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스키타이 문화권(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 가장 이른 유적인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재지(스키타이 문화)의 유물 뿐만 아니라 외국(고대 이란과 그리스) 유물, 그리고 스키타이 귀족이 주문해서 생산한 유물이 나온다. 주문생산한 유물은 은제거울과 철제검이 있다.

 

은제거울에는 금판에 문양을 새겨서 접합했고, 철제검은 손잡이와 검집은 금으로 입히고 화려한 동물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철제검의 손잡이와 검집 문양은 두 사람이 나무를 마주보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 문양은 코카서스 남쪽의 고대 우라르투 왕(사르두우리 ii, 아르기쉬치 I)의 투구에 나온다. 또 반인반수도 고대 우라르투 왕의 의자를 장식하던 문양과 같다. 토프라흐-칼레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이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전시된 바 있다.

 

그림 1. 켈레르메스 유적의 검집 문양 중 일부(거의 유사한 유물이 멜구노프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그림 2. 켈레르메스 유적의 검집 문양 중 일부 2

 

그림 3. 우라르투 왕의 투구

 

이러한 정황들 때문에 스키타이 문화권에 우라르투를 포함시켜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만약에 포함시킨다면, 우라르투 북쪽의 현재는 조지아 땅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가 매우 고민되었다. 여기에는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를 현지방문해서 사정을 알아보고, 결론을 내리고자 했다.

 

우라르투는 우라르투이고, 조지아는....현대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스키타이 문화권의 판단여부도 불분명하다는 결론. 우라르투는 역시 앗시리아와 북방의 스키타이 문화권을 연결 혹은 방어하던  역할을 했다. 

 

우라르투 이후의 앗시리아와 페르시아 문화가 이곳을 점령해서, 자기 색깔을 찾지 못했다. 또 그 이후에는 아마도 기독교가 밀려오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졌을 것이다. 현대 아르메니아의 적은 역시나 이슬람 문화이고, 조지아의 적은 러시아다.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에 위치한 우라르투 사르두리(Sarduri) II세 때의 수도는 투쉬파였다. 현재 터키 국경내에 있으며 반 호수에 있는 절벽 위에 사원(그림 1)을 만들고 그곳에 왕이 머물렀다고 한다. 시비니 신의 사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반(Van) 절벽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프랑스 연구자인 슐츠로 19세기 초에 발견했다. 슐츠는 처음에 중세시대 아르메니아 역사가 Movses Khorenatsi가 남긴 연구를 밝히기 위해서 이곳을 찾았다. 반 호수 기슭에 건설된 도시가 아시리아 여왕의 명령이라는 내용이었고, 슐츠는 반 호수 기숡에 세워진 사원지가 앗시리아의 건축물이라고 생각했다. 발견한 암석과 설형문자가 새겨진 비문을 스케치 했다. 그러나 그는 1829년 쿠르드족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작업은 1840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후에 슐츠가 스케치 한 비문은 앗시리아어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고, 중세 아르메니아어 일 수도 있다고 추측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영국박물관의 원정대와 독일 원정대가 투쉬파를 발굴하고 그 때 가져간 유물은 현재 영국과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독일에서 그 내용이 출판되었다.

 

1915~1916년 동안 반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군대에 점령되는 동안 러시아 제국고고학회(그림 1)가 투슈파에서 발굴을 했는데 그 때 동쪽 경사면의 틈새에 있는 사르두리(Sarduri) II세의 비문(그림 2)을 발굴하게 되었다. 그는 우라르투의 왕으로 기원전 764~735년 동안 제위했다.

 

그림 1. 러시아 제국고고학 위원회의 발굴, 군인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짐

 

그림 2. 사르두리 II세의 비문

 

러시아 제국고고학회의 발굴 이후에는 대규모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8년 영국 탐험대가 소규모 작업을 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은 불법적인 도굴이 만행되던 곳이었다.

 

* 유적의 위치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음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1. 11. 28. 09:22 세계의 박물관

오늘은 필자가 발견한 박물관 가운데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이곳저곳 많은 박물관을 본 경험에 의하면 굉장한 느낌 곳일 꺼라고 생각한다.

 

코카서스 남쪽 국가인 아르메니아의 기원전 8세기 유적인 예레부니 성곽 바로 앞에 위치한 예레부니 박물관이다. 앞에서 필자가 예레부니 유적의 위치를 잘못 표시했는데, 아래 링크로 가면 바로 볼 수 있다. 예레부니 유적 보다 늦게 만들어진 테이시바이니 유적은 점토벽돌로 만들어진 성곽이라서 지금은 녹아내려서 상대적으로 잘 남아 있지 않지만, 예레부니 유적은 잘 남아 있고, 구글 위성으로도 뚜렷하게 보인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그림 1. 예레부니 성곽과 박물관

 

그림 2. 예레부니 성곽(오른쪽 보라색)과 테이시바이니 성곽(왼쪽 표시), 구글지도에 표시

 

그림 3. 아라라트 분지와 두 성곽의 위치

 

예레부니 박물관은 1968년에 소비에트 시절에 설립되었으니, 당시에는 소비에트 박물관 중에 한 곳이었다. 예레반(그루지아의 수도)이라는 도시가 만들어진 2750주년 기념으로 10월 19일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 박물관을 만든 근거는 예레반 시에서 발견된 고대 유적지인 아린 베르드(예레부니 성곽의 언덕 명칭), 카미르 블루르(테이시바이니 성곽의 언덕 명칭), Shengavit의 발견을 기념하고 만들어진 것이다. 건축물은 1970년 소련 건축가 연맹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림 4.1968년 박물관 개관 당시의 인민, 사진 앞의 사람들은 유적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박물관은 칼디 신의 사원을 그대로 모방한 디자인이다.

 

그림 5. 1968년 박물관 개관 당시의 예레부니 성곽

 

그림 5. 예레부니 박물관의 입구, 칼디 신을 묘사

 

사실 필자가 깜짝 놀란 것은 유적 앞에 박물관을 세우고, 유적을 그대로 교육의 장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물론 유적이 벽돌로 된 성곽이라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졌기도 하지만, 이를 활용할 생각을 했다는 점이다. 예레부니 유적 자체에서 유물이 많이 나오지는 않아서 박물관에는 유물이 많이 없을 수도 있지만, 유적을 그대로 이용한다는 점은...

 

1968년이다.

 

 

더보기

오늘은 새벽부터 일어나 난리를 치렀더니 너무 피곤해서 자료를 찾다가 엉뚱하게 박물관 표지를 보고 여기에 꽂혔다. 역사인식이 없는 나라에 살다보니, 별 것이 다 부럽다. 

 

김재윤

 

 

 

'세계의 박물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키르기스스탄의 촐폰아타 암각화박물관  (0) 2020.07.17
posted by 김재윤23

우라르트의 마지막 도시라고 알려진 테이시바이니 유적은 우라르트 전쟁의 신 테이세바의 명칭을 도시명에 붙인 것이다. 유적은 기원전 7세기 경에 세워졌고 적의 공격으로 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망하기 전까지 테이시바이니는 매우 풍족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적에서는 와인 저장고가 발견되었고, 성의 남쪽에는 포도 뿐만 아니라 살구, 사과 , 석류, 버찌, 호두, 복숭아 등을 길렀던 과수원도 발견되었다. 과일씨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림 1. 테이시바이니 성곽의 평면도, 그리드는 50m간격


성곽내에는 창고들이 발견되었는데, 알곡 저장소, 참기름 제작소, 포도주 제조공간, 양조장 및 맥주 보관소 등이 확인되었다. 알곡보관소에서는 중앙에 구멍이 있는 부침개 모양의 커다란 빵도 발견되었다. 참기름을 제조하던 공간에는 기름을 짜고 남은 깻묵의 흔적과 돌통이 발견되었다. 포도주 제조공간에도 같은 통이 발견되었다.

그림 2. 테이시바이니 성곽의 창고, 노란색-알곡저장소, 녹색-양조장 및 맥주 보관소, 하늘색-참기름 제작 및 보관소, 자주색-와인저장고 , 1. 중앙문, 2. 서문, 3. 내성, 4. 지배자의 거주지, 5- 쐐기문자점토판이 발견된 곳 (그리드는 50m간격)

그림 3. 테이시바이니 성곽의 석주


과수원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 것은 포도씨이고 포도주 저장공간이 가장 많이 발견되어서 포도주 제작이 주요한 생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포도주를 저장한 토기는 카라스 라고 부르는데 400개가 발견되었다. 카라스 한 개는 800~1200리터이다. 포도주를 따르는데는 쿱신(그림 4)(스키타이 문화에서는 유제품을 보관하거나 마시는 잔을 쿱신이라고 부른다)을 사용하는데, 문양이 새겨져 있다. 테이시바이니 유적외에는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쿱신은 1036개가 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림 4. 테이시바이니 성곽의 포도주 저장고(28번)

그림 5. 포도주 저장고 28번에서 나온 쿱신

 

 

 

그림 6. 25번과  28번 포도주 저장고의 바닥 평면도


아라르트 분지에서는 0.5~1톤의 알곡이 1헥타르에서 생산된다. 1500톤의 알곡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2000~3000헥타르의 경작지가 있어야만 가능한데, 테이시바이니 창고에 저장된 정도의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300헥타르의 땅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전체 농경의 면적은 4000~5000헥타르에 달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코카서스 산맥 남쪽에 위치한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은 현재에도 포도주생산으로 유명하다. 소비에트 때도 꼬냑과 와인 생산을 담당했던 곳이다. 필자는 와인 맛을 잘 모르지만 이곳 와인을 좋아했다. 자주 마셨는데, 와인도 뒤끝이 있다. 나도....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에 위치한 우라르트의 도시로 잘 알려진 곳은 예레부니와 테이시바이니 유적이 있다. 모두 성곽 유적으로 특히 테이시바이니(Тейшебаини) 성곽에서는 코카서스 산맥의 북쪽 스키타이 기원전 7세기 유적인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청동화살촉과 같은 모습의 화살촉이 발견되었다(그림 1).

그림 1.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청동화살촉


테이시바이니 유적은 기원전 13세기부터 기원전 8세기 혹은 기원전 7세기까지 존재했던 도시이다. 유적은 1936년에 발견되었고 카르미르-부루르 언덕 위에 만들어졌는데, 유적의 면적은 4헥타르가 넘는다고 한다. 2차 대전이 시작된 1939년부터 발굴을 했으나 전쟁으로 발굴은 중단되었고 1958년부터 다시 피오트로프스키가 발굴을 했다. 이 때 우라르트(철기시대) 이전인 순동시대 및 청동기시대(기원전 13~기원전 8세기 어느시점)에도 문화층이 있던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우라르트 문화층을 발견했다.

도시의 명칭은 역시 우연하게 발견된 쐐기 문자에서 발견되었다. 우라르트의 왕인 루스이 II세가 세운 것인데 그는 아르기쉬치 II세의 아들로 기원전 685~639년에 통치했다. 우라르트 왕국의 쇠퇴기에 세워진 도시로 알려졌다. 기원전 714년 아시리아 사람들은 무사시르에 위치한 우라르트 신 칼디의 주요 종교 건물을 파괴한 것으로 알려졌다. 루스이 II세는 우라르트 신의 숭배를 강화해서 이를 군사력 강화로 이으려고 애쓴 왕으로 알려졌다. 종교를 미끼로 대중을 겁박했을 것이다. 루스이 II세 통치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반 호수 북쪽에 위치한 칼디 신을 숭배하는 도시를 건설하고, 전쟁의 신(神) 테이세바의 이름을 따서 테이세바이니 라고 하는 성을 건설한 것이다. 테이시바이니의 경제와 관련된 내용이 적힌 쐐기문자가 적힌 점토판이 남아 있다.

그림 2. 지질학자가 발견한 점토판


이 유적에는 1950년에 촬영한 항공사진이 남아 있다(그림3). 고대 성곽의 도로와 성벽 및 거주구역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림 3. 1950년 촬영, 불가코바가 찍은 항공촬영, 테이시바이니 고고유적발굴조사장면

 

그림 4. 1950년 촬영, 테이시바이니 성내에서 발견된 포도주 보관소(28번), 저장고 중에 한 곳으로 땅을 파고 큰 도가니를 묻은 방법으로 보관했다. 가장 상단에는 포도주의 종류와 보관 날짜를 표시했다.



발굴결과로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멸망은 여름이었다. 소가 고지대 목초지에 있었고 아직 포도가 익지 않은 기간이었다. 그리고 한밤에 공격이 시작되어 서둘러 도시주민들이 거주구역을 떠나 요새내부로 들어갔다고 판단했다. 발견된 화살촉의 방향이 적군은 언덕 경사면에서 공격했다. 거주구역에서는 여성와 아이들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적에게 벗어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성곽 안쪽의 내성에 임시로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결과 화재가 발생해서 요새 지붕이나 천장등이 파괴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테이시바이니가 마지막에 불타면서 붉게 변한 벽돌로 인해서 이 유적이 위치한 곳의 이름이 카미르-브루르(붉은 언덕)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으로 전해진다. 공격으로 멸망한 이유는 요새로 통하는 물 공급시스템이 파괴되면서 더 이상 이 곳에서 생계를 이을 수 없었다고 알려졌다. 이 유적에서는 포도를 재배하는 과수원도 발견되었는데, 물 공급시스템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연구되었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Yk1k5FjnYe1OSn-yRxnY5IuDo9w9PMt&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복사본 복사본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 Б. Город бога Тейшебы // Советская археология. — Москва, 1959. — № 2.(피오트로프스키 1959, 테이세바 신의 도시)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Пиотровский Б. Б. Урартская крепость Тейшебаини (Кармир-Блур) (к 25-летию раскопок) // Краткие сообщения Института Археологии. — 1965. — Вып. 100. — С. 72—78.(피오트로프스키 1965, 우라르트 테이시바이니 요새성곽)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