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된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은 1664년에 러시아에서 근무한 니콜라스 비트젠의 저서(1785)에 나오는 유물과 유사한 것이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유물은 그가 러시아를 떠난 후에 러시아 특파원을 통해서 수집한 유물이라고 알려졌는데, 그가 죽은 후에는 경매에서 팔렸다는 사실 외에는 더 이상 자세한 유물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늑대와 뱀이 뒤엉켜 있는 버클 장식이 표트르 1세의 수집품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버클장식은 왼편과 오른편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거의 같은 모습이어도 비트젠의 책에 나오는 유물과 표트르 1세의 유물은 방향이 달라서 같은 무덤에서 나온 유물이 각각 다른 경로로 전해졌을 수 있다. 비트젠의 유물과 표트르 1세의 수집품이 같은 무덤에서 나왔지만 각각 다른 경로로 존재했을 수 있다.

 

2021.05.03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시베리아황금유물컬렉션] -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컬렉션 중에서..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컬렉션 중에서..

몽골 울란곰 유적에서 발견되는 동물문양장식은 청동으로 주로 제작되었고 주로 어떤 유물의 부속품인데, 무기를 장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외에는 청동거울과 버클 장식 등도 있다. 버클로

eastsearoad.tistory.com

하지만 비트젠의 그림에 나오는 유물 중에 복잡하게 만들어진 목걸이(그림1의 가장 상단)는 표트르 1세의 유물에도 유사품이 발견된다. 비크젠의 수집품에 목걸이는 안이 빈 금 파이프를 쌓고 가장 상단에 동물장식을 붙인 것이다. 토크 혹은 토크 스타일일 수 있는데,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진 목걸이는 표트르 1세의 유물에서 여러 점 발견된다(그림 2). 그 중 호랑이상(그림 3)이 달린 목걸이는 가가린의 물품 목록에는 없었고,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루덴코 1962). 

 

그림 1. 비트젠(1785)이 수집한 시베리아 유물

 

 

 

그림 2. 표트르 1세의 수집품 중 금 파이프를 쌓아서 만든 목걸이

 

목걸이(그림 2-8, 그림 3)는 크기가 다른 앞 판과 뒷 판이 일종의 경첩으로 연결되어 개폐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목걸이는 파이프 모양의 금관 3줄이 돌을 끼울 수 있는 갑입부를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 돌을 끼우는 부분은 원형과 마름모가 교차되게 디자인되어 있고, 전부 돌을 끼웠을 가능성이 있는데 남아 있는 부분에는 터키석과 산호가 남아 있다. 가장 상단에는 호랑이상 4마리가 좌우로 나뉘어서 목걸이 테이 고정되어 있다. 호랑이의 늑골과 날카로운 발톱의 표현, 호랑이 꼬리에 달린 그리핀 머리가 특징적이다. 꼬리 끝에 체인이 달려 있다.

 

 

그림 3.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그림 2-8과 동일유물

 

표트르 1세 수집품 가운데는 같은 방법으로 제작된 유물이 여러 점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림 2)유니크한 유물은 아니고 일반적인 목걸이 스타일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호랑이 상이 목을 두르고 있기 때문에 동물장식이 없는 유물 보다는 특별해 보인다. 아크 알라하-3 유적, 파지리크 유적의 2호분 여성 목걸이가 표범 혹은 맹수의 전신상을 6점 이상씩 붙여서 목을 두르도록 디자인 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한 스타일로 볼 수 있다. 소재와 목을 두텁게 덥도록 만든 차이가 있다. 알타이의 유물은 목제로 제작된 뒤에 얇은 금종이로 마감되었다는 점에서 착용하면 비슷한 느낌을 줄 수 있다. 단지 표트르 1세의 수집품 유물은 매우 불편해 보인다(직경 14.3cm, 높이 5.3cm).

 

호랑이와 꼬리에 달린 그리핀의 모습은 표트르 1세의 버클 장식 가운데 동물투쟁문의 동물과 유사하다. 늑골이 드러나도록 마른 호랑이의 모습과 부리가 과장되고 눈이 큰 그리핀(그림 4)이 그러하다.

 

그림 4.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 버클장식 목걸이에 부착된 호랑이의 모습과 표현법이 유사하다. 드러난 늑골, 발톱 뿐만 아니라 굽동물의 갈기에 붙은 그리핀의 머리가 목걸이의 호랑이 꼬리에 달려 있다. 

 

 

그림 3의 목걸이는 기원전 5~4세기라고 편년된 바 있는데(Piotrovsky B.), 이는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감입을 하는 제작방법이나 납템질하는 방법 등은 이 시기에 있었던 방법이지만 목걸이 스타일은 기원전 5~4세기를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Piotrovsky B., Galanina L., Grach N. 1986 : Scythian Art. The Legacy of the Scythian World: mid-7th to 3rd century B.C. Leningrad: Aurora Art Publishers. 1986. 184 p.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필자는 선사시대 유적에 부장되는 인간형상물에 대해서 매우 관심이 커서 유학 당시부터 그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시작은 아무르강 하류의 극동전신상토우(김재윤 2008) 였지만 중국동북지방(김재윤 2019b)부터 최근에는 시베리아(김재윤 2019 a, 김재윤2021)와 흑해(김재윤 2019a)까지 넓히고 있다.

인류사 전체에 있어서 인간형상물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곳은 후기구석기시대 흑해와 시베리아 지역이다. 시베리아에서는 신석기시대 및 청동기시대 오쿠네보 문화까지 인간형상물이 이어지다가 초기 철기시대 스키타이 문화의 동부지역에서는 인간 스스로 형상물이된 미라가 이를 대체했다고 생각한다. 미라를 연구한 학자들은 시신을 미라 처리하는 이유를 ‘부활’에 대한 염원을 담은 것으로 해석한다.  때문에 그 이전 시대무덤에 부장된 인간형상물도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오랫동안 전통이 이어진다는점에서 유라시아 초원 문화의 상징물로 볼 수 있다.

스키타이 서부 지역인 흑해에서는 미라를 대신해서 여신상이 유물에 표현된다. 기원전 7세기부터 켈레르메스 유적의 거울부터 기원전 5~4세기 귀걸이, 장신구, 등에서 여신상이 발견된다. 스키타이 동부 지역에서 미라가 발견되는 모습과는 대비된다.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이어져 온 비너스상 전통이 연속된다고도 볼 수 있다.-프로로그 중에서-

 

 

교과서 밖의 역사의 시작은..

어느 날 필자를 찾아온 검색어 덕분에 시작하게 되었다. 블로그를 2년 넘게 운영하고 있었고,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이었다. 스키타이 문화에 대한 강의는 몇 년 째 했지만 둘을 연결할 생각은 못했는데, 검색어 때문에 시작하게 되었다.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 복원’이라는 검색어가 어느 날 블로그에 집중되었고, 유라시아의 고대문화를 알릴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날 이후로 몇 년 째 모아오고 있는 대학교 강의 자료를 블로그에 풀기 시작했다.

이미 유라시아 초원의 역사와 문화는 다양한 시대와 다양한 주제로 연구되고 있는데, 아직도 기초자료에 대한 정보는 역부족이다. 필자는 ‘인간형상물’과 그 출토지에 대한 정보를 공개해서 미약하지만 앞으로 여러 연구자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 .-프로로그 중에서-

 

위의 내용은 필자의 새로운 책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에 포함된 것이다.

제목은 여성상으로 국한되었지만, 스키타이 문화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시베리아 유적 및 알타이 미라가 출토되는 유적과 흑해 여성상들의 출토지(무덤)와 함께 부장된 유물에 대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이제 인쇄만 남았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1,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진인진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에서 발견되는 남성 전사는 목걸이를 착용하고 묻힌 경우가 종종 있다. 해발 2500m 우코크 고원의 미라가 된 남성전사(그림 1), 아크 알라하-1의 1호분 45세 남성, 아크 알라하-1 유적의 2호분 소년(그림 2) 뿐만 아니라 추야강 계곡의 유스티드 XII유적 무덤에서도 발견된다.

목제로 둥근 고리 끝에 동물장식이 달린 것이다. 고리 끝에 달린 동물장식은 대부분 맹수류 이다. 알타이에서 발견된 여성 목걸이는 동물장식을 여러 마리 달았지만, 남성은 이에 목제고리의 끝에만 달아서 심플하다.

 

그림 1. 베르흐-칼쥔 II유적의 남성전사 목걸이

 

그림 2. 아크 알라하-1 유적의 2호분 소년 목걸이

 

그런데 베르흐-칼쥔 II유적의 남성전사 목걸이(그림 1)와 매우 유사한 금제로 만든 목걸이가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그림 3)에도 있다. 눈과 귀, 갈기에 움푹들어가도록 만들어졌는데, 턱 모서리에 청록색의 터키석이 삽입된 점으로 보아서 같은 돌이 들어갔을 수 있다. 호랑이의 머리는 속이 비었고 일종의 수지로 채워진 것이다.

 

그림 3.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중에서 목걸이, 367.9g

 

위에서 언급한 알타이의 유적은 기원전 5세기 유적인데, 남성이 목걸이를 착용한 예는 기원전 7세기 중반 아르잔-2호에서부터 발견된다. 1kg이 넘는 목걸이다(그림 4). 기원전 5세기 유적과는 달리 닫힌 모양이고 앞 부분이 두툼하게 장방형 판이 붙은 모양이다. 그런데 동물장식은 없지만 구조적으로 같은 유물이 표트르 1세의 수집품(그림 5)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유물은 동물장식도 없어서 매우 단순한 편이지만 다소 금이 많이 사용된 유물(941.8g)이라는 점 외에는 특징적이지 않았다. 아르잔-2호의 발굴로 이러한 스타일의 목걸이가 기원전 7세기 유물일 가능성이 많아진 것이다. 표트르 1세의 유물 가운데 맹수장식과 함께 이른 시기의 유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림 4. 아르잔-2호 5호묘 남성의 목걸이

 

그림 5.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중에서 목걸이, 직경 21.6cm, 941.8g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몰로딘, 폴로스막, 치키세바 2000, 알타이 미라 현상, 2000)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투바의 아르잔-2, 스키타이 차르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표트르 1세의 수집품으로 알려진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가가린은 세 번에 걸쳐서 차르에게 무덤에서 캐낸 유물을 보냈는데, 2번째 소포에 가장 많은 유물이 들어 있었다. 그 중에는 아주 작은 소형 유물도 포함되었는데, 토기(그림 1-11, 53,54,55)와 목기(그림 1-21)를 모방한 금속제 이미테이션이다. 소형 유물들은 대부분 장신구류인데, 그릇을 모방한 금속제품도 어딘가에 달아서 사용되었을 수 있다. 이 외에는 대부분 반지, 귀걸이 혹은 꽃을 모방한 장신구이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중에서

 

그 중에서 좀 이상한 유물이 있다. 사람 이를 금으로 만든 포켓 속에 넣고 체인을 달아서 만든 귀걸이다(그림 1-56,57). 시베리아 황금 유물이 금과 돌(보석류, 주로 터키석)을 함께 이용하는 경우 금제품에 포켓을 만들어 넣는 상감기법을 쓰고 있는데, 이 유물은 터키석을 대신해서 사람의 어금니를 끼워 넣은 것이다.

 

그림 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중에서, 귀걸이 한 쌍

 

 

비트겐이 수집한 유물에도 사람이를 사용한 귀걸이가 발견되었다(그림 3에서). 사람이를 사용한 장신구는 매우 드문 경우이지만 비트겐의 수집품에도 있는 점으로 보아서  그림 2의 유물이 완전 유니크 한 유물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림 3. 비트겐(1785)이 수집한 유물

 

사실 현재 발굴되는 자료나 그 뒤의 자료에서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귀걸이의 포인트가 되는 부분에 보석이나 돌이 끼워진 채 발견되는 경우가 잘 없기 때문이다. 비트겐은 1664년에 러시아에서 일하고, 그 뒤에 시베리아에서 유물을 수집해서, 이미 17세기 중후반부터 시베리아에는 도굴이 만연한 상태였고 볼 수 있다. 눈에 띄는 웬만한 무덤은 거의 도굴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 과정에서 아주 작은 소형의 유물들이 제대로 보존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다만 스키타이 무덤에 들어가는 뿔그릇은 동물을 대신해서 그 동물의 뿔로 제작되었다는 의견(폴로스막 2001)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의 주인공에 대한 기억? 혹은 그를 기리기 위해서 혹은 어떤 징표 등으로 만들었을 수 있다. 영화에서 사이즈가 큰 반지를 줄에 끼워 목걸이로 간직하는 경우가 있는데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당시의 사회상 및 풍습, 혹은 개인적인 것과도 관련이 있을 듯 한데, 정보가 부족하다.

 

표트르 1세에게 유물을 보낸 시베리아 총독 가가린은 무덤의 위치를 엄청난 비밀로 여겼다는 점에서도 무덤의 위치를 그린 지도는 그야 말로 ‘보물지도’였을 것이다. 지도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풍습?은 러시아에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필자가 유학했을 당시 2000년대 초반이었는데 처음에는 답사를 다니거나 하면 학자들은 군대에서 입수한 지도라며 쓱 보여주고 엄청난 비밀인 것처럼 했던 기억이 난다..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코메디인데.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Федоровна K.E. 2006, Золото кочевников. О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НАУКА из первых рук(표드로브나 2006, 유목민의 황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 대해서)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336 с.(폴로스막 2001, 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 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권에서는 유기물질로 만들어진 그릇 외에도 금속제 그릇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청동솥 외에도 금제와 은제 그릇 등이 발견되는데, 흑해와 볼가강 유역 등 서부지역에서 종종발견된다.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에서도 금속제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스키타이 시대와 동 시기의 페르세폴리스 궁전벽화에 남아 있다. 이들 유물은 이르티스강과 오비강의 합류점 및 알타이 부근에서 도굴에 가까운 방법으로 18세기에 채취된 것이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켈렉션 중에서. 페르세폴리스의 아케메니드 궁전에 그려진 금속그릇과 비슷한 형상, 기원전 5~3세기 유물로 추정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은 시베리아 총독 이었던 가가린이 보낸 선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 번에 걸쳐서 보냈는데 차르의 명명에 따라서 상트페테르부르그로 보내졌다. 가가린은 토볼스크에서 유물들을 수집했다고 알려졌는데, 현재는 이르티시 강 상류와 오비강의 합류점 및 알타이 부근으로 알려졌다(그림 2).

표트르 1세에게 무덤에서 캐낸 금제품(표트르 1세의 유물 컬력션)을 보내기 전(1715년)에 1712년에 가가린은 금, 은, 구리 및 기타 등등을 모았다. 주자시의 임부는 금생산에 관련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 주제와 관련된 문서는 거의 없는데, 아마 큰 비밀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금제품의 발견과 모든 금과 관련된 정보는 고대 유적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718년 2월 13일 차르는 ‘오래되고, 비범한 것을 모으라는 칙령을 내렸으며 보상을 약속했다. 1721년에 가가린은 교수형을 당했다.

 

 

그림 2. 18세기 황금 유물이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

 

죽기 전에 가가린은 3번에 걸쳐서 표트르 1세에게 소포를 보냈는데, 1번째는 10점(1715년), 2번째는 122개의 유물이 들어 있었다. 2번째 소포는 1716년 12월 토볼스크에서 가가린이 표트르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으나, 소포가 도착할 무렵에 차르는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없어서 모시코프(П. И. Мошков, P. I. Moshkov)가 소포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편지에는 각 물건의 무게를 표시해 두어서 식별이 가능하다. 2번째 소포중에서 20점은 표트르 1세의 아들인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에게도 같은 유물이 보내진 것으로 편지에 적혀있었으나, 행방은 묘연하다. 세 번째 소포는 1717년 10월에 60개의 금제품과 2개의 은제품을 보냈다고 알려졌다. 세 번째 소포에 들어간 유물에 대해서는 혼란이 있었으나 최근 튜멘 지역에서 발견된 문서로 그 존재가 확실해 진 듯하다. 이 문서에는 가가린이 보낸 소포에서 보낸 유물과 동일한 물건의 유물 무게가 일치하는 품목이 적힌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시베리아의 금제품은 용광로에서 녹여서 동전으로 제작되는 일이 흔했는데, 표트르는 칙령 1718년으로 이를 막았고, 러시아에서 일종의 문화재보호법이 생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김재윤 2018) .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Федоровна K.E. 2006, Золото кочевников. О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НАУКА из первых рук(표드로브나 2006, 유목민의 황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 대해서)

김재윤 2018, 러시아의 발굴 -연해주 철기시대 얀콥스키 문화의 바라바시 3유적을 중심으로-, 야외고고학, 31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