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앞에서 이미 포스팅한 바와 같이 철기나 청동제품을 생산도 했지만 농경과 가축 사육(유목적 목축)이 이루어졌던 흔적이 있다.

 

농경구로 볼 수 있는 것은 철제와 골제 쟁기 및 철제 수확구(그림 1-12)가 있다. 유적에서는 체리씨와 사과씨도 발견되었는데, 종류가 이 지역에서 재배된 원산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곳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사람들은 밀, 호밀, 보리, 완두콩, 기장, 귀리, 콩을 재배했던 것ㅇ로 알려졌다. 곡물을 분쇄하기 위한 갈판(그림 2) 및 좀 더 가늘게 갈기 위해서 금속제 막대기(그림 1-11)도 사용했다. 곡물을 말리기 위한 장소도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1. 루보틴 성곽의 철제도구, 1: 도끼, 2-톱 편, 3-마치, 4-천공도구, 5,10-송곳, 6-끌개편, 7-송곳(손잡이가 있는)의 날 부분, 8,9-끌, 11-공이, 12-낫?

 

그림 2. 루보틴 성곽의 석제 갈판

 

도네츠 강 유역이 위치한 곳은 남쪽의 스텝과 북쪽의 삼림지대가 혼합된 곳으로 산림-스텦지역으로 당시에 목축하기에 유리했던 환경이다. 소, 작은 굽동물, 말, 돼지, 개, 당나귀(동물뼈 출토) 등을 길렀고 야생동물도 사냥했다.

유적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철제품은 끝이 뾰족한 직선 혹은 굽은 송곳류와 칼인데, 모피가공과 관련된 도구이다(그림 3). 모피가 주요한 교역품이었던 것인데, 주로 남성이 모피와 가죽 생산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신발 등도 제작했고, 마구 및 무기를 제작했다.

 

그림 3. 루보틴 성곽의 모피가 공구류, 철제 칼과 송곳

 

유적에서는 다양한 토제 방추차(그림 4)가 출토되었는데, 실을 직접 뽑았고 직물을 짰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일은 여성들이 담당하였을 것이라고 시람코는 판단했다.

 

 

그림 4. 루보틴 성곽의 토제 방추차

 

흑해지역 스키타이 사람들은 생산 및 무역을 바탕으로 살았다. 그 생살활동은 농경, 유목적목축, 철과 청동 제작, 모피 및 가죽제품 제작 등 이다.  무덤만 보아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А., Люботинское городище. Сборник научных трудов, Харьков: Регион-Информ, 1998. - 184 с (시람코, 1998, 류보틴 성곽)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도네츠 강 유역에 위치한 루보틴 성곽 유적은 환호와 성벽으로 사용된 목조구조물, 집의 구조물 들이 남아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유적은 기원전 7세기 말~기원전 6세기경에 축조된 것이다. 집도 집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청동과 철을 제작하던 공간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청동과 철을 제작했던 장소(발굴범위 13구역내에서 확인, 평면도 참고)는 철제작 노와 그 옆에 있는 구덩이(103번)와 로 확인된다. 구덩이는 입구(1.6×1.5m) 보다 바닥이 더 넓은 형태(2.1m)로 바닥면이 편평하지는 않고 북쪽면에서 점차 내려간다(깊이 1.6m). 그 동쪽벽에는 점토로 만든 페치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쪽이 먼저 생겼는데, 바닥에는 황토가 20cm정도 두께가 남아 있다. 바닥에 남아 있는 구멍은 페치카를 지지하는 과정에서 생겼을 수 있다. 위의 페치카가 허물어진 뒤에 아래 구덩이(103번 구덩이)로 점토가 흘러 내려갔다. 이곳에서는 동물뼈나 그릇 등 전혀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철제를 다듬는 곳이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매우 잘 단조된 철제품이 300개 이상 나왔기 때문이다.(그래서 시람코는 이 곳을 '금고'라고 표현했다)

123번 구덩이는 철 제작 노가 생기기 전에 이미 생겼던 곳인데, 노를 만들던 새람들은 크게 상관하지 않았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설명되었 있는데, 필자도 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림 1. 루보틴 성곽의 철제작 노(爐)

 

그림 2. 루보틴 성곽의 송풍관(토제품)

 

단조를 위해서는 1000도 가까이 온도를 올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송풍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유적에서는 송풍관으로 추측되는 유물도 발견되었다(그림 2). 뿐만 아니라 유적에서는 오랫동안 불에 노출된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도가니의 용도로 추측된다.

 

단조된 철제품으로 보아서 노가 운영되던 시기는 기원전 6세기 말~기원전 5세기의 것이다. 이 성곽이 기원전 7세기 말이라고 했던 것은 이 노에서 나온 유물 보다 더 이른 유물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А., Люботинское городище. Сборник научных трудов, Харьков: Регион-Информ, 1998. - 184 с (시람코, 1998, 류보틴 성곽)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7세기 루보틴 성곽에서는 어떤 집이 있을까?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지상식 건물지와 반지하식 건물지가 있다. 지상식 건물지에는 노지가 남아 있고, 목조 구조물이 있는 구조이다.

 

지상식 목조집의 벽은 장대와 막대로 만들고 진흙을 덮어서 마무리했으며, 지붕은 짚으로 덮었다. 점토로 덮인 나뭇가지로 만들었고, 지붕은 짚으로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림 1).

지상식 목조집은 구덩이를 파지 않고, 점토 범위 중앙에 기둥구멍(직경 40~45cm, 깊이 95~100cm)이 3개 있고 가장자리에는 기둥구멍이 발견되지 않고 점토를 바른 목체만 발견되었다. 이 점토 범위에는 곡물보관 장소로 보이는 구덩이(28번 구덩이, 깊이 1.25m, 입구 90cm, 바닥 1.3m)와 점토로 만든 일종의 난로 혹은 페키차를 위한 구덩이(29번 구덩이, 95×70cm, 깊이 25cm) 가 발견되었다. 단면이 사다리꼴 모양인 구덩이(20번 구덩이, 입구1.25, 바닥1.5m, 깊이 1.45m)도 발견되었는데 곡물보관장소이다. 발굴범위 6에서 발견된 집이다.

페치카는 국내에서 러시아의 벽난로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러시아 일반 사람들에게 페치카는 난방 기능 뿐만 아니라 일종의 오븐기능도 있다.

 

그림 1. 루보틴 성곽의 지상식 집의 복원도(2)와 점토범위(1), 10×12.5m

 

 

반 지하식은 타원형(2.6×3.3m, 깊이 1.35~1.48m)으로 구덩이를 바닥에 팠지만 집은 지상위에 있다. 바닥의 중앙에 기둥구멍이 있고, 동북쪽에 문이 설치되었다. 17호 집에는 화덕자리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반지하식집에 화덕자리가 있는 집도 있다. 발굴범위 9지역에서 이 집은 위치한다.

 

그림 2. 루보틴 유적의 17호 주거지의 구덩이와 그 복원도

 

성채 내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모두 25동 정도 집이 발견되었는데, 집의 크기 및 바닥에 구덩이를 판 것과 파지 않은 것 등의 차이는 있지만 나무와 흙을 이용해서 집을 만든 것은 동일하다.

 

더보기

무덤만 보다가 집을 보니 너무 낯설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이 괴리감이 어디서 생기는지 모르겠다. 자료 탓은 아닌 것 같은데, 요즘 내가 너무 낯설다.

스키타이 성곽은 주로 생산 시설이 있는 경우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고, 모형 집들도 발견된다. 무덤의 빈도수가 절대적으로 많지만 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А., Люботинское городище. Сборник научных трудов, Харьков: Регион-Информ, 1998. - 184 с (시람코, 1998, 류보틴 성곽)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필자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하는 것은 구글맵으로 성곽 유적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주로 연해주 지역의 성곽을 많이 아니깐(번역한 적도 있음) 살펴본다. 그런 재미를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럴 시간이 없다. 왜 그런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림 1. 구글 위성으로 찾은 루보틴 성곽, 그림 2와 비교해 보시기를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사실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은 대부분 좋은 유물(보기 좋거나 학술적 가치가 큰)이 나오는 것은 무덤이기 때문에 성곽은 잘 살펴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이 계기가 되어서 이 자료 저 자료를 찾아 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성곽 유적이 많다. 특히 루보틴 성곽은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좀 흥미로울 수 있다.

 

그림 2. 루보틴 성곽의 평면도, 숫자는 발굴된 범위이다.

 

기원전 7세기 후반의 유적으로 도네츠 강의 북부에 위치하는데, 우디강과 루보틴 강의 합류 지점에 위치한다. 1961~1964년까지 발굴되었는데,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중요한 곳은 발굴범위 3으로 적힌 곳이다. 왜냐하면 성벽조사이기 때문이다. 성곽 유적은 오랫동안 사용되어서 축조된 연대를 특정하기 힘들다. 제일 윗 층에 남은 것은 그 유적의 가장 마지막 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축연대(처음 축조된 연대)를 알기 위해서는 성벽 절개면 조사를 해야 한다.

루보틴 유적에서는 성벽 절개조사를 했고 그 결과 성벽의 구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성벽의 외곽으로는 환호가 돌아가고 그 안에도 벽(그림 3-2)을 세웠고, 환호 안쪽으로는 훨씬 단단한 성벽을 세웠다. 성벽은 두 개의 통나무 벽을 세우고 그 사이 공간은 흙, 모래, 점토 등으로 채워서 만들어진 것이다(그림 3-3). 목제 성벽의 높이는 2.7m이상, 너비는 1.8m이고, 환호바닥에서부터 수직으로 했을 때 성벽의 높이는 10m정도로 추정된다.

 

발굴범위 5는 서문이 있던 곳인데, 이를 복원하면 그림 3-4이다. 이 유적에는 남쪽에도 문이 있다. 성 안에는 직선적인 구획 계획은 확인되지 않지만, 서쪽 입구에서 동쪽으로 난 길 주변에는 건물지가 없었다. 이 도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연결된 도로와 교차된다.

 

그림 3. 루보틴 성곽의 환호의 바닥 평면도 (1)와 성벽의 단면도(2), 성벽의 위에서 본 모습(3),  문 복원도(4)

 

성벽이 남겨진 성곽은 루보틴 유적만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А., Люботинское городище. Сборник научных трудов, Харьков: Регион-Информ, 1998. - 184 с (시람코, 1998, 류보틴 성곽)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돈 강 유역의 스키타이 성곽이라고 알려진 하지만 남겨진 건축물은 그리스식 건물지 밖에 없는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은 어떻게 스키타이 유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장 윗층에 남은 그리스 건축물은 기원전 3세기 1/4분기에 해당되며, 그 곳에는 그리스식 토기(그림 1)들이 발견된다. 그리스식 집과 토기는 이 성곽에서 가장 마지막 시기에 발견되는 것이지만, 어찌되었던 스키타이 인의 입장에서는 불리하다.

 

그림 1.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기원전 3세기 그리스 토기

 

스키타이 문화에서 연대측정의 근거가 되는 것 중에 하나는 화살촉이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화살의 중요성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았던 것 같다.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에도 스키타이 사람들은 고리트를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헤로도투스가 남긴 스키타이 신화에서 타르기타우스(그림 7) 라고 하는 사람이 스키타이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인물인데, 늘 고리투스를 착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행히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에 살았던 스키타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남겨놓았다. 화살촉과 아키나크라고 불리는 단검 및 청동창이다. 단검과 청동창은 사실 스키타이 연대를 세밀하게 알지 못한다. 기원전 7~4세기까지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기원전 4세기 이후가 되면 단검은 길어지며, 손잡이 끝장식은 동물의 뿔을 형상화 한 형태(그림 2-5~7)가 아니라 T혹은 역 V자(그림 2-37, 51~54,) 로 바뀌게 된다.

 

그림 2. 유럽 스키타이 문화의 무기변화, 상단: 기원전 4~2세기, 하단: 기원전 7~4세기, 1~15: 검, 16: 투부(전투용도끼), 17~21: 청동창, 22: 찰갑(미늘 갑옷), 23-26: 갈고리

 

그림 3.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청동검

 

그림 4.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청동창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에서 출토된 청동검(그림 3)에도 뿔 모양처럼 생긴 손잡이 끝장식이 달려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유적의 청동창(그림 4)의 모습도 기원전 7~4세기 유물과 유사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화살촉이다. 화살촉을 연대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유럽 스키타이 문화나 시베리아 스키타이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시대별로 변화에 비교적 민감하게 변화되고, 지역성(지역)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림 5.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청동화살촉

 

그림 6. 유럽 스키타이 문화의 화살촉 변화, 2,4-볼가~돈강 유역, 3,5-우랄 남부

 

화살촉은 신부(몸통)의 단면과 자루를 끼우는 부분, 평면형태 등이 중요하다. 유물에 따라서 다른 부수적인 부분들도 판단의 기준이 된다. 대체로 유럽스키타이 유물들도 세 가지 기준으로 구분했다.

기원전 7세기 유물은 (단면)양쪽으로 날이 있는 형태(양익형, 兩翼)이고, 기원전 6세기 이후가 되면 삼익형이 된다. 혹은 간혹 그냥 삼각형도 있는데, 외면에 홈이 없는 경우라서 그렇다. 삼익형의 단면은 기원전 4세기 이후가 되면 대부분 삼각형으로 변화되고, 자루 끼우는 부분도 몸통 안쪽으로 들어가게 된다.

기원전 7세기와 기원전 6세기는 신부(화살촉의 몸통)형태도 변화가 된다. 기원전 7세기 유물은 평면형태가 마름모에 가깝고 앞 부분만 날이 있는 형태이지만, 기원전 6세기 이후 삼각형에 가까우며 신부 전체가 날이 선 형태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자루를 끼우는 부분이 따로 만들어지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형태들이 발견된다. 돈강 유역과 우랄 남부지역의 화살촉은 이 점은 비슷하지만 화살의 동체부에 홈의 깊이 정도가 다르다.

기원전 5~4세기 유물은 단면과 자루끼우는 부분은 직전 시대와 유사하지만 화살촉의 앞 부분이 길어진다. 뿐만 아니라 화살촉 신부의 날이 좀 더 커지는 경향도 있다. 돈강 유역과 우랄 남부지역은 약간 다른 경향이 있는데, 우랄 남부지역(그림 6-)5에 단면이 양익형인 것이 생긴다. 하지만 기원전 7세기와는 달리 자루끼우는 부분이 신부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이후는 훈-사르마트 문화 시기에 해당하는데 화살촉의 앞 부분이 더 길어지고 자루끼우는 부분이 바깥으로 나와 있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간다.

 

엘리자베틴스코예 성곽에서 출토된 화살촉(그림 5)은 기원전 6세기 유물 혹은 기원전 5세기 유물과 유사하다. 그리스인이 집을 짓은 것은 기원전 3세기 1/4분기라고 하니, 이전에 이미 스키타이 인들이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자료를 찾다가 스키타이 성곽이 생각보다 많이 발견되며, 훨씬 오래된 유적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림 7. 차스티예 고분에서 발견된 은제 항아리 속의 타르기타우스

 

참고문헌

 

Марченко К. К., Житников В. Г., Копылов В. П. Елизаветовское городище на Дону. М., 2000(마르첸코, 지트니코프, 코피로프, 2000, 돈 강 유역의 엘리자베트토프스코예 성곽)

Степи европей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1989. 46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89, 소비에트 연방 유럽 내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시기, 소비에트 고고학 시리즈)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prev 1 2 3 4 5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