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해안로
앞 서 설명한 고고학 유적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중부지역에서 강을 따라서 움직이는 육로와 바다로 가는 해로 즉 2개의 교통로가 있다는 것으로 설명가능하다. 육로를 복원할 수 있는 강은 모두 20개로 남쪽의 제르칼나야 강에서부터 700~800km 떨어진 가장 북쪽의 사마르가 강이다. 필자는 지난 35년간 이 지역을 선사시대에서 고대 교통로와 관련된 유적을 연구했다.
1) 제르칼나야 강 유역.
지형학적 특징으로 인해서 연해주에서 아무르 강 유역으로 넘어가는 것은 고개를 통하는 것이 편했는데, 이 강은 바다의 만으로 흘러들어간다. 바다와는 직선거리로 약 80km가량이다. 베뉴코바 고개는 청동기시대 남서쪽과 서쪽을 동쪽과 연결하는 길목이었지만 이 시기의 성곽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발해시기에 축조된다. 고개는 아무르 강 유역으로부터 들어오는 길로서 우수리 강과 지류인 파블로프카(Павловкa, Pavlovka) 강도 이곳과 통한다. 서쪽에서부터 들어오는 도로는 우수리 강 유역의 절벽성인 미스-우보르카(Мыс-Уборка, Mys-Uborka), 시부차르(Сибучар, Sibuchar), 벨쵸프스코예(Бельцовское, Bel'tsovskoye)성곽 등으로 알 수 있다. 이곳은 아무르 강에서 바다로 가는 길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한다.
베뉴코프가 이곳을 잘 이용했다. 그는 길 원주민이 지나다니는 길 뿐만 아니라 중국 사냥꾼 등이 이용하는 길도 잘 알았다. 제르칼나야 강 유역에서 고개에서부터 바다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지점에서 확인되는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의 마을 유적인 오를노예 그네즈도(Орлиное гнездо, Orlinoye gnezdo) 제르칼나야-카리에르(Зеркальная-Карьер, Zerkal'naya-Kar'yer), 우스티노프카(Устиновка, Ustinovka)-4, 수보로보(Суворово, Suvorovo)-3, 4, 6, 8, 퍄느이 클류치(Пьяный Ключ, P'yanyy Klyuch), 우스티-제르칼노예(Усть-Зеркальное, Ust'-Zerkal'noye)-4, 우스티-제르칼노예 성곽(댜코프 1989) 등으로 보아서 선사시대부터 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지도. 노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제르칼나야 강 유역.(4~6: 고르노레첸스코예 1-3성곽, 7, 시바이고우 성곽, 8, 사도브이 클류치, 9-보고폴예, 10제르칼나야 토성, 11 우스티 제르칼나야 , 12-파디 시로카야 성곽)
좀 더 자세한 지도는 http://2장. 제르칼나야 강 유역의 성곽 을 참고. 각 성에 대한 설명도 앞선 포스팅 참고
그리고 제르칼나야 도로의 표식이 되는 곳은 절벽산 성인 스칼라 데르수 성곽이다. 이 곳은 청동기시대 부터 마을이 있어왔던 것이고 주변 지역을 감시하고 마을을 보호하는 기능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자연적인 입지 탓에 성벽은 따로 설치되지 않았다. 제르칼나야 강의 하류는 지류로 인해서 북쪽, 동쪽, 남동쪽으로 나눠진다. 동쪽은 제르칼나야 강의 본류로 동해로 흘러가는데 우스티-제르칼노예 성곽이 문지 역할을 한다. 남동쪽은 사도비 클류치 강과 브루실로프카 강의 상류와 맞닿아 있다. 아르자마소프카(Арзамасовка, Arzamasovka)강은 동해의 올가(Ольга, Ol'ga) 만으로 흘러간다. 북쪽의 지류는 제르칼나야 강에서 테튜힌(Тетюхин, Tetyukhin)고개로 남아가가서 루드나야 강의 지류인 모나스트르카 강 계곡까지 이어진다. 이 길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도 이용되었던 것인데 지역주민들은 ‘Богопольская тропа(역자 주. 신의 풀밭길)’이라고 명명하였다. 현재는 걸어 다니거나, 수레 , 스키 혹은 말을 타고 갈 수 있을 정도이다.
말갈인들의 길에 대한 존재에 대해서 발해와 여진은 역사적 기록을 남겨 놓았다. ‘수서’에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 7세기 후반의 흑수말갈족에게는 李謹行 이라는 군인이 있었다. 그의 아들과 함께 중국과의 물자교류를 위해서 석도(石道)를 만들었는데, 시기는 발해건국이전이라고 되어 있다(보로비요프 1975, 샤프쿠노프 1968). 퉁구스-만주 국가인 발해는 지방 행정구역을 포함해서 자신의 전체 영역에 육로를 만드는 것에 아주 능하였다. 길은 세금을 걷고, 각 지방 간의 상업활동, 국민과 국가의 경계를 통제하는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필요한데 즉 외교적 활동, 정치적 활동, 가까운 국가나 먼 국가 간의 상업 교류나 군사적 목적 등에도 필요하다.
발해의 영역은 북쪽에서 남쪽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2500km로 거의 ‘방형’이다. 발해의 북동쪽은 바다, 남동쪽은 통일신라, 서쪽은 거란족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역사서에는 발해의 육상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신라도, 거란도, 영주도, 일본도가 있다고 한다(샤프쿠노프 1968).
발해~동하국의 제르칼나야 도로는 베뉴코프스코예, 고르노레첸스코예-1~3, 시바이고우, 보고폴, 사도비 클류치, 브루실로프스코예, 제르칼느이 성벽, 파디 시로카야 성벽 등이 관련되었고, 전체가 하나의 도로망으로 연결되어 다른 지역과 고립되지 않았다. 서쪽과 남서쪽은 우수리 강과 그 지류인 볼샤야 우수르카 강, 파블로프카 강, 쥬라블레프카(Журавлевка, Zhuravlevka)강이 연결되어 베뉴코보 고개를 통과하면 커다란 교통로와 연결된다. 그곳에는 콕샤로프크코예(Кокшаровское, Koksharovskoye)-1~3, 사라토프스코예(Саратовское, Saratovskoye)-1,2, 우보르카-돌린나야(Уборка-долинная, Uborka-dolinnaya), 주라블레프스코예(Журавлевское, Zhuravlevskoye) 오크라인카(Окраинка,Okrainka), 플라호트뉴킨스코예-돌린노예(Плахотнюкинское-Долинное, Plakhotnyukinskoye-Dolinnoye), 플라호트뉴킨스코예-고르노예(Плахотнюкинское-Горное, Plakhotnyukinskoye-Gornoye)성곽 등이 자리 잡아서 대규모 교통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발해 및 동하국과 관련되어 있다.
발해는 대무예(719-737)와 대인수(818-830)가 새로운 영역을 확장하고 그 곳에 솔빈부를 세웠다. 그런데 각기 다른 지역의 주민들을 이주 시키고 정착시키기 위해서 그들을 통제해야만 한다. 다른 어떤 장소 보다도 베뉴코보 고개를 통해서 산으로 들어가는 문지 역할을 하는 곳을 통제해야만 했다. 산의 고개마루를 지키기 위해서 여러 성곽이이 들어서게 되었고, 군사적 목적 등 때문에 여러 장소에 성곽 뿐 만 아니라 사원도 축조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아르세네프는 이곳에 사원이 있었다고 기록한 바 있다.
발해시기와 발해 멸망 후 시기에 이 지역에 고르노레첸스코예-1~3, 보고폴예, 사도브이 클류치 성지와 시네고르(Синегорье, Sinegor'ye)-1,2 유적, 우스티노프카 폴랴(Устиновка поля, Ustinovka polya)유적 등 대규모 취락 유적이 존재했다. 보고폴예 성곽에서 출발한 길은 두 갈래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북쪽으로 테튜힌 고개로 넘어간다. 이 고개를 지나면 루드나야 강 유역의 모나스트르카 강 쪽으로 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동쪽 방향으로 바다쪽 제르칼나야 항구로 가는 길이다. 바다로 가는 길에는 경계벽이 있어서, 이 길을 보호하고 있다.
이 지역이 동하국에 편입되었을 때, 시호테 알린 산맥에서 가장 큰 성지 중에 하나인 시바이고우 성지를 축조되었다. 여진족이 베뉴코보 고개를 넘어서 이곳까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여진족은 길을 만드는데 매우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일종의 아스팔트를 도로에 깔아서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다. 필자는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에서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나 바 있다. 이 곳을 여러 해 동안 발굴했는데, 그 곳에서 궁정지 같은 큰 건물과 성벽 사이에 2~3cm 두께로 매우 단단하게 다진 흙을 자갈돌 위에 깐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여진족은 중국과의 전쟁 이후에 북쪽으로 통하는 육로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진족은 다른 퉁구-만주족(말갈, 만주족, 우데기족, 나나이족)과 마찬가지로 육로를 더 선호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한편으로 강을 따라서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것에도 아주 능했다. 예를 들면 우데기족은 1950년대 까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발해인들은 육로와 수로 모두를 이용 하였다. 여진족은 여름에는 배를 타고 이동하고, 겨울에는 얼어 붙은 강위를 걸어서 이동하였다. 여진족에게는 두 수로 사이를 마차를 이용해서 육로로 이동하는 방법이 잘 알려 져 있다. 강 상류에서는 말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힘든 곳에서는 소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고학적 유물로 남아 있는데 마차 바퀴의 뚜껑 등이 그러하다. 수레 이용에 대한 흔적은 퉁구-만주족의 언어에도 남아 있는데, 몽골어와 여진어의 ‘마차’는 거의 유사하다. 두 수로를 이동하는 것은 큰 수레를 이용할 수 있고, 강을 빨리 건널 수 있다. 중국에서는 도로에 25km 사이마다 역참을 둔다. 하지만 동하국의 여진족은 새로운 영역에서 성곽 축조를 서둘러야 해서 이런 중국의 방법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곽 안의 큰 건물에서는 문에 이르기 까지 ‘대로’는 반드시 건설했다. 물론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서 문의 위치는 바뀔 수 있는데,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따라서 제르칼나야 강 유역의 교통로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다 통하고 있다. 서쪽에서는 베뉴코바 고개를 통해서 우수리강 유역과 통하는 길이고, 북쪽에서는 테튜힌 고개를 통한 길, 남쪽은 브루실로프카 강의 상류를 통하는 것이다. 동쪽은 제르칼나야 항구를 통해서 바다로 가는 곳과 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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