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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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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케마 강 유역의 소결


케마 강 유역에서는 확인되는 제일 이른 성곽 혹은 환호 유적은 고금속기시대로 기원전 1000년기 후반의 켐스코예-스칼리스토예 성곽이다. 산지성으로는 스트라시니 언덕 위의 성(세레브란캬 유역), 두브로빈스코예 성곽(리도프카 강 유역), 우스티-제르칼노예 성(제르칼나야 강 유역), 우스티 벨림베(타요시나야 강 유역) 등이 확인되었다. 케마 강의 하류에 이 성을 축조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데, 거주용이 아니라 방어용인데, 동해로부터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서 축조되었다.


발해시기 성곽은 켐스코예-돌린노예, 켐스코예-모르스코예, 성곽이 있는데, 모두 해안가로 가기위한 도로를 따라서 축조된 것으로 이 길의 위험을 막고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서 축조되었다.


케마 강 유역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영동지역으로서, 지형학적인 특징으로 서쪽으로부터 험준한 산맥으로 인해서 고립된 곳이다. 케마 강의 하류로 부터는 들어오기가 쉽지만, 상류는 거의 가능성이 없다. 탈니코바야 강 유역으로부터 들어오는 길에 위치한 우스티-일모 성곽이 이 곳으로 들어오는 문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 성에서부터 도로가 뻗어서 하류의 두 성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이 확인되지 않아서 이 유적의 정확한 연대를 아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발해 이후에 축조 되어서, 그 뒤에도 오랜 기간 이용되었다고 확실하게 생각된다.


그림 78. 케마 강 유역의 성곽 분포도(35-우스티 일모, 36-켐스코예-스칼리스토, 37-켐스코예-돌리노예, 38-켐스코예-모르스코예 유적)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 켐스코예-돌리노예 성곽


케마 강의 왼쪽 해안가에 이 강의 하구에서 1.5km 떨어진 곳으로 벨린카야 케마 마을 안에 위치한다. 처음으로 1907년 아르세네프가 유적의 평면도를 작성하였다(그림 86).


그림 86 1907년 아르세네프가 육안으로 작성한 유적의 평면도


2001년 아무르-연해주 고고학탐사단이 이 곳을 조사하였다. 성곽은 케마강의 좌안 강가와 강 줄기 사이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북쪽의 양 모서리가 깎인 방형이다(그림 86, 87).


그림 87. 켐스콩예-돌리노예 성곽 평면도(2001년 작성)



성벽의 길이가 130m가량이고 평면적은 1700에 달한다. 유적에는 총 3개의 문시설이 있는데, 북쪽, 서쪽, 동쪽 벽의 중앙에 위치한다. 문의 너비는 5~7m이다. 성벽은 흙과 큰 자갈돌로 쌓아졌다. 성벽의 높이는 대부분 1~1.5m가량이고, 북서쪽은 2m가량이다. 성벽의 기저부 너비는 5m가량이다. 성벽의 상부 너비는 1m이다. 성내부안에는 여러 번 축조가 반복되어서, 성의 구조물들이 파괴된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층을 조사했는데, 유물이 확인되지 않았고, 지표에서 시대를 알 수 없는 토기편 들이 채집되었다.


p.s. 유적은 발해시기에 조성 혹은 제작된 것으로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지난 150년 동안 연해주에서는 150개가 넘는 성곽 건축물을 발견 및 발굴 조사하였다. 건축물에는 성곽, 성벽, 해자 등을 다 포함하며 남쪽의 해안가부터 북쪽의 산악지대와 타이가 지역에 걸쳐 있다.

연해주의 성곽연구는 세 단계에 걸쳐서 발전한다. 첫 번째 중국문헌 분석, 두 번째 향토학자에 의한 연구, 세 번째 고고학자에 의한 본격적인 야외조사이다.

첫 단계- 당연히 연해주 성곽 조사의 첫걸음은 현대에 들어와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은 당시에 주위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 하기 위해서 축조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오랑캐를 무찌르는데 익숙한 중국문헌에서 정보를 얻어서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 연구의 첫 시발점이다. 이에 관해서는 역사서에 아주 많이 남아 있고, 실제 남아 있는 건축물과 허물어진 성지 등도 이를 방증한다.

실제로 직간접 적으로 획득한 인접한 주민들에 대한 일상생활, 전통, 민족의 수 나아가서 국가의 지형, 도로, 성지, 마을, 도시, 방어시설 등도 그 국가에 대한 정보이다. 획득된 정보는 지도, 보고서, 연대기 등을 작성할 수 있고, 이것들은 그 지역에 대한 정치적 상황 등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비추린(1777~1853)(그림 1), 바실레프, 고르키, 로조프, 쿠네르 등이 기술한 동방의 이방인에는 중세 퉁구-만주족의 다양한 성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있었다. 그래서 북서(북서)’94편에는 연해주, 아무르, 만주 등에서 사는 우쯔이 종족에게 성곽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에서 일 천 년기 전반(역자 주1~4세기)·에 각 도시와 마을은 특징적인 고유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비추린 1950). 


그림 1. 비추린(1777-1853). 17세기 부터 동방정책으로 인해서 러시아는 중국 및 만주를 연구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졌고, 18세기에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청나라와 수교하면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그림의 비추린은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북경교회사절단을 파견하게 되면서 중국에서 복무했고, 중국정사25사에 기록된 동아시아역사를 번역하였다. 그의 연구는 러시아 동방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가 번역한 책은 러시아가 한국을 배우는 기본교재이다. 현재도 러시아에서 발해와 여진과 관련된 논문에서 그의 이름은 늘 거론된다. 


말갈족과 그 성지에 관해서는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의 기록에는 ‘645년 당과 고구려가 전쟁을 했다. 고구려 쪽에는 말갈인이 참가하였고, 중국에서는 투르크 인이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곳은 안시성 부근이다. 고구려의 북부욕살 고연수 및 남부욕살 고혜진과 말갈인은 50,000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도왔다. 중국 황제는 만약에 그들이 안시에 들어간다면, 높은 산을 파고, 도시로부터 식료품을 조달받아야 한다. 그러나 말갈인이 우리의 소와 말을 훔치게 둔다면, 우리 쪽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비추린 1950).

여러 역사서에는 여진의 성 축조 기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들에게는 강한 조상이 있는데, 안시라 불리고, 성지를 축조하였다. 후툰장에서 아무르 까지 북쪽으로 80m떨어져 있다(바실레프 1857). 좀 더 늦은 역사서 명나라(1368~1644) 집의 역사(러시아과학원 동양서체연구소 문서국)에도 성에 대한 기록이 있다. 행정관청 중 국가 수입담당기관, 인사기관, 사법기관 등은 성곽 안에 두도록 하고 도로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역사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성곽, 도시, 마을, 국경선, 국경의 항구 등이 구분되어 있을 때이다. 군사-정치-경제적 상황 등이 악화될 때는 국가 안이나 종족 내에서 성을 지어야 했다. 역사서에는 일본 유민이 해안가에 59개의 도시를 짓고 약 58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 거기에 성벽에 대해서 약간 기술되어 있는데, ’...군인들은 성벽위에 터널을 묻었고....’밤에 물을 길어서 도시성벽을 다듬었다. 밤에는 얼어붙어서 그곳에 올라가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러시아과학원 동양서체연구소 문서국).

10~20세기 극동 사람들은 성지축조와 마을 축조 뿐 만 아니라 방어적인 요새나 도로를 만드는 데 아주 능했다. 말갈, 발해, 여진, 고구려 인 들은 성을 축조하였는데, 중국의 역사서에는 아주 정확하게 그들의 입지 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많은 세월이 흘러서도 러시아 연구자들은 이 역사서에 따라서 성지를 찾을 수 있다.

러시아 연구자들은 고대와 중세시대 성지의 입지는 생업과 방어가 용이한 곳을 택한 것으로 생각했다. 높은 입지는 넓은 영역을 관망할 수 있었고, 봉화대의 역할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댜코바 2009)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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