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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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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 해당되는 글 2

  1. 2021.12.12 우라루투의 도시, 루사힐리니
  2. 2021.12.02 기원전 9세기경 우라루투 수도

사실 필자는 우라루투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흑해 지역의 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기원전 7세기경 유물을 이해하려고 하니, 도저히 우라루투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필자가 정말 궁금한 것은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은제 거울에 붙은 금판 속의 문양(그림 1) 들이다. 

 그 거울의 뒷면에는 반인반수 상들이 상들이 궁금했다. 우라루투 신의 모습은 동물(사자와 황소)을 밟고 서서 있는 모습도 있고, 반인반수 상도 발견되었다. 특히 토파크-칼레에서 출토된 청동 반인반수 상(그림 2)은 괴기스럽기는 한데, 눈길을 많이 끄는 유물이다. 칼디 신의 모습으로 여겨진다.

 

그림 1. 켈레르메스 유적의 은제 거울, 금판은 부착된 것임

 

우라루트의 도시였던 토파크 칼레 유적은 터키의 반 호수 동쪽 부근에 위치한 곳으로 투쉬파와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토파크 칼레 라고 알려진 명칭은 터키식이고, 우라루투에서는 루사히닐리(Rusahinili)라고 불렸다. 루사I세(기원전 735~714년)의 도시라고 알려진 곳이다. 이곳 이전의 도시는 투쉬파 인데, 루사의 아버지인 사르두리 II세때 앗시리아의 왕 Tiglath-Pileser III세가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에 토파크 칼레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곳은 1879년에 영국에서 먼저 발굴을 했고 많은 유물들이 영국박물관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898~1899년 독일의 고고학 탐험대에서도 발굴을 했고 베를린 박물관에 보관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확실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터키 고고학 박물관에서 나머지를 조사하고 반 박물관에 보관된 것으로 알려졌다.

 

청동으로 된 반인반수 상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비슷한 유물이 베를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눈과 턱이 흰색 돌로 상감되어 있다.

 

그림 2.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토파크 칼레 유적 출토

 

청동으로 된 테이시바 신(우라루투, 전쟁과 천둥의 신)의 이름이 새겨진 형상물도 토파크 칼레에서 출토되었고,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그림 3.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테이시바 신의 이름이 새겨짐, 토파크 칼레 출토

 

토파크 칼레 유적은 여러 나라에서 발굴했고 공개된 자료도 매우 한정적이서 예레부니, 테이시바이니 유적, 투쉬파 유적 등에 비해서 알려진 바가 매우 적다...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투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에 위치한 우라루투는 코카서스 북쪽에 있던 스키타이 세계와 앗시리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그루지아 국경인 예레반의 수도에는 예레부니와 테이시바이니 성곽이 남아 있고, 터키에는 반 호수 부근에 사르두리 II세의 비문이 발견된 성곽이 남아 있다. 우라르투의 수도였던 투쉬파 혹은 시비니 신의 사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투쉬파는 사르두리 II세 이전부터 중심지로 사용되었는데, 사르두르 I세(기원전 844-828년)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가 반 절벽의 서쪽기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아들인 Ishpuini(기원전 828-810년) 왕이 통치할때까지는 늘 앗시리아에 공격을 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철제품의 수준이 올라가면서 암벽을 파서 동굴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생기게 되었고, 요새를 만들 수 있었다. 앗시리아는 우라르투의 수도를 쉽게 공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곳에 우라루투가 수도를 삶은 이유를 환경적인 요인으로 삶는데, 아르메니아 고원은 대륙성기후로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데, 이곳은 겨울에도 그렇게 춥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천연요새의 역할을 했고, 시비니 신의 숭배가 반 암벽과 관련되어 있다는 추측도 있다.

 

사르두르 I세의 아들 Ishpuini 통치 이후 그의 아들 Menua(기원전 810~786년) 아래에서 집중적으로 개발되었다. Ishpuini는 우라르투의 신 칼디를 포함한 사원지를 건설했다. 당시에 동굴을 파고 왕실의 방도 만들어졌다. 여러 층의 건물이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모형화 한 청동유물이 발견되었다. 현재는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졌다(그림 1).

 

 

그림 1. 건물과 탑의 모형물, 청동제품, 탑의 높이는 16.5cm, 건물의 높이는 30.5cm

 

메뉴아는 투시파 주변에 물을 제공하기 위해서 수로를 70km 가량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 호수의 물은 염분이 많았기에 관개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수로는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메뉴아 이후에 Argishti I(기원전 786~764년)과 Sarduri II세가 통치하면서 우라루투는 전성기에 이르렀다. 아르기쉬티 I세와 사루두리 II세는 반 절벽의 다른 면에 자신의 연대기를 비문에 남겼다. 이 비문은 우라루투 설형문자가 남아 있는 가장 큰 것이다.

 

현재 터키 국경에 있는 투쉬파는 기원전 9세기부터 우라루투의 수도로 사용되었으나 요새를 짓기전에는 강력하지 못했고, 요새를 짓고 난 이후 아르기쉬티 I세 지배기 기원전 8세기 경부터 앗시리아를 막아내었다.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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