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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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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7. 23.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의 여러 모습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로마 황제가 그려진 은제품으로 주제가 전환되었다. 사실 로마황제는 필자의 관심사도 아니고 잘 모른다. 그러나 사르마트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문화에서 나오는 왕관장식이 사르마트 문화 및 서아시아의 문화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하는데 이 부분을 전달한 것 뿐이다.

 

로마 북방의 민족들에게 머리장식은 단지 권력자들만이 것은 아니었다. 카자흐스탄 바티르 호수 옆의 동굴 속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머리띠 장식이 발견되었는데, 나무그릇에 담긴채 발견되었다. 일종의 린넨으로 된 끈으로 상단에는 얇은 붉은색 실크 천으로 덮여 있었고 150개의 금판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

 

그림 1. 카자흐스탄 바티르 호수 옆 동굴에서 출토된 머리끈, 길이 46cm, 너비 3cm

 

이러한 머리띠는 복잡한 머리장식의 일부일 것으로 여겨진다. 스키타이 머리장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앞머리를 머리띠로 가리고 뒤에 화려한 장식판으로 붙이는 것이었다(미로시나 1981, 포스팅 참고). 스키타이와 그리스 여성의 모자 및 관장식 복원을 연구한 미로시나에 따르면 비슷한 유물은 그리스에서도 있었다고 한다(미로시나 1983).

 

그림 2. 흑해지역의 스키타이 여성머리 복원(미로시나 1981)

2021.09.2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흑해의 여신] - 기원전 5~4세기 스키타이 여성머리장식

 

기원전 5~4세기 스키타이 여성머리장식

이제까지 보여드린 스키타이 여신인 거울을 들고 있는 여신인 티파티가 표현된 네모꼴의 장식판은 여성의 베일에 달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거울을 들고 있으면서 몸을 돌리고 있는 여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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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4세기 흑해지역의 스키타이와 사르마트 문화에서 발견되는 머리띠 장식은 사실 기원전 5세기 알타이에서도 나무로 된 것이 발견된다. 바르부르가지 유적에서 발견된 것은 꽃(장미) 장식이고 타샨타 II유적에서 나온 것은 사슴장식이다. 신기하게도 이들 나무장식은 그리스와 흑해북안에서 발견되는 황금티아라와 비슷하다.

 

그림 3. 알타이에서 발견되는 나무 디아뎀. 1: 바르부르가지, 2: 타샨타 II유적

 

자세츠카야는 머리띠 장식은 당시에 일종의 부적과도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우 복잡한 머리장식이더라도 앞머리를 가리는 머리띠를 하고 착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습이 왜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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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상상력을 보태면, 누군가 높은 권력자 중에 한명이 머리띠 장식 덕분에 목숨을 살렸을 수 있다. 날라오는 화살이 운좋게 머리띠 장식에 맞고 튕겨나갔다거나...스키타이 화살은 당대 가장 출중한 무기였기 때문이다..이러한 경위가 전해지고 전해져서 어떤 부적, 혹은 행운의 상징과도 같은 역할을 했을지 모른다. 

 

 

참고문헌

Мирошина 1981 — Мирошина Т.В. Некоторые типы скифских женских головных уборов IV-III веков // СА. №4.(미로시나 1981, 기원전 4~3세기 스키타이 여성 머리장식)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7. 22.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가 유라시아 초원의 서부 지역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세기 가량으로 이 문화의 후기인 1세기경에는 남쪽에 로마 제국이 영역을 확장했다. 특히 1세기 이후에는 아부구스트, 네로, 트리야누스는 중부유럽 뿐만 아니라 도나우, 드네프르, 볼가 강~돈강의 하류에 로마의 군대를 이리저리 돌리며 배치했다(포스팅참고)

2022.07.20 - [사르마트 문화] - 1세기 돈 강 유역에서 발견된 로마의 은쟁반

 

1세기 돈 강 유역에서 발견된 로마의 은쟁반

유라시아 서부의 사르마트 문화에서는 특히 동쪽의 돈강 유역 부근의 고분에서는 로마제 은제 식기 등이 발견된다. 특히 은제 쟁반의 가장 중앙에는 원판에 그리스로마신화가 주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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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위 계급이 사용하던 그리스로마신화가 들어간 은쟁반이 시기를 달리하며 중부유럽과 사르마트 문화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볼가강~돈강 유역의 쿠르간에서 은제쟁반이 있다.

 

북방 초원에서 발견되는 은제쟁반이 팔기 위해 만든 물건이 아니라는  외교관계 혹은 화친을 위한 물건이라는 것은 당시의 로마에서 은제품을 매우 사랑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로마의 은(銀) 사랑은 황제의 얼굴이 들어간 장식용 원판을 은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흑해북안의 케르치 해협에 위치한 보스퍼로스 왕국의 4세기 네크로폴에서 출토되었다. 콘스탄티누스 II세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다(그림 1).

 

그림 1. 4세기, 보스포러스 왕국의 네크로폴 출토. 콘스탄티누스 II세(1,2), 은제품으로 금박을 입혔다.

 

승리의 장면을 표현한 이 은제 원판에는 콘스탄티누스 II세는 머리에 머리띠를 차고 있었다. 원래 머리띠는 로마의 황제들이 착용하지 않았다. 아니 증오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주와 금판으로 장식된 머리띠를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황제부터 쓰기 시작했다. 처음 쓴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 머리띠를 처음 들여온 사람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기원전 323)이 동방원정을 떠나서 페르시아 왕관을 들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통치자는 동방의 장식을 증오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황제의 의상에 없어서는 안되는 장식이 되었다(자세츠카야 2011).

 

은제 원판의 콘스탄티누스 II세는 승리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고 그는 화려하게 치장된 의장용 군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띠도 금과 진주로 장식된 것이다. 그의 모습은 다른 은제 쟁반에도 발견되었다(그림 2).

 

그림 2. 콘스탄티누스 II세. 은제 쟁반 위에 표현됨. 흑해북안의 보스퍼러스 네크로폴에서 출토됨.

 

뿐만 아니라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와 그의 아들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의 머리, 라벤나에 있는 성 비탈리 교회의 유명한 모자이크에 있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테오도라 황후의 머리에도 비슷한 장식이 있다(자세츠카야 2011).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로 로마의 황제와 황후들은 증오하던 동방의 머리장식을 착용했다.

사실 머리띠 장식은 로마 북방의 민족들에게 아주 오래부터(스키타이 문화) 애용되던 의상장식이라는 것은 이 블로그를 계속 보는 사람은 알 것이다.

 

참고문헌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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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20. 09:22 사르마트 문화

 

유라시아 서부의 사르마트 문화에서는 특히 동쪽의 돈강 유역 부근의 고분에서는 로마제 은제 식기 등이 발견된다. 특히 은제 쟁반의 가장 중앙에는 원판에 그리스로마신화가 주조되어 있다.

사르마트 문화의 모든 지역에서 로마의 은제 식기가 발견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부유한 사르마트 문화의 쿠르간이어도, 유리병이나 암포라 등은 무역품으로 묘주의 무덤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은제 식기는 1세기 중반 이후 볼가 강~돈강 유역의 무덤에서만 발견된다.

2022.07.18 - [사르마트 문화] - 1세기 동유럽의 로마 식기는 무역품일까?

 

1세기 동유럽의 로마 식기는 무역품일까?

사르마트 문화는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2세기까지 돈강 유역부터 흑해 북안을 차지했다. 기원전 4세기경의 유적에서는 그 이전 스키타이 문화와 구분이 애매한 것들이 많지만 1세기경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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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들 은제 식기는 8점이 주로 발견되는데, 로마 사람들은 식탁 위에 식기를 8개씩 쓰지 않았다. 로마의 국경 밖에서만 8개의 은제 그릇이 발견되었다.

2022.07.19 - [사르마트 문화] - 동유럽에서 발견된 로마 식기 8점

 

동유럽에서 발견된 로마 식기 8점

사르마트 문화에서 1세기경에 종종 은제 식기가 발견된다. 주로 사르마트 문화의 동쪽 지역인 돈강 유역이나 볼가 강 유역에서 볼 수 있다. 돈강 하류의 대표적인 도시인 노보체르카스크 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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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원판이 달린 은제 그릇은 로마의 최상층에서 사용했다는 것은 일부 유물 가운데 비문이 남아 있어서 알 수 있다. 심페르폴에서 나온 은제 바닥에는 그리스 비문이 남아 있었고, 3세기 케르치에서 발견된 은제 접시의 바닥에도 "Tsar Antonin"과 "Tsar Riskuporid"라고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 그릇은 Marcus Aurelius Antoninus Caracalla가 보스퍼러스 왕 (케르치 해협에 위치) Riskupori du III세에게 선물했다고 알려졌다. 또 다흐호프브카야 마을 부근에서 발견된 은제 컵에도 "from Tsar Pakor"이라는 비문이 남아 있었다. 1세기 이전의 유물로 알려졌다(클레인 2016).

 

당시 로마 사람들은 금 보다 은을 더 사랑했다. 그들은 전리품을 금으로 받지 않고 은으로 받았다. 은과 청동으로 만든 예술품 모으기는 로마귀족들 사이에서 전염병처럼 퍼졌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가 들어간 은제품을 판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돈강 하류의 사도브이 유적에서 나온 그릇을 일반민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무역 채널로 들어왔다고 볼 수 없다. 최상위 수준에서 로마의 국경을 넘어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사르마트 문화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의 바깥에서 나오는 은제 그릇은 대부분 외교관계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왜 1 중반~2세기 볼가 강 유역, 돈강 유역과 쿠반지역(코카서스 북부)에서 갑자기 은제 식기가 나왔을까?

 

클레인(2016)은 이를 로마의 군대 이동과 비교했다. 로마에서는 네로시대(54~68년)를 거치면서 로마군대의 배치에 변화가 있었다. 그 이전에 아부구스트 시대에 동유럽(다뉴브 강 하류)에 배치했던 군대 중에 일부를 네로시대가 되면서 서부와 중부유럽으로 배치를 전환했고 일부는 아시아 지역(볼가 강, 돈강 유역)에도 증가시켰다. 그 결과 네로시대에는 다뉴브(도나우) 강 하류에 로마 군대는 반으로 줄어 들었다. 1세기 후반 이후 트리야누스(98~1117년)가 통치하면서 서부유럽의 군대를 빼서 다뉴브(도나우) 하류에 다시 군대를 증가시켰고, 아시아 지역(돈강 유역)의 군대는 그대로 두었다.

1세기 전반부에는 독일과 그 후방의 유럽에서 군대가 많이 주둔했을때 그곳에 로마제 은제 식기가 많이 발견되지만 이때 쿠반과 볼가 강 및 돈강 유역에서는 로마의 예술적인 은제 식기의 숫자는 작은 편이었다. 1세기 중반 이후에서 2세기 초반에 다뉴브 강과 아시아지역에 로마 군대가 그 이전보다 많아지면서 돈강 유역, 볼가 등에서 은제 식기가 발견되었다.

 

즉 사르마트 문화의 부유한 쿠르간 중에서 볼가 강과 돈강 유역에서 은제 식기가 1세기 중반 이후에 많이 발견되는 것은 외교품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드네프르강 유역과 다뉴브 강 유역에도 사르마트 문화의 쿠르간 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이때 로마는 이 보다 더 서쪽인 독일과 덴마크 등지를 더 신경 썼었다.

 

그래서 돈강 하류에  위치한 사도브이 쿠르간 주인공은 당시에 사르마트  부족연합  사람들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 중에 한명이었을 것이다(클레인 2016).

 

그림 1. 1세기 유라시아의 여러 제국(클레인 2016)

 

 

 

참고문헌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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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19.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에서 1세기경에 종종 은제 식기가 발견된다. 주로 사르마트 문화의 동쪽 지역인 돈강 유역이나 볼가 강 유역에서 볼 수 있다. 돈강 하류의 대표적인 도시인 노보체르카스크 시에서는 사도브이 유적에서 8점의 은제 식기가 발견되었다. 은제 식기 안에는 그리스로마신화그 그려진 것으로 로마제품이다. 이 유적과 동시기의 유적이 볼가강과 돈강 유역의 사이 지역에서 나왔는데 주토보 유적이다. 이곳에서도 은제 식기가 8점이 발견되었다.

 

 

그림 1. 사도브이 유적의 은제 쟁반, 네레이스와 해마

 

1세기는 로마가 강성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들의 유물은 사르마트 문화지역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는데 베를린 근처에서도 발견되었다. Gildesheim유적은 로마의 은제 창고로 알려질 만큼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은제 쟁반8개가 있었다.

 

즉 로마 제국의 밖에서는 로마의 8개의 그릇이 세트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로마 제국 안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로마에서는 잔치상에 앉는 사람은 4-8명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에서 잔치상에 앉는 사람은 숫자 3과 관련되어 있다. 보통 3명이지만 3명이 3중으로 열을 지어서 앉는 경우는 9명이 초대되었다. 나중에는 12명의 손님을 초대하는 방법이 동쪽으로 퍼졌다(예수의 최후의 만찬). 그래서 그리스와 로마사람들은 8개의 그릇을 다루지 않았다.

 

당시 로마 제국 밖의 북방 민족들 잔치에서는 귀족은 8명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르마트 사람들 보다는 당시 독일인과 로마사람들의 인식이었다. 왜냐하면 중부유럽에서 사변형 건축학은 올드 인도-유럽의 전통이라고 알려져서(세메이카 1971) 숫자 4와 8은 독일인에게 전통적인 숫자였고, 로마인들은 그것을 알았다(클레인 2016).

 

 

참고문헌

Семека Е. С. 1971. Антропоморфные и зооморфные символы в четырех- и восьмичленных моделях мира. — Труды по знаковым системам. Тарту, вып. 5 (Ученые записки Тартуского гос. университета): 92-108.(세메이카 1971, 4 방향과 8 방향에 있는 의인화와 동물화 심볼에 대한 연구:사인의 시스템에 대한 연구)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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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18.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는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2세기까지 돈강 유역부터 흑해 북안을 차지했다. 기원전 4세기경의 유적에서는 그 이전 스키타이 문화와 구분이 애매한 것들이 많지만 1세기경이 되면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로마제품은 사르마트 문화의 사람들이 애용했다. 로마에서 주로 수출하던 물건은 토제 암포라(손잡이 두 개 달린 항아리)와 유리제품과 붉은색 옻칠을 한 그릇이다. 주로 로마 구경 근처와 흑해 북안의 도시 부근에서 많이 발견된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지에 산지해 있다. 또 러시아의 코카서스 북부 지역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그림 1. 사드브이 유적에서 출토된 로마의 은제 그릇의 내부, 네레이스(바다의 님프)와 켄타우로스

 

 

 

그림 2. 1세기, 유라시아의 제국

 

그런데 로마의 유물로 생각되는 은제 그릇은 그 출토범위가 다르다.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러시아 국경 안인 볼가와 쿠반(코카서스 북부)지역과 그리고 돈 강 유역에서 비교적 발견되는 편이다(클레인 2016).

 

아이러니 하다. 로마의 유리를 사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부자들은 로마의 은제 식기는 사지 못했을까? 로마의 아름다운 예술적인 식기를 1세기 우크라이나 지역에 살던 사르마트 사람들은 변변치 못한 물건으로 취급했을까? 아니면 그들에게는 너무 비싼 물건이었을까?

 

아니면 돈강 서쪽의 사르마트 사람들과 흑해북부의 우크라이나 사람들과는 매장방법 즉 전통이 달랐을까? 그렇지 않다.

1~2세기 돈강 서쪽에는 매우 많은 유물을 부장하는 전통이 있었고 사르마트 고유한 그릇이 부장되었다. 예를 들면 사도브이 유적(은제 쟁반 8점 나옴)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호흘라치 무덤의 동물장식이 있는 청동솥이다.

 

그렇다면 로마의 은제 식기는 무역품이 아니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사도브이 무덤의 주인공은 그것을 구입한 것이 아니다.

 

그럼 전쟁에서 이긴 획득물일까?

전쟁에서 이긴 물건이라면 패자들에게 약탈을 하던지, 조공품이었던지, 배상금이었던지 물건을 선별적으로 고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은제품은 선별적이었다. 그리고 사르마트 귀족들이 주문제작한 것이라면 그들이 좋아했던 동물문양으로 장식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 완전히 로마 자신들의 스타일이었다.

 

 

 

참고문헌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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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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