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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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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무덤방은 통나무 38기가 놓여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자작나무 잎이 4겹으로 덮여 있었는데, 부분적으로 관의 밖으로도 이어졌다(그림1). 이를 벗기자 14개의 통나무가 드러났다. 직경은 16~22cm, 길이 3.3m가량이다. 이곳에도 8개의 통나무는 절개된 것을 사용했는데, 1차 무덤 덮개와 마찬가지로 다른 용도(집)로 사용하다가 뜯어내서 재사용된 것이다(그림2).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1차 무덤방의 덮개

 

 

그림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무덤방 1차덮개

 

2차 무덤방은 직경 15~20cm의 통나무 4개를 쌓아 올렸다. 2차무덤방의 바닥은 무덤방 속의 얼음을 다 녹인 후, 그 내부의 관과 부장품을 수습한 후 확인가능했다. 하지만 무덤방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설명한다. 바닥은 13개의 통나무를 깔아서 만들었는데 무덤안쪽으로만 매끄럽게 손질했다. 1차 무덤바닥은 통나무에 홈을 파서 끼워넣어 물샐틈없이(그림 3-1) 마무리 되었다. 끼워 넣는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는데, 씨실과 날실을 짠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의 구조물이다.

 

그림 3.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1차와 2차 무덤방의 덮개를 제거하고, 말무덤, 관과 부장품을 드러낸 후의 무덤방의 모습

 

 

1차무덤방과 2차무덤방 사이의 동쪽벽에는 무덤방 사이를 지지하기 위해서 수직으로 통나무릴 세워놓았는데, 1차무덤방의 바닥에 끼워넣어서 제작되었다. 높이 1.2cm, 직경 20cm가량의 통나무이다(그림 4).

 

그림 4.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1차와 2차 무덤방 사이 수직으로 세워진 통나무

 

2차무덤방안에는 얼음으로 가득찼다(얼음으로 가득 찬 사진은 없었는데, 앞의 포스팅에서 무덤구조를 설명하면서 단면도를 공개했는데, 얼음이 꽉 차인 모습이 간단히 표현되었다). 통나무 관 2개가 뚜껑이 닫힌 채로 놓여 있다. 첫 번 째 관은 2.7m, 두 번째 관은 2.6cm이다. 통나무 관은 나무 쐐기를 써서 단단하게 봉쇄되었다. 머리부근에 5개, 발 근처에 1개, 두 번째 관은 머리와 발에 각각 1개의 구멍이 있다. 두 번째 관의 뚜껑에는 손잡이가 있었다. 무덤방 안이 얼음으로 가득차서 통나무관이 변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나무관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그림 5).

무덤방의 동북쪽에는 음식이 담긴 그릇이 있는데, 항아리형 토기 2점은 액체를 담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고, 다리가 짧고 음식을 담는 부분은 편평한 목제 쟁반 2점, 바닥이 둥근 목제 그릇 2점, 동물뿔로 만들어진 그릇 2개가 확인되었다. 각배는 얼음이 녹으면서 산산히 부서졌다. 목제 쟁반위에는 양의 꼬리뼈와 새끼양의 대퇴골이 놓여 있었는데, 이 부위의 고기를 놓은 것이다(그림 5).

 

그림 5.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1차와 2차무덤방의 덮개를 제거하고 얼음을 녹인 후 2차 무덤방의 내부

 

 

오늘은 무덤의 구조 중에 무덤방의 1차와 2차 덮개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통나무의 외관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 무덤을 발굴한 폴로시막은 무덤방이 얼음으로 차 있지 않았다면 통나무 관이 완벽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또 아이러니 하지만, 그 얼음 덕분에 통나무관도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통나무관의 시신은 미라처리는 되어 있지 않지만 주인공의 정보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앞서 필자가 링크해둔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의 유투브 공개영상에는 나레이션에서 그런 멘트가 있다...‘냉동된 무덤’‘’얼마나 드문존재인지,, 발굴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무덤을 여는 순간 ‘과학 혹은 고고학’이 내게 오는 순간이었다고...현재 우코크 지역은 원주민들과의 갈등으로 발굴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한다....어떤 계기가 생겨서 우리나라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으면 그런 계기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의 알타이 산맥에서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을 살펴보고 있다. ‘스키타이문화’라고 불리는 초원의 철기시대문화로 스키타이문화에서도 알타이 산맥에 위치한 문화를 파지릭문화라고 한다. 이 유적은 이 문화의 일원이다.

 

‘얼음공주’이라고 알려진 여성미라가 나온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에서 이 여성의 직업과 관련된 유물을 설명한 바 있다. 여러 유물이 있지만 거울과 그녀의 목걸이는 상반된 특징이라고 했다. 거울은 다소 소박했고, 목걸이는 최상급 무덤이라고 하는 파지릭 유적에서 나온 목걸이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두 유물은 목제라고 하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물론 청동과 금박을 덧입혔지만.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는 이 여성의 무덤에는 없었던 유물이 말무덤을 상세하게 쳐다보셨다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말무덤에서 가장 상부에 튀어나와 있던 유물 중에 하나는 방패이다(그림 1).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무덤방의 1차덮개 노출 후, 현재 보이는 장면은 말무덤을 덮은 흙과 일부 삐져나온 유물 및 2차 무덤방의 덮개와 무덤방의 부속품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설명할 것이다.

 

오늘은 그  방패에 대해서 약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방패가 말 무덤에서 확인되는 이유는 평소에 안장에 달았기 때문이다. 현재 파지릭문화에서는 가죽제에 나무가 달린 것과 목제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 출토된 방패는 목제인데, 투엑타 유적의 1호분, 타산타 유적 출토품과 생김새가 유사해서, 가죽방패를 목제로 모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크기는 27.5×38cm이다. 방패의 손잡이 면은 매끄럽게 마연되었고, 문양이 새겨진 면에는 선을 그어서 문양을 표현했다. 가장 바깥의 테두리는 위아래는 2.5cm, 양쪽은 1cm의 여백을 두고 그 안에 28개의 선을 그어서 표현했는데, ‘×’자 모양이다(그림2).

그림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방패, 마구옆에서 출토된 목제 방패

 

투엑타 유적과 타산타 유적에서도 목제로 제작된 방패가 확인된 바 있다.

파지릭문화가운데서 가장 먼저 방패가 확인된 것은 투엑타 1호분의 것이다(그림 3). 유적을 발굴한 후 루덴코는 목제방패는 가죽방패에 나무막대기를 댄 것과 같은 형태여서, 알타이 인들은 아마도 가죽방패를 사용했다고 확신했다(루덴코 1960).

투엑타 1호 출토품은 42×50cm(그림3의 왼쪽), 46×50cm(그림 3의 오른쪽), 타산타 유적의 1호분도 44×35cm이다(그림5-9).

타산타 유적의 두 유물은 네모방향으로 가장자리를 두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 안을 수직으로 표현한 것은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것과 다르다. 그리고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의 남성전사의 것이 약간 작다.  또한 투엑타 유적의 출토품은 네모틀에 그 안은 가죽을 나무막대기에 꼬아서 만들고 틀에 넣어서 만든 것이다(그림 3, 4).

 

그림3. 투엑타 유적 출토 방패, 너비 1cm가량의 가죽과 37개의 나무막대기에 꼬아서 방패 앞부분을 장식. 가장자리에는 턱이 있음. 원래는 이정도만 남아 있었으나 가죽의 원래모양을 복원(그림 3)했다.

 

그림4. 투엑타 유적 출토 방패 복원도, 필자는 1960년에 나온 책이라고 믿기지가 않았다.

 

 

 

그림5. 타산타 유적 출토 방패,  9번 유물이 방패이다.

 

 

타산타 유적을 발굴한 쿠바레프(1987)는 소형과 목제의 방패는 무덤에 매납하기 위해서 만든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서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을 발굴한 폴로시막은 고렐리크(1987)의 의견을 인용했다. 고렐리크는 파지릭 문화에서 출토되는 방패는 모두 작은데, 보병용 전사의 것이라면 가능하다. 그가 이렇게 이야기 한 이유는 솔로하(흑해 북쪽, 지금의 우크라이나 국경내)라고 하는 유적의 유물 때문이다.

솔로하 유적에서 출토된 크기 12.6×10.2cm의 황금 빗이다. 유적의 연대는 기원전 5~4세기 가량으로 평가된다. 세 명의 전사가 싸우는 장면을 가장 꼭대기에 배치해서 조각했다. 중앙에는 말탄 전사, 오른쪽과 왼쪽에는 보병의 전사가 싸우는 장면이다. 그 중에서 네모 방형의 방패를 든 이가 스키타이 전사자이다(그림 6~8).

 

그림 6. 에르미타주 소장, 솔로하 유적에서 출토된 빗, 네모방패를 들고 있는 보병을 스키타이 전사로 본다.

 

그림 7. 에르미타주 소장 솔로하 유적에서 출토된 빗, 세부사진

 

그림 8. 에르미타주 소장 솔로하 유적에서 출토된 빗, 스키타이 남성전사의 다른 면

 

 

참고문헌

루덴코 1960,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쿠바레프 1987, Кубарев В.Д. 1987 : Курганы Уландрыка. Новосибирск: 1987. 304 с.(쿠바레프 1987, 울라디르카 유적)

고렐리크 1987, Горелик М.В. Вооружение народов Восточного Туркестана // Восточный Туркестан в древности и раннем средневековье. М.: Восточная литература, 1995. С. 359-430.(고렐리크 1987, 투르케스탄 동부 민족의 무기에 대해서)

알렉세예프 2012,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유라시아 초원을 이동하며 살던 스키타이 문화중에서 알타이 산맥 부근에서 살아움직였던 파지릭문화의 유적 가운데서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을 살피고 있다.

우리는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의 무덤구조를 보았는데, 앞써 포스팅한 ‘얼음공주’무덤과 달리 이 무덤속에는 ‘말무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했다.

말무덤을 살피기 위해서는 우선 무덤방을 덮은 천장을 보아야 한다.

 

깊이 1.8m에 이르자 무덤방을 덮을 정도의 규모로 무덤 천정부에 해당하는 목제들이 드러났다. 무덤방의 덮개는 집을 해체해서 얻어낸 낙엽송 통나무들이다. 어떻게 알 수 있었냐고?

통나무 2개가 이어 붙은 것도 있고 이유없이 모서리에 홈이 남아 있기도 했다(그림 1). 이런 부분은 무덤의 무덤방을 만드는데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통나무의 직경은 15~20cm가량으로 통나무 38기가 놓여있었다. 이제 까지 주거지의 통나무를 무덤 천정부로 사용한 예가 없다(앞에서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1993년 발굴)에서도 비슷한 설명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크 알라하 1유적은 1990년에 먼저 발굴되었기 때문에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1차 천장부, 그림에서 가장 위쪽인 부분의 통나무를 살펴보면 홈이 파인채로 통나무가 놓인 것을 알 수 있다.

 

 

무덤의 동북쪽에는 나무로 만든 덮개가 없고 큰 돌과 흙으로 채운 말무덤이 있었다. 말무덤은 파지릭 유적의 1호, 4호, 5호분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말무덤은 1차 무덤방을 통나무로 두르고 그 안에 말무덤을 설치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말무덤의 크기는 3.7×0.9m구역 안에 9마리의 말이 부장되었다. 모든 말은 투부라고 하는 쇠도끼로 말의 이마를 내리쳐서 죽였는데,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말은 두 층으로 묻었다. 7 마리는 머리가 서쪽이고, 2마리는 동쪽으로 향했는데, 말 그대로 빽빽하게 묻었다. 말의 뼈를 분석한 결과 말은 봄에 묻혔다(그레브네프·바실레프 1994).

 

말은 9마리이지만 말을 장식하고, 말에 착장한 마구는 모두 7벌이 확인되었다. 5벌은 말에 채워졌고, 2벌은 그 옆에서 확인되었다. 모든 마구는 목제로 제작되었다. 그 중 네 마리에는 철제로 된 재갈이 채워진 채로 확인되었다.

 

그림 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말무덤, 그림1에서 나무로 덮은 곳이 아닌, 돌과 흙으로 덮인 곳의 아래부분에서 말무덤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그레브네프·바실레프 1994, Гребнев И.Е., Васильев С.К. Лошади из памятников пазырыкской культуры Южного Алтая / Приложение // Полосьмак Н.В.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Новосибирск: Наука, 1994. С. 106-111.(그레브네프·바실레프 1994, 알타이 남쪽의 파지릭문화에서 출토된 말)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 시베리아에서도 알타이 산맥 중에서 우코크 라고 불리는 고원에 위치한 무덤을 살펴보는 중이다. 스키타이 문화 중에서도 알타이 산맥에서 확인되는 문화를 파지릭 문화라 하는데 그 문화의 유적 중에 한 곳이다. 지난 달에는 별명이 얼음공주라고 붙은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무덤을 살펴보았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3km 떨어진 아크 알라하 1유적의 남성무덤을 살피고 있다.

우코크 고원의 위치는 어제 포스팅에서 찾으실 수 있다.

 

이 무덤은 얼음공주 무덤보다 3년 일찍 발굴되었다. 무덤을 절개한 면은 그림1과 같다.

무덤의 제일 윗 부분은 움푹들어 갔는데, 원인은 가장 바닥에 있는 무덤방인 목관의 천정부가 내려앉아서이다. 주로 목재가 썩어서 생기는 현상이다. 언제가 공개하게 될 파지릭 유적에서는 천정부가 완전히 내려앉아서 무덤의 최상부가 내려앉았다.

그런데 이 아크 알라하 1유적의 무덤방은 얼음으로 차 있다고 보고서에도 적혀 있고, 실제로 그림 1에도 얼음이 표시되어 있다.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무덤 단면도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계속 얼음이 차 있었다면, 무덤방이 내려 앉았을 이유가 없다. 도굴일가능성? 도굴되었다면 무덤방의 뚜껑 및 그 아래의 관도 모두 도굴당했을 것이다.

외부의 요인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스키타이문화의 무덤 상부는 가장 중간이 약간 씩 내려앉은 모습이다.

무덤구덩이는 무덤방 위와 무덤방이 아닌 말무덤 위를 채운 공간의 돌은 크기가 다르다. 말무덤 위는 2.6m까지 큰 돌로 채웠고, 무덤방 위에는 무덤구덩이를 만들 때 퍼 낸 흙으로 다시 덮었고, 깊이 1m가 되어야 큰 돌이 나오기 시작했다. 얼음층은 깊이 0.5m가 되어서야 나타났다.

 

무덤구덩이의 깊이는 2.9m 가량이다. 구덩이를 파자 9줄의 통나무가 양쪽으로 쌓여진 것이 확인되었다. 길이 4.6m두께는 9cm정도이다(그림2). 무덤구덩이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게 위해서 쌓았다. 발굴할 때도 이곳이 무너지지 않게하기 위해서 철제 사다리를 받쳐두었다.

그림 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무덤, 그림1을 좀 더 자세하게 확대.

 

무덤 단면도를 공개했으나, 이제 여러분은 모두 다 눈치챘을 것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2명이라는 사실을,,

통나무관이 2개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상상하시나요?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어제부터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 얼음공주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남성무덤을 살펴보고 있다. 두 유적의 거리는 3km 가량이다.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 서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 얼음공주 무덤이 있었다. 베르텍 마을과 12km 떨어진 곳으로 좀 더 가깝다.

아크 알라하 3유적과 아크 알라하 1유적은 스키타이문화중에서도 알타이 산맥에서 위치한 문화를 파지릭문화라 하는데, 그 문화 중에서도 우코크 구원에 위치하는 유적이다.

 

https://www.google.co.kr/maps/place/Ploskogor'ye+Ukok/@50.3307878,87.9890127,6.35z/data=!4m13!1m7!3m6!1s0x42b7eb0e314da4fd:0xaf8aeded3a068607!2sAkalakha!3b1!8m2!3d49.6937885!4d87.4078366!3m4!1s0x42b70a2829374ba7:0x6d63a380c8591ae1!8m2!3d49.3077771!4d87.5947237!5m1!1e4?hl=ko

 

Google 지도

Google 지도에서 지역정보를 검색하고 지도를 살펴보거나 운전경로 정보를 검색합니다.

www.google.co.kr

 

아크 알라하 1유적은 발굴전에는 자갈과 점판암들로 쌓였다. 무덤의 크기는 남북방향은 17.5m, 동서방향은 8m가량이다.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을 기준으로는 49cm이다. 무덤의 중앙은 0cm로, 고도와 같았다. 무덤이 중간에 함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표토(지표면을 덮은 흙)를 제거하자 무덤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큰 돌로 호석(가장자리를 두른 돌)을 돌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림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표토만 제거, 남쪽에는 고리모양의 원형 돌무지가 하나 더 있는데, 무덤은 아니다.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1호와 관련된 제사 유구로 생각된다. 무덤 중앙을 가로지는 선은 발굴할 때 사용했던 기준점이다. 그 옆의 숫자는 돌의 위치이다. 가장 중간이 ocm이다. 숫자의 간격은 1m이다. 

 

호석 안쪽으로 자갈과 점판암들로 쌓여 있었고, 일일이 손으로 제거했다. 이를 제거하자 2차 호석이 드러났다(그림2). 1호분의 주인공이 있는 무덤구덩이는 깊이 2.9m가량에서 확인되었다. 동서남북방향과 일치하며 크기는 4.8×4.75m이다.

그림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적석제거 후 드러난 호석과 무덤구덩이, 가운데 네모꼴이 원래 무덤주인공의 무덤구덩이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표시가 엉뚱한 사람의 무덤 위치이다.

 

 

그런데 그 전에 적석을 제거하는 가운데 무덤 중앙을 기준으로 깊이 24cm에서 1호분과는 전혀 관련없는 14세기의 것으로 생각되는 엉뚱한 사람?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이 얄팍한 사람들은 아크 알라하 1호분의 무덤에 사용된 돌을 치워서 구덩이를 만들고 그 위에 시신을 안치했다. 사지를 쭉 핀 신전장으로, 두향은 서쪽으로, 손을 가지런하게 모은 자세로 놓았다. 두개골은 흙의 압력으로 눌러서 부서졌다(그림3). 허리춤의 오른쪽에는 철제 원형 재갈(말의 고삐를 채우는 장치) 2점(그림4)과 화살촉이 확인되었다. 이 유물로 보아서 14세기의 사람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이 사람의 성별에 대해서는 보고서에 없었는데, 유물로 보아서 남성일 가능성이 크다.)

그림 3.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4세기 무덤

 

그림 4.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4세기 무덤 출토품

 

 

그런데 의문스럽지 않으십니까?

과연 14세기 사람들은 아래에 있는 무덤을 도굴하지 않았을까?

힌트는 앞에서 이야기 한 무덤의 깊이에 있다. 파지릭문화의 사람은 바닥까지 3m까지 파야 그 사람 무덤에 다달수 있었으나, 14세기에 장례식을 치르던 사람들은 24cm정도만 파서 사자를 묻었다. 그 밑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알았지만 손대지 않고 자신이 알던 사람만 그곳에 묻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이곳에 묻힌 사람들은 죽어서 만났다.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금을 지키는 그리핀, 아크 알라하 무덤)

구글지도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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