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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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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7. 27.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인 호흘라치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관이 출토되었다. 하단과 상단의 주제가 각각 다른데 마치 지도와 같다. 하단에는 그리스 여성과 새가 표현되었고 상판에는 나무, 사슴, 새가 표현되었는데, 그리스 북부의 초원지역인 사르마트 지역을 의미하고 있다.

 

사슴과 나무 주제는 사르마트 문화 이전, 스키타이 문화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우라루투의 유물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우라루투는 아나톨리 지역 가운데서 코카서스 남쪽에서 기원전 8세기경부터 자리잡고 있던 국가이다. 앗시리아 보다 더 강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새는?

 

호흘라치 무덤의 관에 있는 새는 날개를 펴고 전면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리스 여성의 양쪽에 2마리가 있고, 상단에도 날개를 접고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 새가 2마리씩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그림 1. 호흘라치 유적의 관에 있는 새 장식

 

하단의 그리스 여성과 새는 금으로 된 머리밴드와 따로 제작해서 붙인 것이다. 새의 배와 날개에는 유색의 돌로 상감되어 있다. 새의 부리끝에는 이상한 줄기가 달려 있다.

 

그런데 같은 시대의 고르피기아(케르치 해협의 그리스 도시)의 검에도 새가 있다. 하지만 새는 측면이고 토끼를 물어 뜯는 장면이다. 또 비늘장식처럼 새의 깃털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2. 고르피기아의 검 속에 표현된 새와 토끼

 

코롤코바와 자세츠카야는 이 새장식은 스키타이 문화에서부터 전해져온 새의 자세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켈레르메스 유적(그림 2-1) 뿐만 아니라 알타이의 유적(그림 2-2,3)에서도 양 날개를 편 새들은 출토되었다(그림 2).

 

그림 3. 스키타이 문화의 새 장식

 

호흘라치 유적에서 출토된 관의 하단 중앙에는 그리스 여성이 있지만 그녀의 옆에 있는 두 마리 새는 초원의 특징이다.

 

참고문헌

Королькова Е.Ф. 2008, Сарматские украшения и сибирское золото древних кочевников //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ов: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СПб.; Азов.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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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26. 09:22 사르마트 문화

 

 

기원전 4세기경 유라시아 초원에는 스키타이 문화를 뒤이어서 사르마트 문화라고 명명된 문화가 볼가 강~ 돈강 유역에서 생겨나서 서쪽의 드네프르강~드네스트르 강으로 퍼져나갔다.

이 문화는 2세기까지 지속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호흘라치 유적의 관은 가장 잘 알려진 유물 중에 하나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족들은 일찍부터(스키타이 문화) 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했는데,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앞이마를 가리는 밴드 형식과 머리높이 보다 높은 장식이 있는 크라운 형식이다. 밴드 형식의 머리장식은 뒤에 로마의 황제들도 착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포스팅 참고).

 

호흘라치 무덤의 관은 크게 상판과 하판으로 구분된다. 특히 상판은 나무와 사슴, 새로 구성되어 있고, 하단은 그리스 여성이 표현되어 있다. 이 머리장식은 머리밴드와 크라운이 결합된 형식이다.

호흘라치 관의 하단에 표현된 여성은 머리모양으로 보아서 아프로디테로 추정된다(자세츠카야 2009). 자세히 보면 여성의 귀 뒤로는 길게 머리를 땋거나 혹은 머리밴드에서 흘러내린 끈이 어깨 높이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머리형식은 1~3세기 아프로디테를 표현한 방법이라고 한다(로스토프체프 1993).

 

그림 1. 사르마트 문화의 호흘라치 유적 출토 관(冠)의 세부

 

그러나 머리띠(밴드)를 착용하거나 머리를 어깨 높이 혹은 그 아래까지 하는 긴 머리스타일은 단순히 그리스에서만 유행했던 머리스타일은 아니다. 특히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 왕조에서도 어깨 혹은 어깨 아래까지 오는 긴 머리 스타일과 머리띠를 착용한 사람들이 남아 있다. 머리밴드는 스키타이 세계에서는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인기가 많았다. 또 II~III세기 이란에서도 여왕과 남성사제는 머리띠 혹은 머리에 컬이 있는 스타일이었다(야센코 2006).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된 수많은 그리스로마의 사람을 표현한 테라코타제품들 가운데 머리띠를 착용하거나 긴 컬을 표현한 것은 여왕,여신,제사장이다(호자 2005).

 

그렇다면 호흘라치에서 출토된 관 속의 그리스 여성은 그리스에서 유행한 머리스타일이다. 하지만, 단지 그리스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인접한 지역의 유목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것이다.

 

사르마트 문화 시기에 머리밴드는 최상위 계급(통치자 및 귀족)만이 착용하지는 않았다. 일반인들도 착용했다. 단지 금과 화려하게 치장된 것은 고귀함, 부, 신의 권능을 부여 받은 상징으로 여겨진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가죽이나 천에 유리구슬이나 일반 구슬을 달아서 착용했다.

사르마트 문화의 유적에서는 아주 많은 구슬들이 출토된다고 한다. 유기물질이 잘 남아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목걸이, 팔찌 뿐만 아니라 꽤 많은 유물들은 머리밴드에 장식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아주 소략한 무덤에서도 구슬들은 출토된다.

 

참고문헌

 

Яценко С. А. Костюм древней Евразии. М(야센코 2006, 고대 유라시아의 의복)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Ростовцев М.И. 1993 : Парфянский выстрел. // ПАВ. №5. 1993. С. 98-107.(로스토프체프 1993, 파르티아 샷)

Ходза Е. Н. 2005, Вослед Прометею. Греческие терракоты в Эрмитаже. СПб(호자 2005, 프로메테우스의 유산.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그리스의 테라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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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24. 09:22 사르마트 문화

로마의 황제들이 북방민족의 머리장식을 착용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부터이다. 그들이 사랑한 은제 쟁반에 남겨진 황제의 모습으로부터 알 수 있다.

여기서 북방민족은 사르마트 문화와 그 이전의 스키타이 민족이다. 또 페르시아에서도 착용했다. 알려지기로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원정을 떠나서 돌아올 때 페르시아에서 가져왔다고 알려졌다.

 

일단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문화/사르마트 문화에서 보이는 여성의 머리장식은 앞이마를 가리는 머리띠가 있고 정수리 부근에 이등변삼각형(나무 모양)의 높고 복잡한 머리장식으로 치장을 하는 것이 흑해 북쪽에서 발견된다. 특히 앞이마를 가리는 머리띠 장식은 상당히 널리 유행한 장식 다. 기원전 5세기~4세기 알타이에서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도 확인된다.

 

그림 1. 기원전 4세기 사흐노프스키 쿠르간, 머리밴드 형식

 

그림 2. 스키타이 여성 머리장식 복원, 그림 1은 앞이마를 가리는 모습으로 사용되었다.

 

 

흑해지역에서 앞이마를 가리는 고리 모양의 머리장식은 기원전 7세기 멜구노프 유적에서도 나온다(그림 3-1). 이 시대에는 크라운도 있다. 단순한 머리밴드가 아니라 머리높이 보다 더 높게 하는 것이다(그림 3-2). 물론 이 유물은 그리스제품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이 유물이 왜 이곳에서 발견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림 3. 멜구노프 유적(상)과 켈레르메스 유적(하), 기원전 7세기

 

 

크라운 형태(머리 보다 높은)는 기원전 5세기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 5호분에서 나온 카페트의 여성들도 착용하고 있었다. 또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 출토된 남성들도 비슷한 관을 썼다. 이 유적은 기원전 5~기원전 3세기이다(아래포스팅 참고).

 

 

그림 4. 알타이 파지리크 유적 5호 카페트

 

2020.12.18 -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 아무다리야 강 유역의 기원전 5~3세기 신전

 

아무다리야 강 유역의 기원전 5~3세기 신전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는 유물 속에 인물이 많이 숨어 있다. 평면판 속의 사람들, 입체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은 모두 남성이다. 그런데 여성도 발견되는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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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초원에서 머리보다 높은 장식을 하는 관의 형태와 앞이마를 가리는 머리밴드 형식이 이미 기원전 7세기경부터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각각 존재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4세기경부터 변화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앞이마를 가리고 정수리를 높게 하는 장식이 특히 여성들 사이에 번져나갔다. 이는 여성의 무덤에서만 출토되기 때문이다.

 

둘 중에 누가 더 오랫동안 사용되었을까? 당연히 더 간단한 머리밴드 형식이다. 동유럽에서 발견되는 4~5세기 훈족의 무덤에서도 금으로 된 밴드 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다(그림 5,6). 이들은 천으로 된 머리밴드를 장식했다. 실제로 금 안쪽으로 유기물질이 부착된 채 남아 있는경우가 아주 드물게 있다. 흑해지역도 유기물질은 잘 남아 있지 않는다.

 

그림 5. 훈족의 머리장식, 5세기, 리굴스키 리만 유적(상)과 카라-아르크 유적(하)

 

그럼 사르마트 문화의 상징적인 호흘라치 유적의 관은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크라운 혹은 머리밴드?

 

그림 6. 호흘라치 유적의 여성관, 1세기

 

 

참고문헌

Яценко С. А. Костюм древней Евразии. М(야센코 2006, 고대 유라시아의 의복)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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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23.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의 여러 모습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로마 황제가 그려진 은제품으로 주제가 전환되었다. 사실 로마황제는 필자의 관심사도 아니고 잘 모른다. 그러나 사르마트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문화에서 나오는 왕관장식이 사르마트 문화 및 서아시아의 문화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하는데 이 부분을 전달한 것 뿐이다.

 

로마 북방의 민족들에게 머리장식은 단지 권력자들만이 것은 아니었다. 카자흐스탄 바티르 호수 옆의 동굴 속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머리띠 장식이 발견되었는데, 나무그릇에 담긴채 발견되었다. 일종의 린넨으로 된 끈으로 상단에는 얇은 붉은색 실크 천으로 덮여 있었고 150개의 금판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

 

그림 1. 카자흐스탄 바티르 호수 옆 동굴에서 출토된 머리끈, 길이 46cm, 너비 3cm

 

이러한 머리띠는 복잡한 머리장식의 일부일 것으로 여겨진다. 스키타이 머리장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앞머리를 머리띠로 가리고 뒤에 화려한 장식판으로 붙이는 것이었다(미로시나 1981, 포스팅 참고). 스키타이와 그리스 여성의 모자 및 관장식 복원을 연구한 미로시나에 따르면 비슷한 유물은 그리스에서도 있었다고 한다(미로시나 1983).

 

그림 2. 흑해지역의 스키타이 여성머리 복원(미로시나 1981)

2021.09.2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흑해의 여신] - 기원전 5~4세기 스키타이 여성머리장식

 

기원전 5~4세기 스키타이 여성머리장식

이제까지 보여드린 스키타이 여신인 거울을 들고 있는 여신인 티파티가 표현된 네모꼴의 장식판은 여성의 베일에 달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거울을 들고 있으면서 몸을 돌리고 있는 여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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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4세기 흑해지역의 스키타이와 사르마트 문화에서 발견되는 머리띠 장식은 사실 기원전 5세기 알타이에서도 나무로 된 것이 발견된다. 바르부르가지 유적에서 발견된 것은 꽃(장미) 장식이고 타샨타 II유적에서 나온 것은 사슴장식이다. 신기하게도 이들 나무장식은 그리스와 흑해북안에서 발견되는 황금티아라와 비슷하다.

 

그림 3. 알타이에서 발견되는 나무 디아뎀. 1: 바르부르가지, 2: 타샨타 II유적

 

자세츠카야는 머리띠 장식은 당시에 일종의 부적과도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우 복잡한 머리장식이더라도 앞머리를 가리는 머리띠를 하고 착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습이 왜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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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상상력을 보태면, 누군가 높은 권력자 중에 한명이 머리띠 장식 덕분에 목숨을 살렸을 수 있다. 날라오는 화살이 운좋게 머리띠 장식에 맞고 튕겨나갔다거나...스키타이 화살은 당대 가장 출중한 무기였기 때문이다..이러한 경위가 전해지고 전해져서 어떤 부적, 혹은 행운의 상징과도 같은 역할을 했을지 모른다. 

 

 

참고문헌

Мирошина 1981 — Мирошина Т.В. Некоторые типы скифских женских головных уборов IV-III веков // СА. №4.(미로시나 1981, 기원전 4~3세기 스키타이 여성 머리장식)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7. 22.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가 유라시아 초원의 서부 지역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세기 가량으로 이 문화의 후기인 1세기경에는 남쪽에 로마 제국이 영역을 확장했다. 특히 1세기 이후에는 아부구스트, 네로, 트리야누스는 중부유럽 뿐만 아니라 도나우, 드네프르, 볼가 강~돈강의 하류에 로마의 군대를 이리저리 돌리며 배치했다(포스팅참고)

2022.07.20 - [사르마트 문화] - 1세기 돈 강 유역에서 발견된 로마의 은쟁반

 

1세기 돈 강 유역에서 발견된 로마의 은쟁반

유라시아 서부의 사르마트 문화에서는 특히 동쪽의 돈강 유역 부근의 고분에서는 로마제 은제 식기 등이 발견된다. 특히 은제 쟁반의 가장 중앙에는 원판에 그리스로마신화가 주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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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위 계급이 사용하던 그리스로마신화가 들어간 은쟁반이 시기를 달리하며 중부유럽과 사르마트 문화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볼가강~돈강 유역의 쿠르간에서 은제쟁반이 있다.

 

북방 초원에서 발견되는 은제쟁반이 팔기 위해 만든 물건이 아니라는  외교관계 혹은 화친을 위한 물건이라는 것은 당시의 로마에서 은제품을 매우 사랑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로마의 은(銀) 사랑은 황제의 얼굴이 들어간 장식용 원판을 은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흑해북안의 케르치 해협에 위치한 보스퍼로스 왕국의 4세기 네크로폴에서 출토되었다. 콘스탄티누스 II세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다(그림 1).

 

그림 1. 4세기, 보스포러스 왕국의 네크로폴 출토. 콘스탄티누스 II세(1,2), 은제품으로 금박을 입혔다.

 

승리의 장면을 표현한 이 은제 원판에는 콘스탄티누스 II세는 머리에 머리띠를 차고 있었다. 원래 머리띠는 로마의 황제들이 착용하지 않았다. 아니 증오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주와 금판으로 장식된 머리띠를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황제부터 쓰기 시작했다. 처음 쓴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 머리띠를 처음 들여온 사람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기원전 323)이 동방원정을 떠나서 페르시아 왕관을 들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통치자는 동방의 장식을 증오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황제의 의상에 없어서는 안되는 장식이 되었다(자세츠카야 2011).

 

은제 원판의 콘스탄티누스 II세는 승리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고 그는 화려하게 치장된 의장용 군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띠도 금과 진주로 장식된 것이다. 그의 모습은 다른 은제 쟁반에도 발견되었다(그림 2).

 

그림 2. 콘스탄티누스 II세. 은제 쟁반 위에 표현됨. 흑해북안의 보스퍼러스 네크로폴에서 출토됨.

 

뿐만 아니라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와 그의 아들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의 머리, 라벤나에 있는 성 비탈리 교회의 유명한 모자이크에 있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테오도라 황후의 머리에도 비슷한 장식이 있다(자세츠카야 2011).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로 로마의 황제와 황후들은 증오하던 동방의 머리장식을 착용했다.

사실 머리띠 장식은 로마 북방의 민족들에게 아주 오래부터(스키타이 문화) 애용되던 의상장식이라는 것은 이 블로그를 계속 보는 사람은 알 것이다.

 

참고문헌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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