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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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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반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가가린이 수집해서 1712년에 표트르 1세에게 보낸 유물가운데 사람의 형상이 표현된 유물은 2점이다. 높이 1.5cm가량의 여성상과 직경이 3.8cm정도 되는사각통 금판위에 그려진 전사 5인이다(그림 1, 그림 2).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중에서 전사 5인이 그려진 황금원통

 

그림 2. 18: 전사 5인이 그려진 황금 통 그림1의 동일유물

 

여기에 표현된 전사 5인은 전쟁에서 막 이기고 돌아오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가장 앞의 말탄 기수 옆에는 말 안장 위에 전사의 시체를 던져 머리를 숙이고 있고, 그 뒤를 이어 나란히 뒤따르는 세 마리 말 중에 한 마리에도 역시 시체가 매어진 상태이다. 세 마리 말 중에 한 사람은 한 손에 검을 들고 생포한 장수(리더?)의 등을 겨누고 있으며, 그 뒤에 두 마리 말위에 탄 궁수는 생포한 전사를 향해 시위를 당기고 있다. 말을 탄 전사들은 헬멧을 쓰고 있는데 파지리크 유적 3호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파지리크 3호 유적은 파지리크 5호, 2호, 1호(기원전 5세기)에 비해서 늦은 시기로 기원전 3세기 경에 해당한다. 코롤코바는 기원전 4~2세기 유물로 보았다. 기원전 2세기는 이미 스키타이시대는 아니다. 루덴코나 코롤코바 모두 기원전 5세기 보다 늦은 기원전 4~2세기

유물로 보았다. 

 

스키타이의 유물 가운데 금제품 위에 문양을 그릴 때 제작하는 방법은 chasing, punching, repousse이 있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특히 체이싱기법은 볼록하게 튀어나온면 바로 옆에 음각을 해서 튀어나온 부분이 더 뚜렷하도록 보이는 기법이다.

표트르 1세의 유물에서도 체이싱 기법이 그대로 보인다(그림 3).

 

하지만 스키타이시대 이후에도 유물에 표현된 주제나 제작기법 등은 계속 사용되기 때문에 유구가 정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절대적인 연대를 알기는 힘들다. 단지 이 유물은 시베리아 출토 유물이라는 것이 확실하며,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어느 시점에 제작된 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웅담이 유물에 표현되는 것은 스키타이 문화에서 흔히 선호된 주제이다. 

 

그림 3. 그림1-1의 세부

 

2020.12.10 -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 스키타이 핸드메이드 제작기술: 두드리고, 깍고, 잘라내기

 

 

스키타이 핸드메이드 제작기술: 두드리고, 깍고, 잘라내기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물 가운데 스키타이 스타일과 제작기술로 만들어진 유물은 8점으로 파악된다. 광학현미경과 주사전사 현미경을 사용해서 분석한 결과이다(Scythians 2017). www.google.com/maps/d/edi

eastsearoad.tistory.com

2020.12.15 -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 스키타이 도깨비와 사자

 

스키타이 도깨비와 사자

아무다리야 퇴장유적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스키타이 금제품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진 유물은 8점이다. 그 가운데 제작기법은 스키타이 기법이지만 문양은 전통적인 문양이 아닌 유물이 있다.

eastsearoad.tistory.com

 

 

참고문헌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Е.Ф. Королькова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и золото древних кочевников Евразии. //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СПб: «Славия». 2012. С. 83-88(코롤코바 유라시아 유목민의 황금 유물 중에서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으로 알려진 유물 가운데는 유물의 형태나 기본적인 모티브 뿐만 아니라 유물의 제작방법을 시베리아 아르잔-2호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유물이 많다.

‘시베리아’인데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간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은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아무다리야 퇴장지 및 카자흐스탄 동부산악지대와 비교된 연구가 많다(Piotrovsky B., 1986, 코롤레바 2003 등 다수)

 

수집된 경위가 매우 다양하고(시베리아 총독 가가린에 의한 수집, 비트겐의 수집품을 옥션을 통해서 수집)유물의 연대폭이 넓어서 다양한 장소에서 수집되었을 수 있다.

게다가 17~20세기 중반까지도 ‘시베리아’는 우랄산맥 동쪽에서부터 극동까지 시베리아라고 불렀기 때문에 추정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넓다.

 

그런데 투바의 아르잔-2호 발굴로 출토된 유물은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누금’기법이라고 불리는 작은 알갱이의 금을 유물에 부착하는 제작방법은 주로 흑해지역과 카자흐스탄 동부 산악지대에서 발견되는데, 흑해지역에서 기원전 7세기경에 발견되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먼저 생겨난 제작방법이라고 알았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역시 그리스와의 관련성이다.

 

그러나 투바 아르잔-2호에서는 누금기법이라고 불리는 제작방법으로 장신구를 제작한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귀걸이이다(그림 1). 주인공 무덤 5호의 여성 뿐만 아니라 일반 여성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13호에서 출토된 귀걸이도 마찬가지 방법이 가미된 것이다(그림 2). 아르잔-2호 5호묘의 여성귀걸이(그림 1-1)는 둥근 고리 2개를 연결하고 그 아래에 원뿔 모양의 펜던트를 붙이는 방법이다. 아르잔-2호 13호묘 여성귀걸이(그림 2-5)는 원뿔 펜던트 아래에 구슬을 포도송이처럼 붙인 것이다.

 

그림 1. 아르잔-1호의 5호묘 여성 귀걸이

 

그림 2. 아르잔-2호의 13b호묘 여성 귀걸이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 귀걸이(그림 3-3)는 둥근고리 아래에 원뿔모양의 펜던트를 붙이는 구조는 아르잔-2호 출토품과 같다. 그 아래에 붙인 구조물(그림 3-3-3)은 좀 더 복잡하다. 둥근 고리도 꼬아서 사용한 것(그림 3-3-1)이다.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 아르잔-2호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교해 볼 수 있는 유물도 있는 것이다.

 

 

그림 3.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금제 알갱이를 붙이는 방법은 켈레르메스 유적의 여성머리띠 장식에서 발견되지만, 알갱이가 매우 크고 그 크기가 균일하지 않아서, 아르잔-2호와 비교해 볼 때 조잡해 보인다. 그리스에서 수입한 유물로 알려졌다(그림 4).

 

 

 

그림 4. 켈레르메스 유적 1호분 출토, 그리스+스키타이 스타일, 1903년 슐츠 발굴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유물은 여러 지점에서 수집되어서 황제의 수집품으로 등록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아르잔-2호의 발굴로 그 지점이 좀 더 여러 곳이며, 좀 더 명확해 질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Piotrovsky B., Galanina L., Grach N. 1986 : Scythian Art. The Legacy of the Scythian World: mid-7th to 3rd century B.C. Leningrad: Aurora Art Publishers. 1986. 184 p

Е.Ф. Королькова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первое российское археологическое собрание. // Основателю Петербурга: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в Эрмитаже]. СПб: «Славия». 2003. С. 190-199.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추구노프, 파르칭거,나게르 2017, 투바의 아르잔-2, 스키타이 차르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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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의 수집품으로 알려진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가가린은 세 번에 걸쳐서 차르에게 무덤에서 캐낸 유물을 보냈는데, 2번째 소포에 가장 많은 유물이 들어 있었다. 그 중에는 아주 작은 소형 유물도 포함되었는데, 토기(그림 1-11, 53,54,55)와 목기(그림 1-21)를 모방한 금속제 이미테이션이다. 소형 유물들은 대부분 장신구류인데, 그릇을 모방한 금속제품도 어딘가에 달아서 사용되었을 수 있다. 이 외에는 대부분 반지, 귀걸이 혹은 꽃을 모방한 장신구이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중에서

 

그 중에서 좀 이상한 유물이 있다. 사람 이를 금으로 만든 포켓 속에 넣고 체인을 달아서 만든 귀걸이다(그림 1-56,57). 시베리아 황금 유물이 금과 돌(보석류, 주로 터키석)을 함께 이용하는 경우 금제품에 포켓을 만들어 넣는 상감기법을 쓰고 있는데, 이 유물은 터키석을 대신해서 사람의 어금니를 끼워 넣은 것이다.

 

그림 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중에서, 귀걸이 한 쌍

 

 

비트겐이 수집한 유물에도 사람이를 사용한 귀걸이가 발견되었다(그림 3에서). 사람이를 사용한 장신구는 매우 드문 경우이지만 비트겐의 수집품에도 있는 점으로 보아서  그림 2의 유물이 완전 유니크 한 유물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림 3. 비트겐(1785)이 수집한 유물

 

사실 현재 발굴되는 자료나 그 뒤의 자료에서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귀걸이의 포인트가 되는 부분에 보석이나 돌이 끼워진 채 발견되는 경우가 잘 없기 때문이다. 비트겐은 1664년에 러시아에서 일하고, 그 뒤에 시베리아에서 유물을 수집해서, 이미 17세기 중후반부터 시베리아에는 도굴이 만연한 상태였고 볼 수 있다. 눈에 띄는 웬만한 무덤은 거의 도굴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 과정에서 아주 작은 소형의 유물들이 제대로 보존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다만 스키타이 무덤에 들어가는 뿔그릇은 동물을 대신해서 그 동물의 뿔로 제작되었다는 의견(폴로스막 2001)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의 주인공에 대한 기억? 혹은 그를 기리기 위해서 혹은 어떤 징표 등으로 만들었을 수 있다. 영화에서 사이즈가 큰 반지를 줄에 끼워 목걸이로 간직하는 경우가 있는데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당시의 사회상 및 풍습, 혹은 개인적인 것과도 관련이 있을 듯 한데, 정보가 부족하다.

 

표트르 1세에게 유물을 보낸 시베리아 총독 가가린은 무덤의 위치를 엄청난 비밀로 여겼다는 점에서도 무덤의 위치를 그린 지도는 그야 말로 ‘보물지도’였을 것이다. 지도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풍습?은 러시아에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필자가 유학했을 당시 2000년대 초반이었는데 처음에는 답사를 다니거나 하면 학자들은 군대에서 입수한 지도라며 쓱 보여주고 엄청난 비밀인 것처럼 했던 기억이 난다..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코메디인데.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Федоровна K.E. 2006, Золото кочевников. О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НАУКА из первых рук(표드로브나 2006, 유목민의 황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 대해서)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336 с.(폴로스막 2001, 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 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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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권에서는 유기물질로 만들어진 그릇 외에도 금속제 그릇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청동솥 외에도 금제와 은제 그릇 등이 발견되는데, 흑해와 볼가강 유역 등 서부지역에서 종종발견된다.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에서도 금속제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스키타이 시대와 동 시기의 페르세폴리스 궁전벽화에 남아 있다. 이들 유물은 이르티스강과 오비강의 합류점 및 알타이 부근에서 도굴에 가까운 방법으로 18세기에 채취된 것이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켈렉션 중에서. 페르세폴리스의 아케메니드 궁전에 그려진 금속그릇과 비슷한 형상, 기원전 5~3세기 유물로 추정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은 시베리아 총독 이었던 가가린이 보낸 선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 번에 걸쳐서 보냈는데 차르의 명명에 따라서 상트페테르부르그로 보내졌다. 가가린은 토볼스크에서 유물들을 수집했다고 알려졌는데, 현재는 이르티시 강 상류와 오비강의 합류점 및 알타이 부근으로 알려졌다(그림 2).

표트르 1세에게 무덤에서 캐낸 금제품(표트르 1세의 유물 컬력션)을 보내기 전(1715년)에 1712년에 가가린은 금, 은, 구리 및 기타 등등을 모았다. 주자시의 임부는 금생산에 관련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 주제와 관련된 문서는 거의 없는데, 아마 큰 비밀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금제품의 발견과 모든 금과 관련된 정보는 고대 유적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718년 2월 13일 차르는 ‘오래되고, 비범한 것을 모으라는 칙령을 내렸으며 보상을 약속했다. 1721년에 가가린은 교수형을 당했다.

 

 

그림 2. 18세기 황금 유물이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

 

죽기 전에 가가린은 3번에 걸쳐서 표트르 1세에게 소포를 보냈는데, 1번째는 10점(1715년), 2번째는 122개의 유물이 들어 있었다. 2번째 소포는 1716년 12월 토볼스크에서 가가린이 표트르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으나, 소포가 도착할 무렵에 차르는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없어서 모시코프(П. И. Мошков, P. I. Moshkov)가 소포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편지에는 각 물건의 무게를 표시해 두어서 식별이 가능하다. 2번째 소포중에서 20점은 표트르 1세의 아들인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에게도 같은 유물이 보내진 것으로 편지에 적혀있었으나, 행방은 묘연하다. 세 번째 소포는 1717년 10월에 60개의 금제품과 2개의 은제품을 보냈다고 알려졌다. 세 번째 소포에 들어간 유물에 대해서는 혼란이 있었으나 최근 튜멘 지역에서 발견된 문서로 그 존재가 확실해 진 듯하다. 이 문서에는 가가린이 보낸 소포에서 보낸 유물과 동일한 물건의 유물 무게가 일치하는 품목이 적힌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시베리아의 금제품은 용광로에서 녹여서 동전으로 제작되는 일이 흔했는데, 표트르는 칙령 1718년으로 이를 막았고, 러시아에서 일종의 문화재보호법이 생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김재윤 2018) .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Федоровна K.E. 2006, Золото кочевников. О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НАУКА из первых рук(표드로브나 2006, 유목민의 황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 대해서)

김재윤 2018, 러시아의 발굴 -연해주 철기시대 얀콥스키 문화의 바라바시 3유적을 중심으로-, 야외고고학, 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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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21. 12:41 스키타이 동물장식

원형의 범장식은 기원전 9세기 아르잔-1호에서 탄생했고 기원전 7세기에는 유라시아 초원의 각 지역(중앙아시아, 흑해) 등지에서 발견된다. 물론 각 지역에 따라서 형태 및 제작방법은 차이가 있다. 범 장식이 변형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 알타이에서 부터이다. 몸을 S자형으로 변형시키고 날개만 달린 범 장식이 등장한다.

 

그런데 S자형으로 몸을 뒤틀고 있는 동물의 자세는 ‘동물투쟁문’이라고 불리는 문양에서 많이 사용된다. 금으로 제작된 벨트 장식으로 알려진 두 마리 동물의 투쟁문양은 기본적으로 S자형으로 몸을 틀고 있는 2마리 동물을 배치했다. 각각 수직과 수평으로 S를 세운 것이다. 그림 1은 날개와 산양의 뿔을 달고 있는 이미 변형이 심해진 그리핀이 굽동물의 등을 물어 뜯고 있는 장면이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중

 

‘동물투쟁문’으로 알려진 또 다른 유물 가운데 두 동물은 서로가 서로를 물어 뜯는 장면이다(그림2). 이때 호랑이는 변형되지 않았고, 먹이가 되는 포식자가 오히려 변형된 뿔을 갈기처럼 달고 있다. 

 동물'투쟁'문양의 시작은 필자는 바샤다르 유적의 통나무관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알타이 카탄타 유적에서 발견된 목판에 새겨진 동물투쟁문양(그림 3)의 예로 보아서 표트르 1세가 모은 동물투쟁문양도 결국 알타이 부근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다.(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은 1703년 시베리아 주지사였던 가가린이모아서 황제에게 보낸 유물로 정확한 출토위치를 모른다.) 그림2의 유물 외에도 대부분의 동물투쟁문은 두 동물이 서로의 목과 다리를 물어 뜯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림 1의 유물은 '투쟁'에서 벗어난 유물이다. 맹수가 포식자를 공격하는 장면은  기원전 5세기 흑해지역(그림 4)에서 발견된다.  주로 사자가 사슴을 공격하는 장면이다. 그런 점에서 그림 2는 절충?이다.

 

그림 2.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중

 

그림 3. 알타이 카탄타 유적에서 발견된 목판

 

그림 2의 굽달린 동물은 동물의 종이 애매하지만 사실 사슴 혹을 엘크의 변형도 범 장식처럼 심하게 변형되었다. 시베리아에서 동물의 변형시켜서 만들기 시작한 것은 사슴이 더 먼저였다. 사슴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사슴류가 어떻게 변화되지도 큰 과제중에 하나이다. 파지리크 유적에서 발견된 사슴뿔 달린 말 가면도 결국 말을 살아 있는 변형동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을 것이다. 미라의 문신에도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림 4. 흑해 지역의 각배 장식판에 새겨진 맹수공격문양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Артамонов М.И. 1973 : Сокровища саков. М.: 1973. 280 с.(아르타모노프 1973, 사카족의 보물)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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