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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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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0. 19. 12:03 고깔모자와 코트

유라시아 서부지역의 스키타이 문화는 고대 이란 지역의 국가와 많은 관련성이 있다. 앗시리아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가 존재하는 동안 북방에는 스키타이 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특히 다리우스 1세가 스키타이 왕을 잡은 것은 매우 큰 업적이었나 보다. 그의 업적을 적어놓은 베히스툰 비문에서도 유독 스키타이 왕을 뚜렷하게 그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와 전투하는 장면이 새겨진 도장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베히스툰 비문의 스키타이 왕은 그의 상징인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었고, 페르시아 도장에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실린더 모양의 도장은 페르시아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다양한 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여러 종류의 돌을 사용했는데, 그 중에는 푸른색 옥수석(blue chalcedony)으로 만들어진 길이 2.15cm의 도장에 다리우스와 스키타이 왕이 싸우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그림1).

 

그림 1. 영국 박물관에 보관된 페르시아 도장, 발견된 곳 모름. 다리우스왕의 승리

 

 

이 유물(그림 1)을 다리우스 왕의 승리를 그린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나무 위에 있는 표식 때문이다. 이것은 아후라마즈다’(조로아스터교의 신) 라고 하는 신의 표식이다. 관을 쓴 페르시아 인들은 다른 도장에도 있지만 아후라마즈다의 표시가 없으면 왕으로 인식하지 않았다(그림 2). 베히스툰 비문에도 가장 상단에 아후라마즈다의 표시가 있고 그 아래에 다리우스왕과 그가 잡아온 포로들을 잡아서 세워 놓았다.( 이 비문의 내용은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이 전하는 사건과 달라서 이 비문에 대해서 찬반의 논란이 있다.)

아후라마즈다의 표식이 없는 도장(그림 2)에도 고깔모자와 고리투스를 든 이는 있지만, 영국박물관의 설명에는 그를 스키타이 인으로 단정하지는 않았다(John Curtis and Nigel Tallis 2005).

 

 

그림 2. 영국 박물관에 보관된 페르시아 도장, 페르시아 남성과 고리투스를 찬 남성의 전투장면. *고리투스-스키타이 활통

 

 

 

참고문헌

Forgotten Empire: the World of Ancient Persia (London 2005) (edited by John Curtis and Nigel Tallis)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0. 18. 12:04 고깔모자와 코트

유라시아 서부지역에 철기시대 스키타이 문화는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존재했으며, 현재의 이란에는 앗시리아부터 페르시아 제국이 존재했다. 그래서 스키타이 문화와 고대 이란 국가는 서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양 지역 모두 동물문양장식을 이용한다. 하지만 자연환경이 다르고 그곳에 살수 있는 동물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선호하는 문양에도 차이가 있다.

 

기원전 7세기 코카서스 북쪽의 쿠반강에는 켈레르메스라고 하는 무덤이 만들어졌다. 무덤은 20세기 초에 발굴했는데, 이미 많은 유물이 유실된 상태였다. 하지만 스키타이 문화가 얼마나 인접한 국가와 영향을 받았는지 잘 알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코카서스 남쪽의 아나톨리 지역의 우라르투, 앗시리아, 그리스의 유물과 스키타이 문화 유물까지 그나마 남아 있다.

특히 앗시리아의 유물은 금으로 된 잔과 투부, 의자 장식들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수입품이라고 단순하게 알려져 있지만, 외교품일 가능성이 크다.

 

철로 된 투부는 전투용 도끼를 의미하는데 자루 부분은 금으로 장식되어 있고, 동물문양으로 뒤덥혀 있다(그림 2). 특히 동물문양은 북방의 스키타이 문화와는 다르다. 가장 쉽게는 동물의 앞다리와 뒷다리를 구분하는 선을 2줄로 넣는 방법(그림 1의 우측)은 북방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페레보드치코바).

 

그런데 필자가 간과한 점이 하나 있는데, 투부에 스키타이 사람이 표현되어 있었다. 고깔모자를 쓰고 투부를 아래로 들고 있는 사람(남성)이다(그림 1의 좌). 같은 유적에서 발견되는 금잔은 틀림없이 이란의 전통이지만, 투부는 스키타이 왕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제작했을 것도 같다.

 

그림 1.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발견된 투부 중 세부

 

그림 2. 켈레르메스 유적의 투부

 

 

 

기원전 7세기에도 앗시리아 사람들은 스키타이 사람들이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고깔모자의 흔적을 알 수 있었다. 또  이 유적에서 발견된 순도 100%의 앗시리아의 금잔과는 달리, 이 투부를 만들때 선물 할 대상을 매우 신경썼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단순한 수입품이라기 보다는 외교품일 가능성도 크다.

 

 

참고문헌

Яценко С.А. 2006 : Костюм древней Евразии (ираноязычные народы). М.: 2006. 664 с. («Культура народов Востока»)(야센코 2006, 유라시아의 고대 의복)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0. 17. 10:45 고깔모자와 코트

유라시아 초원 서부지역의 스키타이 사람들은 인접한 지역과 교류한 흔적이 기원전 7세기경부터 확인된다. 아시다시피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우라루투, 앗시리아, 그리스와 관련된 유물이 나왔다. 그리고 기원전 6~5세기 이후에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유적과 유물에 스키타이 사람들이 나타난다.

 

특히 페르시아와 관련해서는 페르세폴리스의 아파다나 궁전이나 다리우스 1세의 Behistun 비문 등에서 스키타이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스에서는 채색토기 안에 스키타이 인들이 종종 등장한다. 외국인에 비친 스키타이 사람들로 자신들의 스타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마도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지는 않는 것 같다.

 

베히스툰 비문은 다리우스 1세의 조상 및 그의 업적을 적은 것이다. 업적은 주로 자신이 통치한 영토를 적은 것인데 23개의 국가 명칭이 적혀 있다. 거기에는 스키타이도 해당된다. 아케메스 왕조가 최대 영토를 이루었을 때, 카스피해 우측의 스키타이 땅 일부를 삼킨 것으로 알려졌다.

그림 1. 기원전 500 페르시아 제국, William R. Shepherd, 1923.

https://maps.lib.utexas.edu/maps/historical/history_asia.html

 

그리고 비문의 뒷부분에서는 키루스 II세와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의 죽음으로 초래된 반랍을 진압하기 위해서 1년동안 싸운 전투에서 끌려온 포로를 새겼다. 9명의 포로를 목에 줄을 메어서 끌고 오는 장면인데, 고깔모자를 쓴 스키타이 왕이 가장 마지막에 있다(그림 2).

각 포로의 상단에는 누구인지가 적혀 있는데, 가장 마지막 인물의 상단에는 Skunkha는 뾰족한 모자를 쓴 사카(스키타이)의 왕이다고 씌여 있었다.

-->https://web.archive.org/web/20200310112440/https://www.livius.org/sources/content/behistun-persian-text/behistun-minor-inscriptions/

 

 

그림 2. 기원전 6세기경 베히스툰 비문의 일부

 

 

그림 3. 기원전 6세기 말 베히스툰 비문을 그린 것. 작가는 알 수 없음. Всемирная история (в четырёх томах) Древний мир., «Специальная литература»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1997.

 

어느 왕이나 그 치적은 부풀려지게 마련이고, 각 나라 왕들의 목에 줄을 메고 가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인 표현일 것이다. 아파다나 궁전에는 여러 국가의 대표단들이 그려져 있는데, 다들 다양한 모자를 착용하고 있다. 베히스툰 비문에서는 스키타이 왕에게만 고깔모자를 그려놓았다. 아마도 스키타이 왕을 잡은 것이 가장 큰 업적이었던 모양이다.  

 

필자가 궁금한 것은 유라시아 서부에서 언제부터 고깔모자를 썼는가 하는 것이다. 이 비문을 보아 기원전 6세기 말에도 이들은 고깔모자를 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Яценко С.А. 2006 : Костюм древней Евразии (ираноязычные народы). М.: 2006. 664 с. («Культура народов Востока»)(야센코 2006, 유라시아의 고대 의복)

 Всемирная история (в четырёх томах) Древний мир., «Специальная литература»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1997.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여성들이 썼던 원통형 모양의 티아라는 이웃한 지역에서도 사용되었다. 우라르투와 페르시아 등지에서도 주로 남성과 그리핀이 쓰고 있다. 아마도 당시에 유라시아에 매우 유행했던 모자였다고도 여겨진다.

 

고깔모자는 스키타이 사람들이 주로 쓰고 다니던 모자이다. 흑해지역의 대형무덤에서 나온 것들은 유기질제 모자(가죽, 천)에 금장식을 붙여서 만들었고 양 옆으로 베일을 달았다.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는 고깔모자를 쓴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발굴되었다. 베일과 장식판의 위치 남은 유물로 보아서 고깔모자를 썼다고 밖에 볼 수 없다(그림 1).

 

그렇다면 삼각장식판으로 고깔모자를 만든 유물은 매우 드문경우이다. 그래서 아마도 트라키아 문화와 매우 관련이 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깔모자는 남성들도 썼다. 실제로 유물로 발견되지 않는데 대부분 썪어서 없어져서다. 대신에 유물 속에 고깔모자를 쓴 남성들이 관찰된다. 쿨-오바 유적의 황금 항아리 속의 남성, 이웃한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 궁전벽화에도 고깔모자를 쓴 남성들이 나온다.

 

그림 1. 체르토믈리크 유적의 출토 예

 

그림 2. 페르세폴리스의 궁전벽화

 

하지만 이들은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유물이다. 기원전 7세기 아르잔-2호 여성은 사슴장식을 한 고깔모자를 착용하고 있었고, 기원전 5세기에도 그 전통은 이어진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5~4세기 고대 흑해연안에 살았던 스키타이 여성들 중에는 유독 화려한 모자를 썼던 경우가 무덤 속에서 종종 발견된다. 스키타이 칼라프라고 불리는 이마를 가리도록 된 모자를 일컫는다.

 

또 티아라 라고 불리는 유물도 발견된다. 몇몇 무덤에서 발견되는데, 스키타이 칼라프 중에 높은 종류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좀 다르다. 유기질제로 된 모자 틀에 장식을 붙여서 만들었고, 상단이 편평하다(그림 3).

 

이들은 실제로 유적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여성형상물에서도 확인된다. 알렉산드로프스키폴 유적에서 발견된 아르김파사는 티아라를 착용하고 있다(그림 1). 또 비슷한 시기에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 5호의 카페트 속 여성도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데, 티아라와 비슷하다(그림 2).

 

 

그림 1. 알렉산드로프스키폴 유적, 얼굴 위는 단순한 모자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림 2. 파지리크 유적 5호의 카페트 부분

 

그림 3. 크라스니이 페레코프 유적 출토

 

스키타이 칼라프 중에서 메토피드라고 불리는 이마장식을 제외하고는 티아라, 고깔모자, 칼라프 모두 머리 위로 높게 하는 것이 스키타이 여성들의 모자 특징이다. 모자는 높을수록 중요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시베리아의 아르잔-2호의 주인공 무덤을 보면 고깔모자의 전통은 여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