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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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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에 해당되는 글 8

  1. 2022.11.09 비가 올때는...1
  2. 2022.11.08 스키타이 남성의 부츠
  3. 2022.11.05 스키타이 사람들의 모피코트4
2022. 11. 9. 09:15 고깔모자와 코트

 

시베리아에서 발견되는 외투 종류 가운데 모피가 아닌 펠트로 제작된 코트가 파지리크 유적의 3호에서 발견되었다. 3호는 기원전 5세기의 1호, 2호, 5호와는 달리 기원전 3세기로 이미 스키타이 문화는 없어지고, 흉노 시절에 해당하는 무덤이다.

 

모자가 달린 매우 부피가 큰 펠트로 만들어진 것인데, 옷 위에 착용할 수 있고, 고리투스를 덮을 수 있다. 후드는 탈부착 가능하다. 인접한 투바지역의 민족지 자료가운데 비슷한 옷이 비옷으로 사용되었다. 이 펠트로 된 레인코트는 카자흐스탄의 말 목동과 몽골과 투바에서도 20세기 초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그림 1. 파지리크 유적 3호의 펠트코트

 

무기를 덮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의복은 시베리아 남부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유목민들 사이에 매우 인기 있었다. 사냥이나 목축 뿐만 아니라 군사작전에도 사용된 기록이 남아 있다. ‘Strategikon’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인 Maurice(582~602년)가 남겨 놓은 군사매뉴얼인데, 이 코트에 대한 기록이 있다. 스트라테기콘에 따르면 소매가 넓은 펠트로 된 외투 또는 후드가 달린 옷이 군사들에게 제공되어야 한다고 한다. 갑옷과 활을 덮을 수 있을 만큼 커서, 우천시 혹은 이슬로 축축해지면, 갑옷과 활을 덮어서 무장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언제라도 활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 갑옷은 펠트 코트로 가리면 그 빛이 적에게 멀리 보이지 않고, 또한 적의 화살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에 필요하기 위함이다.

 

아마도 이 비옷이 나온 3호 보다 이른 시점의 무덤에서도 비슷한 유물이 남아 있었을 수 있다. 이들 무덤에서는 알 수 없는 펠트조각들이 대량으로 나왔으나, 이미 형태를 알 수 없었다. 코트 형태가 아니라도 어떤 모습으로든 비오는 날에 대한 대비는 있었을 것이다. 

스키타이 활이 다른 유목민들 사이에서 매우 유명했고, 이 활을 만든 사람들은 잘 사용하고 보관하는 방법도 알았을 것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8. 09:15 고깔모자와 코트

 

 

기원전 5~4세기 스키타이 남성들의 복장이 실물로 남아 있는 지역은 알타이이다. 여밈이 없는 긴 셔츠와 바지 및 펠트로 된 스타킹이 발견되었다. 특히 펠트로 된 스타킹은 남녀노소가 모두 착용했다. 키의 여부에 관계 없이 무릎까지 오는 펠트 스타킹이다. 이 위에 부츠를 신었다. 대부분 무릎까지 오며, 가죽과 모피로 만들어졌다. 부츠의 종아리와 발가락을 따로 만들어 연결했다. 표트르 대제의 시베리안 컬렉션 기마궁수(그림 3)도 펠트 스타킹을 착용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림 1. 파지리크 유적에서 발견된 여성 펠트스타킹, 파지리크 2호

 

그림 2. 파지리크 유적 2호, 남성부츠

 

 

 

그림 3. 표트르 대제의 시베리안 콜렉션 기마궁수

 

반면에 흑해지역의 스키타이 남성들은 대신 가죽으로 된 부츠를 신고 있는데, 무릎까지 올라가지 않고 낮은 것이다. 장식판의 스키타이 남성들이 신고 있는데, 이들은 펠트로 된 스타킹은 신지 않았다.

 

그림 4. 쿨-오바 유적의 황금 항아리 속의 스키타이 남성

 

그림 5. 아파다나 궁전에서 스키타이 외교사절단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 아파다나 궁전에서 스키타이 외교사절단이 조공하는 장면이 있는데, 긴 옷과 펠트로 된 스타킹이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외교사절단이 들고 갈 만큼 펠트 스타킹은 중요한 특산품이다. 알타이 유적을 발굴한 루덴코와 폴로스막은 이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또 이들도 발목에 끈을 묶은 낮은 신발을 신고 있다. 궁전의 벽화에 있는 각 국의 사절단의 얼굴은 모두 서아시아인이기 때문에 얼굴의 형태는 참고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 유물에서 발견되는 스키타이 남성들은 맨발로 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덜 정확하다. 아마도 그리스 사람들이 표현될 때 대부분 얇은 옷 혹은 벗은 몸, 맨 발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5. 09:15 고깔모자와 코트

스키타이 사람들의 고깔모자를 찾아서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간접적인 자료(궁전 벽화, 토기)를 살펴보았다. 대개 인접한 국가들의 사람들은 스키타이인을 표시할 때 고깔모자를 쓴 채로 표시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하지만 실물자료가 발견되는 알타이에는 고깔모자(물론 하위 유형은 여러 가지이다) 외에 그냥 둥글고 귀를 덮는 흔히들 투구형 모자라고 부르는 자료가 알타이에서 발견되었다.

 

그림 1. 알타이 파지리크 유적 2호분의 투구형 모자

 

가장 많이 인용되는 헤로도투스는 스키타이 사람들을 묘사할 때 머리장식, 허리띠와 그 장식은 황금이라고 간략하게 묘사한 것과는 달리 페르시아 문헌에서는 3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사카하우마바르가(하오마(음료)를 마시는 사카), 사카티그락사우다(뾰족한 모자를 쓴 사카), 사카타이 파라드라야(바다 건너 사카족)이다. 그중에 헤로도투스가 언급한 아미르 스키타이는 사카하우마바르가와 같다(스테파노바, 판코바). 현재의 자료로 이들을 구분할 수는 없다.

 

특히 흑해지역의 자료는 유기물질은 거의 남겨져 있지 않고 알타이에서만 실물자료가 남아 있다. 이전에 포스팅 한 바와 같이 ‘왕의 장례치르는 방법’에 나오는 미라도 알타이에서 발견된다.

 

알타이의 쿠르간에서는 외투가 발견된다. 모피로 만든 것인데,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남성미라도 모피를 입고 매장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남성은 바지와 모피코트 외에는 그 안에 상의는 입고 있지 않았다.

 

그림 2.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모피코트

 

그런데 흑해지역의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 출토된 은제 암포라는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주인공의 여성 무덤방에서 발견되었다. 그릇의 모양와 문양은 전체적으로 그리스 수입품으로 보이는데, 중간에는 스키타이 남성들이 말을 다루고 있는 장면이 함께 표현되었다.

그 중에 한 남성은 맨발에 바지를 입고 벗은 가슴 위에 모피 자켓을 입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그림 3).

 

그림 3. 체르토믈리크 유적의 은제 암포라 세부.

 

또 톨스타야 마길라 유적에서도 모피코트가 등장한다. 금으로된 가슴장식 혹은 목걸이에도 스키타이 남성들이 유목을 하는 장면이 가장 안쪽에 표시되었다. 그중에 가장 중앙에 있는 두 남성이 바지만 입고, 모피코트를 두고 서로 잡아 당기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그림 4. 톨스타야 유적의 가슴걸이(혹은 목걸이) 중 세부

 

알타이의 혹독한 기후를 생각한다면 모피코트는 당연하지만, 흑해지역의 자료는 좀 의외이다. 이제까지 살펴온 여러자료(특히 그리스 토기)에서 스키타이 남성들이 옷은 다 입었지만 종종 맨발로 표현되는데 맨발에 모피코트는 아이러니 하기 때문이다. 체르토믈리크 유적의 암포라에 스키타이 남성도 맨발이다. 그렇다고 스키타이 남성들이 다 맨발로 다니는가? 그렇지 않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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