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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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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스크 성곽은 동과 서의 개별 성곽과 이 두 성을 연결하는 또 다른 성벽 및 북쪽에 위치한 쿠즈민 성으로 이루어졌다. 동과 서의 성곽 이름은 따로 없고, 벨스크 성의 동쪽 성과 서쪽 성이다.

 

동과 서의 성곽은 축조되시 시작한 시점에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거의 비슷한 시점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는 거 같다. 하지만 두 성의 구조차이는 크다.기원전 7세기 경에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기원전 3세기까지 유적에서는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서쪽의 성곽은 지점마다 성벽높이의 차이가 있지만 5~8m이고, 성벽의 가장 아래 너비는 22~32m이다. 해자의 깊이는 6m에 달한다.

 

그림 1. 벨스크 성곽의 서쪽 성

 

1985년에 성벽을 절개조사했는데(어느 지점인지는 정확하지 않음), 성벽을 4번에 걸쳐서 올렸던 것이 확인되었다.

 

그림 2. 벨스크 성곽의 서쪽 성벽의 단면도, 단면도에서 기호가 다른 것은 각 층을 이루는 흙을 설명한는 것이다. 

 

서쪽 성에서는 많은 구덩이가 확인되었는데, 집자리도 있고 토기들이 들어간 구덩이도 있다. 서쪽 성에서는 집은 땅을 파고 만든 집이지만, 동쪽 성은 상황이 다르다. 서쪽성과 동쪽성에서 모두 그리스 토기가 발견되지만, 그리스와 무역이 본격화 된 것은 기원전 5세기 경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필자가 참고하고 있는 책은 1987년에 출간된 것으로 이 후에 좀 더 자세한 자료가 축적된 것으로 보인다. 1987년에는 성의 평면도와 성벽 단면도 그리고 성 내의 구조물들이 보고 되기는 했지만, 성벽의 구조물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못하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헬온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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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드네프르 강의 지류인 보르스클라 강을 끼고 위치한 벨스크 성곽은 동유럽 최대의 성곽유적으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동쪽 성은 기원전 7세기 경 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하지만 가장 북쪽에 위치한 쿠즈민 성곽은 기원전 5~4세기경에 생긴 것이다.

동과 서에 위치한 두 개의 성곽이 하나의 큰 성곽으로 합쳐진 기원전 6세기 말~5세기이어서 그 이후에 쿠즈민 성이 드러섰다.

 

성곽의 위치 상 보르스클라 강과 거의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은 일종의 항구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발굴자는 전한다. 쿠즈민 성의 면적은 15.4헥타르 정도이고, 전체 성벽의 길이는 898m이다. 1987년 보고 당시 이 성의 발굴조사에서는 별 다른 유구는 발견하지 못했고, 다만 성 내에서 기원전 5~4세기 스키타이 토기를 발견했고 기원전 4세기의 암포라(그리스 토기)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성벽 절개조사를 했는데, 해자의 바닥면인 첫 번째 토층에서는 문화적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유물이 한 점도 나오지 않았지만), 두 번째 토층에서는 기원전 4세기 토기편 2점이 발견되었다.

이를 근거로 쿠즈민 유적은 기원전 5~4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본다.

 

그림 1을 살펴보면 볼쇼이 벨스크 성곽의 벽이 만들어진 후에 이 벽을 남동쪽 벽으로 삼아서 북쪽의 성벽 2개를 만들어서 쿠즈민 성곽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1. 벨스크 성곽의 동북쪽 성벽

 

성이 워낙 크기 때문에 쿠즈민 성도 일부만 조사되었을 것이어서 1987년 보고 당시에 쿠즈민 성 내의 다른 건물흔적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성벽 절개조사는 했다. 하지만 쿠즈민 성벽의 절개는 단면을 남겨 놓지 않고 텍스트만 존재했다. 그래서 단면은 없다. 시람코의 인터뷰 혹은 짧은 다큐를 찾을 수 있었는데, 9월이 되면 발굴을 마친다는 이야기로 보아서 여전히 러시아(소비에트때부터 익혀온)와 같은 방법으로 발굴은 진행된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헬온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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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드네프르강의 지류인 보르스클라 강과 접한 벨스크 성곽은 전체 면적은 4021헥타르이다. 2번 동쪽 성은 첫 번째, 1번 서쪽 성이 두 번째로 만들어지고, 두 성이 합쳐진 것은 기원전 6세기 말~기원전 5세기 초인데, 볼쇼이 벨스크 성곽(그림 1-4)이라고 따로 부른다. 쿠즈민 성곽은 두 성이 합쳐진 뒤에 만들어졌는데 기원전 5~4세기에 만들어졌다. 이 성 전체를 벨스크 성곽이라고 하며 기원전 7세기부터 이곳에서는 사람이 살았다.

동쪽 성곽이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7세기경의 유물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이 시점이라고 추측하고, 서쪽 성곽은 기원전 6~5세기 유물이 발견되어서 서쪽 보다 늦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1. 벨스크 성곽

 

어제 15.4헥타르라고 한 것은 동벽과 북벽이 만나는 사이에 있는 3번인 쿠즈민 성곽의 크기이다. <정정합니다.~> 이 성곽의 면적은 20세기초 모스크바의 크기와 맞먹는다. 2017년 부터는 여름에 이 성곽 내에서 페스티발이 열린다고 한다. 1980년대 자료까지는 러시아어로 된 것이 많은데 그 이후 자료는 우크라이나어이다...T T. 이 성은 우크라이나의 자랑거리 중에 하나이다.

너무 큰데, 또 그에 비하면 정보가 러시아어로 된 것이 충분치 않아서 ,,, 뭣 부터해야 할지 모르겠다. 성 안에는 무덤도 있다.

 

성벽은 동쪽과 서쪽에 다른데, 동쪽은 성벽 앞에 해자가 있다. 해자는 성벽을 따라서 있는 구덩이다. 러시아에서는 환호와 해자를 통틀어 같은 용어를 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에는 환호라고 하고 성벽이 남아 있는 삼국시대에는 주로 해자라는 용어를 쓴다.

 

그림 2. 벨스크 성곽(위키페디아 참고)

 

동쪽 성벽에는 성벽위를 편평하게 다듬지 않고 비교적 뾰족하게 처리했고, 그 앞에는 수직기둥이 박혀 있었다. 성의 벽을 절개해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다. 동쪽성벽의 높이는 3~5m(지점에 따라서 다름), 깊이 1.6~3.5m, 너비는 6.3(상부)~24m(하단)이다. 루보틴 성곽은 성벽의 목축물이 남아 있었지만, 벨스크 성곽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단면과 여러 정황들로 만든 것이다.

 

그림 3. 벨스크 성곽의 동쪽벽 단면도

 

 

참고문헌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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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7세기 루보틴 성곽에서는 어떤 집이 있을까?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지상식 건물지와 반지하식 건물지가 있다. 지상식 건물지에는 노지가 남아 있고, 목조 구조물이 있는 구조이다.

 

지상식 목조집의 벽은 장대와 막대로 만들고 진흙을 덮어서 마무리했으며, 지붕은 짚으로 덮었다. 점토로 덮인 나뭇가지로 만들었고, 지붕은 짚으로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림 1).

지상식 목조집은 구덩이를 파지 않고, 점토 범위 중앙에 기둥구멍(직경 40~45cm, 깊이 95~100cm)이 3개 있고 가장자리에는 기둥구멍이 발견되지 않고 점토를 바른 목체만 발견되었다. 이 점토 범위에는 곡물보관 장소로 보이는 구덩이(28번 구덩이, 깊이 1.25m, 입구 90cm, 바닥 1.3m)와 점토로 만든 일종의 난로 혹은 페키차를 위한 구덩이(29번 구덩이, 95×70cm, 깊이 25cm) 가 발견되었다. 단면이 사다리꼴 모양인 구덩이(20번 구덩이, 입구1.25, 바닥1.5m, 깊이 1.45m)도 발견되었는데 곡물보관장소이다. 발굴범위 6에서 발견된 집이다.

페치카는 국내에서 러시아의 벽난로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러시아 일반 사람들에게 페치카는 난방 기능 뿐만 아니라 일종의 오븐기능도 있다.

 

그림 1. 루보틴 성곽의 지상식 집의 복원도(2)와 점토범위(1), 10×12.5m

 

 

반 지하식은 타원형(2.6×3.3m, 깊이 1.35~1.48m)으로 구덩이를 바닥에 팠지만 집은 지상위에 있다. 바닥의 중앙에 기둥구멍이 있고, 동북쪽에 문이 설치되었다. 17호 집에는 화덕자리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반지하식집에 화덕자리가 있는 집도 있다. 발굴범위 9지역에서 이 집은 위치한다.

 

그림 2. 루보틴 유적의 17호 주거지의 구덩이와 그 복원도

 

성채 내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모두 25동 정도 집이 발견되었는데, 집의 크기 및 바닥에 구덩이를 판 것과 파지 않은 것 등의 차이는 있지만 나무와 흙을 이용해서 집을 만든 것은 동일하다.

 

더보기

무덤만 보다가 집을 보니 너무 낯설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이 괴리감이 어디서 생기는지 모르겠다. 자료 탓은 아닌 것 같은데, 요즘 내가 너무 낯설다.

스키타이 성곽은 주로 생산 시설이 있는 경우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고, 모형 집들도 발견된다. 무덤의 빈도수가 절대적으로 많지만 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А., Люботинское городище. Сборник научных трудов, Харьков: Регион-Информ, 1998. - 184 с (시람코, 1998, 류보틴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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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돈 강 유역의 스키타이 성곽이라고 알려진 하지만 남겨진 건축물은 그리스식 건물지 밖에 없는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은 어떻게 스키타이 유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장 윗층에 남은 그리스 건축물은 기원전 3세기 1/4분기에 해당되며, 그 곳에는 그리스식 토기(그림 1)들이 발견된다. 그리스식 집과 토기는 이 성곽에서 가장 마지막 시기에 발견되는 것이지만, 어찌되었던 스키타이 인의 입장에서는 불리하다.

 

그림 1.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기원전 3세기 그리스 토기

 

스키타이 문화에서 연대측정의 근거가 되는 것 중에 하나는 화살촉이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화살의 중요성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았던 것 같다.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에도 스키타이 사람들은 고리트를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헤로도투스가 남긴 스키타이 신화에서 타르기타우스(그림 7) 라고 하는 사람이 스키타이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인물인데, 늘 고리투스를 착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행히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에 살았던 스키타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남겨놓았다. 화살촉과 아키나크라고 불리는 단검 및 청동창이다. 단검과 청동창은 사실 스키타이 연대를 세밀하게 알지 못한다. 기원전 7~4세기까지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기원전 4세기 이후가 되면 단검은 길어지며, 손잡이 끝장식은 동물의 뿔을 형상화 한 형태(그림 2-5~7)가 아니라 T혹은 역 V자(그림 2-37, 51~54,) 로 바뀌게 된다.

 

그림 2. 유럽 스키타이 문화의 무기변화, 상단: 기원전 4~2세기, 하단: 기원전 7~4세기, 1~15: 검, 16: 투부(전투용도끼), 17~21: 청동창, 22: 찰갑(미늘 갑옷), 23-26: 갈고리

 

그림 3.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청동검

 

그림 4.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청동창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에서 출토된 청동검(그림 3)에도 뿔 모양처럼 생긴 손잡이 끝장식이 달려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유적의 청동창(그림 4)의 모습도 기원전 7~4세기 유물과 유사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화살촉이다. 화살촉을 연대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유럽 스키타이 문화나 시베리아 스키타이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시대별로 변화에 비교적 민감하게 변화되고, 지역성(지역)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림 5.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청동화살촉

 

그림 6. 유럽 스키타이 문화의 화살촉 변화, 2,4-볼가~돈강 유역, 3,5-우랄 남부

 

화살촉은 신부(몸통)의 단면과 자루를 끼우는 부분, 평면형태 등이 중요하다. 유물에 따라서 다른 부수적인 부분들도 판단의 기준이 된다. 대체로 유럽스키타이 유물들도 세 가지 기준으로 구분했다.

기원전 7세기 유물은 (단면)양쪽으로 날이 있는 형태(양익형, 兩翼)이고, 기원전 6세기 이후가 되면 삼익형이 된다. 혹은 간혹 그냥 삼각형도 있는데, 외면에 홈이 없는 경우라서 그렇다. 삼익형의 단면은 기원전 4세기 이후가 되면 대부분 삼각형으로 변화되고, 자루 끼우는 부분도 몸통 안쪽으로 들어가게 된다.

기원전 7세기와 기원전 6세기는 신부(화살촉의 몸통)형태도 변화가 된다. 기원전 7세기 유물은 평면형태가 마름모에 가깝고 앞 부분만 날이 있는 형태이지만, 기원전 6세기 이후 삼각형에 가까우며 신부 전체가 날이 선 형태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자루를 끼우는 부분이 따로 만들어지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형태들이 발견된다. 돈강 유역과 우랄 남부지역의 화살촉은 이 점은 비슷하지만 화살의 동체부에 홈의 깊이 정도가 다르다.

기원전 5~4세기 유물은 단면과 자루끼우는 부분은 직전 시대와 유사하지만 화살촉의 앞 부분이 길어진다. 뿐만 아니라 화살촉 신부의 날이 좀 더 커지는 경향도 있다. 돈강 유역과 우랄 남부지역은 약간 다른 경향이 있는데, 우랄 남부지역(그림 6-)5에 단면이 양익형인 것이 생긴다. 하지만 기원전 7세기와는 달리 자루끼우는 부분이 신부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이후는 훈-사르마트 문화 시기에 해당하는데 화살촉의 앞 부분이 더 길어지고 자루끼우는 부분이 바깥으로 나와 있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간다.

 

엘리자베틴스코예 성곽에서 출토된 화살촉(그림 5)은 기원전 6세기 유물 혹은 기원전 5세기 유물과 유사하다. 그리스인이 집을 짓은 것은 기원전 3세기 1/4분기라고 하니, 이전에 이미 스키타이 인들이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자료를 찾다가 스키타이 성곽이 생각보다 많이 발견되며, 훨씬 오래된 유적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림 7. 차스티예 고분에서 발견된 은제 항아리 속의 타르기타우스

 

참고문헌

 

Марченко К. К., Житников В. Г., Копылов В. П. Елизаветовское городище на Дону. М., 2000(마르첸코, 지트니코프, 코피로프, 2000, 돈 강 유역의 엘리자베트토프스코예 성곽)

Степи европей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1989. 46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89, 소비에트 연방 유럽 내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시기, 소비에트 고고학 시리즈)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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