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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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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서부에 위치한 우랄 남부지역의 탁사이-1 유적의 6호 무덤은 여성이 피장자였다. 남아 있는 인골상태는 좋지 않지만 여성의 모자와 의복에 달렸던 황금 장식 덕분에 여성이 입은 옷을 추정할 수 있다(그림 1).

 

그림 1. 탁사이1 유적 6호분 여성복원

 

그런데 이 여성의 오른쪽 손목 부위에서는 11개의 주판알 모양의 금구슬과 5개의 펜던트가 발견되었는데, 팔찌로 추정되는 물건이다(그림 2).

펜던트는 고깔모양으로 금판을 돌려 붙이고 동물의 이빨을 끼워서 만든 것이다. 고깔모양의 금판에는 금판을 돌려 붙였으며, 테두리 선을 두르고, 작은 금구슬도 삼각형을 이루며 누금기법으로 붙였다.

 

그림 2. 탁사이-1 유적의 팔찌

 

그림 3. 탁사이-1 유적의 팔찌 펜던트

 

그림 4. 탁사이-1 유적의 팔찌 구슬

 

주판알 모양의 금구슬(0.78~0.91cm)은 반구형 2개를 모양을 만들어서 붙인 것이다. 역시 그 위를 세로 선으로 붙여서 마무리 했다.

 

탁사이-1 유적의 팔찌에는 고깔모자 금판장식에 연결된 늑대송곳니가 포인트다. 팔찌를 착용하면 늑대 송곳니 부분이 눈에 띨 수 밖에 없다. 동물의 이빨을 포인트로 장식하는 유물은 이미 소개한 바 있는데,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 컬렉션 가운데서, 사람이를 매개로 한 귀걸이다.

 

2021.05.05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시베리아황금유물컬렉션] -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서 귀걸이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서 귀걸이

표트르 1세의 수집품으로 알려진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가가린은 세 번에 걸쳐서 차르에게 무덤에서 캐낸 유물을 보냈는데, 2번째 소포에 가장 많은 유물이 들어 있었다. 그 중에는 아주 작은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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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가 시베리아에서 수집한 유물이 나온 곳 중에 하나로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니아강 사이 지역으로 꼽힌다. 탁사이-1 유적과 멀지 않은 곳(상대적으로)으로, 사람이를 포함한 동물이빨을 금으로 감싸서 장신구로 만드는 전통? 특징?이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탁사이-1 유적의 팔찌 펜던트와 표트르 1세의 귀걸이에 ‘이(齒)’가 달린 부분은 현대의 장신구와 비교해 보면 주로 반짝이는 보석이 달린다. 금은 이를 뒷받침 하는 역할이다.

 

2400년 전 유물을 보면 우리의 시각은 금으로 된 부분에 머물 수밖에 없지만, 장신구의 가장 포인트가 되는 부분으로 ‘이’를 이용했다는 점은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물론 이 유물은 벽사(부적)의 기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누구든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림 5. 탁사이-1 유적의 6호분 평면도, 1- 무덤의 바닥 평면도, 2-중앙 무덤구덩이 바닥면, 3-6호분 내의 3호 무덤 유물 출토양상(고깔모자 쓴 여성)

 

참고문헌

Лукпанова Я.А. Реконструкция женского костюма из элитного погребения Таксай–1: Взгляд археолога // Поволжская археология, № 1 (19), 2017. – С. 234–244(룩파노바 2017, 탁사이-1 유적 엘리트 무덤에서 나온 여성의복 복원)

Е.Ф. Королькова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первое российское археологическое собрание. // Основателю Петербурга: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в Эрмитаже]. СПб: «Славия». 2003. С. 190-199.(코롤코바 2003,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러시아의 최초고고학유물)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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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시베리아의 투바공화국에 위치한 곳에서는 일명 태양의 사원이라고 불리는 ‘울루그-호루움’ 이라는 명칭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곳에서는 직경 66m에 달하는 돌로 만든 둥근 유구가 발견되었는데, 제사유적으로 생각되는 곳이다. 매장주체부가 없다.

그라치는 이 유구가 태양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2021.06.06 - [시베리아 투바와 몽골의 유적/투바의 유적] - 기원전 5세기 시베리아 태양의 사원

 

기원전 5세기 시베리아 태양의 사원

기원전 5세기 시베리아 사글리 바쥐 VI유적에서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유구가 발견되었다. 무덤과 함께 발견되었지만 유적을 발굴한 그라치는 ‘울루그-호르움’이라고 따로 명명했다. 모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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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알타이에서도 평면형태가 비슷한 유구가 발견되었다. 유스티드 I유적과 인접한 곳에 위치하는데, 쿠바레프는 무덤 유적과 함께 ‘의례복합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의례복합체를 구성하는 제사유구에는 원형의 돌 쌓은 유구가 발견된다. 중앙에 원형은 돌로 채우고 그 외곽을 2열로 돌을 돌렸고, 가장 중앙의 원형 유구와 2번째 고리 사이를 직선의 돌로 열을 만든 것이다(그림 1-1~5, 6). 울루그-호루움과 원형의 모티브를 사용했고, 방사선으로 원형 사이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직경 66m의 투바 울루그-호루움에 비해서는 현저히 작은 크기(직경 1.2~1.3m)이다.

 

뿐만 아니라 원형의 제사 유구 사이에는 방형으로 돌을 돌린 그룹의 알 수 없는 유구도 발견되었다(그림 1-1). 원래는 키가 높은 석주(돌기둥, 높이:100cm)는 세워져 있었으나, 발견되었을 당시에는 쓰러진 상태였다. 세워진 상태의 석주도 발견되었다(그림 2).

 

그림 1. 유스티드 I유적의 의례복합체, 1: 방형제사유구, 2의 부분. 2: 유스티디 I유적의 의례복합체

 

그림 2. 유스티드 I유적의 방형제사유구

 

유스티드 I유적에서는 10기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열을 이루는 무덤은 4기였고, 나무무덤방을 사용했지만, 말은 없는 무덤이었다.

 

투바의 태양을 상징하는 울루그-호루움 유적(기원전 5세기)와 비교하면 시간상으로는 알타이 유스티드 I유적(기원전 4세기)이 약간 늦다. 하지만 알타이에서 원형과 방형의 의례복합체를 만든 시기를 유스티드 I유적으로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알타이에서 늦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없다. 투바에서 거대 유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저지대의 평원이고, 알타이에는 계곡마다 유적이 만들어지는 지형적 특징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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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태양, 금 등 반짝이는 것에 집착했을까?

 

참고문헌

Грач А.Д.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1980(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2007 :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2007. 282 с.(쿠바레프, 슐가, 2007, 추야 강과 우르술 강의 파지리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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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된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은 여러 경로로 입수된 유물을 한 번에 부른 명칭이다. 표트르 1세가 사실상 시베리아를 러시아제국의 영토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시베리아 총독 가가린이 모은 황금 유물도 있지만, 좀 더 학문적인 경로?로 모은 유물도 있는데 1734~1744년 동안 제2의 캄챠트카 대탐험 프로젝트 중에 밀러가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의 유물(그림 3~5)을 모은 것도 포함된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콜렉션, 밀러의 발굴품

 

그림 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콜렉션, 밀러의 발굴품 2

 

제2의 캄챠트카 대탐험은 표트르 1세 이후 예카테리나 1세와 엘리자베타 여왕 기에 있었던 짧게 이야기 하면 시베리아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보낸 대 탐험대이다. 총 책임자는 베링이었고, 우랄에서 태평양 연안, 추코트카 반도까지 북극해안을 포함한 모든 시베리아를 조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시기에는 현재 러시아의 극동도 시베리아 지역에 포함되었다.

주축은 러시아과학아카데미였고 밀러는 역사 전문가로 참가하게 된다. 이 탐험대에는 500명이 넘는 과학자, 측량사, 노동자, 군인, 선원 등이 포함되었다. 주로 천연자원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원래 사는 주민의 경제와 역사, 지리 등을 연구하기 위해서 관련된 연구자 들이 대거 파견된 것이다. 북극해를 연구하기 위해서 쇄빙선 함대가 투입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밀러는 1735년 겨울에 크라스노야르스크를 방문해서 고대 무덤에서 구리로 된 유물을 대량으로 발견했다는 보고서를 남겼고, 그 지역에 구리광석이 산포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그 지역은 사얀(미누신스크 분지 부근)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 유물들은 주로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분포하던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타가르 문화의 산염소와 사슴모양 입상이며(그림 3,4), 타가르 문화의 이른 시기인 기원전 7세기 경의 유물이다. 이 뿐만 아니라 철제품도 있었는데, 등자와 재갈멈치(그림 5)이다. 출토된 곳은 미누신스크 분지인데, 등자를 사용하던 시기는 예니세이 키르키스 문화라고 불리는 기원후 9세기 경(자비투히나 1977)으로 보았다.

그러나 최근 연구된 유적에서는 알타이에서 등자가 발견되는 시점은 기원후 5세기 중반이다(세레긴). 자비투히나는 1940년대 연구를 근거(에프투호바 1948)로 예니세이 강(미누신스크 분지) 유역에서 발견된 밀러 의 등자를 기원후 9세기로 보았다.

 

그림 3. 밀러의 발굴품

 

그림 4. 밀러의 발굴품

 

그림 5. 밀러의 발굴품

 

그런데 밀러가 조사한 시베리아의 역사는 1937년에 간행되어 그의 시베리아 탐험에 관한 내용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조사한 유물로 소개된 책(밀러 1937)에는 말탄 궁수와 목을 돌리고 있는 사슴 및 귀걸 등이 소개되어 있는데, 오비강과 이르티시 강 사이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로 기록되었다(그림 5). 밀러는 크라스노야스크 지역 외에 오비강과 이르티시 강 주변의 무덤에서도 조사한 것이다.

아마도 표트르 1세에게 유물을 보낸 시베리아 총독 가가린과 거의 비슷한 지점에서 유적을 조사 했다.

흥미로운 것은 밀러, 가가린 등은 자신이 발견 혹은 취득한 유물을 모두 무게를 달아서 기입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당시에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보기에는 시베리아를 보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었을까?

 

그림 6. 밀러가 조사한 이르티시~오비강 유역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

 

참고문헌

Г.Ф. Миллер История Сибири. Том I. // М.-Л.: 1937. 608 с.(밀러 1937, 시베리아 역사1권)

Серегин Н.Н. Матренин С.С. 2016 Погребальный обряд кочевников Алтая во II в. до н.э. – XI в. н.э.(세레긴, 마트레닌 2016, 기원전 2~기원후 11세기 알타이 유목민의 무덤)

Элерт А. Х. 2008, По следам академического отряда Великой Северной экспедиции , том 18, №6//(에레르트 2008, 위대한 북방 탐험대의 학문적 분리를 위한 발자취)

Завитухина М.П. 1978 : Коллекция Г.Ф. Миллера из Сибири — одно из древнейших археологических собраний России. // СГЭ. [ Вып. ] XLIII. Л.: 1978. C. 37-40(자비투히나 1978, 러시아 고고학자료가운데 가장 오래된 밀러의 시베리아 수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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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중에는 매우 특이한 유물이 있다. 1716년 시베리아 총독이 보낸 유물목록을 다시 정리한 자비투히나(1977)의 글에서만 스케치 비슷한 유물이 있고 그 뒤로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자비투히나, 코랄코바 등이 표트르 1세의 유물을 정리했지만다른 유물에 비해서 관심이 적다.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중에서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것은 버클 장식이다(그림1). 보통 쌍으로 존재하는데, 동물투쟁문양이다. 이 문양은 스키타이시대부터 흉노, 훈-사르마트 시기까지도 이어지는 대단히 지속력이 강하다. 이곳에는 늘 등장하는 것은 동물외에도 그 배경이 되는 나무 혹은 나뭇잎이다. 특히 사람이 등장하는(그림 1-1,2)는 나무가 배경이 된다. 그림 1-1은 여성이 쓰고 있는 유물이 파지리크 유적의 2호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슷해서 기원전 5세기대의 유물로 생각된다. 그림 1-2는 그림 1-1보다는 늦다고 보는 의견과 비슷한 시점이라고 보기도 한다. 등장하는 인물 보다는 배경이 된 나무의 표현이 훈-사르마트시대(그림 1-4, 2-46~49)(사르마트문화 중 늦은시기, 사르마트: 볼가~돈강 유역에 걸친 스키타이 문화권내의 지역문화)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 중에서 허리띠 버클장식

 

그런데 가가린이 1716년에 보낸 유물가운데 ‘유니크’ 혹은 독특하다는 표현말고는 다른 말로 설명이 안되는 유물이 있는데 황금나무이다(그림 2-50). 가가린의 유물목록에서 50번이고 무게는 12 황금근(золотник, zolotnik, 러시아제국시절 황금의 단위, 1졸로트닉=4.26g)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환산하면 51.12g이다. 현대에 새로 측정한 바에 따르면 53.1g이다.

 

그림 2.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 중에서 1716년 가가린 목록 50번이 황금나무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림 1에 나오는 나무와 그림 2의 나무는 전혀 다른 나무이다. 그림2의 나무는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잎이 붙는 형태인데, 주로 종려나무라고 불리는 종이 대부분 잎이 끝에만 붙는다. 그러나 종려나무의 잎(한 가지에 가는 잎이 가지런하게 붙어 있음)과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이 나무도 변형된 모습처럼 생각된다. 그렇다면 황금나무는 벨트에 표현된 나무와 전혀 다른 나무이기 때문에 출토지점도 완전히 다를까?

모두 같은 소포 속에서 나와서 다른 유물과 출토위치가 다르더라고 해도 그 인근이지, 아프리카 유물을 보냈을리는 만무하다. 황금나무를 만든 사람은 어디서 이런 나무를 보았을까?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은 너무 유명해서 인터넷에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 황금나무는 사진조차 찾을 수 없고, 이 나무에 대해서 쓴 사람도 없다. 물론 손잡이가 양쪽으로 달린 황금 그릇(그림 2-45)처럼 페르시아계통의 유물일 수 있지만 반드시 그 곳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황금그릇은 어떻게 보면 매우 흔한 유물처럼 보인다. 흑해지역의 기원전 5세기 이후 유적, 볼가강의 필리포프카 유적 등에서 툭하면 나오는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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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나무의 잎을 다는 기술은 나무가지 끝에 고리를 매개로 잎을 단 것인데, 나뭇잎이 흔들릴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주로 관(冠)에서 많이 사용되는 방법인데, 오랫동안 북방민족들이 관을 만들때 사용한 방법 중에 하나이다.

 

 

참고문헌

Е.Ф. Королькова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первое российское археологическое собрание. // Основателю Петербурга: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в Эрмитаже]. СПб: «Славия». 2003. С. 190-199.(코롤코바 2003,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러시아의 최초고고학유물)

М.П. Завитухина Собрание М.П. Гагарина 1716 г. в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 АСГЭ. Вып. 18. Л.: 1977. С. 41-51 (자비투히나 1977,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표트르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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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가가린은 1716년 12월 12일 표트르 1세에게 두 번째 소포를 보낸다. 그때 황제는 외국에 출장중이었고, 모스코프가 소포를 대신받았다. 이 사실은 표트르 1세와 함께 동행한 내각대신에게 보낸 편지 1717년 1월 18일에 기록이 되어 있었다. 모스코프는 즉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가가린이 보낸 편지와 함께 유물의 목록을 작성했다. 가가린은 ‘1.5파운드가 되지 않는 작은 유물은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보내지 않는다고 편지에 적었다. 하지만 편지와 달리 1.5 파운드가 되지 않는 소형 유물도 보냈는데, 그 유물 중에 하나가 금으로 만든 여성상이었다.

모스코프는 토볼스크에서 온 목록을 복사하지 않고 자신이 새로 정리했다. 물론 편지에 기초한 것이었다. 모스코프가 한 작업은 유물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이었다. 1727년 12월 22일유물은 쿤스트카메라로 옮겼는데, 모스코프는 여성상을 ’스타투이카(статуйка)‘라고 불렀다. 작은 상(statue)이라는 뜻이다.

 

쿤스트카메라에서 제작한 첫 번째 카달로그는 라틴어로 출판되었는데, 안드레이 그레코프가 그린 수채화를 구리판으로 만들어 삽화로 만들어 제작되었다. 1727년 쿤스트카메라가 불이 나면서 구리판은 소실되었지만 일부 삽화는 남아 있다.(아래포스팅의 수채화)

 

2020.02.15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시베리아황금유물컬렉션] -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 시베리아 황금유물 컬렉션의 사연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 시베리아 황금유물 컬렉션의 사연

시베리아 알타이 산의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 출토된 네모꼴 나무방패를 살펴보다가 우리는 ‘솔로하’라고 하는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빗에도 비슷한 유물이 새겨졌다는 사실을 알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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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컬렉션 중에서 여성상

 

높이 3.4cm, 너비 0.9cm,두께 0.4cm(무게 10.12g)이며 벌거벗은 여성상이다. 뒤에는 구멍이 달려 있다. 눈, 코, 입이 매우 크고 발달했다. 손 모양이 특이한데 왼손과 오른손이 가슴아래부터 배까지 일렬로 붙이고 있다. 특이하게 양 손에는 팔찌를 끼고 있다. 목은 짧고, 어깨가 넓은편인데, 뒤에서 보면 신체의 비율은 어린아이와 가깝다.

 

아시다시피 어느 무덤에서 나온지 모르니 이 벌거벗은 여성이 어디 출신인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다른 유물과 비교를 해서 가늠할 수 밖에 없다.

 

G. Contenau et R. Ghirshman(1954), 보로비요바(1968), 푸가첸코바(1966) 등이 이 여성에 대해서 연구했는데 대부분 중앙아시아 혹은 아케미니드 왕조의 유물과 비교했는데, 손 모양과 정면자세, 비율 등이 그 근거이다. 대부분 기원전 5~4세기의 유물이었다. 대부분 어머니 조상을 형상화 한 것으로 의례품으로 보았다.

 

시베리아에서 벌거벗은 여성상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말타와 부레티 유적이다. 맘모스 상아를 깎아서 만든 것인데, 세세하게(손과 발)는 다르지만 가슴과 Y존으로 여성성을 강조하고 있고, 목이 없게 표현된 점, 나신이지만 머리에는 뭔가를 쓴 모습, 작은 크기 등은 수 천년 전의 유물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물론 이 유물로 표트르 1세의 작은 여성상을 연대 추정할 수 없고, 얼굴의 눈코입은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그림 2. 말타 유적 출토 여성상(1~23)과 남성상(24~29), 30,31은 불명확

 

참고문헌

 

Завитухина Золотая статуэтка из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и некоторые вопросы истории коллекции.// СГЭ. [ Вып. ] XXXVIII. Л.: 1974. С. 41-44(자비투히나 1974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 중에서 황금상에 대해서)

김재윤 2019  시베리아 선사시대 인간형상물의 변화에 대한 검토, 韓國新石器硏究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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