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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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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 30. 21:10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앞서 영남에 주로 분포하는 동심원문 암각화를 바탕으로 영남이 환동해문화권과 교류했던 것으로 보았다.

(새로 바뀐 글쓰기....전 너무 별로인듯....플러그인 시도하면 10번중 한번 되는 것 같음)

 

작년에 필자가 발표한 원고를 정리해서 논문투고 정리하던 중,  그곳에서 표가 잘못 올려진 것을 발견했다.

 

동심원문암각화의 유적은 대부분 영남 내륙에 위치한다(지도참고). 6500~6000년 전은 아무르강 하류와 동해안, 6000~5800년 전은 연해주와 동해안이 같은 문화권이라고 해도 이 연대를 영남 동심원문암각화연대의 제작시기로 바로 연결시키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앞서 제시된 연대는 토기를 근거로 한 것인데, 일상생활용품이다. 암각화는 정신적인 영역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1. 사카치알리안, 2. 세레미체보, 3. 쌍탑, 4. 지초리, 5. 영천보성리, 6. 포항 대련리, 7. 대구 진천동, 8. 대구 천내리, 9.고령 앙전동, 10. 고령 안화리, 11. 밀양 안인리, 12, 함안 도항리, 13. 동래 복천동(김재윤 2019)

 

영남에 그려진 동심원문암각화는 남해안신석기시대인이 그린 것으로, 어떤 형태로든지 환동해문화권사람들과 정신적인 교감으로 생겨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최소한 영남에서 특히 내륙에 유적이 생기는 시점 이후에 암각화도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영남의 내륙에 마을단위의 유적이 생기는 시점은 청도 오진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5000년 전 이후이며, 동심원문 암각화도 이후일 수 있다(표1).

표1. 시간에 따른 환동해문화권의 범위와 교류권 김재윤 2019

 

*게재되면 완성된원고는 첨부할 예정입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답은 영남이 환동해문화권의 교류지역임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이미 필자가 연구한 바를 토대로 환동해문화권의 범위와 그 교류지역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선사시대 환동해문화권의 교류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중심으로 연해주와 우리나라 강원도를 중심으로 연구되었다(2,3). 


표2. 환동해문화권의 동심원문암각화와 극동전신상토우(김재윤 2018)



3. 시간에 따른 환동해문화권의 범위와 교류권(김재윤 2018)



연해주와 동해안의 교류는 신석기시대 루드나야 문화의 세르게예프카 유형과 오산리 유적의 A,B지구 및 오산리 C지구의 III~V층에서 확인되는 오산리식토기와 융기문토기를 근거로 논의 되었고, 그 시점은 6000~5800년 전이다[각주:1](김재윤 2015, 2017). 이후부터 강원도에는 첨저토기가 출토되는 5100년 전[각주:2] 동안은 동해안에 유적이 확인된 적이 없다. 만약 동해안에서 유적이 확인된다면, 연해주와의 문화권은연대가 좀 더 길어질 수 있다.

  즉 5800~5100년 전 환동해문화권의 범위는 불투명하며, 5100년 전께는 연해주와 강원도의 생업권은 끊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점은 자이사노프카문화가 시작되는 시점과도 비슷하다(3, 김재윤 2017a).


   다시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흥성문화(김재윤 2004, 강인욱 2017) 및 시니가이문화가 강원도 영서지역을 통해서 진주 남강의 평거동 유적까지 내려온 흔적이 청동유물, 토기, 석기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었는데, 시니가이문화가 내려온 연대는 3100~2900년 전께이다(김재윤 2018a).

  그런데 연해주와 강원도의 신석기시대 문화권이 형성되기 이전에 아무르강 하류의 문화가 동해안까지 확인된 정황도 있다. 오산리C지구의 신석기시대 최하층인 VI층 및 문암리, 망상동 유적에서 확인되는 적색마연토기가 아무르강 하류의 말리셰보문화에서 전해졌고 관련이 있는 연대는 6500~6000년 전을 확인한 바 있다. 오산리C지구의 VI층은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 토기 제작이 없었던 동해안에서 갑자기 적색마연토기가 확인되는 것은 이미 토기문화가 있던 곳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해서 아무르강 하류의 말리셰보문화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김재윤 2015, 2017).

  그런데 토기 뿐 만 아니라 아무르강 하류에서 출토되는 말리셰보 문화 및 보즈네세노프카 문화의 극동전신상토우를 근거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아무르강 하류도 환동해문화권에 속할 가능성을 했는데 환동해문화권으로 생각했다(김재윤 2008).

 하지만 앞서 본고에서 고찰한 아무르강 하류의 동심원문암각화로 보아서 연해주와 아무르강 하류와의 문화권은 9000년 전 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 이 때부터 6000년 전까지는 아무르강 하류가 환동해문화권에 포함될 수 있으며, 북부지역일 수 있다.

  또한 9000년 전께는 쌍탑1기와 노보페트로프카 문화가 유사하기 때문에 아무르강 중류 및 눈강 유역도 환동해문화권의 북부지역인 아무르강 하류와 관련성이 있다(3). 그러나 아무르강 중류 및 눈강 유역은 환동해문화권에 속한다기 보다는 환동해문화권의 북부와 교류한 간접적인 영향권으로 볼 수 있다.

  6000~5800년 전 환동해문화권은 앞서 보았듯이 연해주와 강원도 오산리 부근이다. 그러나 오산리 유적 이남인 태백산맥이 끝나는 죽변유적의 토기는 오산리 및 한반도 남부지역과의 관련성이 더 크다[각주:3].

 

 따라서 영남 동심원문암각화의 유적은 남해안 신석기문화가 자리잡은 가운데(6910B.P. 이후, 3) 환동해문화권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연해주 및 아무르강과 관련 있는 6000~5800년 전이다. 이 지역은 환동해문화권의 간접영향권으로 교류했을 가능성이 있다.

 환동해문화권의 신석기시대는 9000~6000년 전에 아무르강 하류가 환동해문화권의 가장 북부지역에 속하며, 그 이후 6000~5800년 전 연해주와 동해안만이 문화권일 가능성이 있다(3). 5800년 전 이후로 동해안에서 유적이 확인된다면 이 시점은 더 지속적일 가능성이 있다.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환동해문화권은 두만강 유역의 흥성문화 및 연해주 시니가이문화가 연해주와 강원도가 직접적인 관련성을 보이는데, 강원도 영서지역을 통해서 소백산맥이동의 진주 남강 유역에서 확인된다. 현재로서 확실한 연대는 시니가이문화의 이동성이 보이는 3100~2900년 전이다. 환동해문화권은 신석기시대와는 다른 경로인 강원도 영서지역으로 소백산맥 동쪽의 영남 남강 유역까지 환동해문화권과의 교류한 흔적이 남아 있다. 토기, 석기, 청동기 등 구체적인 양상이 확인되어서 신석기시대보다는 더 뚜렷한 관련성을 보인다. 하지만 진주 남강을 환동해문화권의 남부지역으로 결정하기에는 좀 더 확정적인 증거가 답보되어야 할 것이며, 현 상황에서는 간접적인 영향권으로 일단 두고자 한다[각주:4].

 따라서 3100~2900년 전 청동기시대에는 환동해문화권으로 한반도와 강원도 영서지역이 포함될 수 있다(3).

 

 신석기시대 환동해문화권의 형성배경은 태백산맥 및 시호테알린산맥과 태평양을 매개로 한 생업권이 문화권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필자가 생각하는 아무르강 하류 및 연해주와 강원도의 관련성은 생업권을 의미하며, 고고학적으로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김재윤 2017). 전파론적인 해석과는 차이가 있다. 신석기시대 여러 기간에 걸쳐서 아무르강 하류 오시포프카문화 및 말리셰보문화의 모습이나 연해주의 세르게예프카 문화양상 이 동해안에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연환경에 따른 생업권 때문이며, 동심원문 암각화가 태백산맥에서 분기된 소백산맥이동에서 주로 확인되는 것은 환동해문화권과의 교류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이 산맥과 바다를 매개로 한 생업권임을 알 수 있는 것은 5000km [각주:5]이상 떨어진 곳 추코트카의 페그티멜 암각화에서 신석기시대 그려진 사슴문양과 청동기시대에 그려진 고래그림이 반구대암각화와 같은 방법으로 그려지고, 사카치알리안의 호랑이 문양은 반구대암각화와 비슷하게 그려졌다는 것은 같은 생업권을 의미하며, 반구대암각화도 환동해문화권의 영향이 일정부분 있다(김재윤 2017b, 2-12,18, 19,22).

  

https://eastsearoad.tistory.com/272?category=772722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category=772722

https://eastsearoad.tistory.com/274?category=772722

https://eastsearoad.tistory.com/275?category=772722

https://eastsearoad.tistory.com/276

https://eastsearoad.tistory.com/277

https://eastsearoad.tistory.com/278?category=772722


*본고는 2018년 12월에 있었던 제 49회 한국상고사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1. 이 연대는 양 지역의 문화가 시작되는 시점이 아닌 서로 관련된 시점이다. [본문으로]
  2. 중동부지역 신석기문화는 오산리식토기 출토된 오산리C지구 3,4,5호 주거지(5750±15B.P.)(소상영 2016) 이후부터 첨저토기가 확인될 때까지 공백이 있다. 문암리의 중기유물층(5120±36B.P.)(소상영 2016의 표 13) [본문으로]
  3. 죽변 유적에서 확인되는 토기는 연해주 보다는 오산리와의 비교우위를 점한다(임상택 2012). [본문으로]
  4. 이는 청동기시대 형성배경은 신석기시대와는 다른 생업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별고로 고찰코자 한다. [본문으로]
  5. 이 경로는 야쿠티아지역을 통해서 아무르강 중류, 하류 및 동해안을 따라서 내려온 경로를 계산한 것이다. 만약 해안선만을 따라서 추정하면 10,500km가량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김재윤23

한반도 남부의 동심원문 암각화는 대부분 소백산맥이동의 영남지역에 분포하고 있다(그림1). 동심원문 및 동심원문과 유사하게 원을 여러 겹처서 시문한 암각화가 있고, 변형 사다리꼴(검파형) 혹은 석검이 그려진 암각화와 함께 시문된 것이 있다(그림 7,8). 그런데 고령의 인화리 암각화에는 동심원문 위에 검파형암각화가 그려져서 두 문양이 시기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그림 8-6). 또한 고령 양전동 암각화에서는 SW2면에서는 검파형 문양에서 뻗어나온 방사선의 위쪽에 동심원문이 그려졌는데(그림8-1), 동심원문이 먼저 그려진 것이다. 즉 동심원문과 검파형암각화는 그려진 시간차가 있을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한반도 동심원문 암각화는 무산 지초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석묘와 관련되어 있어 청동기시대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환동해문화권과 비교하면 연대는 다르다. 문제제기한 바와 같이 유적의 성격에 따른 연대추정은 상황에 따라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발굴된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교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수 있다.


 또한 사카치알리안에서 얼굴모양 마스크 이외에 전신상이 출토된 예가 있다(그림9-1,2). 머리는 원형이고, 몸통은 삼각형으로 표현되고 두팔이 표현되었다. 유사한 예가 포항 대련리에서도 확인되었는데(그림 9-3,4), 사카치알리안 유적의 동심원문 암각화와 얼굴모양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같은 시점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세레미체보 유적(그림 3-8)에서 동심원문과 약간 다른 회오리문양이 확인되는데 양전동(그림 8-4)에서도 확인된다. 즉 동심원문, 전신상암각화, 회오리 문양 등은 소백산맥 이동의 영남에서 확인되며 환동해문화권이 관련성이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

그림 9. 전신상인면문(1,2: 사카치알리안, 3,4: 포항 대련리)




 백성 쌍탑 1기와 사카치알리안, 세레미체보 유적 등의 예로 보아서 동심원문양은 이미 신석기시대 9000년 전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고, 두만강 유역도 세레미체보 유적이 위치한 두만강 유역과 멀지 않다. 그러나 두만강 유역에는 9000년 전 까지 올라가는 유적이 확인된 바 없고, 한반도 남부의 소백산맥 이동의 남부지역 신석기시대 유적도 9000년 전 까지 올라가는 유적이 현재까지는 없다(2,3). 또한 연해주 자이사노프카문화가 시작되는 시점인 5000B.P.부터는 강원도지역에서는 첨저토기가 출토됨으로 이 시간대는 환동해문화권이 축소되었다고 강원도는 문화권에 포함되지 않는다(3, 김재윤 2017).

  

 따라서 현재로서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동심원문 암각화는 아무르강 하류~우수리강 일대 및 송눈평원 일대에서 많이 확인되던 문양이고, 얼굴모양으로 활용되어 그려져서 9000년 전이다. 뿐만 아니라 우수리강과 가까운 두만강 유역에도 확인되는데, 같은 문화지역임으로 유사하거나 약간 느린 시점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또한 한반도의 동심원문 암각화도 태백산맥에서 분기된 소백산맥 이동에서만 확인되었는데, 이는 두만강유역에서도 확인됨으로 환동해문화권과 교류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좀 더 뚜렷한 것은 토기 및 석기 등으로 연구된 아무르강 및 연해주와 교류가 있었던 6500년 전 이후부터 일 수 있고, 연해주와 동해안의 관련성이 6000~5800년 전임으로 이 기간과 관련성이 높다(김재윤 2015, 2017, 3).

  하지만 암각화의 제작연대와 이기간이 반드시 일치할 수는 없다. 정신적인 행위를 토기와 석기 등 일상적인 유물과 같은 시간적인 잣대로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환동해문화권과 영남의 신석기시대사람들이 교류했다고 해도 동심원문암각화를 그린 주체는 영남의 신석기시대 사람이다. 동심원문암각화가 대부분 내륙에 존재하는데, 이곳에서 유적이 생기는 시점은 대부분 5000년 전 이후이며, 동심원문 암각화도 이 때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category=772722(그림1)

https://eastsearoad.tistory.com/274?category=772722(그림3)

https://eastsearoad.tistory.com/272?category=772722(그림 7,8)


*본문에 제시된 표 2와 3은 다음포스팅에 올리겠습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7. 13:45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한반도 영남에 위치한 순수한 동심원문만 그려진 고령 안화리, 진천동 입석, 밀양 안인리, 함안 도항리 등지에서 확인되고 있다(그림 7). 뿐만 아니라 검파형 암각화와 함께 그려진 고령 양전도, 영천 보성리, 고령 안화리 등도 확인된다(그림 8). 동심원문 암각화는 대부분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는데 지석묘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울산반구대암각화박물관 2011,2012).

동심원문암각화가 대부분 지석묘관련 시설에서 확인된다 하더라도 이를 암각화의 제작시기로 단정할 수 없다. 밀양 안인리 4호는 묘역식지석묘로 암각화는 중앙상석이 아닌 가장 자리의 돌에서 확인되었다. 석검과 함께 그려져서 청동기시대로 추정되었지만(그림8-7) 두 그림이 겹쳐져서 그려진 것이 아니라 각각 그려져서 다른 시기 일 가능성도 있다.




그림 7. 1. 무산 지초리, 2. 함안 도항리, 3. 대구 진천동, 4. 복천동, 5.6대구 천내리, 7. 밀양 안인리(신안)4호(김재윤 2018에서)


지석묘와 관련된 동심원문 암각화는 축조될 당시에 이미 암각화가 그려져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지석묘 시기를 암각화가 그려진 시기로 단정할 수 없다. 복천동(그림 7-4)에서도 이미 그려진 돌을 석곽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청동기시대로 추정된 것은 수영천변에서 청동기시대 유물이 채집되었기 때문인데, 만약 신석기시대 유물이 채집된다면 그 연대는 또 변동의 가능성이 있다.

동심원문 암각화 및 일명 검파형암각화가 그려진 고령 양전동 유적은 청동기시대 설과 삼국시대 설로 나눌 수 있다. 청동기시대는 양전동암각화가 보고된 당시에 유적 주변에서 무문토기와 마제석부 등이 발견됨으로 청동기시대~초기철기시대로 편년되었다(이은창 1971). 영일 인비리 유적의 마제석검이 그려진 손잡이 부분을 양전동형암각화의 조형으로 보는 의견은 청동기시대 설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송화섭 1994). 그 이후에도 경주 안심리에서 확인된 유사한 주제로 그려진 암각화가 지석묘의 상석에서 확인됨으로 청동기시대 설이 더 확고해졌다(이상길 1996). 석장동 암각화가 발견되면서 마제석검과 양전동형암각화의 사다리꼴 모티브의 중간모습, 사다리꼴 모티브 등이 확인되면서 인비리 보다는 석장동 유적이 가장 이른 양식으로도 꼽히기도 한다(장명수 1995·2001). 분류기준을 달리한 연구자는 인비리가 석장동 보다는 이르다고 보았지만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다는 설은 변함이 없다(이하우 2011). 


그림 8. 1~4: 고령 양전동, 5. 고령 안화리, 6. 영천 보성리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5a1161a


반면에 양전동형암각화가 삼국시대에 해당될 것이라는 의견을 낸 것은 三上次男(1977)이다. 일본 구주 고분문양와 비슷한 점이 그 근거이다. 고령지산동고분30호분의 개석에서 양전동형암각화의 사다리꼴 모티브 일부가 확인되면서 이 유적의 연대를 양전동형암각화의 하한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전호태 2013, 강봉원 2017). 이를 확대해서 양전동형암각화 가운데 양전동암각화를 영남의 다른 유적과 구분해서 고령이라는 특성과 연결시켜 가야 건국신화와 연결시키고 국가제의가 이루어진 장소로 보는 관점(전호태 2017)은 그간 양전동형암각화가 청동기시대의 것이라는데 대부분의 연구자와는 차이가 있다. 강봉원은 전호태의 의견과는 차이가 있는데 5세기까지 내려올 수 있는 유적은 지산동고분군30호분의 개석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다른 유적들은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강봉원 2017).


 만약 양전동암각화가 삼국시대의 것이라면, 일명 검파형암각화가 그려진 암각화 유적 뿐만 아니라 동심원문이 같이 그려진 유적도 여기에 포함 될 수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동심원문 암각화는 이곳에서만 확인될까? 그리고 언제 그려졌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위해서 다른 지역의 암각화와 비교고찰할 필요가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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