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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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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에 해당되는 글 2

  1. 2021.09.06 '무덤은 자궁이다'
  2. 2020.10.24 알타이의 미라와 부활3

 

현재 살펴보고 있는 드네프르 강 유역의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무덤인 가이마노바 유적은 하나의 봉분 아래에 2개의 큰 무덤방(1번, 2번 무덤방)과 작은 무덤방 2개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깊은 곳에 만들어진 무덤은 2번 무덤방이다. 무덤방은 수직으로 판 입구 아래에 있지 않고 입구를 파고 연도(무덤방과 연결되는 복도시설)를 통해서 동굴처럼 생긴 무덤방으로 연결되도록 만들어졌다. 무덤방은 네모반듯한 것이 아니라 천정이 둥그스럼하게 생겼고, 무덤방의 입구도 타원형이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전통이어서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그 전통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깊은 구덩이를 파고 동굴과 같은 무덤방을 만드는 것은 쿠르간의 구조에서부터 발견된다. 쿠르간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지만, 동유럽 초원의 동석기시대부터 쿠르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드네프르강 유역과 볼가 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스레드니스톡 문화(Среднестоговская культура, Srednestogovskaya culture) 인 기원전 4000년기 전반을 쿠르간 I기라고 하며,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이행하는 동석기시대에 해당된다. 쿠르간 III기가 되면서 얌나야 문화 공동체(기원전 3000년 기 전반)가 되는데, 동유럽부터 시베리아 초원에서도 얌 문화가 발견된다. 동유럽의 동석기시대 마지막시기이다. 

[문화공동체는 문화권과 같은 개념이다. 암나야 문화 (Ямная культура, Yamnaya culture). 얌(Ям)은 구덩이라는 의미이다.]

 

쿠르간의 대표적인 연구자인 마리야 킴부타스는 ‘무덤은 자궁이다’라고 하는 이론을 유럽의 신석기(그림 1) 및 동석기시대  무덤에 대입했다.

 

그림 1. 아일랜드 신석기시대 널길무덤문화 기원전 4천년기 후반

 

무덤은 자궁이다라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구의 학자들 사이에 있었다.

 Dames(1977)는 무덤은 실제 주검을 묻는 방과 긴 회랑 같은 통로로 구성되는데 자궁과 질을 나타낸다고 했다. 무덤을 만드는 자의 목표는 가능한 어머니의 몸에 가깝게 가는 것처럼 만들었을 것이고 그 개념이 무덤의 배치에도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보았고, 마리야 킴부타스는 이를 인용했다(1989). 무덤을 자궁으로 보는 시각은 구석기시대라고 르로이 구르한(1967)이 생각했다. 구석기시대에 지형적으로 좁튼 통로나 타원형 지대 또는 절개된 틈새나 동굴속 작은 구멍들에 표시한 흔적들이 이미 무덤을 자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비슷한 생각이지만 좀 더 정확하게는 무덤은 자궁을 의미하며 만들었을 테지만, 어느 순간 부터는 그 의미가 약간 다르게 변질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무덤을 자궁이라고 생각한 시점이 구석기시대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쿠르간에서 발견되는 입구의 모양이나 통로 및 땅에 주검을 매장하는 의미가 자궁의 형상화 했다는 생각은 필자가 늘 생각해 오던 바이다.  필자가 경험한 장례식에서 가족들이 하는 모든 말과 행위는 다음에는 더 좋은 곳에 태어나라고 빌어주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히는 이런 말과 행위는 남아 있는 자들이 스스로 위안을 삼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러한 의미를 담은 무덤 구조가 스키타이 시대 들어와서 어마어마하게 커진 것은 단순히 주검매장을 위한 공간으로만 보기에는 경제적이지 못하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사상적인 의미(+알파)가 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 포스팅에서 마리야 킴부타스를 약간 비판한 적이 있는데 쿠르간에 대한 연구방향이 처음과 달라서 개념이 불분명해졌기때문이다. 소비에트 연구자 이지만 원래는 리투아니아 연구자였고 마지막에는 미국학자로 생을 마감했다. 그 전 포스팅에서 라트비아라고 했는데 그녀는 리투아니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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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어렸을 때 중3쯤에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대유행했던 것이 외국사람들과 펜팔하는 것이었다. 다들 미국 혹은 영국사람들과 펜팔 신청을 했지만 나는 동유럽사람을 신청했다. 원하는 것은 러시아였지만 원하는 국가로 러시아를 신청할 수는 없었고 퉁쳐서 동유럽이라고 되어서 적었는데, 우연하게 당첨된 것이 리투아니아의 또래 여학생이었다. 거의 2년 동안 한달에 한번쯤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어느 순간에 끊기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나는 리투아니아 사람과도 인연이 있었네....ㅋ

 

참고문헌

Dames, M. 1977 The Avebury Cycle. London: Thames and Hudson

Leroi-Gourhan, A. 1967 Treasures of Prehistoric Art. New York: Harry N. Abrams.

Gimbutas Marija ,1989. The Language of the Goddess: Unearthing the Hidden Symbols of Western Civilization. San Francisco: Harper & Row.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에서 고대로부터 교통로로 사용되어 온 추야강의 지류인 유스티드 강과 울란디르크 강 유역의 유적을 살펴보았다. 추야강의 또 다른 지류인 바르부루가지 강에서도 흥미로운 유적이 발견되었다.

 

바르부르가지I유적에서는 모두 30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져서 확인된다. 남쪽에는 1~18호, 북쪽에는 21~30호가 있다. 두 그룹 사이로 현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수로가 지나가는데, 붕괴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이제까지 본 무덤과는 약간 다른 구조의 무덤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 25호 무덤에는 남성미라 1구가 발견되었다. 미라로 처리한 부위는 두개골, 손, 발로 피부상태가 좋았다. 그 외의 부위는 거의 잘 남아 있지 않다. 무덤은 돌판을 무덤으로 쓴 돌널무덤(석관묘)이다. 석관묘의 바닥에는 4개의 나무판을 깔았고 석판을 여러 겹으로 겹쳐서 덮었다. 무덤 구덩이는 보통 단을 만들지 않지만 말을 부장하는 구덩이의 북쪽에 단을 만들고 말을 넣어서 석관묘의 높이와 맞추었다. 무덤의 깊이는 120cm, 크기는 290×240×205cm이다. 이 무덤 상부의 돌을 덮은 범위는 (적석) 6m이다.

 

그림 1.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의 평면도

 

그림 2.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상부와 단면도

 

 

앞에서 유스티드 XII유적과 울란디르크 I유적에서도 돌널무덤이 있었으나, 무덤바닥에 나무를 깔고 여러 겹으로 덮는 것, 무덤구덩이에 단을 만드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미라의 머리 아래에는 돌침(돌베개)가 사용되었다.

 

알타이에서 발견된 유적은 지난 겨울~봄에 살펴본 아크 알라하-3유적, 바샤다르 유적 2호분, 파지릭 유적 2호, 5호 등이다. 2600~2500년 전 유적으로 기원전 6~5세기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무덤에서 발견된 미라는 2600~2500년 전  미라 처리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고 부장된 유물이나 무덤 등도  차이가 있다. 바르부르가지 I유적은 기원전 5세기 경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만들어진 곳으로, 미라가 나온 25호는 기원전 4세기경의 무덤으로 생각된다(쿠바레프 1992).

  우코크 고원이나 파지릭 계곡에서 발견된 미라는 대단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미라로 전신의 관절을 끊지 않았고, 그 내부를 풀과 동물의 털로 채워넣었다. 반면에 바르부르가지I유적의 25호 미라는 사실 흉내만 낸 미라이다. 머리, 팔, 다리만 미라가 되도록 했고 몸통은 거의 잘 남아 있지 않다.

알타이에서 스키타이 문화의 전성기인 2600~2500년 전 이후의 미라의 존재와 그 상태 등이 늘 궁금했는데,,약간은 해결된 듯 하다.

 

 통나무관에 어린아이를 묻는 장법이나 미라를 만드는 장법 등은 모두 어쩌면 ‘부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모른다. 2400년 전 작은 무덤에 묻힌 사람에게도 그런 것을 누군가의 염원을 담았을 수도 있다.

사실 이 지역에서 스키타이 문화 이전에는 미라를 대신해서 사람을 닮은 인형을 무덤 속에 묻어 두었다. 청동기시대(오쿠네보 문화), 순동시대(글라스코보 문화), 신석기시대(키토이문화, 세로보문화), 후기구석기시대에서 모두 발견된다. 물론 시대별로 생김새와 재질은 차이가 있다. 

 죽은 자와 함께 넣은 미니어쳐 혹은 미라는 살아 있는 사람의 염원이 담긴 물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그리며 넣은 ‘재생’, ‘부활’에 가까울 것 같다. 설마 노잣돈의 의미로 넣은 것은 아닐테니...바르부르가지 I유적에서도 우코크 고원이나 파지릭계곡의 유적과 같이 화려한 무덤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를 담아서 무덤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2 : Курганы Сайлюгема. Новосибирск: 1992. 22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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