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번역서2: 연해주 영동지역 고대 부터 발해및여진의 성곽연구/1장'에 해당되는 글 8

  1. 2018.05.12 연구사 4: 부세의 연구
  2. 2018.05.10 연구사 3: 파라랄디(카파로프)의 연구
  3. 2018.05.09 연구사 2: 베뉴코프 및 향토학자의 연구

1884년에 아무르 지역연구회가 창설되면서, 연해주 성곽연구를 주독하게 된다. 이 연구회는 블라디보스톡과 아무르지역의 연구를 통합한 것으로 중요한 연구들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림 6. 부세


1862년 극동에서 아무르 주의 전시 주지사 탐험기록 담당 사무관으로 근무한 부세(1838~1896)의 연구가 괄목할 만하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우수리스크 까지 기차를 타고 여러 번 여행을 하였는데, 그는 이곳의 경제적인 생산 활동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의 문화와 역사적인 문제까지 깊이 있게 관심을 기울였다. 지역민에 대한 관심은 현존하는 고대 문화유산과 유적들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부세는 아무르지역연구회에서 처음으로 고고학 유적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보고서에는 모두 20여기의 성지를 포함한 97개의 고고학 유적에 대한 것이었다. 부세는 고고학답사를 여러 번 했는데, 그 결과 연해주 남동쪽의 많은 성지를 발견하였다. 우수리스크 지역에서 자파드노-우스리스크 성, 유즈노-우수르스키 성, 아누치노 지역에서 아누치노 성과 노보고르데예프스키 성지, 이바노프카 마을에서 서쪽으로 5.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도로에 대한 것도 포함되었다. 그 외에도 헤니나야 소프카, 니콜라예프스코예, 콕샤로프크소예-1, 파블로프스코예 성지, 수호돌 항구의 크라스느이 곶의 성지 등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 성지들에 남아 있는 방어시설-성벽, 해자, 문, 평면시설-들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그 기록을 남겼다. 부세는 대부분의 성지가 ‘만주, 한국, 중국 사이의 전쟁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이 성지가 668년-발해 건국 초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파라라디 신부의 연구에 의하면 훨씬 오래된 고대성지는 타원형으로 생겼는데, 유즈노-우수리스크 지역에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고 밝혔다(부세 1888).
부세의 연구는 고고학 유적과 유물들 직접 조사한 것으로 사후(1908년)에 출판되었다. 크라포트킨 공작이 부세가 조사한 연해주의 성지를 발표하였다. 아누치노 지역의 브라트 산의 성지, 크라스노야로프스코예 성지와 고대 도로, 보구슬라프스코예, 체르니고프스코예, 노보니신스코예, 노보로스신스코예, 스테큘뉴힌스코예-1, 이즈베스토프스코예 성지 등이다. 고고학 유적들의 분석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4단계로 편년하였다.


1. 선사시대
2. 668~1615년: 만주인과 중국인의 전성기로 이곳에서는 947년 동안이 문화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시대
3. 1615년~1861년까지는 문화의 황폐화시대
4. 러시아의 영토에 영입된 시기
 
부세가 연해주 성곽들의 다양한 형태를 지리학적으로 설명하면서 우수리 강을 중심으로 중세시대에는 하나의 커다란 정치체가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그것은 우수리 강과 아르세네프 강의 수계가 이 정치체의 서쪽 경계가 된다고 하였다(부세 1888: 크라포트킨 1908).
또 한명의 연해주 성지 연구자가 있었는데, 연해주의 산림원에서 근무하던 팔체프스키 엔. 아. 이다. 그는 여러 기의 성지들을 발견하고 아무르 지역연구회에 이를 통보하였다. 그가 발견한 성지는 연해주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한 것으로 에스톤카 성, 루드나야 성, 바튜키 성, 곤차로프카 성, 라조프스코예 성, 예카테리노프스코예 성, 프르세발스코예 성 등이 있다(부세·크라포트킨)(역자 주. 이 책은 출판연도가 없음).


몇 몇의 성지(예를 들면 루드나야 성지)는 현재까지 팔체프스키의 보고만이 남아 있을 뿐 다른곳에는 전혀 보고되지 않은 곳도 있다. 왜냐하면 루드나야 성지는 그 뒤에 루드나야 프리스탄 항구를 건설하면서 완전히 성지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테튜헤 강의 하류에서 북서쪽으로 1verst(역자 주. 러시아의 옛 거리단위. 1verst=1.067km)만 가면 강의 좌안에 작은 장방형 성지(정면이 27×25 shazen)(역자 주17세기에 사용한 러시아 거리단위. 1 shazen=2.16m)가 있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서 루드나야 성지는 평지성으로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크기는 58.2×54m정도로 생각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현재까지도 파라랄디(카파로프) 신부(1817~1878)의 역사-민속학적 연구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다. 그는 1870~1872년에 연해주, 아무르, 만주 지역 지질학회 회원이었다(그림 4, 5). 그는 러시아 동방학자 가운데서 기록된 최초로 고고학 유적을 찾았던 학자이다(카파로프 1871, 파노프 1898). 우수리스크 지역에 처음으로 카파로프가 왔을 때, ‘어떤 중국 책’에 적힌대로 레푸 강(현재 일리스타야 강)과 다우비헤(현재 아르세네프카 강)의 수계를 따라서 잔존한 성벽을 찾았다. 이 성은 치키르-무둔이라는 중국 사람이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는 둔다스 만과 포시에트 만에서 고대 항구의 흔적을 찾았다고 적었다(카파로프 1871, 파노프 1898). 그 외에도 크레포치나야, 케드로프카, 라드돌라야 강, 페레보조치나야, 크라스노야르스크, 니콜라예프스코예 성의 성벽을 연구했다.


그림 4. 카파로프가 발견한 라즈돌나야 강(중국명: 수분하)의 토루

그림 5. 카파로프 신부


상트-페제부르그로 돌아가는 길에 신부는 죽고, 그의 연구 결과물은 일부는 도난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그의 출판물은 사후에 출판 되었는데, 고고학적 유적과 민속학적 문화적인 해석에 대한 것이다. 카파로프는 수분하의 북쪽 성지들을 관찰했는데, 이 성지들은 한국사의 프리즘과 같은 존재라고 언급하고 있다. 성의 일부분은 고려인이 축조한 것이고, 일부는 여진의 것이라고 하였다. 수분하의 우안에 남은 성벽은 트랙터에 의해서 많이 파괴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성의 대부분은 발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역사적인 사실과 지역적 위치 등으로 보아서 유즈노-우수리스크 지역에 남아 있는 고대의 유적들은 만주에 있던 발해의 중요한 행정관청 중에 하나로 생각된다. 그 뒤 이 지역에서 고려와 여진(중원에 금을 세우게 됨) 사이에 충돌이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흔적은 전쟁과 관련된 유적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아르히만드르트 파랄랄디 1871).


이.페. 나다로프는 연해주 성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1882~1883년 동안 극동지역에서 이만 강 하류 부터 아르세네프카 강까지 조사하였는데, 노보포크로프스키의 2개 성지, 예카테리노프스크, 파브로프스키 성지, 바라바쉐프카 강의 고대 도로 등이다. 나다로프의 보고서(나도로프 1887)에는 ‘이만강가에는 고대 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기술되었다. 나파로프가 언급한 것은 고대석성으로 생각되는데, 부정형의 평면형태 이며, 성벽과 해자의 크기를 측량하였고, 성벽이 3중이었던 것으로 밝혔다. 그는 이 성지가 지금으로부터 1000년 이상 올라간 고려의 것으로 보았다. 지역주민들 사이에도 옛날 석성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흙으로 구운 기와와 전돌 등이 발견되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두 번째 단계는 향토사학자의 연구에 의한 연구이다. 제정 러시아 때 극동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고, 19세기 중반부터 연해주의 중세시대 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무르 주에 파견된 군인이나 기술자에 의해서 이러한 것들이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공식적으로 이 지역의 성곽 연구에서 제일 처음 시도한 사람은 젊은 러시아 장교 엠. 이. 베뉴코프(1832~1901)로, 그는 1858년에 정부의 명령에 따라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르 지역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그림 2).

그림 2. 베뉴코프


 26살의 청년은 아무르에서부터 우수리강을 따라서 해안지대인 동해안까지 가는 탐험을 책임감, 프로의식, 호기심 등으로 우수하게 마무리 하였다. 베뉴코프는 처음 탐험에서 어느 것도 쉽게 지나치지 않았지만 아쉽게도 연해주의 사람들과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필요한 정보를 얻고 그것을 평가하기 위해서 올바른 질문을 할 필요가 있었다. 우수리스크 지역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성곽과 요새 등을 남긴 사람과의 교류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1970년 하바로프스크에서 발간된 베뉴코프의 책 『아무르, 중국, 일본의 여행』에 대해서 스테파노프는 서평을 다음과 같이 했다. ‘러시아의 우수리 지역을 관찰하였다. 아주 육중한 시호테 알린 산맥을 지나서 바다에 이르는 고개를 찾았다’ 

마시모비치 학술위원은 베뉴코프의 책에 서평을 남겼는데, 과거에 자신이 갔던 길에 대해서 아주 정직하게 수정을 하였다. ‘도비하 강의 하류에서 남동쪽으로 우리는 내려왔는데 그곳에는 아주 드물게 고등교육기관이 있는 큰 취락지역이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22~45〬경도로 무너지고 오래된 성지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성지는 아마도 금 혹은 청왕조의 처음 시기에 만들어진 12경이 중 한 곳이다’(베뉴코프 1970).

  베뉴코프가 왜 오래된 여진의 성을 보았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기억 속에 힘센 여진족에 대한 이야기나 전설 등이 항상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제외하고는 베뉴코프는 중국 역사서에 남아 있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언급하곤 하였다.

 또 다른 연해주의 고대 성곽에 대해서 연구를 한 사람은 지질학자 이코켄틴 알렉산드로비치 로파틴이다. 극동 탐험 당시에 첫 보고서로‘ 고대 아무르 지역의 49개 수혈’을 쓰고, 고고학회 회원이 된다. 이 자료는 현재 상트 페체르부르그에 물질문화연구소에 남아 있다(로파틴 1869). 그는 현재 우수리스크 시에 남아 있는 성에 대해서 기술했는데, 그 성지의 이름은 「자파드노-우수리스크 성지(우수리스크 서쪽 성)」로 평면형태가 방형이고, 12세기~13세기 초반에 축조되었다. 「유즈노-우스리스크 성지(우수리스크 남쪽 성)」는 부정형 평면형태로 8~13세기 초반으로 비정된다. 크라스노야르스코예 성은 라즈돌나야 강(수분하)의 우안 높은 절벽위에 위치하는데, 평면적은 1,550,000~1,600,000㎡이고, 너비 3~5m, 길이 8m정도의 성벽이 현존한다. 노보고르디예프스코예 성지(별칭은 쿠루글나야 소프카: 역자 주둥근언덕)로 노보고르데예프카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단독 언덕 위에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다. 「베르흐네 -미하일로프스코예 성지」는 우수리강의 우안에 위치하는데, 베르흐네-미하일로프카 마을에서 남쪽으로 3~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부정형이고, 삼중의 성벽과 해자가 돌아가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외 이노케틴 알렉산드로비치는 처음으로 고고학 건축물의 그름과 특징 등을 자세하게 그렸다. 1858년부터 라파틴과 거의 동시에 우수리스크 지방의 성지를 전문 지도제작자인 프로렌스키가 지도에 표시하였다.

10년 뒤에 우수리스크 지방의 성지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계속 찾아왔는데 그 중 한명인 여행가 프리세발스키 (1839~1888)(그림 3)도 이곳에 들러서 니콜스크-우수리스코예마을의 성지를 보고 연해주의 고대 도시에 대한 베뉴코프의 이야기를 확인해 주었다(프리체발스키 1937).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prev 1 2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