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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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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유형. 평지성


이 성지는 강 주변에 설치되는데, 그 중에서도 높고 편평한 범람원으로 홍수의 영향이 받지 않는 곳이 선택된다. 연해주의 북동지역에서 평지성은 모두 12개로 브루실로프스코예, 사도비 클류치, 보고폴예, 에스톤카, 프리스탄스코예, 드지기토프스코예, 크라스노예 오제로, 체렘샤니, 말라야 케마, 켐스코예-돌리노예, 켐스코예-모르스코예,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성곽 등이다.

평지성은 농경에도 편한 지역으로 물과 접근성이 좋은 중류역이나 하류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 진다. 1) 방형(장방형), 2) 다각형, 3) 궁형(개방형)

 

(1) 1형식. 방형 성지

현존하는 평면형태 방형의 평지성은 브루실로프스코예 http://브루실로프카 성곽 유적 , 사도브이 클류치, 에스톤카http://루드나야 강 유역: 에스톤카 발해성곽, 드지기토프스코예, 프리스탄스코예, 크라스노예 오제로, 말라야 케마, 체렘샤니, 켐스코예-모르스코예 성지 등 모두 9기이다.



. 평면형태. 단순하고, 내성과 보루가 없다. 예외적으로 드지기토프스코예 성지에는 아주 작은 내성이 있다. 성지의 내부는 아주 편평하고, 장대가 없다. 성내부에서 소토가 확인되는 유적은 브루실로프스코예, 드지기토프스코예, 크라스노예 오제로, 에스톤카, 체렘샤니 유적 등이다. 성벽과 가까운 곳에서 구덩이가 확인되는데, 이 곳에는 성벽을 축조할 때 사용된 흙을 채취한 흔적으로 생각된다. 돌로 만들어진 우물도 확인되는데 이러한 유적은 에스톤카, 브루실로프스코예 유적 등이다. 성의 내부에서는 생활구역과 생산구역으로 나누어진다.

 

. 성벽의 축조방법. 성벽은 치가 없는 단순구조로, 성의 크기를 계측한 후 모서리부터 축조되기 시작한다. 성벽은 흙을 층층이 다져서 쌓아 올리는 판축기법을 이용하였는데, 성벽의 외벽은 돌을 경사지게 해서 쌓아올렸다. 이렇게 성벽을 경사지게 쌓아 올리는 것은 성의 다른 곳에서도 보인다.

. 평면특징. 방형의 성에서는 문지가 2~4기 확인되는 것이 보통인데, 드물지만 1개인 것도 있다. 문지는 대개 단순한데, 2~5m의 성벽을 절개해서 만든다. 여기에 다른 기술을 더한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벽의 높이는 산성과는 차이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높지 않고 1~2~2.5m에서 가량이다.

평면형태 방형의 성지는 성벽 외측에 해자가 있는 것이 보통인데, 보로비요프가 언급했듯이 2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성으로부터 물이 빠져나가게 하는 일종의 하수도 역할과 다른 하나는 방어적인 요소이다(보로비요프 1983).

가장 큰 방형 평지성은 디지기토프스코예 성으로 57,600, 다음은 브루실로프스코예 성곽으로 28,900이다. 나머지 성곽의 평면적은 10,000를 넘지 않는다.

 

. 용도. 평지에 위치한 성지는 높지 않은 성벽과, 단순한 성문, 치와 집석 시설의 부재, 화재나 다른 파손 흔적이 없는 점 등으로 보아서 평온한 시기에 평지의 방형성지가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강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성들은 사냥, 어업 등 퉁구스-만주족의 생업활동을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베뉴코프 1960). 성곽에서 생활구역을 발굴한 결과, 그 곳에서 오랜기간 동안 정주한 흔적이 있다. 이는 방형 성지가 취락을 위한 것임을 잘 알 수 있게 한다.

 

. 문화의 특징과 연대. 이 문제는 아주 복잡하고 현재까지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현재는 방형 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대략 3가지로 구분되는데, 연질토기, 녹로제 토기, 손으로 만든 후 녹로위에서 완성되는 토기로 구분된다. 연질토기는 원래 원주민의 전통으로 모든 유적에서 말갈토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녹로제 토기는 발해형식의 토기로써, 방형 성지가 발해국가와 관계가 많음을 보여준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유적에서 발해토기가 출토하게 된 것은 발해와 말갈 간의 경제교류가 아주 깊었거나 혹은 이 지역에 발해인이 들어왔을 가능성이 많다. 녹로제 토기는 인화문이 시문되어 있다. 이러한 토기는 필자가 예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발해국의 남쪽인 연해주에서 보이는 이 토기가 아무르강 하류 여진족 문화의 일부와 유사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토기를 녹로에 놓고 성형하는 기술과 기형 등은 중국의 기술이다. 그래서 평지성 중에 방형 성지도 연해주 동북쪽에 위치한 성곽은 말갈문화의 것으로 생각된다. 말갈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국가가 발해(698~9226), 여진(115~1234), 동하국(1217~1234)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 볼 수 있다. 방형 평지성에서 출토된 토기는 전체적 양상으로 보아서 8~10세기 발해 국가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적에서 출토된 말갈토기 옹형 토기의 기형은 9~10세기에 유행한 것이기 때문에 유적의 연대는 그에 따르는 것이 더 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댜코바 1983).

 

. 기원. 방형 평지성은 아주 잘 지어진 방어시설로서 기원전 10세기부터 10세기 까지 이 지역에는 없었던 건축물이다. 방어시설이라도 단순히 곶 위에 짓는 정도이다. 바둑판 같이 반듯한 평지성은 고대부터 중국의 기술로 정확한 계측을 통해서 지을 수 있는 건축물이다. 주로 방형성은 궁정 등을 짓는데 이용되었다(이보츠키나 2003). 러시아 극동에서 방형성지는 발해(698~926)이후에야 볼 수 있는 건물지이다. 발해는 연해주로 바로 들어온 것은 아니다. 중국 사료에 기록되어 있듯이, 중국 당나라의 행정을 모방해서 국가의 기초를 9세기 초반에 만들었고, 방형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오랑캐의 땅인 연해주도 하나의 현으로 들어가서 지역 주민들을 통제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치가 없는 방형의 평지성에서는 확인되는 고고유물 가운데 무기가 지표에서도 수습되지 않고, 토층에서도 거의 확인되지 않는데, 이러한 점은 연해주의 북동 지역에 발해는 처음에는 아주 평화로웠다는 점을 반증한다. 성은 그 지역과 주민의 관할하는 하나의 관청으로써 역할이었다. 성의 지위는 그 규모와도 일치하는데, 드지기토프스코예 성지는 동북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성곽은 인접한 포드네베스노예 성곽에서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 사면으로부터 들어오는 문지를 지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곳은 동해까지 이어져서 드지기트 항구까지 다다르는 길을 통제한다. 또한 드지기토프스코예 성곽의 위상은 내성의 조재로도 알 수 있다. 고고학유물 중에서 확인되는 말갈토기의 존재는 이 평지성이 지역민인 말갈 군인들이 관장하던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는데, 아직까지 외래문화(발해문화)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가 존재하던 시기에 발해 토기가 나타난 것은 이 지역에 새로운 고고문화를 규명할 수 있다. 방형의 평지성과 녹로제 토기 등은 중국 전통인데, 중요한 것은 성벽의 축조방법이다. 현재까지 러시아의 연구자들은 판축 기법이 예외적으로 연해주에서는 여진족과 관련된 12~13세기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도 평지의 방형성이 발해의 것이라는 판단이었지만, 성벽축조에서는 위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연해주의 북동지역에서 말갈족에게는 너무 이른 기술이었는데, 아마도 중국 기술자에 의해서 평지성이 계획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간접적으로 발해의 국가 영역에 들어간 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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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절벽 산성



이 형식에 해당되는 산성은 스칼라 데르수(사진), 달네고르스코예 성곽이다.

자연성지로 강변의 높은 절벽 위에 위치하는데, 관찰과 방어를 위해서 축조하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진. 스칼라 데르수의 전경


. 평면형태-자연면을 그대로 이용해서 단순하다. 움푹 들어간 부분에 주거지가 위치한다.

. 방어시설-자연방어시설이기 때문에 따로 설치하지 않았다.

. 연대-출토된 토기로 보아서 발해문화의 것으로 생각되고 8세기 보다 이르지 않다.

. 용도-루드나야와 제르칼나야 강 유역에서 나가는 길목을 지키는 지점이다.

. 기원-석성은 고구려 전통의 것으로 생각된다. 퉁구-만주족은 지리적으로 고구려와 인접한 지역에 거주했다. 중국 사서에 남아 있는 대로, 우호적인 관계만을 유지한 것이 아니라 전쟁과 같이 대체상황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고구려에만 적대한 것이 아니라 중국과 동아시아 전체를 상대로 그러한 경향이 있다. 7세기 고구려의 멸망이후 고구려의 유민이 넘어와서 발해로 넘어와서, 말갈과 함께 구성원이 되었고, 그 때 함께 산에 석성 짓는 기법도 넘어 왔을 것으로 판단된다. 흙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돌만을 사용하는 축성 기법은 한국과 중국에서 지금까지도 사용되지만, 중국사람 연구자들도 이는 고구려의 기술이라는데 동의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한곳에 떨어진 구릉 위에 성벽을 모두 둘린 석성은 고구려 전통의 것이다. 바시코프스코예 성곽은 평면형태가 궁형으로 고구려의 축성기법과 입지는 말갈인 들이 주로 세우던 곶 위에 세워진 두 가지 전통이 혼합되었다. 성내에서 말갈토기가 확인되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연해주의 석성은 7세기부터 확인되는데, 발해의 건국시점보다는 올라가지 않는다. 절벽성의 하부형식 궁형의 석성은 늦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8~9세기정도이다. 고구려-말갈 혼합형 성이라고도 분류할 수 있다.

산성은 4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구릉 산성, 고개산성, 봉우리 산성, 절벽 산성 등이며 그 기원은 각기 다르다. 구릉 산성은 여진성으로써 동하국(1217~1234)의 군사 행정관청의역할을 담당하던 곳이다(댜코바·사크마로프 2002c). 고개성은 중국 축조기법에 발해의 산성 특징인 고개에 축조된다는 점에서 두 가지가 혼합되는데, 이는 주요 교통로를 통제하던 기능을 한다. 이러한 고개는 현재까지도 도로망으로 이용되고 있다. 봉우리 산성은 고구려의 축성기술에 원 지역민(말갈족)들이 산지를 지키던 곳에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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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형식. 봉우리 산성


동떨어진 언덕이나 구릉 위에 성이 축조되며 돌로 쌓은 성벽이 특징이다(15).

유적은 강의 전체를 관찰 감시 할 수 있는 아주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특징인데, 강으로 접근하거나 성곽으로 올라오는 것을 즉시 볼 수 있는 곳이다. 구릉의 경사면 자체가 돌로 쌓여져 있어서, 누군가 한 발 짝 땔 때마다 돌이 움직여서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형식의 특징은 자연적 지형에 따른 것으로 돌이 많은 언덕위에 위치한다. 스미르코프 클류치, 자볼레첸나야, 클류치, 바시노프스코예, 세셀레프스코예, 야수 성곽 등이다.

클류치 성곽은 동해안의 디지기트 항구를 통제하고, 바시노프스코예 성곽은 루드나야 항구, 스미르코프 클류치 성곽과 자볼레첸나야 성곽은 세레브랸카 강의 지류를 지킨다. 세셀레프스코예 성곽은 지보피스나야 강을 지킨다.

평면형태에 따라서 타원형 성곽과 궁형성곽으로 나눌 수 있다.


A. 타원형 성곽

성벽은 성의 모든 면에 다 돌아가는 폐쇄형으로 돌로 축조되어 있다(자볼레첸노예, 스미르코프 클류치http://세레브랸카 강 유역의 석성2, 세셀레프스코예 , 야수). 


. 평면형태-단순한데, 취락이나 생업과 관련된 건축물은 구릉 상의 평지나 그와 가까운 곳의 단구대 시설을 이용한다.

. 성의 축조방법-성벽은 돌로 쌓는 것이 특징인데, 돌 사이의 다른 흙이나 부수적인 것 없이 오직 돌만을 이용해서 축조하였다. 성벽의 높이는 1~7.5m까지 다양하다. 문은 단순한데, 2~5m가량의 절개면이다. 성벽 전체 흑은 하부만 경사지게 만들어졌다. 성곽의 평면형태는 원형으로 직경 1~3m, 깊이는 0.7~1m가량이며, 화살촉 등이 발견된다.

.용도는 동해안의 디지기트, 세레브랸카 항구 등으로 향하는 길의 문을 지키고 감시하는 역할이다.

 

B. 궁형성곽

바시코프스코예 성곽은 궁형으로, 성벽은 돌로 쌓았다.http://루드나야강유역: 바시코프스코예 발해성곽


. 평면형태- 자연입지를 그대로 따랐는데, 성벽이 부채꼴로 휘어지는 궁형의 모양이다.

. 용도-루드나야 강과 동해의 루드나야 항구로 들어가는 길의 문지를 통제하는 성격이다.

. 연대-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와 다른 유물을 통해서 말갈문화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석성의 전통은 고구려의 것으로 발해시기에 축조되었다.

. 기원. 입지는 곶에 위치지만, 돌로 쌓은 성벽은 고구려 전통으로 원주민인 말갈과 고구려 전통이 혼합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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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형식- 고개 산성(산성은 구릉성, 고개, 봉우리, 절벽 등으로 분류된다.)


이 형식의 산성은 주로 산의 고개마루에 지어지는데, 큰 강의 유역에서부터 다른 교통로로 이어지는 곳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각된다. 2형식에 해당하는 산성은 모두 4개인데, 베뉴코보스코예 산성, 포드네베스노예 산성, 말라야 카리마 산성과 카라민스키 흐레베트 산성 등이다.

 베누코프스코예 산성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 경사면으로부터 동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축조되었는데, 이 교통로는 제르칼나야 강까지 이어지고, 다시 하류에서는 동, , 북쪽으로 지류를 따라서 나누어진다.

북쪽 방향은 지류는 제르칼나야 강에서부터 테튜헤 고개를 통해서 루드나야 강 유역의 모나스트르카 강까지 이어진다. 남쪽과 동쪽 방향은 브루실로프카 강과 사도비 클류치 강의 상류와 연결된 교통로이다. 이 세 방향은 제르칼나야 강과 통하게 되어 있다.

포드네베스노예 성곽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 경사면의 아무르 강 유역에서부터 동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이 길은 볼샤야 우스르카 강의 지류와 드지기토프카 강의 지류인 이르티스 강을 통해서 동해안의 드지기트 항구까지 이어진다.

말라야 카르마 성곽과 카라민스키 흐레베트 성곽이 위치한 곳도 지보피스나야 강 유역의 암구 유역에서부터 들어오는 북쪽 문지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고개마루에 위치하고 있는 산성은 그 평면형태로 크게 3가지로 구분가능한데, 방형(장방형), 자형, 다각형 등이다.

 

A. 하부형식 1

포드네베스노예 성곽은 방형(장방형) 평면형태로 평면적은 24,000(155×160m)이다. 방향은 성의 벽면이 동서남북과 일치한다(그림 132).

평면형태-아주 단순하고 그 내부 시설도 내성, 보루, 건축지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벽-동쪽 성벽에서는 치가 확인되는데, 성벽은 흙과 돌을 섞어서 사용하였다. 성문은 아주 단순한데, 5m가량의 절개면이 남아 있다.

용도-방어와 감시역할을 위한 성지이다.

 




그림 132. 포드네베스노예 성곽

 

B. 하부형식 2

자형 평면형태로 말라야 카르마(그림 133의 좌)와 베뉴코프스코예 성지(그림 133의 우)가 해당되며, 평면형태는 10004800이다(그림 133).

평면형태-아주 단순하고, 내성, 보루, 건축지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림133. 말라야 카리마(좌), 베뉴코프스코예(우)

 

C. 하부형식 3

카라민스키 흐레베트 성곽과 같은 다각형의 성지로 그 평면크기는 1000이다.http://암구강 유역의 성곽 6

 

. 평면형태-아주 단순하고, 내성, 보루, 장대(將臺)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 성벽-단순한데, , 해자 등이 없고, 문지가 단순하다.

. 용도-고개를 지키고 감시하기 위한 성지이다.

. 기원-3가지 평면형태의 고개 산지성은 중국의 축조건축기술을 따랐는데, 성의 입지는 중국과는 다르다. 방형 혹은 장방형 성지는 평지에 축조되는 것은 중국의 전통인데, 이와 같은 평면형태의 성곽이 산의 고개에 위치한 것은 특이하다. 이는 교통로를 더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 자연적인 입지를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즉 자연적인 입지를 그대로 살리면서 평지성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했다.

 고개 산지성의 기본적인 용도는 교통로를 통제하기 위한 장소로써 아무르 강에서부터 동해로 들어가는 길을 관장하기 위함이다. 아마도 이 길목과 길은 아주 예전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교통로의 주요 지점에 건축물을 것은 발해로 최초로 8세기를 넘지 않는다


 새로운 지역에서 적응하기 위해서 고아시아족과 퉁구-만주족을 받아 들여야 했고, 외부의 적과 물자교류에서 얻을 수 있는 세금을 걷기 위해서 이러한 곳을 통제했을 것이다.

중국식의 똑바른 방형의 평지성은 러시아 극동에서는 발해에 의해서 처음으로 축조되었는데, 처음에는 발해가 평안할 때는 주로 강 주변에 축조되었다. 그 뒤에 발해가 국난에 휩싸이고, 주변 국가들에 의해서 어려워 질 때, 자연지형을 이용하는 성지 등이 새롭게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평지성의 평면형태가 산위에 축조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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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델레예프 편년법에 따라서 연해주 북동지역의 여러 성지에 대한 유형화를 하고자 한다. 고고문화의 기원, 편년과 계통문제와 관련된 기본적인 문제와 국가적 통일 문제 뿐만 극동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과 고고물질간의 해석과도 관계가 있다.

앞서 제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연해주의 동북지역에는 12개의 강이 존재하고, 58개의 성지가 조사되었다.

먼저 유적이 입지한 지형에 따라서 유형화 하고, 좀 더 구체적인 입지에 따라서 형식으로 나누었다. 그래서 전체 입지에 따른 유형은 1) 산지성, 2) 평지성), 3) 으로 나누어 진다.

 

1)1유형. 산지성

이 유형은 15개의 유적(베뉴코보, 시바이고우, 바시코프스코예, 클류치. 쿠날레이스코예, 포드네베스노예, 고르부샤, 시미르코프 클류치, 자볼로첸노예, 세셀레프스코예, 야슈, 소프카 류브비, 소욘스코예, 카라민스키 흐베르트, 말라야 카르마) 이 모두 포함된다.

산지성은 아주 높은 곳으로 주변과 성쪽으로 다가오는 길을 모두 관찰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다. 특히 전쟁에 관련된 것이 많은데, 입지의 성격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1형식-구릉성곽, 2형식-고개성곽, 3형식-봉우리 성곽, 4형식-절벽성곽


(1) 1형식- 구릉성 산성

이 형식은 시바이고우, 쿠날레이스코예, 소프카 류브비 성지가 해당된다(그림 131, 14).

구릉성 산지성은 성벽이 모든 방면을 다 두르는 것이 아닌 개방형 성벽이다. 한 형식의 온돌이 설치되어 있고, 크지 않은 다양한 형태의 방어시설로 군사행정용 관청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형식의 성곽은 이 지역에서는 발전적인 형태는 보이지 않는데,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성벽, 주거지, 궁전지, 보루 등을 고쳐서 쓴 흔적은 보이지 않는점도 이 형식의 성이 아주 짧은 기간만 이용되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림 131. 구릉성 산성(7-시바이고우, 25-쿠날레이스코예, 44-소프카 류브비 성)



 

. 입지. 이 형식의 성지는 항상 산에서 내려오는 깨끗하고 차가운 시내물이 집수되는 곳과 가까운 곳에 축조된다. 각 성지는 큰 강의 지류 하류에 입지하는데, 시바이고우 성지는 제르칼나야 강의 지류인 우스티노프카 강 하류 보다 약간 위쪽에, 쿠날레에스코예 성지는 드지기토프카 강의 지류인 쿠날레이카 강의 하류, 소프카 류브비는 암구 강 지류인 세르바토프카 강의 하류에 축조되었다.

시바이고우 성지와 쿠날레이스코예 성지는 강의 하류에 위치하는데, 연해주의 북동 지역 산지성의 특징이 아니라 연해주 전체에서 확인된다. 비슷한 예가 샤이긴스코예(Шайгинское), 스칼리스토예(Скалистое), 예카테리노프스코예(Екатериновское), 아나네프스코예(Ананьевское) 성곽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산지성은 성벽이 모두 둘러지지 않은 개방형 성벽인데, 그 용도는 대체적으로 전쟁이나 군사용 행정관청 혹은 가축 등을 기르기도 하였다. 그래서 당연히 대량의 말이 필요하기 때문에 물과 가까운 곳에 입지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소프카 류브비는 약간 예외인데, 동해에서 0.5km 떨어진 곳에 입지하는데, 이는 방어나 보초 시설과 같은 기능을 한다.

성벽은 구릉의 산마루를 따라서 주로 축조되는데, 구릉 사면에서부터 시작해서 밑으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문은 아래쪽에 설치된다. 소프카 류브비는 예외적으로 강과 접한 절벽위에 지어져서 따로 방어시설이 필요하지 않았다. 방어시설이 필요한 곳은 높은 곳 보다는 아래쪽에 필요한데, 그곳에 성벽이 축조되었다.


. 성곽내부구조. 산지성의 내부구조는 그 곳의 지형에 따라서 결정된다. 성곽은 성벽으로 보통 구획되고, 내부에는 보루, 내성, 생활구역으로 나눠진다.

생활구역은 항상 경사면에 특별하게 평탄면을 다듬는다. 시바이고우 성지 내에서는 3~5~8m높이의 상당히 높은 곳이고, 쿠날레이스코예 성지 내에서는 2~4m높이의 성지, 소프카 류브비에서는 1~3m 높은 곳에 설치되는데, 가장 단단한 구릉사면에 설치된다. 테라스 축조는 어떠한 경우든지 모두 같은데 1) 구릉을 가로 질러서 편평하게 다듬고 2) 소토로 기초를 다지고 3) 무거운 흙으로 번갈라 가면서 층층이 쌓아서 만드는 방법을 따르고 있다. 테라스의 크기는 각기 다르기 때문에 주거지가 1기 확인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여러 기 확인되는 경우도 있다. 주거지에서는 고래나 고래 온돌이 설치되었다.

16세기 사서에 따르면, 여진족은 이 단구대 위의 숨겨진 도시안에 귀족이나 그의 친척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2003).

 

내성은 시바이고우와 쿠날레이스코예 성지에서 확인된다.

내성은 산쪽으로 가까운 곳에 축조되는 특징이 있다.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은 북쪽 성벽, 시바이고우 성벽은 서쪽 성벽에 가까운 곳에 축조된다.

내성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에 가까운데 쿠날레이스코예, 시바이고우 성곽도 몇 개의 장방형 내성이 모여서 큰 성벽으로 둘러 쌓인 것이다.

) 내성벽과 단구대는 축조되는 것이 정형화되어 있다. 그 장소를 편평하게 다지고, 흙을 채워서 기저부를 만들고, 그 위에 건축물의 계측하고 그 곳에 내성의 모서리부터 성벽을 쌓아 올렸다.

내성에는 중심지가 되는 큰 건물지가 있는데, 그 건물지의 모서리가 동서남북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16세기 사서에 의하면 내성 안에는 만주족의 귀족과 그 친인척 들이 살았다고 기록되었는데, 이에 동의한다. 그 이유는 연해주의 경우도 내성이 행정관청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프카 류브비에서는 이러한 건물지가 없는 데, 내성이 있는 성곽과는 용도가 다를 것으로 추정된다.

 

보루는 시바이고우와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에서 확인되고, 소프카 류브비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성벽과 멀지 않은 곳에 설치되었는데, 쿠날레이스코예 성지에서는 동쪽, 시바이고우 성지에서는 북쪽과 가까운 곳에서 확인된다. 특징은 다음과 같다.

평면형태-방형

장축길이-19~20m

성벽의 모서리는 동서남북의 방향과 일치

보루 내에는 자형 혹은 자형 온돌이 설치된 주거지가 2~3기 확인됨.

문지는 2~3m성벽을 절개한 것으로 현존하는데, 나무로 시설물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

성벽은 판축기법을 이용해서 흙으로 쌓아서 만든 것.

평면크기 400.

용도는 군사용이다.

 

방어시설은 세 성곽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성벽은 모두 한 가지 방법으로 제작되었는데, 판축기법으로 축조되었다. 이 판축기법으로 인해서 높이가 8m까지 성벽을 축조할 수 있었다.

좀 더 낮은 성벽의 경우(쿠날레이스코예 성지)도 판축기법을 이용했는데, 시바이고우 성지에서는 문에 옹성시설을 한 곳도 있다.

집석시설

성벽에 보초와 관련된 시설

성벽에 투석을 할 수 있는 시설물(시바이고우, 쿠날레이스코예 성지)

각 형식은 다시 하부 형식을 내포한다.

 

구릉성 산지에서 소프캌 류브비 성곽은 아래와 같은 특징이 있어서 1형식의 하부형식으로 구분한다.


A. 하부형식 1

성벽은 산마루에 설치되지 않고, 범람원을 따라서 설치되었다.

치와 집석시설이 확인되지 않는다.

내성이 없다.

보루가 없다.

성의 평면크기가 4500로 작다.

소프카 류보비 성곽은 방어와 보초용으로 동하국의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통제하는 용도로 축조되었다.

 

. 용도. 산성의 평면크기와 위치가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연해주의 남쪽과 중부지역을 통제하기 위함이 명확하게 보인다. 연해주에서 산성 중에서 24개의 유적이 구릉에 위치하는데, 북동 지역에서는 3개만이 확인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은 시바이고우 성지로, 가장 큰데 평면적이 20,000가량이다. 성 내부에는 보루, 내성, 생활구역 등이 설치되어 있고, 성벽에는 치, 투석시설, 방어시설 등이 확인된다. 하지만 아주 두터운 성벽과 사용되지 않은 많은 투석기 등은 이곳에서 실제로 전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화재의 흔적이나 주거지가 파손 혹은 불에 탄 흔적 등도 없고 유물에서도 이런 전쟁의 흔적이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성곽내부가 파괴 된 채 남아 있었다면, 거의 붕괴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지만 이 성에서는 그런 점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은 연해주 동북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성지로 12,000를 차지한다. 가장 높은 성벽은 동쪽벽으로 높이가 8m에 달하는데, 적으로부터 침략을 막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이나 충돌의 상황에 직면한 흔적은 소프카 류브비 성곽에서만 관찰된다. 이 성곽은 동하국의 해안 동북경계 중에서 동해 바다쪽을 지키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푸른 관옥과 철제 화살촉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성곽에 갑작스런 침입으로 인해서 버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동하국의 동북경계를 표시하는 직접적인 유적은 말라야 카리마 성지이다. 이곳은 지지보프스나야 강의 지류인 암구 강으로부터 들어오는 길목과 교통로를 지키기 위해서 세워졌다.

구릉 상 위의 산성은 동하국의 군사행정관청용으로써 성벽이 사방을 모두 다 둘러싸고 있지는 않은 개방형이다. 이 성곽은 동해 바다를 통제하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10세기 중반부터 퉁구스- 만주족의 조상격인 말갈족이 이러한 지형에 성을 짓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말갈족은 교통로에 아주 두터운 방어시설을 축조하는 것에 능했다. 동하국은 여진족의 국가로 말갈족이 아닌 몽골족으로, 전쟁과 관련된 무기(旋風五砲)와 같은 전쟁용 화차, 불화살촉, 투석기, 기병 등)를 모두 가지고 있었고, 전쟁의 기술도 상당했다.

쿠날레이스코예 성지에서 알 수 있듯이 성곽에서는 스스로 자급자족한다. 쿠날레이스코예 동북쪽은 구릉과 가까운데, 이 곳에서 중국에서 농사를 지을 때와 비슷하게 이용된 경작지가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현재까지도 현지민이 농사를 짓고 있다. 평면형태와 다시 개축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성곽은 20~25년 정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축조되어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성벽을 축조하는 방법은 아주 정형화 된 것으로서, 원주민인 퉁구스-만주족이나 고아시아족의 전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당연히 이러한 성곽을 축조하기 위해서 중국에서 기술자를 데리고 왔을 것이고, 지형에 맞게 축조하고, 직접 짓는 것은 군인과 지역민 들이 했을 것이다. 성을 계획하고 축조하는 시간은 아주 빨리 행해졌지만 이는 모두 전쟁을 위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 기원. 개방형의 성벽인 산성의 축조방법은 혼합적인 요소가 있다.


성곽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축조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현재 고구려 성곽의 특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유는 연해주와 한국의 지형이 거의 유사하다는 점과 연결시켜 볼 수 있고, 그 용도 또한 방어나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 등 같다. 성곽의 평면형태에서 내성, 보루, 생활 구역, 성의 모서리가 동서남북 방향, 흙으로 기단을 설치하는 것 등은 중국의 축조기술이다.

그런데 건축물은 각기 다른 전통을 따르고 있다. 성벽을 흙으로 판판히 축조하는 판축 기법과 성벽의 모서리 부분부터 축조하는 방법 등은 모두 중국의 특징이다. 그 외의 성벽을 자연지형에 따라서 모두 돌리지 않는 점, 언덕의 산마루에 축조하는 점 혹은 강의 범람원에 축조하는 것과, 산이 아닌 곶 등에 축조하는 것은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부터 있어왔으며, 말갈문화의 전통이다.

그리고 성벽 위의 투석기와 관련된 집석유구와 치의 축조 방법 등은 이블리예프에 따르면 거란족의 전통이라고 한다(이블리예프 1983).

 따라서 개방형 성벽이 특징인 산성은 여러 가지 문화를 받아들인 혼합된 특징을 보인다. 아마도 전쟁과 정치적 목적으로 고구려, 중국, 퉁구-만주족의 여러 기술자들을 데리고 성곽을 축조했던 것이 가장 안전하고 믿을 만 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성곽에서는 고고유물이 확인되었는데 금속과 토기가 대부분인데, 1217~1234년에 존재했던 동하국의 것이다. 역사적 시간과 유적에서 얻어진 방사성탄소연대(745±45, COAH 4182)와 출토된 동전으로 보아서 그 연대는 서로 상응한다. 이러한 유형의 성지가 여러 전통이 혼합된 양상을 보이는 것은 신생국가로써 자신의 영토를 지치기 위해서 그 당시 존재했던 가장 낳은 성 축조기술들을 모아서 새로운 유형의 성을 축조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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