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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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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성곽, 마을, 생산 유적 등'에 해당되는 글 24

  1. 2021.08.10 돈 강 유역의 스키타이 성곽 유적
  2. 2021.08.09 동유럽의 기원전 4세기 철 생산 기지
  3. 2021.08.08 스키타이 문화의 성곽
  4. 2021.08.04 스키타이 사람들의 성곽

 

스키타이 문화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유적은 무덤이다. 드물지만 흑해 주변의 드네프르 강 유역과 돈 강 유역에는 스키타이 문화의 성곽 유적이 존재한다. 주로 강의 어귀에서 교통로에 위치한다.

 

카멘스코예 성곽은 드네프르 강 유역에 위치한 스키타이 성곽이다. 기원전 4세기경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 성 내부에는 아크로폴(아크로폴리스)라고 불리는 그리스인의 정착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 구역은 매우 일부이고, 성곽지의 대부분은 스키타이 사람들의 영역이었다.

 

조금 더 서쪽으로 이동해서 돈 강 유역에 위치한 엘리자베인스코예 성곽을 살펴보도록 하자.

유적은 아조프해에 가깝게 위치하기 때문에 그리스와 관련성은 좀 더 깊어 보인다.

엘리자베트토프스코예 성곽은 두 줄로 된 성곽 안(성의 면적은 40~55헥타르, 평면형태 사다리꼴)에 마을 유적이 만들어진 것이다. 남아 있는 집의 건축물은 그리스 기술로 지어진 것이다. 지하에 땅을 파고 나무기둥을 세워서 그 사이를 벽돌로 채우는 방법이다(그림 2,3). 지붕은 지표면 높이로 만들어졌다(그림 4)

성곽의 가장 중앙 내부에 아크로폴리스 라고 불리는 구역 안에는 그리스식 집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식 건물지가 들어선 것은 기원전 3세기의 1/4분기에 세워진 것이고, 그 구역은 12헥타르 정도이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그림 1.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평면도(위: 1928년 작성, 아래: 1972년 작성),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824년이고, 1964년 이후로 매년 발굴을 했다.

 

 

그림 2. 엘리자베트포스코예 성곽 내의 그리스 식 집

 

그림 3. 엘리자베트포스코예 성곽 집의 벽 구조

 

그림 4. 복원도

 

성벽이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6~5세기 경이고, 이미 그 전부터 스키타이 사람들이 살았으며, 카멘스코예 성곽처럼 아주 적은 공간을 차지했다. 스키타이 사람들은 집자리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계절에 따른 유목민이 머물던 장소로 겨울 도로가 남아 있다.

 

이 유적은 교통로에 위치하는데, 바로 인접한 돈강의 항구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이 스키타이 유적이라는 강력한 증거 중에 하나는 마을 앞에 위치한 스키타이 쿠르간 때문이다. 퍄티 브라체프 쿠르간(그림 5)이라고 불리는 쿠르간인데, 5기의 고분이 한 그룹을 이루고 있다.

 

그림 5. 퍄티 브라체프 쿠르간

 

유적이 사용되는 동안 마지막에 남은 건물구조가 그리스식이어서 아크로폴리스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지만, 유적은 그리스가 세력을 팽창하기 이전인 기원전 6세기부터 존재했고, 스키타이 철제 무기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물론 그리스식 토기도 마찬가지로 많이 출토된다.

 

참고문헌

Марченко К. К., Житников В. Г., Копылов В. П. Елизаветовское городище на Дону. М., 2000(마르첸코, 지트니코프, 코피로프, 2000, 돈 강 유역의 엘리자베트토프스코예 성곽)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4세기 드네프르 강 유역의 카멘스코예 성곽은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이다. 유적에서는 청동과 철을 생산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도가니(그림 1), 화덕자리 및 그 과정에서 사용된 철 생산하던 끌과 망치(그림 2)와 같은 역할을 도구도 발견되었다.

 

그림 1. 카멘스코예 성곽에서 출토된 기원전 4세기 도가니편

 

그림 2. 카멘스코예 성곽, 철 끌과 망치

 

유물 가운데는 선철을 가공해서 1차로 만든 철 소재가 발견되었다(그림 3-1~4). 뿐만 아니라 청동 화살촉(그림 3-5)과 청동 솥의 용범(거푸집)(그림 3-6)도 발견되었다. 유적에서는 당연히 청동과 철로 된 화살촉(그림 4)이 있다.

 

 

그림 3. 카멘스코예 성곽, 1~4: 1차 철 소재, 5-청동화살의 거푸집(편), 6-청동솥의 거푸집(편)

 

그림 4. 카멘스코예 성곽, 화살촉, 1-12: 청동, 13~15: 철제품.

 

청동으로 된 화살촉은 1점을 제외하고는 청동화살촉의 형태는 크게 2가지로 구분된다. 단면이 삼각형이며, 자루를 끼우는 부분이 튀어나오지 않은 것(그림 4-2~7, 9, 12)과 약간 바깥으로 돌출한 화살촉이다(그림 4-8, 10). [물론 이외에도 화살촉 신부(몸체)에는 홈이 있지만 이는 부차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 화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루와 결합되는 부분이다]

자루 끼우는 부분이 외부로 길게 튀어나온 청동화살촉 1점(그림 4-1)은 가지가 붙었는데, 기원전 7세기부터 있었던 형태이다.

 

철제 화살촉(그림 4-13~15)은 자루를 끼우는 부분이 청동에 비해서 길다. 아마 소재에 의한 차이로 인해서 생겼을 것 같다.

 

카멘스코예 유적에서도 동물장식은 발견되는데 독수리 머리(그림 5-2), 사자머리(그림 5-3) 등이 발견되었다. 사자머리는 청동팔찌의 끝에 붙은 것이고, 독수리 머리는 정확하게 어디를 장식한지는 알 수 없지만 은제품이다. 재갈멈치를 장식했던 발톱(그림 5-1)도 순동제 유물도 발견되었다. 사자다리 모양의 청동도장(그림 5-5)도 발견되었는데, 금제 장식판을 만들 때 사용된 것이다.독수리 눈모양이 달린 철제 장식품(그림 5-6)도 있다.

 

그림 5. 카멘스코예 성곽의 동물장식

 

카멘스코예 성곽에서 출토된 유물은 철기와 청동을 가공하기 위한 유물 외에는 동시기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화려한 동물장식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철과 청동을 실제로 생산한 유적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청동생산 가운데 화살촉을 제외하고는 다른 청동무기 제작은 보이지 않고, 대신에 장신구와 솥 등을 생산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 이전과 청동을 사용하는 범위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직접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Граков Б. Н. Каменское городище на Днепре // Материалы и исследования по археологии СССР. М., 1954. № 36(그라코프 954, 드네프르 강의 카멘스코예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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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의 주거 유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기원전 4세기 카멘스코예 성곽(Каменское городище, Kamenskoye settlement)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카멘’은 러시아어로 돌이라는 뜻]

 

발견당시 19세기는 러시아제국이었으나, 현재는 우크라이나 국경 속에 있다. 처음 유적의 평면도가 그려진 것은 1899년으로 이때에 발굴이 시작되었다(그림 1).

주로 발굴은 1938년부터 1950년 사이에 이루어졌고, 1980년대에도 성벽조사가 이루어졌다(그림 2).

 

그림 1. 19세기에 작성된 유적의 지형도와 평면도

 

그림 2. 1938~1950년도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의 평면도와 발굴위치

 

 

그림 3. 1950년도 발굴범위 9에서 확인된 지상식 주거지

 

 

그림 4. 1950년도 발굴범위 9의 3번 주거지의 화덕자리 평면도와 단면도

 

이곳에서는 주거지가 수혈식 집도 있지만 대부분 지상식 주거지이고, 집 내부에 화덕자리가 있는 모습이다.

필자가 이 자료를 찾은 이유는 ‘아크로폴’ 때문이다. 아크로폴이라고 한 것이 필자가 알고 있는 ‘내성’의 의미인지 아니면 또 다른 것이 있는지 궁금했다.

카멘스코예 성곽은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서 성벽을 양쪽 끝에 쌓았다. 지형상 좁은 곳에만 성벽을 쌓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크로폴 이라고 불리는 곳에서는 그리스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그리스식으로 공간을 나눈 구획은 확인되지만 사실 스키타이 사람들이 살았던 구역과 구분되었다. 한 공간에 거주한 것은 맞지만, 스키타이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좁은 공간에서 살았다.

 

생각보다 금속을 생산한 장소가 많이 발견되었다. 발굴범위 바깥에서도 여러 곳에서 금속기 생산하는 층이 발견되었다(그림 2). 이는 발굴 전에 그 층이 많이 노출되어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그라코프는 이 유적이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생산과 무역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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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Граков Б. Н. Каменское городище на Днепре // Материалы и исследования по археологии СССР. М., 1954. № 36(그라코프 954, 드네프르 강의 카멘스코예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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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를 이해하는데 '집'에 대해서는 오해가 있다. 그리스 역사가(헤로도투스) 들이 남긴 기록에는 스키타이 사람들은 방어된 마을과 집이 없이 바퀴달린 집(4륜마차)을 타고 광대한 스텝지역을 옮겨다닌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관념은 꽤 오래 지속된 것 같은데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입성(1812년)시 대화재를 두고 스키타이 인과 비교한 점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러시아 연구자들은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발견된 카멘스코예 성곽(돌 성이라는 뜻) 유적으로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반박했다. 이 유적은 기원전 5세기 유적으로 1200헥타르가 넘는데, 이곳에는 금속제품의 생산흔적(도가니, 주몰용 국자, 노지)이 엄청남게 많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철제품을 생산해서 다른 스키타이 사람들에게 공급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에는 2 줄의 성벽이 있는데(그림 1-19), 스키타이 연구자들은 안쪽의 환호를 ‘아크로폴’이라고 부른다. 그리스 도시와 같이 구획(그림 1-18)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아크로폴에서는 스키타이 귀족들이 살았던 석조구조물 흔적이 조사된 적이 있다.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 뿐만 아니라 돈 강 유역의 엘리자베토프 성도 알려져 있다. 대부분 지상식(그림 1-10, 14)이지만, 땅을 파서 만든 반움집(지하식)(그림 1-11,12,13,17)도 있다.

초원 스키타이는 아니지만 삼림지대의 스키타이 문화를 공유했던 아나닌스카야 문화에서는 목조로 된 집이 발견되기도 했다.

2021.02.22 - [볼가 중류: 아나닌스카야 문화의 동물장식] - 유라시아 타이가 지역의 초기 철기시대 무덤 옆에 집

 

유라시아 타이가 지역의 초기 철기시대 무덤 옆에 집

유라시아 초원 북쪽의 타이가 지대의 초기철기시대문화인 아나닌스카야 문화에서는 동물장식이 스키타이 문화의 것과 유사해서 초원지대와 어떤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유물 가

eastsearoad.tistory.com

 

 

 

그림 1. 카멘스코예 성곽과 엘리자베트프 성곽 유적, 10~17: 엘리제베트프 성곽(16: 전체 성곽 평면도, 10, 14-지상식 집, 11, 13, 17-지하식 집, 12-지하집복원), 18, 19-카멘스코예 성곽(18: 아크로폴 내부의 집의 구획도, 19: 성의 평면도)

 

두 유적은 기원전 5세기 유적이다. 흑해 부근에서 스키타이 쿠르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세기 혹은 기원전 8세기 까지 올려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럼 그들은 집이 없었을까?

 

러시아연구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스키타이 사람들의 생업경제가 유목적 목축이었기 때문이다. 동물을 위해서 목지를 계속 교체 할 수 밖에 없었고, 주거지도 단기간만 사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이 주요한 철기 공방이었다고 한다면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철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 역할로서 성곽 유적이 존재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기원전 7세기에도 스키타이 철제품은 존재하기 때문에 분명히 이를 생산하던 유적이 존재했을 텐데, 발견되지 않았다. 집은 있었지만 남겨 놓지 않았던가, 아니면 너무 쿠르간 조사에만 목을 매었을 수 있다.

 

헤로도투스가 스키타이 사람들이 집이 없다고 한 것은 비아냥 거린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집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가장 최적화 된 상태로 생업에 맞게 가성비 좋은 집을 가지고 다닌 것이고, 필요하다면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어제 일론머스크가 조립식 집을 스페이스 X근처에 만들었다고 하는  기사를 읽고 한참 웃었다.

 

참고문헌

Степи европей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1989. 46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89, 소비에트 연방 유럽 내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시기, 소비에트 고고학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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