-60cm가량이다.(어제 포스팅에 잘못된 수치를 넣었다.) 뚜껑은 길이 371cm, 너비 54-61cm, 높이가 25-27cm이다.

이 관은 낙엽송의 하부를 이용한 것이다. 관의 구멍은 무덤으로 내려간 밧줄을 지탱하기 위한 구멍이다. 관의 바닥 두께는 9~11cm, 측벽 두께는 1.5~3cm, 상단 끝의 두께는 최대 25cm이다. 뚜껑은 큰 청동못으로 관에 고정되었지만, 이미 제거된 상태이다. 주로 나무못을 많이 사용하는데, 베렐 유적, 아크 알라하 3 유적에서는 청동못을 사용했다.

 

통나무관의 길이는 주인공의 계급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족장은 3.25m에서 긴 것은 5m까지, 귀족은 2.5~3m이고, 일반인은 관 대신에 나무판 위에 올려놓은 경우도 많다. 아이의 무덤은 무덤방을 따로 만들지 않고 1~1.3m의 나무판을 이용해서 간단하게 만든다.

 

파지릭 1호 통나무관의 측벽에는 나무 마개가 삽입되었는데, 비슷한 마개가 다른 관에서도 관찰된다. 통나무관의 뚜껑에는 금이 가 있는데, 이는 관을 만드는 동안에 생겨서 가죽끈으로 이를 보수한 흔적이 있다.

 

관은 가죽이나 자작나무껍질로 장식된다. 파지릭 무덤의 1호 관에는 통나무관의 양 측벽에 14개의 가죽아플리케가 조각되어 있다. 가장 중앙(그림 3-1)에는 수탉 머리와 날개가 표현된 가죽장식이 부착되었고(그림 2), 양 쪽에는 수탉의 전신(그림 3-2, 그림 2)이 가죽을 잘라서 만들어서 붙였다. 두 가죽 장식 모두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자른 것이다.

 

수탉은 동물문양장식 가운데, 독수리 보다 늦게 등장하는데, 큰 동물의 뿔과 갈기에 표현되기 시작하면서 등장한다. 닭이 이 지역에서 길렀다는 증거는 아직 없지만, 중국북부(만주)에는 암탉이 존재했다. 수탉은 의복, 토기, 못의 대가리, 문신 등에서 머리 혹은 머리의 벼슬만이 주로 확인된다. 러시아 학자들은 수탉이 독수리를 대체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예를 보이는 것이 베렐 유적에서는 거울 손잡이에 독수리와 수탉이 함께 장식된 유물이다.

 

 

그림 3. 파지릭 유적 1호 관의 가죽 아플리케 장식, 1-길이 18.5cm, 너비: 12cm, 2-길이: 18.5cm, 15.5cm.

 

그런데 정말로 수탉이 독수리를 대체했을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남부 알타이 파지릭 계곡에는 2500년 전 무덤이 남아 있다. 이 계곡의 무덤은 여러 기가 있는데, 그 가운데 미라의 존재로 가장 잘 알려진 2호와 5호 무덤은 이미 포스팅했다. 이 무덤은 루덴코라는 러시아 학자가 1947~1948년에 걸쳐서 발굴한 것이다.

 

그런데 2호 바로 옆에 있는 1호는 18년 정도 먼저 발굴되었고, 그랴즈노프라는 사람이 발굴했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최초로 발굴된 무덤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까지 ‘스키타이 문화’의 중심축이 흑해북안에 치우쳐 있었으나, 이를 시베리아로 관심을 갖게 하게 한 발굴이었다. 매우 중요한 발굴이었다고 생각된다.

 

 

2500년 전 시베리아 남부 알타이의 무덤은 소형도 있지만 대형 고분은 무덤구덩이를 크게 파고 통나무로 된 무덤방을 만들고 밖에는 말을 여러 마리 묻고, 통나무로 무덤구덩이를 덮고 흙과 돌로 무덤구덩이를 채우고 가장 위에는 돌로 마무리 하는 구조이다.

 

1호무덤도 마찬가지인데, 외관에서 드러난 무덤의 직경은 47m이고 높이는 2.2 m이다(그림 1). 무덤구덩이의 크기는 7.2×7.2m, 깊이는 4m가량이다. 가장 상부에 돌을 드러내고 그 아래에는 무덤구덩이를 파낸 흙을 다시 채운 흙이 상부의 돌 아래부터 무덤구덩이 까지 채워졌다(그림 2). 그 아래에는 낙엽송 300개를 채워서 무덤을 덮고 있었다(그림 3).

 

그림 1. 파지릭 1호분의 평면도

 

그림 2. 파지릭 1호분의 단면도 (남북방향)

 

그림 3. 파지릭 1호분의 경관(1), 파지릭 1호분의 무덤 내부(2) 중 무덤을 덮고 있는 낙엽송의 존재

 

 

무덤구덩이는 정확하게 네모꼴이지만 가장 바닥에 설치된 무덤방은 사다리꼴에 가까운데, 무덤방 덮개를 기준으로 긴 변의 길이는 4.87m, 짧은 변의 길이는 3.35m이고, 깊이는 1.4m가량이다(그림 4). 무덤방 덮개의 가장 상부는 매우 두터운 3개의 통나무가 덮개와는 반대방향으로 놓인 것이 확인되었다. 무덤방은 무덤구덩이의 남쪽벽에 붙여서 설치되었다. 2중으로 바닥에서는 통나무로 된 관(2.6×1.2m)이 확인되었다(그림 5). 무덤방 사이에는 돌로 채워졌다(그림 3, 그림6) 북쪽에는 말이 10마리 부장되었다. 말을 부장한 곳에도 통나무로 덮은 채 였다.

 

 

그림 4. 파지릭 1호분의 무덤방 천장

 

그림 5. 파지릭 1호분의 무덤방 내부

 

 

그림 6. 파지릭 1호분의 무덤 단면도(동서방향)

 

 

그림 4에는 도굴구덩이가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림 6과 7에는 천장에 도굴로 무덤천장을 절단한 흔적이 선명하다. 도굴구덩이로 인해서 무덤내부에는 원뿔모양으로 얼음이 차 있었다(그림 6, 그림 8-2).

 

그림 7. 파지릭 1호분의 무덤구덩이 내부 천장

 

 

 

그림 8. 파지릭 1호분의 무덤방 내부 상태, 1-관이 놓인 남쪽벽, 2- 그 반대편, 무덤방은 1차와 2차무덤방이 있었다. 도굴로 인해서 북쪽 내벽은 크게 구멍이 나 있었고, 외벽은 하나의 통나무만 잘려 진 상태였다.

 

 

상부에 통나무 300개를 지지하기 위해서 무덤방 바깥에 북쪽과 남쪽에 이를 지지하기 위해서 수직으로 각각 3개씩 나무를 세워놓았다(그림4, 그림 5). 무덤의 단면에서도 확인된다(그림 3. 그림 6)

 

흥미로운 점은 무덤방의 평면형태이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 파지릭 2호분도 모를 줄여서 정확하게 네모꼴이 아니었다. 평면형태가 직각사다리꼴에 가까웠다. 왜 그랬을까?

 

 

 

참고문헌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 남부의 파지릭 5호분에서는 펠트로 제작된 대형 캐노피가 확인되었다. 그 외에도 양모를 짠 카펫도 출토되었다. 200×185cm 이다(그림 1).

 

 가장 내부에는 긴네모꼴 안에 십자형 도형 24개(가로 4, 세로 6개)가 표현되었다(그림 2). 십자형 도형으로 보이지만, 연꽃봉우리가 4잎으로 도식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 연꽃 봉우리 모양은 동물문양장식을 표현한 뒤에 다시 보인다.

 이 연꽃봉우리 밖에는 그리핀이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는 뒤로 젖히고, 날개 및 꼬리가 위로 올라가게 한 것이다. 그리핀 다음에는 큰 뿔이 달린 사슴(혹은 순록) 이 표현되었다. 그 다음에는 말탄 전사가 표현되었는데, 각 면에 7개씩 49개가 표현되었다. 말은 목을 구부리게 표현되었고, 머리에는 깃털을 장식하고, 코리는 활로 묶여 있다. 무늬가 있는 안장 덮개가 표현되었다. 가장 마지막에는 다시 그리핀 모양을 반복해서 그리고 있다. 이 카펫에는 3종류의 동물이 등장한다.

 

그림 1. 파지릭 5호 출토, 카펫

 

그림 2. 파지릭 5호 출토 카펫의 세부(그림 1과 동일)

 

고대 이란의 표현된다고 한다. 알타이에서 확인되는 그리핀은 독수리의 머리와 목에 갈기를 표현하는 것이 인기가 있었는데, 그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 카펫에 표현된 그리핀은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제이말, 1979).

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이란에서는 안장이 없어서 유라시아 유목민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말 장식, 전사의 모습과 의복, 목을 구부린 말의 표현등은 아무다리야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 봉헌 판에 있는 유목민의 인물 이미지와 유사하다(제이말 1979).

 

이 유물은 양모의 털로 씨실과 날씰을 교차해서 짠 것이다. 그런데 실을 만드는 털 가운데는 아주 소량으로 죽은 양의 털을 이용한 흔적을 코노노프(루덴코 1968)가 확인했고 후에 미콜라이축(1999)도 다시 확인했다.

 

이 유물에 대해서 그랴즈노프와 루덴코는 알타이에서 제작되었다고 생각했다(루덴코 1961). 온갖 종류를 다 응용하는 고대 이 지역의 전통은 유목민에게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알타이 유목민의 기술로 제작될 수 없었고, 이란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아르타모프(1973)도 있었다.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는 아마도 그 당시 세상 문화의 중심이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참고문헌

아르타모프 1973Артамонов М.И. Сокровища саков. М.: Искусство, 1973. 279 с.(아르타모프 1973, 사카족의 부(富)

제이말 1979 Зеймаль Е.В.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Л.: Искусство, 1979. С. 39, 44, 51-52, 64.(제이말 1973, 아무다르 유적: 전시회도록)

미콜라이축 1999 Миколайчук Е.А. Исследование физико-химического состояния ворсового шерстяного ковра из пятого Пазырыкского кургана // Реставрационный сб. СПб.: АО «Славия», 1999. Вып. 2. С. 13-17. (미콜라이축 1999, 파지릭 유적의 5호에서 출토된 카펫의 화학적 분석

루덴코 1961, Руденко С.И. Искусство Алтая и Передней Азии (середина I тыс. до н.э.). М.: Издат. фирма РАН «Восточная литература», 1961. 66 с.(루덴코 1961, 알타이와 근동의 예술)

루덴코 1968 Руденко С.И. Древнейшие в мире художественные ковры и ткани. М.: Искусство, 1968. 121 с.(루덴코 1968, 고대 예술적인 양탄자와 직조물)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남부의 알타이 산맥 중에서 해발 1500m가량 되는 파지릭계곡에는 2500년 전 에 만들어진 공동묘지가 있다. 크고 작은 무덤이 있는데, 지상에 무덤을 덮은 돌이 남겨져서 쉽게 눈에 띈다. 지상으로 올라온 부분을 봉분이라고 하는데, 봉분이 있는 무덤을 러시아에서는 ‘쿠르간()이라고 부른다. 파지릭계곡에는 5개의 대형 쿠르간이 있고, 소형 쿠르간도 존재한다. 1호 무덤은 1929년에 그랴즈노프가 발굴했고, 2~5호는 루덴코가 1947~1949년까지 발굴했다.

 

특히 파지릭 5호분은 남녀미라와 함께 4륜의 바퀴가 있는 마차가 확인되어서 특히 주목을 받았다. 무덤구덩이에는 통나무로 만들어진 무덤방이 2중으로 설치되었고 통나무관이 1개 존재했다. 남성과 여성을 함께 묻었다. 파지릭 2호는 도굴이 심해서 남녀 미라가 관 밖에서 확인되었지만, 관은 1개만 확인되어서 같은 방법으로 매장되었을 것이다.

 

파지릭 5호분에 묻힌 남녀는 55~60세 가량의 남성과 40대의 여성으로 몽골로이드이다. 남녀모두 미라처리된 것이다. 미라 처리는 뼈와 피부만 남기고 인간을 인간형상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복잡한 처리과정을 거치고 피부에 일종의 송진과 기름을 발라서 보존처리했다. 5호의 미라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지 않다. 2호에서는 남성에게 문신이 새겨져 있다. 남성은 키가 175~176cm가량이었다.

파지릭 5호분의 미라처리에 사용된 송진은 열대지역에서 자라는 식물에서 채취된 것이었다. 미라는 온몸에 절개면이 아주 많았는데, 지방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미라처리에서 가장 관건은 근육과 지방은 제거하면서 관절은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절이 유지되어야 골격이 흐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파지릭 5호분에서는 말도 9마리나 확인된다. 무덤방의 바깥공간에 차례대로 부장되었다. 가장 나중에 들어간 말을 제외하고는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 외에도 굴레, 안장 등으로 장식되었다. 특히 가장 나중에 들어간 말은 가장 옵션이 좋은 말이었는데, 머리장식까지 있었다. 마차의 선두를 이끌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장 나중에 들어간 말은 아무것도 착장되지 않았다.

 

말의 머리장식은 같은 시점에 만들어진 알타이에서도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3 유적,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말의 옵션이다.

 

말을 부리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인 재갈과 재갈멈치는 고삐로 연결된다. 그러나 기능적인 것과는 약간은 거리가 있지만 말의 얼굴에는 굴레가 씌워지는데, 대부분 동물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말의 이마와 콧잔등 뿐만 아니라 귀 아래와 귀에서 입으로 연결되는 부위에는 사슴, 맹수 등이 전신, 두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맹수는 독수리와 합체 되어서 이 세상에는 없는 동물이다. 그리핀이라고 부른다.

파지릭 5호분에는 굴레장식 뿐만 아니라 안장 및 안장덮개가 출토된다. 특히 가장 나중에 들어간 머리장식이 있던 1호 말은 안장덮개로 중국산 실크가 출토되었다.

 

뿐만 아니라 펠트로 제작된 대형 벽걸이 캐노피가 확인되는데, 남녀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남녀의 얼굴형태가 다르고, 남성은 알타이에서 확인되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지만, 말과 관련된 도구와 고리트(활과 화살을 함께 담는 통)는 알타이 식이다.

마차는 4개의 바퀴가 있는데, 살이 있는 바퀴이다. 마차에는 차양덮개가 있었으며 꼭대기에는 새모양의 펠트로 만든 인형 4마리가 붙어있었다. 백조의 모습이지만, 날개는 독수리이다.

특히 화려한 1호말, 마차, 대형 벽걸이 캐노피에서 확인되는 외래적인 요소(페르시아적인 요소)들 덕분에 파지릭 고분은 특히 5호분은 러시아학계에서는 당대의 가장 높은 사람들의 무덤으로 생각한다.

 

페르시아적인 요소는 안장의 덮개 중 일부인 고들개에 표현된 그리핀이 사자머리 그리핀이 확인되는데,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 왕조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페르시아적 요소와 그리스적인 요소는 흑해북안의 스키타이 무덤에서 자주 확인되는 특징인데, 이곳 알타이에서도 엿볼 수 있다.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확인되는 인간과 말이 상주하는 무덤은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데 이름해서 파지릭 문화라고 한다. 파지릭 유적에서 유래되었다. 파지릭 문화는 스키타이 문화의 일원이다. 스키타이 문화는 흑해북쪽부터 시베리아 남부지역까지 동물문양을 상징으로 공동체를 이루었다. 좀 더 넓게는 중국의 황하상류 지역인 오르도스 및 만주의 일부인 요서지역까지 그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유적에서 스키타이 문화의 동물문양장식이 확인된다. 그쪽에서 수입한 것이든, 이미테이션 했던 어쨌든 접촉이 있었다.

 

이제까지 저의 블로그를 계속 읽으신 분은 다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직업에서 오는 노파심에서 정리해보았다(선생님들은 잔소리를 많이 한다). 아직도 파지릭 유적에는 더 소개해야 할 무덤이 남아 있고(파지릭 1호분), 파지릭 유적 보다 백여년 빠른 바샤다르 유적과 약 삼백 년 정도 더 빠른 아르잔 1유적도 소개해 드려야 한다. 그리고 하도 많이 빽빽거렸던 했던 흑해 북쪽의 유적도 소개하고 싶은데,,.

 

앞으로는 좀 속도감 있게 진행할 것이다(스키타이 문화의 유물 중 파지릭 유적과 흑해북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컬렉션 등은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구경하실 수 있다. 꼭 가보시기 바란다. 워낙 크고 화려한 박물관이라서 그림만 보다 오실수 있으나 고고학방은 지하에 있다. 고고학 유물이 싫으면 다빈치 그림 부터 근현대 화가의 그림까지 그리스, 이집트 등등 너무 많아서 피곤하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다.

비행기 값만 빼면 루블값이 거의 바닥을 기고 있어서 크게 비싸지 않다. 운하에서 배를 탈 수 있는 여름이 좋다..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음으로 유럽의 휴가철이 끝나는 8말이 더 좋을 듯도 하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얼음공주미라는 고르노-알타이 시 박물관에 있는데, 진열을 해 놓았는지는 모르겠다..워낙 주민들의 반발이 심해서..)

 

 

김재윤의 고고학광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