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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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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릭유적은 2500년 전 혹은 보다 약간 더 오래된 시간에 만들어진 무덤이 주요한 장소이다. 이 유적은 좁게는 파지릭문화에 속하고, 넓게는 스키타이 문화이다. 파지릭문화는 스키타이문화(권)에서 알타이 지역에 있던 무덤을 중심으로  밝혀졌다. 앞서 살펴보았던 얼음공주로 유명한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3유적과 아크 알라하 1유적도 이 문화의 유적이다.

 

파지릭 유적은 1929년 1호를 그랴즈노프가 발굴하기 시작해서, 1947~1949년에 발굴되었다. 그래서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각 유적에 대한 리포트가 나온 후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 논문 및 저서가 나오지 않고, 유적발굴이 곧 자신의 저작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후자의 형태는 중국과 러시아 등 광대한 범위의 국가에서는 약간의 변명처럼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하다. 가령 예를 들면 5000~4500년 전 사이에 유적이 발견되지 않다가, 발견되었다면 그 자체로 연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루덴코가 발굴한 2~5호의 파지릭 유적은 대부분 1953년에 발표된 책에 기술된 내용이다. 그래서 각 유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있지만, 루덴코는 파지릭 유적에 대한 종합적인 결론을 내어서, ‘파지릭문화’를 규정하려 했다.

 

예를 들면 파지릭 유적의 무덤구조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루덴코는 전체적으로 남들과 다른 고분을 ‘콕’ 찝어서 특히 설명을 많이 한다.

무덤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본 평면형태는 1~4호의 대형 고분에는 동쪽으로 돌이 길게 배치되어 이어지지만 5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 대신 앞의 4개 고분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5호 무덤 주변에는 평면형태가 고리모양인 적석구조물이 확인된다(그림 1). 5호분의 적석 범위는 재는 곳의 위치에 따라서 5~7m이다. 남쪽에는 봉분에 붙어서 직경 3.5~3.7m의 것이 2개 확인되었고, 북쪽에는 2.5~3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그림1. 파지릭 유적의 5호분 평면형태. 다른 무덤의 평면 모습은 1953년 책에는 없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 2호와 5호를 중심으로 책에 기술되어 있다.

 

2호분을 비롯해서 가장 크기가 작은 4호분을 제외하고는 무덤구덩이의 크기는 51~55㎡이다. 4호무덤구덩이는 30㎡이다. 깊이는 표토층에서부터 4m정도이다.

2호의 무덤구덩이의 평면형태는 긴 네모꼴이다. 무덤구덩이의 입구가 바닥보다는 약간 크다.

 

그림 2.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발굴모습, 1-무덤의 최상부를 절개해서 파내려가는 장면, 2-무덤구덩이의 입구모습. 1947년 발굴당시의 모습.

 

파지릭 유적에서는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3유적과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 보이지 않던 유물이 발견되는데, 바로 무덤구덩이를 발굴해 내려가면서 확인되는 삽, 말뚝과 망치들이다. 이는 그 때 당시에 스키타이 인들이 무덤을 파는 도구로 생각된다.

특히 2호분에서는 무덤구덩이의 북쪽에 있는 무덤방 위에서 발견되었다. 2호분에서 출토된 목제 삽은 두 점의 손잡이 길이가 다르다. 115cm(그림 3-b), 127cm(그림 3-c)이고, 삽의 작업면은 길이 35~38cm, 너비는 약 12cm이다.

 

 

 

 

그림 3. a-3분에서 출토된 나무망치, b,c-2호분에서 출토된 나무 삽. 축척1/9

 

혹시 이 유물을 보고 삽이 아닐꺼라고 의심하는 분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삽은 삼각형의 손잡이 끝에 고리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삽이 맞다.

손잡이에 아무런 고리가 없지만, 이런 모양의 삽은 현재 러시아에서 사용된다.

물론 삽의 앞부분은 다르다.

삽의 크기는 신체에 비례한다. 러시아 삽은 자루가 매우 길고 단면이 두꺼워서 한국사람들이 사용하기에 불편하다. 신체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가 유학당시 한국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러시아와 공동발굴을 했었는데 첫 해가 지나자 한국사람들은 한국삽을 들고 오기 시작했다.

 

2호분의 삽의 자루가 다른 것도 사용하다가 부러졌을 가능성도 있고, 신체조건이 다른 두 사람의 삽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보통 고고학자는 부러진 것을 표기할 때 사용하다가 부러졌는지, 아니면 원래 그 길이었는지를 관찰해서 적어둔다. 루덴코도 나름 예리한 사람으로 생각되는데 그런 말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원래 길이였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 산의 파지릭계곡에는 크고 작은 고분(봉분이 있는 무덤)이 40여기 정도 존재한다. 무덤의 최상부에 해당하는 봉분은 가장 위는 돌로 마무리되었는데, 그 하부에는 흙과 돌로 채워졌다. 가장 높은 부분은 발굴하면 가장 먼저 확인되는데, 단순히 돌을 쌓은 것이 아니라 무덤의 가장자리를 돌로 두른 후 그 안을 다시 돌로 채운 형태이다.

어제 살펴본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은 무덤 하부에 형성된 영구동토층이라고 부르는 렌즈모양의 얼음창고와 상부에 쌓인 돌의 범위가 거의 일치했다.

 

40여기의 무덤 가운데서 1~5호가 가장 대형으로 계곡의 입구(남쪽) 쪽에는 5호가 위치했고. 가장 북쪽에는 3호와 4호, 가장 남쪽에는 5호가 위치했다.

1호는 그랴즈노프가 1929년에 발굴을 처음 시작했고, 2호는 루덴코가 1947~1948년, 3호와 4호는 1948년, 5호는 1949년에 발굴했다. 소형고분 6~8호는 같은 해에 발굴되었다. 봉분이 있는 구조물이 모두 무덤은 아니고, 그 아래가 비어 있는 경우도 있다.

 

아드리아노프(А.В. Адрианов)는 여러해 동안 알타이에서 6~8개의 둥근돌이 돌아가고 흙을 덮은 흔적이 있는 고리모양의 구조물을 발굴했으나, 어떤 유물도 없어서 어떤 문화인지, 연대 등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파지릭 유적에서 대형고분은 봉분이 있는데, 그 단면은 가장 상부가 편평하게 된 반구형의 모습이다. 봉분의 높이와 직경의 비율은 1:10정도이다.

대형무덤의 경우 중간에 꺼짐 현상이 있는데, 이는 무덤방 속에 비어 있는 공간으로 봉분 위의 흙이 쓸려 들어갔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도굴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무덤방에는 빈공간이 있을까?

앞서서 살펴보았고, 또 앞으로도 살펴보겠지만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방은 유물로 꽉 채우지 않는다(그림1).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얼음공주 무덤과 같이 얼음으로 꽉 차지 않는 경우 빈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으로 가장 높은 곳의 흙이 쓸려 들어간 것이다.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유적이 파지릭 계곡의 무덤이다. 

 

그림 1.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단면도 가운데 무덤방 가장 중앙, 왼쪽-단면도, 오른쪽-상층의 흙이 쓸려 내려오지 않았을 경우를 복원한 모습

 

 

필자가 어제 ‘영구동토층’이라고 무덤아래에 형성된 얼음층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다(그림 2). 파지릭 유적을 발굴한 루덴코의 설명이었다. 영구동토층의 생성원인은 이해가 가는데, 무덤빈 공간으로 최상부의 흙이 바닥까지 쓸려들어가는 현상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나무방과 나무관이 썩으면서 무덤의 봉분 위의 흙이 쓸려 내려갔을 꺼라 생각했는데, 루덴코의 단행본을 읽다보니 약간 모순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영구동토층'이라면 나무방과 나무관은 썩지 않아야 한다. 만약에 오랜 시간으로 인해서 썩었다고 한다면 나무방은 전체적으로 썩어야지 어떻게 가장 중앙에만 썩을까?

 

그림 2.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단면도

 

루덴코의 설명처럼 영구동토층이 무덤의 반을 채운 돌이 열 전도율을 막아서 영구동토층이 생긴건 맞을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틀림없이 그 조건이 바뀌어서 무덤방을 둘러싼 얼음이 녹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 때 봉분의 붕괴현상이 있었을 수도 있다. 17세기 이후에는 소빙기때 이미 예전에 형성된 얼음동토층 모양대로 다시 돌아갔을 수 있다.

 

그럼 파지릭계곡의 도굴도 그때? 그런데 루덴코의 설명에는 도굴은 무덤방까지 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굴로 판 구덩이 덕분에 무덤속에 많은 물이 흘러들어가 무덤방이 다시 얼어붙었다고 루덴코는 설명한다. 결과론 적으로 도굴로 인해서 들어간 외부의 물이 다시 얼어 붙으면서 다시 무덤을 감춘 것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아주 복잡하게 설계된 무덤은 다행히도 우리가 살펴볼 부분은 많다. 필자가 자꾸 무덤의 빈 공간을 이야기 했는데, 무덤의 내부를 보면 알 수 있다(그림 1).

파지릭 유적에서 가장 먼저 살펴보고 싶은 무덤은 2호분이다. 비슷한 시기의 여성무덤, 남성무덤, 아이무덤까지 살펴보았는데, 남녀가 함께 묻힌 무덤은 아직 살펴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무덤의 남성은 문신이 있는 미라로 발견되었다.

파지릭 2호분의 남성의 미라와 우코크 고원의 얼음공주 그리고 또 다른 유적인 베르흐 칼쥔 2 유적의 남성미라에서 확인되는 문신은 같은 사람이 새겼을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이야기 한다. 세 유적은 동 시대로 생각된다. 물론 파지릭 유적이 약간 더 이르다는 의견도 있지만...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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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 산맥은 지형이 아주 복잡하고 높아서 이 지역에서 발원한 강과 강의 지류가 많이 있다. 파지릭 유적이 있는 파지릭 계곡은 연평균 기온이 낮고, 겨울이 길다. 영구동토대가 형성될 수 있다. 그런데 영구동토대가 알타이 전 지역에서 확인되는 것은 아니고 산과 계곡의 지형조건이 맞을 때만 만들어진다. 그런데 영구동토대가 자연적으로 형성되기도 하지만 인간의 건축물로 인해서 영구동토대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파지릭 유적의 위치)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ll=50.47243177143555%2C89.10164035214848&z=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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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1호분은 영구동토대의 가장자리에 축조되었고, 2호분은 영구동토대의 정 중앙에 위치한다. 그러나 남쪽에 위치한 파지릭계곡의 입구에는 영구동토대가 형성되지 않았다. 여름에 매우 덮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덴코는 파지릭 유적의 무덤 아래에 있는 영구동토층은 자연조건만이 아닌 일종의 '계산된 행위'로 생각했다. (계산된 행위는 필자의 표현이다. 루덴코는 이렇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앞에서 우코크 고원에서 이 문화 사람들의 무덤구조를 알아보았다. 무덤방을 크게 파고 그 아래에 나무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는 흙으로 무덤을 채운 후 무덤의 반 이상은 돌로 채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파지릭 유적도 비슷한데 무덤구덩이의 크기가 대체적으로 50㎡이고, 깊이는 4m이다.(4호는 30㎡) 무덤방은 무덤구덩이 보다 작으며(1호-17㎡, 2호-13㎡, 5호-8㎡)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 무덤방은 반 이상이 자작나무와 큰 돌로 채워져 있다. 무덤구덩이의 중심높이에서 0.9~2m는 흙으로 덮여 있고 그 위에 1.3~1.7m까지 돌로 덮인 구조이다.

 

러시아 전역에서 발굴은 주로 여름에 한다. 극동은 늦봄부터 시작하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6월이고, 대부분 7~8월에 집중되고, 늦으면 9월까지이다. 파지릭 유적도 여름 하반기에 발굴했다고 한다.

 

영구동토층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무덤이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이다. 동토층의 가장 중앙에 그리고 무덤구덩이의 위치가 동토층이 시작하는 부분과 딱 맞닿아서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영구동토층은 렌즈형태로  범위는 무덤 가장 위층의 적석(쌓은 돌)범위와 일치한다. 그리고 가장자리의 돌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무덤의 상층 가장 중심부는 무너져 내려서 고분을 채운 돌과 무덤방 아래까지 그 돌이 떨어져 내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때 영구동토층 가장 상층 부에 있는 토양도 무덤바닥에 떨어졌다.

 

 

그림1.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무덤 하부구조, 1947년에 발굴한 탓에 유구 사진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영구동토층'이라고 하지만 일종의 얼음층이다

 

이러한 현상이 생긴 이유는 무덤을 반 이상 채운 '돌' 때문이고, 부수적으로 자연조건이 맞아서 영구동토층이 생기게 된 것이다. 돌은 열 전도율이 매우 낮고 습기를 냉각시킨다. 우리는 지난 포스팅에서 알타이에서 무덤은 주로 늦 봄과 늦 가을에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덤을 만든 후 첫 번째 겨울에 무덤을 채운 돌과 무덤방은 얼어 붙는다. 그 다음해 여름까지는 4m나 되는 깊은 무덤 구조 덕분에 봉분 아래의 흙은 온도가 그렇게 올라가지 않는다. 돌은 열 전도율이 낮기 때문이다. 매서운 겨울이 되면 다시 더 얼어 붙고, 이런 과정의 반복하게 되면 여름이 되어도 영하로 유지된다.

 

즉 무덤 아래에 거대한 냉동고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영구동토층 덕분에 파지릭 계곡의 무덤에는 나무, 펠트, 가죽, 모피, 비단과 사자의 미라도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2호분이다. 

인간의 염원이 만든 얼음층이라고 해야하나?

우리는 인간의 염원으로 인해서 온 세상을 전염병으로 뒤덮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따위의 얼음층 정도야, 기후조건이 맞으면 충분히 가능하고 놀랍다.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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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오늘 부터는 우코크 고원을 떠나서 파지릭 계곡의 스키타이 무덤 유적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스키타이 문화 가운데서 알타이 산맥에 위치한 문화를 ‘파지릭’이라고 붙인다. ‘파지릭문화’라고 한다.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된 이유가 파지릭 유적의 무덤 덕분이다.

 

알타이 산맥에는 특히 우슬라Урсула, Ursula 강의 왼쪽 지류인 카툰Катуни, Katun 강 유역과 아르구트Аргут, Argut, 추이Чуи, Chui 강 유역에는 강을 따라서 산악초원지대가 형성되어 있는데, 아주 많은 고분이 존재한다. 파지릭 지역은 투바 자치구와 접해 있는 알타이 동부의 추리시만Чулышман, Chulyshman 강을 끼고 있는 계곡이다.

 

파지릭 유적은 우코크 고원에서 북서쪽으로 직선거리 110km 가량 떨어진 곳에 파지릭계곡이 위치한다(그림2). 해발고도 1400m가량이다. 2500m 였던 우코크 고원보다는 훨씬 낮다. 파지릭 계곡에는 영구동토층이 연속분포하는 구역의 외부에 대형 고분이 있다.

 

무덤을 만드는 데 사용된 수백그루의 나무는 낙엽종(자작나무)이 주를 이루었고 가문비나무도 약간 있었다. 그런데 해발 1500m에서는 자작나무가 자라지 않고, 인접한 바시카우스(Башкаус)강과 추리시만(Чулышман)강에서 자작나무가 자란다(그림2).

자작나무를 사용했기 때문에 무덤이 발견될 당시에 봉분의 상부가 내려 앉아서 봉분의 가장 꼭대기는 움푹들어가거나 편평하다. 현재 파지릭 고분의 주변에 자라는 나무는 대부분 가문비 나무이다. 

 

 

 

그림 1. 위의 사진은  파지릭 계곡의 무덤 전경(발굴당시 찍은 사진), 아래 사진은 1호를 발굴하는 장면이다.  위의 사진은 정확하게 몇 호를 찍은 사진인지는 표기되지 않았다. 루덴코가 발굴하기 시작한 것은 1947년 2호부터이다. 1호는 1929년 그랴즈노프가 발굴했는데, 이 사진은 루덴코가 찍은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래 사진이 1929년에 찍힌 것인지 1947년에 2호 발굴당시에 그랴즈노프가 발굴한 1호를 찍은 것인지는 정확치 않다. 하지만 1호라고 표시되어 있다. 요즘같으면 무덤의 돌을 다 걷어내었겠으나, 어쨋든 무덤 최상부에서 무덤방으로 곧장 들어가서 발굴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시베리아, 알타이라고 하면 아주 춥다. 인간이 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알타이 산을 이루는 굽이굽이 계곡에는 초원지역이 형성되어 있는데, 산악초원(그림 1-1)이라고 한다. 일종의 높은 곳에 있는 분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된다. 특히 알타이 산맥의 초목에는 많은 양의 염분이 함유되어 방목해서 키우는 동물의 성장과 발달에 유리하다.

동물은 염분이 없으면 살이 찌지 않는다. 

 

 

 

 

그림 2. 파지릭 고분의 위치(×). 나뭇잎 그림은 파지릭 유적에 사용된 자작나무를 구해온 바시카우스 강과 추리시만 강의 위치이다. 붉은색 점은 우코크 고원의 위치이다. 아래 구글 지도를 보시면 파지릭 고분이 있는 곳에 사진이 있는데, 해발 2300m이상에서 자라는 가문비나무이다.

 

 

이 계곡의 고분은 모두 40여기 정도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 대형 고분 5기에는 1~5호의 번호를 붙였다. 북쪽의 2기는 3호와 4호, 가장 남쪽에는 5호, 중앙에는 1호와 2호가 위치한다. 그 외에 번호가 붙은 것은 9기로 6~14호까지 번호 있는 무덤이 있다. 번호를 매기지 않은 고분은 외형은 고분이지만 제일 상층에 돌이 돌아가는 것 외에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미 1924년에 알려졌기 때문에 더 이상 파지 않았다. 이 외에도 알타이 산맥에는 봉분(표토층 위로 올라온 무덤상부구조)는 있으나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림 2. 파지릭계곡의 무덤분포도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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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 시베리아의 스키타이문화권에서도 알타이 지역에 위치한 파지릭문화의 한 유적인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은 8세 소년의 무덤이다. 고깔모자, 토기, 금제 귀걸이, 청동 목걸이, 투부(전투용도끼), 모피, 칼집과 청동칼, 화살촉, 목기등이 소년과 함께 묻혔다.

그 중 목기는 남아있지는 않지만 양뼈조각이 있었고, 다른 유적들의 예로 보아서 목기 위에 고기덩어리가 올려진 장면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 여성미라, 일명 얼음공주의 무덤에서도 뿔, 나무, 흙으로 만든 그릇이 확인되었다.

 

2020/01/1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미라'의 무덤] - 2500년 전 여성미라 무덤의 뿔, 나무, 흙 그릇

 

2500년 전 여성미라 무덤의 뿔, 나무, 흙 그릇

투르크-몽골 계통의 민족들에게는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특별한 그릇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반적인 그릇에 특별한 음식과 음료를 담았다고 한다. 야쿠트인들은 신에게 거대한 가죽조끼, 목제 잔, 우유를 담..

eastsearoad.tistory.com

 

그런데 이 유적에는 없지만, 이 유적이 속한 파지릭 문화에는 금속으로 만든 그릇도 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솥이다. 바닥에는 솥을 지지하기 위한 높임 다리가 있으며, 양 쪽에는 손잡이가 있고 자작나무 껍질이 감긴 채로 확인되었다. 안에는 돌이 들어 있었다. 함께 출토된 막대기가 6개(1.2m 가량) 있었다.

 

 

이 솥과 막대기는 같은 공간에서 출토되어서 세트이다. 무슨 용도로 사용되었을까?

솥은 금이 가 있고, 솥 안에는 탄화된 대마씨가 발견되었다. 금이 간 이유는 뜨거운 돌의 열기에 의했을 가능성이 많고, 대마씨가 탄화된 것도 돌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러시아 연구자들의 생각이 맞다면, 청동솥과 막대기는 대마씨에 나오는 연기 흡입용이다.

6개의 막대기를 묶고 그 위를 펠트로 씌우면 일종의 텐트가 된다. 그 텐트 안에서 청동솥에 달군 돌을 넣고, 대마씨앗을 뿌려서 그 향을 맡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탄화된 대마씨가 가득 들어간 가죽주머니도 같은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기록된 스키타이 부족에 대한 내용은 러시아학계에서는 아주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다가 이 유물이 발굴된 후에 약간 시각이 바뀌었는데, 그가 설명한 스키타이 인의 정화의식에 대한 내용 중에 이 부분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헤로도투스가 74~75절에 썼는데, 여기까지만 보면 위의 유물과 일치해서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대한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헤로도투스는 마지막에 스키타이 사람들의 정화의식을 그리스의 증기욕과 관련시켰다(그리스, 로마 사회의 목욕문화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무덤을 발굴한 루덴코(1953)는 직접 반박했다. 헤로도투스의 내용과 이 유물이 연기흡입과 관련된 건 가능성이 있지만, 그리스의 목욕문화와는 헤로도투스의 착각이라고.

청동솥 위에 뿌려진 대마씨 때문에 연기가 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의미가 그리스 증기욕과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유물은 알타이 산맥의 파지릭 유적 2호분에서 출토되었고, 루덴코는 그 유적의 2호분을 직접발굴한 사람이다.

파지릭 2호분에서 나온 청동솥과 막대기 6개는 용도는 명료해진 것도 있지만 문제가 복잡해지게 된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왜냐하면 헤로도투스가 본 스키타이 인이라는 사람이 그리스와 인접한 흑해 북안이라는 주장이 팽배했는데, 그가 설명한 부분이 알타이 산맥의 유적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청동솥과 막대기, 가죽주머니 안의 탄화된 대마씨는 의료용일지 모른다. 지금도 마약은 의료용으로 사용된다. 스키타이 인들은 죽은 사람의 내장을 걷어내고 미라를 만들던 기술이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파지릭 유적 2호분에는 미라가 2구 확인되었다.

 

 

그림1. 파지릭 유적 2호분 출토(높이 13.8cm, 동최대경 9.8cm), 청동솥(2)과 막대기(3), 손잡이는 자작나무 껍질이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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