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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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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0. 17. 10:45 고깔모자와 코트

유라시아 초원 서부지역의 스키타이 사람들은 인접한 지역과 교류한 흔적이 기원전 7세기경부터 확인된다. 아시다시피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우라루투, 앗시리아, 그리스와 관련된 유물이 나왔다. 그리고 기원전 6~5세기 이후에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유적과 유물에 스키타이 사람들이 나타난다.

 

특히 페르시아와 관련해서는 페르세폴리스의 아파다나 궁전이나 다리우스 1세의 Behistun 비문 등에서 스키타이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스에서는 채색토기 안에 스키타이 인들이 종종 등장한다. 외국인에 비친 스키타이 사람들로 자신들의 스타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마도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지는 않는 것 같다.

 

베히스툰 비문은 다리우스 1세의 조상 및 그의 업적을 적은 것이다. 업적은 주로 자신이 통치한 영토를 적은 것인데 23개의 국가 명칭이 적혀 있다. 거기에는 스키타이도 해당된다. 아케메스 왕조가 최대 영토를 이루었을 때, 카스피해 우측의 스키타이 땅 일부를 삼킨 것으로 알려졌다.

그림 1. 기원전 500 페르시아 제국, William R. Shepherd, 1923.

https://maps.lib.utexas.edu/maps/historical/history_asia.html

 

그리고 비문의 뒷부분에서는 키루스 II세와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의 죽음으로 초래된 반랍을 진압하기 위해서 1년동안 싸운 전투에서 끌려온 포로를 새겼다. 9명의 포로를 목에 줄을 메어서 끌고 오는 장면인데, 고깔모자를 쓴 스키타이 왕이 가장 마지막에 있다(그림 2).

각 포로의 상단에는 누구인지가 적혀 있는데, 가장 마지막 인물의 상단에는 Skunkha는 뾰족한 모자를 쓴 사카(스키타이)의 왕이다고 씌여 있었다.

-->https://web.archive.org/web/20200310112440/https://www.livius.org/sources/content/behistun-persian-text/behistun-minor-inscriptions/

 

 

그림 2. 기원전 6세기경 베히스툰 비문의 일부

 

 

그림 3. 기원전 6세기 말 베히스툰 비문을 그린 것. 작가는 알 수 없음. Всемирная история (в четырёх томах) Древний мир., «Специальная литература»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1997.

 

어느 왕이나 그 치적은 부풀려지게 마련이고, 각 나라 왕들의 목에 줄을 메고 가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인 표현일 것이다. 아파다나 궁전에는 여러 국가의 대표단들이 그려져 있는데, 다들 다양한 모자를 착용하고 있다. 베히스툰 비문에서는 스키타이 왕에게만 고깔모자를 그려놓았다. 아마도 스키타이 왕을 잡은 것이 가장 큰 업적이었던 모양이다.  

 

필자가 궁금한 것은 유라시아 서부에서 언제부터 고깔모자를 썼는가 하는 것이다. 이 비문을 보아 기원전 6세기 말에도 이들은 고깔모자를 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Яценко С.А. 2006 : Костюм древней Евразии (ираноязычные народы). М.: 2006. 664 с. («Культура народов Востока»)(야센코 2006, 유라시아의 고대 의복)

 Всемирная история (в четырёх томах) Древний мир., «Специальная литература»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1997.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유적은 무덤이다. 드물지만 흑해 주변의 드네프르 강 유역과 돈 강 유역에는 스키타이 문화의 성곽 유적이 존재한다. 주로 강의 어귀에서 교통로에 위치한다.

 

카멘스코예 성곽은 드네프르 강 유역에 위치한 스키타이 성곽이다. 기원전 4세기경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 성 내부에는 아크로폴(아크로폴리스)라고 불리는 그리스인의 정착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 구역은 매우 일부이고, 성곽지의 대부분은 스키타이 사람들의 영역이었다.

 

조금 더 서쪽으로 이동해서 돈 강 유역에 위치한 엘리자베인스코예 성곽을 살펴보도록 하자.

유적은 아조프해에 가깝게 위치하기 때문에 그리스와 관련성은 좀 더 깊어 보인다.

엘리자베트토프스코예 성곽은 두 줄로 된 성곽 안(성의 면적은 40~55헥타르, 평면형태 사다리꼴)에 마을 유적이 만들어진 것이다. 남아 있는 집의 건축물은 그리스 기술로 지어진 것이다. 지하에 땅을 파고 나무기둥을 세워서 그 사이를 벽돌로 채우는 방법이다(그림 2,3). 지붕은 지표면 높이로 만들어졌다(그림 4)

성곽의 가장 중앙 내부에 아크로폴리스 라고 불리는 구역 안에는 그리스식 집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식 건물지가 들어선 것은 기원전 3세기의 1/4분기에 세워진 것이고, 그 구역은 12헥타르 정도이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그림 1.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평면도(위: 1928년 작성, 아래: 1972년 작성),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824년이고, 1964년 이후로 매년 발굴을 했다.

 

 

그림 2. 엘리자베트포스코예 성곽 내의 그리스 식 집

 

그림 3. 엘리자베트포스코예 성곽 집의 벽 구조

 

그림 4. 복원도

 

성벽이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6~5세기 경이고, 이미 그 전부터 스키타이 사람들이 살았으며, 카멘스코예 성곽처럼 아주 적은 공간을 차지했다. 스키타이 사람들은 집자리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계절에 따른 유목민이 머물던 장소로 겨울 도로가 남아 있다.

 

이 유적은 교통로에 위치하는데, 바로 인접한 돈강의 항구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이 스키타이 유적이라는 강력한 증거 중에 하나는 마을 앞에 위치한 스키타이 쿠르간 때문이다. 퍄티 브라체프 쿠르간(그림 5)이라고 불리는 쿠르간인데, 5기의 고분이 한 그룹을 이루고 있다.

 

그림 5. 퍄티 브라체프 쿠르간

 

유적이 사용되는 동안 마지막에 남은 건물구조가 그리스식이어서 아크로폴리스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지만, 유적은 그리스가 세력을 팽창하기 이전인 기원전 6세기부터 존재했고, 스키타이 철제 무기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물론 그리스식 토기도 마찬가지로 많이 출토된다.

 

참고문헌

Марченко К. К., Житников В. Г., Копылов В. П. Елизаветовское городище на Дону. М., 2000(마르첸코, 지트니코프, 코피로프, 2000, 돈 강 유역의 엘리자베트토프스코예 성곽)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0. 12. 8. 12:50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아무다리야 유적에서는 남성인물상이 표현된 유물이 많이 확인된다. 후기구석기시대 이래로 유적에서 출토되는 인간형상물은 여성이 많지만, 아무다리야 유적에서는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입체상과 평면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평면상은 금판에 남성이 새겨진 것인데 모두 43점이 확인되었고 크기는 제각각이다. 모두 같은 스타일의 남성이 아니라 의상이 달라서 다양한 민족을 표상하고 있다. 제작된 기술의 수준도 같지 않고 어떤 유물은 세밀하고 어떤 유물은 대충 그린 것도 있다.

 

그 중에서 스키타이 남성전사도 포함되는데, 가장 잘 묘사되고 가장 큰 평면판에 새겨진 남성 이다(그림1, 그림 3). 고깔모자를 쓰고 있고, 통이 넓은 바지에 발목은 끈으로 조여 강조했으며 부드러운 부츠를 신고 있었다. 상의는 무릎까지 오는 긴 상의에 소매가 꽉 끼는 카파탄 종류와 키르바스(어깨 부위가 뒤로 젖혀짐) 스타일을 겹쳐 입은 듯 하다. 허리에 벨트를 하고 있었다. 이 남성은 턱수염을 길렀다. 오른쪽에는 스키타이 인의 단검인 아키나크를 차고 있었는데, 검집과 벨트로 연결되는 부위가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같은 형태의 검은 멜구노프와 켈레르메스 유적 등 흑해 스키타이 유적에서 확인되었고 이 유물이 확인된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도 1점 발견되었다(그림 1). 스키타이 남성들은 대부분 턱수염을 기른채 여기저기서 확인된다. 쿨-오바에서 출토된 황금항아리 등에서 확인가능하다.  알타이의 파지리크 2호에서는 턱수염만 따로 발견되기도 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턱수염을 기르는 것이 일종의 스키타이 특징으로 보았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은 불을 피우기 위한 혹은 불을 옮기기 위한 장면으로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성직자 혹은 마술사일 것으로 추정한다(커닝햄 1881, 아르타모노프 1973). 43점의 평면판에 새겨진 남성들은 모두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데, 막대기를 들고 있는 경우가 가장 많다.

 

같은 형상(고깔모자, 아키나크 검)의 스키타이 인들이 페르세폴리스 아파다나 궁전의 동쪽벽에서도 확인된다(그림 2). 아파다나 궁전 외에도 다리우스 무덤의 비문에 스키타이 남성에 대한 그림과 설명이 있다. 페르세폴르스 근처의 다리우스 무덤의 비문에는 Saki-tigrahauda, Saki-haumavarka, Saki-taradaraya의 세 그룹의 사카족(스키타이 문화권에서 중앙아시아에 있던 민족)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무덤입구의 부조에 그림이 묘사되어 있고 비문설명에도 남아 있는데, 제일 처음의 그룹은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르타모노프 1973).

 

그림 1.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평면판에 새겨진 스키타이 남성

 

그림 2. 페르세폴리스 아파다나 궁전의 동쪽벽, 스키타이 대표단

 

그림 3.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평면 금판

 

이 유물은 길이가 15cm인데, 인간형상물이 그려진 평면금판은 크기가 각기 다르다(그림 3). Barnett(1968)은 구부러진 흔적(우측 하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건축물(사원)의 틈새나 용기 안에 넣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시만은 아무다리야 퇴장지가 일종의 신전 혹은 사원이며 신자들이 봉헌 제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제이말 1979).

 그런데 이 평면판들이 같은 수준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어서 같은 시대에 제작되었는지에 대한 의심도 있다. 그러나 Barnett는 금이 풍부한 중앙아시아에서 충분히 제작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참고문헌

 

Barnett R. The Art of Bactria and the Treasure of the Oxus. — «Iranica Antiqua», Leiden, 1968, vol. 8, p. 34-53, pl. II-XIV.

Е.В. Зеймаль 1979,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제이말 1979, 아무다르리아 퇴장지: 전시도록, 에르미타주 박물관)

Артамонов М.И. 1973 : Сокровища саков. М.: 1973. 280 с.(아르타모노프 1973, 사카족의 보물)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Oxus_Treasure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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