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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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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타이에서 유스티드 계곡에 위치한 유적은 유스티드 강과 인접한 산이 만든 곳에 위치한다. 이 강은 추야강의 지류이다.

추야강은 알타이를 북서와 동남쪽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강으로 현재에도 이 강을 따라서 알타이를 이동하는 주요도로가 나 있다. 이 도로(P-256)를 따라서 몽골의 서부로 연결된다. 반대편으로 이 도로를 따라서 가면 카프카스 산맥까지 연결되는 대상도로이다. 협곡사이로 꼬불꼬불하게 연결되는 매우 아름다운 도로이다.

추야강은 그 언제가부터 계속 이용된 자연교통로이다. 그 강의 지류에는 수 많은 무덤이 만들어져 있다. 유스티드 강은 추야 강에서 북쪽방향으로 갈라진 강이고, 강의 중류에 무덤이 위치한다. 무덤은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만들어졌다.

 

www.google.com/maps/d/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유스티드 강과 반대편으로 뻗은 강은 울란드리크 강이 있다. 이곳에도 유적이 있는데, 모두 8개로(유스티드 I~V, 타샨타 I~III유적)이다. 타샨타는 이곳의 마을명을 그대로 유적이름으로 붙여서 발견순서대로 번호를 매긴 것이다.

 

유스티드 XII유적에서 발견된 투구모양의 머리장식을 소개하면서 인접한 지역의 유적으로 울란디르크 유적을 잠시 소개한 바 있다. 그 중에서 동물문양장식이 없으면서 이 유물의 출토위치가 인골부근이 아닌 그릇 두는 곳(그림 1-14, 그림 2-14)에서 출토되었던 유물은 울란디르크 III유적의 1호분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 유적에는 8개의 고분이 발견되었다.

 

다행히 이 유적의 무덤에 대한 정보가 유스티드 계곡보다는 많은 편이다. 예를 들면 무덤상부를 덮은 직경, 깊이, 구덩이 크기와 같은 것이다. 울란디르크 유적 1호분의 지름(무덤 위를 덮은 돌의 지름)은 10m이고 높이는 50~60cm이다. 구덩이 크기는 300×240cm이다. 길이 160~170cm의 통나무 4개(무덤 한쪽벽 기준)를 이용해서 양 가장자리에 15~20cm를 남기고 무덤방을 만들었다. 무덤방의 구덩이 남쪽과 동쪽 및 서쪽에 돌을 채웠다.

 

 

그림 1. 울란드리크III유적의 1호분

1-철제 재갈, 2-멧돼지 송곳니 모양의 굴레장식, 목제품, 3-목제 재갈멈치 편, 4-가죽조각과 목제 사슴머리장식 편, 5-목제 버클 장식판, 6-허리띠 장식판, 7-자루가 끼워진 전투용 도끼, 8-청동검, 9-목제 검집, 10-목제 단추, 11-청동거울, 12~13-목제장식판, 15-목제 화살통 지지대편, 16-뿔로 만든 화살촉과 화살대 편, 17-목제쟁반과 철제 칼, 18-토제 항아리, 19-목제 칼, 20-검은색 물감의 범위

 

 

그림 2. 울란드리크III유적의 1호분의 출토유물, 그림1과 일치

 

이 유적에서는 재자리가 아닌 모자장식 뿐만 아니라 울란드리크 계곡과 유스티드 계곡을 통틀어서 유일하게 동물장식이 부착된 청동검(그림 2-8)과 전투용 투부(그림 2-7)가 출토되었다. 알타이 추야강변에서 출토되는 파지릭 문화의 청동검은 대부분 손잡이가 T자형이며, 손잡이와 날의 경계에 나비모양으로 벌어진 칼날멈추개가 형성되어 있다(그림 3).

 

그림 3. 알타이 추야강과 우르슬라강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파지릭문화의 검

 

그런데 청동검은 손잡이 끝 장식과 칼날멈추개에 동물문양장식이 있는 것이다. 추야강 일대의 유적에서도 몇 점 출토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청동제 전투용도끼의 끝 장식도 맹수모양이 장식되어 있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동네에서 검 손잡이에 동물장식을 붙이는 것을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었던 무덤은 아르잔-2호의 5호무덤었다. 물론 이 보다 훨씬 정교하게 만들어진 철검으로 금으로 상감한 것이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87 : Курганы Уландрыка. Новосибирск: 1987. 304 с(쿠바레프 1987, 울란드리크 쿠르간)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Изд-во Алтай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 2007. — 28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연해주 동북지역에 위치한 성곽은 산지성, 평지성, 곶 성으로 크게 분류된다. 그중에서 평지성은 방형, 다각형, 개방형으로 평면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2) 다각형 성곽



평지성 가운데 이 형식에 해당하는 유적은 켐스코예 성곽이 해당되는데, 동해로 들어가는 켐스코예 강 하류에 위치한다. 평면형태가 다각형인데, 좀 더 정확하게 하면, 방형 성지에서 두 모서리를 잘라낸 형태를 하고 있다.




 

. 내부형식- 단순한데 내성, 보루와 장대는 없다. 평면크기는 17,000이다.

. 축조방법- 치가 없는 단순한 구조인데, 성벽은 자갈돌로 높이 1~1.5m가량 세웠다. 문지는 2곳으로 성벽을 절개해서 만들었는데, 서로 마주보고 있다.

 

. 용도-다각형 성곽은 취락을 위해서 축조되었다.

 

. 기원과 연대- 유적에서 연대를 판단할 수 있는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대와 문화적 특징 혹은 소속 등을 이야기하기 힘들다. 단지 평면형태로 볼 때 발해의 평지성 일종으로 연해주 남부 지역에서도 확인된다. 아마도 다각형 평면형태는 중국 전통인 방형 평지성에서 기원했을 것인데, 이 성곽보다는 좀 더 늦은 시기에 나타난 것으로 9세기 보다 올라가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각형 평지성은 발해의 특징으로 생각되는데, 발해가 중국과는 다른 스스로를 나타내기 위해서 내부법을 만들었을 때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기간에는 신생한 퉁구 만주국가가 영역을 확장하고 있을 때인데, 말갈족의 후손들도 포함된다. 이 때는 평화로운 시기는 아니었고, 중국 사서에 남아 있듯이 발해가 중국에 사신을 몇 번에 걸쳐서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발해는 또한 거란족과 충돌이 있었을 때로 성지가 방형보다는 좀 더 넓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 결과로 이런 평면형태 다각형의 성지가 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 2유형. 평지성


이 성지는 강 주변에 설치되는데, 그 중에서도 높고 편평한 범람원으로 홍수의 영향이 받지 않는 곳이 선택된다. 연해주의 북동지역에서 평지성은 모두 12개로 브루실로프스코예, 사도비 클류치, 보고폴예, 에스톤카, 프리스탄스코예, 드지기토프스코예, 크라스노예 오제로, 체렘샤니, 말라야 케마, 켐스코예-돌리노예, 켐스코예-모르스코예,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성곽 등이다.

평지성은 농경에도 편한 지역으로 물과 접근성이 좋은 중류역이나 하류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 진다. 1) 방형(장방형), 2) 다각형, 3) 궁형(개방형)

 

(1) 1형식. 방형 성지

현존하는 평면형태 방형의 평지성은 브루실로프스코예 http://브루실로프카 성곽 유적 , 사도브이 클류치, 에스톤카http://루드나야 강 유역: 에스톤카 발해성곽, 드지기토프스코예, 프리스탄스코예, 크라스노예 오제로, 말라야 케마, 체렘샤니, 켐스코예-모르스코예 성지 등 모두 9기이다.



. 평면형태. 단순하고, 내성과 보루가 없다. 예외적으로 드지기토프스코예 성지에는 아주 작은 내성이 있다. 성지의 내부는 아주 편평하고, 장대가 없다. 성내부에서 소토가 확인되는 유적은 브루실로프스코예, 드지기토프스코예, 크라스노예 오제로, 에스톤카, 체렘샤니 유적 등이다. 성벽과 가까운 곳에서 구덩이가 확인되는데, 이 곳에는 성벽을 축조할 때 사용된 흙을 채취한 흔적으로 생각된다. 돌로 만들어진 우물도 확인되는데 이러한 유적은 에스톤카, 브루실로프스코예 유적 등이다. 성의 내부에서는 생활구역과 생산구역으로 나누어진다.

 

. 성벽의 축조방법. 성벽은 치가 없는 단순구조로, 성의 크기를 계측한 후 모서리부터 축조되기 시작한다. 성벽은 흙을 층층이 다져서 쌓아 올리는 판축기법을 이용하였는데, 성벽의 외벽은 돌을 경사지게 해서 쌓아올렸다. 이렇게 성벽을 경사지게 쌓아 올리는 것은 성의 다른 곳에서도 보인다.

. 평면특징. 방형의 성에서는 문지가 2~4기 확인되는 것이 보통인데, 드물지만 1개인 것도 있다. 문지는 대개 단순한데, 2~5m의 성벽을 절개해서 만든다. 여기에 다른 기술을 더한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벽의 높이는 산성과는 차이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높지 않고 1~2~2.5m에서 가량이다.

평면형태 방형의 성지는 성벽 외측에 해자가 있는 것이 보통인데, 보로비요프가 언급했듯이 2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성으로부터 물이 빠져나가게 하는 일종의 하수도 역할과 다른 하나는 방어적인 요소이다(보로비요프 1983).

가장 큰 방형 평지성은 디지기토프스코예 성으로 57,600, 다음은 브루실로프스코예 성곽으로 28,900이다. 나머지 성곽의 평면적은 10,000를 넘지 않는다.

 

. 용도. 평지에 위치한 성지는 높지 않은 성벽과, 단순한 성문, 치와 집석 시설의 부재, 화재나 다른 파손 흔적이 없는 점 등으로 보아서 평온한 시기에 평지의 방형성지가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강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성들은 사냥, 어업 등 퉁구스-만주족의 생업활동을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베뉴코프 1960). 성곽에서 생활구역을 발굴한 결과, 그 곳에서 오랜기간 동안 정주한 흔적이 있다. 이는 방형 성지가 취락을 위한 것임을 잘 알 수 있게 한다.

 

. 문화의 특징과 연대. 이 문제는 아주 복잡하고 현재까지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현재는 방형 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대략 3가지로 구분되는데, 연질토기, 녹로제 토기, 손으로 만든 후 녹로위에서 완성되는 토기로 구분된다. 연질토기는 원래 원주민의 전통으로 모든 유적에서 말갈토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녹로제 토기는 발해형식의 토기로써, 방형 성지가 발해국가와 관계가 많음을 보여준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유적에서 발해토기가 출토하게 된 것은 발해와 말갈 간의 경제교류가 아주 깊었거나 혹은 이 지역에 발해인이 들어왔을 가능성이 많다. 녹로제 토기는 인화문이 시문되어 있다. 이러한 토기는 필자가 예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발해국의 남쪽인 연해주에서 보이는 이 토기가 아무르강 하류 여진족 문화의 일부와 유사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토기를 녹로에 놓고 성형하는 기술과 기형 등은 중국의 기술이다. 그래서 평지성 중에 방형 성지도 연해주 동북쪽에 위치한 성곽은 말갈문화의 것으로 생각된다. 말갈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국가가 발해(698~9226), 여진(115~1234), 동하국(1217~1234)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 볼 수 있다. 방형 평지성에서 출토된 토기는 전체적 양상으로 보아서 8~10세기 발해 국가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적에서 출토된 말갈토기 옹형 토기의 기형은 9~10세기에 유행한 것이기 때문에 유적의 연대는 그에 따르는 것이 더 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댜코바 1983).

 

. 기원. 방형 평지성은 아주 잘 지어진 방어시설로서 기원전 10세기부터 10세기 까지 이 지역에는 없었던 건축물이다. 방어시설이라도 단순히 곶 위에 짓는 정도이다. 바둑판 같이 반듯한 평지성은 고대부터 중국의 기술로 정확한 계측을 통해서 지을 수 있는 건축물이다. 주로 방형성은 궁정 등을 짓는데 이용되었다(이보츠키나 2003). 러시아 극동에서 방형성지는 발해(698~926)이후에야 볼 수 있는 건물지이다. 발해는 연해주로 바로 들어온 것은 아니다. 중국 사료에 기록되어 있듯이, 중국 당나라의 행정을 모방해서 국가의 기초를 9세기 초반에 만들었고, 방형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오랑캐의 땅인 연해주도 하나의 현으로 들어가서 지역 주민들을 통제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치가 없는 방형의 평지성에서는 확인되는 고고유물 가운데 무기가 지표에서도 수습되지 않고, 토층에서도 거의 확인되지 않는데, 이러한 점은 연해주의 북동 지역에 발해는 처음에는 아주 평화로웠다는 점을 반증한다. 성은 그 지역과 주민의 관할하는 하나의 관청으로써 역할이었다. 성의 지위는 그 규모와도 일치하는데, 드지기토프스코예 성지는 동북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성곽은 인접한 포드네베스노예 성곽에서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 사면으로부터 들어오는 문지를 지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곳은 동해까지 이어져서 드지기트 항구까지 다다르는 길을 통제한다. 또한 드지기토프스코예 성곽의 위상은 내성의 조재로도 알 수 있다. 고고학유물 중에서 확인되는 말갈토기의 존재는 이 평지성이 지역민인 말갈 군인들이 관장하던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는데, 아직까지 외래문화(발해문화)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가 존재하던 시기에 발해 토기가 나타난 것은 이 지역에 새로운 고고문화를 규명할 수 있다. 방형의 평지성과 녹로제 토기 등은 중국 전통인데, 중요한 것은 성벽의 축조방법이다. 현재까지 러시아의 연구자들은 판축 기법이 예외적으로 연해주에서는 여진족과 관련된 12~13세기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도 평지의 방형성이 발해의 것이라는 판단이었지만, 성벽축조에서는 위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연해주의 북동지역에서 말갈족에게는 너무 이른 기술이었는데, 아마도 중국 기술자에 의해서 평지성이 계획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간접적으로 발해의 국가 영역에 들어간 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메델레예프 편년법에 따라서 연해주 북동지역의 여러 성지에 대한 유형화를 하고자 한다. 고고문화의 기원, 편년과 계통문제와 관련된 기본적인 문제와 국가적 통일 문제 뿐만 극동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과 고고물질간의 해석과도 관계가 있다.

앞서 제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연해주의 동북지역에는 12개의 강이 존재하고, 58개의 성지가 조사되었다.

먼저 유적이 입지한 지형에 따라서 유형화 하고, 좀 더 구체적인 입지에 따라서 형식으로 나누었다. 그래서 전체 입지에 따른 유형은 1) 산지성, 2) 평지성), 3) 으로 나누어 진다.

 

1)1유형. 산지성

이 유형은 15개의 유적(베뉴코보, 시바이고우, 바시코프스코예, 클류치. 쿠날레이스코예, 포드네베스노예, 고르부샤, 시미르코프 클류치, 자볼로첸노예, 세셀레프스코예, 야슈, 소프카 류브비, 소욘스코예, 카라민스키 흐베르트, 말라야 카르마) 이 모두 포함된다.

산지성은 아주 높은 곳으로 주변과 성쪽으로 다가오는 길을 모두 관찰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다. 특히 전쟁에 관련된 것이 많은데, 입지의 성격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1형식-구릉성곽, 2형식-고개성곽, 3형식-봉우리 성곽, 4형식-절벽성곽


(1) 1형식- 구릉성 산성

이 형식은 시바이고우, 쿠날레이스코예, 소프카 류브비 성지가 해당된다(그림 131, 14).

구릉성 산지성은 성벽이 모든 방면을 다 두르는 것이 아닌 개방형 성벽이다. 한 형식의 온돌이 설치되어 있고, 크지 않은 다양한 형태의 방어시설로 군사행정용 관청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형식의 성곽은 이 지역에서는 발전적인 형태는 보이지 않는데,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성벽, 주거지, 궁전지, 보루 등을 고쳐서 쓴 흔적은 보이지 않는점도 이 형식의 성이 아주 짧은 기간만 이용되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림 131. 구릉성 산성(7-시바이고우, 25-쿠날레이스코예, 44-소프카 류브비 성)



 

. 입지. 이 형식의 성지는 항상 산에서 내려오는 깨끗하고 차가운 시내물이 집수되는 곳과 가까운 곳에 축조된다. 각 성지는 큰 강의 지류 하류에 입지하는데, 시바이고우 성지는 제르칼나야 강의 지류인 우스티노프카 강 하류 보다 약간 위쪽에, 쿠날레에스코예 성지는 드지기토프카 강의 지류인 쿠날레이카 강의 하류, 소프카 류브비는 암구 강 지류인 세르바토프카 강의 하류에 축조되었다.

시바이고우 성지와 쿠날레이스코예 성지는 강의 하류에 위치하는데, 연해주의 북동 지역 산지성의 특징이 아니라 연해주 전체에서 확인된다. 비슷한 예가 샤이긴스코예(Шайгинское), 스칼리스토예(Скалистое), 예카테리노프스코예(Екатериновское), 아나네프스코예(Ананьевское) 성곽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산지성은 성벽이 모두 둘러지지 않은 개방형 성벽인데, 그 용도는 대체적으로 전쟁이나 군사용 행정관청 혹은 가축 등을 기르기도 하였다. 그래서 당연히 대량의 말이 필요하기 때문에 물과 가까운 곳에 입지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소프카 류브비는 약간 예외인데, 동해에서 0.5km 떨어진 곳에 입지하는데, 이는 방어나 보초 시설과 같은 기능을 한다.

성벽은 구릉의 산마루를 따라서 주로 축조되는데, 구릉 사면에서부터 시작해서 밑으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문은 아래쪽에 설치된다. 소프카 류브비는 예외적으로 강과 접한 절벽위에 지어져서 따로 방어시설이 필요하지 않았다. 방어시설이 필요한 곳은 높은 곳 보다는 아래쪽에 필요한데, 그곳에 성벽이 축조되었다.


. 성곽내부구조. 산지성의 내부구조는 그 곳의 지형에 따라서 결정된다. 성곽은 성벽으로 보통 구획되고, 내부에는 보루, 내성, 생활구역으로 나눠진다.

생활구역은 항상 경사면에 특별하게 평탄면을 다듬는다. 시바이고우 성지 내에서는 3~5~8m높이의 상당히 높은 곳이고, 쿠날레이스코예 성지 내에서는 2~4m높이의 성지, 소프카 류브비에서는 1~3m 높은 곳에 설치되는데, 가장 단단한 구릉사면에 설치된다. 테라스 축조는 어떠한 경우든지 모두 같은데 1) 구릉을 가로 질러서 편평하게 다듬고 2) 소토로 기초를 다지고 3) 무거운 흙으로 번갈라 가면서 층층이 쌓아서 만드는 방법을 따르고 있다. 테라스의 크기는 각기 다르기 때문에 주거지가 1기 확인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여러 기 확인되는 경우도 있다. 주거지에서는 고래나 고래 온돌이 설치되었다.

16세기 사서에 따르면, 여진족은 이 단구대 위의 숨겨진 도시안에 귀족이나 그의 친척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2003).

 

내성은 시바이고우와 쿠날레이스코예 성지에서 확인된다.

내성은 산쪽으로 가까운 곳에 축조되는 특징이 있다.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은 북쪽 성벽, 시바이고우 성벽은 서쪽 성벽에 가까운 곳에 축조된다.

내성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에 가까운데 쿠날레이스코예, 시바이고우 성곽도 몇 개의 장방형 내성이 모여서 큰 성벽으로 둘러 쌓인 것이다.

) 내성벽과 단구대는 축조되는 것이 정형화되어 있다. 그 장소를 편평하게 다지고, 흙을 채워서 기저부를 만들고, 그 위에 건축물의 계측하고 그 곳에 내성의 모서리부터 성벽을 쌓아 올렸다.

내성에는 중심지가 되는 큰 건물지가 있는데, 그 건물지의 모서리가 동서남북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16세기 사서에 의하면 내성 안에는 만주족의 귀족과 그 친인척 들이 살았다고 기록되었는데, 이에 동의한다. 그 이유는 연해주의 경우도 내성이 행정관청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프카 류브비에서는 이러한 건물지가 없는 데, 내성이 있는 성곽과는 용도가 다를 것으로 추정된다.

 

보루는 시바이고우와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에서 확인되고, 소프카 류브비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성벽과 멀지 않은 곳에 설치되었는데, 쿠날레이스코예 성지에서는 동쪽, 시바이고우 성지에서는 북쪽과 가까운 곳에서 확인된다. 특징은 다음과 같다.

평면형태-방형

장축길이-19~20m

성벽의 모서리는 동서남북의 방향과 일치

보루 내에는 자형 혹은 자형 온돌이 설치된 주거지가 2~3기 확인됨.

문지는 2~3m성벽을 절개한 것으로 현존하는데, 나무로 시설물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

성벽은 판축기법을 이용해서 흙으로 쌓아서 만든 것.

평면크기 400.

용도는 군사용이다.

 

방어시설은 세 성곽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성벽은 모두 한 가지 방법으로 제작되었는데, 판축기법으로 축조되었다. 이 판축기법으로 인해서 높이가 8m까지 성벽을 축조할 수 있었다.

좀 더 낮은 성벽의 경우(쿠날레이스코예 성지)도 판축기법을 이용했는데, 시바이고우 성지에서는 문에 옹성시설을 한 곳도 있다.

집석시설

성벽에 보초와 관련된 시설

성벽에 투석을 할 수 있는 시설물(시바이고우, 쿠날레이스코예 성지)

각 형식은 다시 하부 형식을 내포한다.

 

구릉성 산지에서 소프캌 류브비 성곽은 아래와 같은 특징이 있어서 1형식의 하부형식으로 구분한다.


A. 하부형식 1

성벽은 산마루에 설치되지 않고, 범람원을 따라서 설치되었다.

치와 집석시설이 확인되지 않는다.

내성이 없다.

보루가 없다.

성의 평면크기가 4500로 작다.

소프카 류보비 성곽은 방어와 보초용으로 동하국의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통제하는 용도로 축조되었다.

 

. 용도. 산성의 평면크기와 위치가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연해주의 남쪽과 중부지역을 통제하기 위함이 명확하게 보인다. 연해주에서 산성 중에서 24개의 유적이 구릉에 위치하는데, 북동 지역에서는 3개만이 확인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은 시바이고우 성지로, 가장 큰데 평면적이 20,000가량이다. 성 내부에는 보루, 내성, 생활구역 등이 설치되어 있고, 성벽에는 치, 투석시설, 방어시설 등이 확인된다. 하지만 아주 두터운 성벽과 사용되지 않은 많은 투석기 등은 이곳에서 실제로 전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화재의 흔적이나 주거지가 파손 혹은 불에 탄 흔적 등도 없고 유물에서도 이런 전쟁의 흔적이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성곽내부가 파괴 된 채 남아 있었다면, 거의 붕괴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지만 이 성에서는 그런 점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은 연해주 동북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성지로 12,000를 차지한다. 가장 높은 성벽은 동쪽벽으로 높이가 8m에 달하는데, 적으로부터 침략을 막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이나 충돌의 상황에 직면한 흔적은 소프카 류브비 성곽에서만 관찰된다. 이 성곽은 동하국의 해안 동북경계 중에서 동해 바다쪽을 지키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푸른 관옥과 철제 화살촉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성곽에 갑작스런 침입으로 인해서 버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동하국의 동북경계를 표시하는 직접적인 유적은 말라야 카리마 성지이다. 이곳은 지지보프스나야 강의 지류인 암구 강으로부터 들어오는 길목과 교통로를 지키기 위해서 세워졌다.

구릉 상 위의 산성은 동하국의 군사행정관청용으로써 성벽이 사방을 모두 다 둘러싸고 있지는 않은 개방형이다. 이 성곽은 동해 바다를 통제하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10세기 중반부터 퉁구스- 만주족의 조상격인 말갈족이 이러한 지형에 성을 짓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말갈족은 교통로에 아주 두터운 방어시설을 축조하는 것에 능했다. 동하국은 여진족의 국가로 말갈족이 아닌 몽골족으로, 전쟁과 관련된 무기(旋風五砲)와 같은 전쟁용 화차, 불화살촉, 투석기, 기병 등)를 모두 가지고 있었고, 전쟁의 기술도 상당했다.

쿠날레이스코예 성지에서 알 수 있듯이 성곽에서는 스스로 자급자족한다. 쿠날레이스코예 동북쪽은 구릉과 가까운데, 이 곳에서 중국에서 농사를 지을 때와 비슷하게 이용된 경작지가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현재까지도 현지민이 농사를 짓고 있다. 평면형태와 다시 개축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성곽은 20~25년 정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축조되어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성벽을 축조하는 방법은 아주 정형화 된 것으로서, 원주민인 퉁구스-만주족이나 고아시아족의 전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당연히 이러한 성곽을 축조하기 위해서 중국에서 기술자를 데리고 왔을 것이고, 지형에 맞게 축조하고, 직접 짓는 것은 군인과 지역민 들이 했을 것이다. 성을 계획하고 축조하는 시간은 아주 빨리 행해졌지만 이는 모두 전쟁을 위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 기원. 개방형의 성벽인 산성의 축조방법은 혼합적인 요소가 있다.


성곽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축조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현재 고구려 성곽의 특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유는 연해주와 한국의 지형이 거의 유사하다는 점과 연결시켜 볼 수 있고, 그 용도 또한 방어나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 등 같다. 성곽의 평면형태에서 내성, 보루, 생활 구역, 성의 모서리가 동서남북 방향, 흙으로 기단을 설치하는 것 등은 중국의 축조기술이다.

그런데 건축물은 각기 다른 전통을 따르고 있다. 성벽을 흙으로 판판히 축조하는 판축 기법과 성벽의 모서리 부분부터 축조하는 방법 등은 모두 중국의 특징이다. 그 외의 성벽을 자연지형에 따라서 모두 돌리지 않는 점, 언덕의 산마루에 축조하는 점 혹은 강의 범람원에 축조하는 것과, 산이 아닌 곶 등에 축조하는 것은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부터 있어왔으며, 말갈문화의 전통이다.

그리고 성벽 위의 투석기와 관련된 집석유구와 치의 축조 방법 등은 이블리예프에 따르면 거란족의 전통이라고 한다(이블리예프 1983).

 따라서 개방형 성벽이 특징인 산성은 여러 가지 문화를 받아들인 혼합된 특징을 보인다. 아마도 전쟁과 정치적 목적으로 고구려, 중국, 퉁구-만주족의 여러 기술자들을 데리고 성곽을 축조했던 것이 가장 안전하고 믿을 만 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성곽에서는 고고유물이 확인되었는데 금속과 토기가 대부분인데, 1217~1234년에 존재했던 동하국의 것이다. 역사적 시간과 유적에서 얻어진 방사성탄소연대(745±45, COAH 4182)와 출토된 동전으로 보아서 그 연대는 서로 상응한다. 이러한 유형의 성지가 여러 전통이 혼합된 양상을 보이는 것은 신생국가로써 자신의 영토를 지치기 위해서 그 당시 존재했던 가장 낳은 성 축조기술들을 모아서 새로운 유형의 성을 축조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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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가 강은 연해주에서 큰 강 중에 하나이다. 이 강의 수원지는 시호테알린 산맥에서 발원하는데 거의 호르 강과 우수리 강 유역과 접하고 있다. 이 강 수계의 길이는 515km이고, 강의 흐름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타타르만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강의 집수지 너비는 7,760,000이고, 강의 길이는 212km이다. 수원지에서 하류까지 길이는 1080m에 달한다. 이 강의 좌안 지류는 다그디(Дагды,Dagdy) (길이 70km), 모이(Мои,Moi)(길이 45km), 이시미(Исими,Isimi)(길이 45km), 아그주(Агзу, Agzu) (길이 30km), 우안의 지류는 호타게(Хотаге, Khotage), 푸히(Пухи,Pukhi) (길이 60km), 쿠크시(Кукси,Kuksi) (길이 30km), 볼샤야 소하트카(Большая Сохатка, Bol'shaya Sokhatka(길이 36km), 부르리바야 강이다. 사마르가 강 유역에서 가장 넓은 부분의 너비는 105km, 길이는 140km 이다.

사마르가 강의 집수지는 예딘카, 코피 강, 안뉴이(Анюй,Anyuy) , 보트치(Ботчи,Botchi ), 넬마(Нельма,Nel'ma ), 브토라야 사마르가(Вторая Самарга,Vtoraya Samarga ), 호르, 아디미(Адими, Adimi), 루드자(Лудза, Ludza) 강과 접한다.

사마르가 강 유역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과 서쪽을 연결시켜주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북쪽과 남쪽도 연결시켜 주고 있다.

사마르가 강 유역에서는 사마르가-6으로 명명된 자연방어적인 성격이 강한 유적과, 고라 쿠르굴나야 성곽이 알려져 있다(그림 127, 30페이지).

 

그림 127. 사마르가 강 유역의 성곽 위치도(57, 사마르가-6, 58-고라 쿠르글라야 성곽)

 

1) 사마라-6 토성(루체이 죨타야)

사마르가 강의 지류인 죨타야(Желтая, Zheltaya) 냇가에서 700~800m 아래로 떨어진 곳으로, 사마르가 마을에서 9km 떨어진 곳으로 사마르가 강 좌안의 절벽 가장 끝에 위치한다. 토성은 아주 높은 곳으로 사마르가 강의 계곡과 하류가 모두 보이는 곳에 입지하고 있다. 절벽의 오른쪽으로 가장 끝에는 그 꼭대기의 끝으로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게 돌로 덮여 있다. 이 절벽은 돌머리 산으로 불리는데, 사마르가 강을 기준으로 높이 60m정도이다. 이 절벽의 북쪽으로 서에서 동쪽으로 성벽이 축조되어 있다(그림 128).

이 절벽의 시작지점에서부터 성벽까지는 70~77m이고, 성벽의 전체길이는 97m, 높이는 0.5~0.5~1m이다. 기저부의 너비는 3~4~4.5m이다. 성벽은 부채꼴 모양으로 휘어진 것인데, 돌을 섞은 흙으로 축조되었다. 최소 0.5m부터 다양한 크기의 돌을 사용하였다. 흙은 해자로부터 퍼 올린 것이다. 해자는 성벽을 따라서 안쪽에 있으며, 깊이는 0.5~0.7m,너비는 1~1.5m~2m이다. 성벽은 매우 단순하며 문이 없다.

 

그림128, 사마르가-6 성곽



성벽에는 치나 다른 집석 시설은 확인되지 않는다(사진 65, 그림 128)

환호의 내부는 단순한 편인데, 너비 3~4m, 깊이 0.4~0.5m의 수혈이 4기 확인된다. 동쪽의 2번 수혈은 방형으로 4벽은 동서남북 방향과 일치한다. 동쪽벽면의 토층은 다음과 같다.

 

표토-0.07~0.10m

노란색 간층과 숯과 돌이 혼입된 베이지색 사양토층(문화층)-0.35m

시굴 구덩이에서 북동과 남동쪽 모서리의 깊이는 부식토층을 기준으로 0.20~0.25m이다.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의 토기와 석제의 자귀 등이 확인되었다(그림 129).



  

그림 129. 사마르가-6유적의 출토품


  

사마라-6번 토성은 산성으로 성벽의 평면형태는 궁형이고 크기는 소형이다. 성벽은 돌과 흙을 혼합했는데, 평면형태는 매우 단순하고 내부는 편평하다. 치와 보루, 내성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리도프카 문화의 것으로 기원전 10세기 정도에 해당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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