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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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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에 해당되는 글 194

  1. 2021.12.02 기원전 9세기경 우라루투 수도
  2. 2021.12.01 기원전 8세기 절벽 위의 무덤
  3. 2021.11.30 태양신의 사원 투쉬파
  4. 2021.11.29 아르메니아의 태양 신(神)?이 표현된 문양
  5. 2021.11.27 기원전 8세기 우라르트에서 발견된 하수관

 

코카서스 남쪽에 위치한 우라루투는 코카서스 북쪽에 있던 스키타이 세계와 앗시리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그루지아 국경인 예레반의 수도에는 예레부니와 테이시바이니 성곽이 남아 있고, 터키에는 반 호수 부근에 사르두리 II세의 비문이 발견된 성곽이 남아 있다. 우라르투의 수도였던 투쉬파 혹은 시비니 신의 사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투쉬파는 사르두리 II세 이전부터 중심지로 사용되었는데, 사르두르 I세(기원전 844-828년)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가 반 절벽의 서쪽기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아들인 Ishpuini(기원전 828-810년) 왕이 통치할때까지는 늘 앗시리아에 공격을 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철제품의 수준이 올라가면서 암벽을 파서 동굴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생기게 되었고, 요새를 만들 수 있었다. 앗시리아는 우라르투의 수도를 쉽게 공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곳에 우라루투가 수도를 삶은 이유를 환경적인 요인으로 삶는데, 아르메니아 고원은 대륙성기후로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데, 이곳은 겨울에도 그렇게 춥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천연요새의 역할을 했고, 시비니 신의 숭배가 반 암벽과 관련되어 있다는 추측도 있다.

 

사르두르 I세의 아들 Ishpuini 통치 이후 그의 아들 Menua(기원전 810~786년) 아래에서 집중적으로 개발되었다. Ishpuini는 우라르투의 신 칼디를 포함한 사원지를 건설했다. 당시에 동굴을 파고 왕실의 방도 만들어졌다. 여러 층의 건물이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모형화 한 청동유물이 발견되었다. 현재는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졌다(그림 1).

 

 

그림 1. 건물과 탑의 모형물, 청동제품, 탑의 높이는 16.5cm, 건물의 높이는 30.5cm

 

메뉴아는 투시파 주변에 물을 제공하기 위해서 수로를 70km 가량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 호수의 물은 염분이 많았기에 관개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수로는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메뉴아 이후에 Argishti I(기원전 786~764년)과 Sarduri II세가 통치하면서 우라루투는 전성기에 이르렀다. 아르기쉬티 I세와 사루두리 II세는 반 절벽의 다른 면에 자신의 연대기를 비문에 남겼다. 이 비문은 우라루투 설형문자가 남아 있는 가장 큰 것이다.

 

현재 터키 국경에 있는 투쉬파는 기원전 9세기부터 우라루투의 수도로 사용되었으나 요새를 짓기전에는 강력하지 못했고, 요새를 짓고 난 이후 아르기쉬티 I세 지배기 기원전 8세기 경부터 앗시리아를 막아내었다.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에 스키타이 세계와 교류하던 우라르투는 기원전 764~735년에 현재의 터키 국경에 있는 반 호수에 인접한 절벽 위에 성을 만들었고 그 곳이 당시의 수도로 알려졌다. 투쉬파 라고 하는 곳인데, 여러 국가에서 이 곳을 발굴했지만 가장 운 좋은 것은 1915~1916년의 러시아제국고고학위원회였다. 사르두리 II세의 비문을 발견해서 여기가 그의 도시라는 것을 밝혀 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왕실 포도원이 인접한 곳에 있었다고 한다. 20세기 초까지 이 곳의 주요 산업 중에 하나가 와인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코카서스 북쪽의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은제 각배(여성이 새겨져 있는)가 그냥 출토된 것은 아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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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뿐만 아니라 액체로 된 음료는 어울리는 그릇이 있다. 커피도 잔이 따로 있고, 차도 찻잔이 있고, 맥주도 회사 마다 자신의 로고가 있는 잔이 있다.

 

반 절벽은 높이 80m로 바위가 자연적으로 가파른 상승을 했기 때문에 천혜의 자연 요새이다.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서쪽 끝은 반 호수와 접하고 있다.

 

왕실로 추정되는 공간은 남쪽 절벽에 입구가 있는 곳이다(그림 1).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면(그림 2) 큰 홀이 있고, 옆에는 작은 방 3개가 붙은 구조이다. 절벽을 동굴처럼 파서 공간을 마련했다.

 

그림 1. 남쪽 절벽에 입구가 있는 큰 방과 작은 방의 평면도(가장 위)와 단면도

 

우라루투 석공들이 다양한 목적을 위해서 내부 공간을 인공적으로 조각해서 만든 것이다. 일부는 슐츠가 발견한 공간도 있다. 모든 인공 동굴의 용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왕실의 매장을 위해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남쪽 경사면의 위쪽에 위치한 방은 천장이 매우 높은 곳인데(그림 1), 궁전의 특징이고,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 중세 아르메니아 역사가 Movses Khorenatsi가 이 건물을 앗시리아 건물로 생각했으나, 러시아 연구자들이 찾아낸 바와 같이 우라루투 왕 사루두이 II세의 비문이 발견되었다.

 

그림 2. 왕의 계단

 

그림 3. 남쪽 절벽 위의 입구, 왕의 방이라고 불리는 곳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에 위치한 우라르투 사르두리(Sarduri) II세 때의 수도는 투쉬파였다. 현재 터키 국경내에 있으며 반 호수에 있는 절벽 위에 사원(그림 1)을 만들고 그곳에 왕이 머물렀다고 한다. 시비니 신의 사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반(Van) 절벽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프랑스 연구자인 슐츠로 19세기 초에 발견했다. 슐츠는 처음에 중세시대 아르메니아 역사가 Movses Khorenatsi가 남긴 연구를 밝히기 위해서 이곳을 찾았다. 반 호수 기슭에 건설된 도시가 아시리아 여왕의 명령이라는 내용이었고, 슐츠는 반 호수 기숡에 세워진 사원지가 앗시리아의 건축물이라고 생각했다. 발견한 암석과 설형문자가 새겨진 비문을 스케치 했다. 그러나 그는 1829년 쿠르드족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작업은 1840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후에 슐츠가 스케치 한 비문은 앗시리아어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고, 중세 아르메니아어 일 수도 있다고 추측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영국박물관의 원정대와 독일 원정대가 투쉬파를 발굴하고 그 때 가져간 유물은 현재 영국과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독일에서 그 내용이 출판되었다.

 

1915~1916년 동안 반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군대에 점령되는 동안 러시아 제국고고학회(그림 1)가 투슈파에서 발굴을 했는데 그 때 동쪽 경사면의 틈새에 있는 사르두리(Sarduri) II세의 비문(그림 2)을 발굴하게 되었다. 그는 우라르투의 왕으로 기원전 764~735년 동안 제위했다.

 

그림 1. 러시아 제국고고학 위원회의 발굴, 군인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짐

 

그림 2. 사르두리 II세의 비문

 

러시아 제국고고학회의 발굴 이후에는 대규모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8년 영국 탐험대가 소규모 작업을 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은 불법적인 도굴이 만행되던 곳이었다.

 

* 유적의 위치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음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에 있었던 기원전 9세기부터 존재했던 우라르투는 기원전 8세기경에 세워진 에레부니 성곽과 기원전 7세기에 세워진 테이시바이니 성곽을 남겨둔채 멸망했다. 테이시바이니 성곽을 무너뜨린 것은 스키타이 사람들로 알려졌지만, 우라르뜨가 완전히 망한 것은 기원전 585년 메디아 인들의 침략에 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흑해 북안에 살던 스키타이 사람과 키메르치 사람들도 한 몫을 했다고 한다.

 

복잡한 지형만큼이나 민족도 다양하고 역사도 그랬던 것 같다. 우라르트가 있었던 지역은 기원전 6세기 이후에 아케메니드 왕조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에레부니 유적에는 기원전 5~4세기 문화층에서 아케메니드 왕조의 은제 각배 등도 발견되고, 칼디 신의 사원도 방형으로 개축되어서 사용되었다.

 

우라르트는 3신을 믿었는데, 칼디 신, 테이시바 신, 시비니 신이다. 칼디 신은 믿음의 신이고, 테이시바 신은 전쟁의 신이며, 시비니 신은 태양의 신이다. 그의 다른 이름은 아르티니스 이다. 아리티니스는 현대 아르메니아 언어에 떠오르는 태양을 의미한다고 한다.

 

칼디 신은 사자를 타고 있고, 테이시바 신은 소를 탄 모습이지만, 시비니 신은 머리에 청동으로 된 솥을 얻고 있다(그림 1). 유물에서 청동 솥(그림 2, 3)에 붙은 날개 달린 인간의 모습을 한 사람들은 시비니 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라르트 종교의 대부분 요소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차용되었다. 시비니 신은 앗시리아 신 샤마쉬와 같은 존재로 알려져 있다. 투실라는 시비니 신의 사원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투실라는 우라르투의 기원전 735~675년의 수도였는데, 반 호수를 마주보는 반 절벽에 세워진 도시이다.

 

그림 1. 시비니 신의 모습

 

그림 2. 청동솥에 표현된 시비니 신

 

그림 3. 청동솥

 

그림 4.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사르두리 2세의 헬멧에 표현된 사람들

 

사실 필자가 이렇게 우라르투를 파고 있는 이유는, 코카서스 산맥 북쪽에 있는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거울과 철검의 검집에 새겨진 문양 때문이다.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신(神)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찾는 과정 중에 와이너리, 맥주 양조장, 참기름 제조공장 등 어마어마 한 곳을 발견하기는 했다.

세상에는 신이 너무 많다.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신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부의 기원전 8세기 유적인 예레부니는 물 공급 및 배수 시스템이 잘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으로 물을 공급했던 장치가 있는데 원통형 돌 파이프를 통해서 지하의 물을 중력을 이용해서 공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림 1. 예레부니 성곽의 칼디 신 사원 바닥의 시스템

 

 

그림 2. 하수구관으로 사용된 돌 관

 

 

그림 3. 하수구 관의 돌 관 배수구 단면

 

원통 모양의 돌 파이프 외경은 40cm, 내경은 10cm가량이며, 파이프 사이는 점토로 밀봉되었다. 수원은 예레부니에서 7km 떨어진 가르니 산의 샘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수관은 바닥에 구멍을 파고 보이지 않도록 설치되었는데, 성곽이 포위될 경우에 전략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수관에서 나오는 물은 도시의 전 구역에서는 사용되기에는 물이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성곽의 안뜰에서는 빗물을 모아서 배수하는 장치가 발견되었다.

 

참고문헌

Оганесян К.Л. Арин-берд. I. Архитектура Эребуни по материалам раскопок 1950-1959 гг// Изд-во АН Армянской ССР, 1961. — 116 с. —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раскопки в Армении, №9).(오가네샨 1961, 1950~1959년 발굴된 자료로 본 아린-베레드 I유적, 예레부니 건축기술)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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