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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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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7세기의 우라르트 마지막 도시인 테이시바이니에서는 스키타이 화살촉이 다량 발굴되면서 스키타이 사람들에 의해서 망했다고 보고 있다.

스키타이 유물은 화살촉 뿐만 아니라 재갈멈치 및 철제 무기와 구슬 등도 발견되었다.

 

하지만 우라르트 왕국의 특징적인 유물들도 전해지는데 청동으로 된 인물상 뿐만 아니라 우라르트 재갈멈치, 투부도 있다.

 

그림 1. 우라르트에서 제작된 청동인물상, 테이시바이니 유적출토

 

그림 2. 우라르트의 재갈멈치, 테이시바이니 유적

 

그림 3. 앗시리아의 청동그릇, 테이시바이니 유적

 

그런데 우라르트에는 역시 앗시라아 제품들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청동그릇, 실린더 모양의 도장과 같은 유물이다. 코카서스 산맥 북쪽의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앗시리아의 유물은 우라르트를 통해서 수입된 것이다.

 

우라르트에서 제작된 청동인물상(그림 1)은 스키타이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발견된 은제거울이나 투부가 그리스에서 제작되었다고 하는 논거의 반박자료로 충분하다.

 

그리스에서 제작되었다고 하는 설이 설득력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이유는, 서양의 고대근원이 그리스라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우라르트 보다는 그리스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먹혔?다고 할까?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성곽 주변에서는 무덤도 발견되었는데 카미르 블루르 유적에서는 골제로 된 동물장식이 발견되었는데, 굴레장식이다.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비슷한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그림 4. 카미르 블루르 유적

 

유적을 발굴한 피오트로프스키는 이 유물을 그리핀으로 보았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카미르 블루르 유적에서는 말이 매장된 무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코카서스 산맥 북쪽의 켈레르메스 유적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코카서스 산맥도 충분히 높기 때문에 문화적 구분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유적에서 나타나는 상황은 매우 흡사하다.

 

 

 

참고문헌

Б.Б. Пиотровский Скифы и древний Восток(Доклад на Конференции по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й археологии).// СА. 1954. XIX. С. 141-158(피오트로프스키 1954, 스키타이와 고대동방)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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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부의 우라르트 성곽인 테이시바이니에서는 스키타이 화살촉이 발견된다. 이 성은 스키타이 화살촉 뿐만 아니라 철제 무기 및 구슬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성벽에서 발견된 엄청난 숫자의 스키타이 화살촉으로 보아서 스키타이 사람들에 의해서 파괴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림 1.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출토된 스키타이 화살촉


비슷한 화살촉이 앗시리아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기원전 7~6세기 스키타이 화살촉이다. 토파흐 칼레, 앗시리아의 수도 아수르 등지에서 발견되어서 스키타이 화살촉을 사용했다.

그림 2. 테에시바이니 유적 스키타이 청동화살촉, 앗시리아에서 발견됨. 1,2,3-하이카베르드, 4-토파흐-칼레, 5,6-아슈르, 7,8-바비론, 9,10-타르스, 11,12-데르아르



처음에 앗시리아에서 이런 유물이 발견되었을 때 화살촉의 경부에 구부러진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방화범의 재료를 부착하는 장치로 설명했다. 하지만 보네트는 이러한 유형의 청동화살촉은 코카서스 부근에서 널리 사용된 것을 지적했다.

무구 중에는 왕의 이름이 있는 것도 발견되었는데 청동으로 된 찰갑이다. 아르기티치 I세라는 명칭이 씌여 있었다. 청동투구도 우라르트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림 3.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청동투구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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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남쪽의 우라르트 마지막 도시인 테이시바이니는 우라르트 최대의 유적으로 점토벽돌로 만들어진 성곽 유적이다. 벽의 두께가 3.5m에 달하는 지점도 있다. 계단식의 구조인 건축물은 한방의 창이 다른 방의 지붕으로 이어지는 구조이고, 벽돌의 1개의 크기 중에 가장 큰 것은 0.5m이상이다.

 

모든 창고(약 120개의 방)는 방별로 인감으로 밀봉되었다. 성곽에서는 라즈단 강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도관이 설치되었는데, 도관은 둥근 돌 파이프로 연결되었는데, 에레부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거주공간에서는 녹로, 빵을 굽던 화덕자리, 곡물 분쇄기 및 가정용품 등이 발견되었다.

 

성곽은 메소포타미아 건물스타일로 진흙 벽돌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현무암 기초위에 진흙 벽돌로 쌓은 것이다. 현재는 원시 벽돌은 벽동 세공의 선이 보이는 정도로 점토 덩어리로 변했다(그림 4)

 

그림 1. 1950년 사진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정리된 바닥

 

그림 2. 1950년 점토벽돌로 된 성벽, 6줄의 벽돌

 

 

그림 3. 테이스바이니 성곽의 중앙문 복원도

 

그림 4. 현재 남아 있는 성벽

 

그림 5. 구글 위성으로 본 테이시바이니 유적

 

유적에서는 금속가공소가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사진이나 그림은 구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철제품은 남아 있는데 처음에는 무기를 사용했고 나중에는 노동도구를 제작했다고 알려졌다.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는 금속덩어리와 거푸집이 발견되었습니다. 장검, 단검, 창, 화살 등과 같은 무기가 많다.

 

그림 6.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삽날

 

그림 7.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철제품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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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르트의 마지막 도시라고 알려진 테이시바이니 유적은 우라르트 전쟁의 신 테이세바의 명칭을 도시명에 붙인 것이다. 유적은 기원전 7세기 경에 세워졌고 적의 공격으로 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망하기 전까지 테이시바이니는 매우 풍족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적에서는 와인 저장고가 발견되었고, 성의 남쪽에는 포도 뿐만 아니라 살구, 사과 , 석류, 버찌, 호두, 복숭아 등을 길렀던 과수원도 발견되었다. 과일씨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림 1. 테이시바이니 성곽의 평면도, 그리드는 50m간격


성곽내에는 창고들이 발견되었는데, 알곡 저장소, 참기름 제작소, 포도주 제조공간, 양조장 및 맥주 보관소 등이 확인되었다. 알곡보관소에서는 중앙에 구멍이 있는 부침개 모양의 커다란 빵도 발견되었다. 참기름을 제조하던 공간에는 기름을 짜고 남은 깻묵의 흔적과 돌통이 발견되었다. 포도주 제조공간에도 같은 통이 발견되었다.

그림 2. 테이시바이니 성곽의 창고, 노란색-알곡저장소, 녹색-양조장 및 맥주 보관소, 하늘색-참기름 제작 및 보관소, 자주색-와인저장고 , 1. 중앙문, 2. 서문, 3. 내성, 4. 지배자의 거주지, 5- 쐐기문자점토판이 발견된 곳 (그리드는 50m간격)

그림 3. 테이시바이니 성곽의 석주


과수원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 것은 포도씨이고 포도주 저장공간이 가장 많이 발견되어서 포도주 제작이 주요한 생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포도주를 저장한 토기는 카라스 라고 부르는데 400개가 발견되었다. 카라스 한 개는 800~1200리터이다. 포도주를 따르는데는 쿱신(그림 4)(스키타이 문화에서는 유제품을 보관하거나 마시는 잔을 쿱신이라고 부른다)을 사용하는데, 문양이 새겨져 있다. 테이시바이니 유적외에는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쿱신은 1036개가 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림 4. 테이시바이니 성곽의 포도주 저장고(28번)

그림 5. 포도주 저장고 28번에서 나온 쿱신

 

 

 

그림 6. 25번과  28번 포도주 저장고의 바닥 평면도


아라르트 분지에서는 0.5~1톤의 알곡이 1헥타르에서 생산된다. 1500톤의 알곡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2000~3000헥타르의 경작지가 있어야만 가능한데, 테이시바이니 창고에 저장된 정도의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300헥타르의 땅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전체 농경의 면적은 4000~5000헥타르에 달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코카서스 산맥 남쪽에 위치한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은 현재에도 포도주생산으로 유명하다. 소비에트 때도 꼬냑과 와인 생산을 담당했던 곳이다. 필자는 와인 맛을 잘 모르지만 이곳 와인을 좋아했다. 자주 마셨는데, 와인도 뒤끝이 있다. 나도....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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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남쪽에 위치한 우라르트의 도시로 잘 알려진 곳은 예레부니와 테이시바이니 유적이 있다. 모두 성곽 유적으로 특히 테이시바이니(Тейшебаини) 성곽에서는 코카서스 산맥의 북쪽 스키타이 기원전 7세기 유적인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청동화살촉과 같은 모습의 화살촉이 발견되었다(그림 1).

그림 1.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청동화살촉


테이시바이니 유적은 기원전 13세기부터 기원전 8세기 혹은 기원전 7세기까지 존재했던 도시이다. 유적은 1936년에 발견되었고 카르미르-부루르 언덕 위에 만들어졌는데, 유적의 면적은 4헥타르가 넘는다고 한다. 2차 대전이 시작된 1939년부터 발굴을 했으나 전쟁으로 발굴은 중단되었고 1958년부터 다시 피오트로프스키가 발굴을 했다. 이 때 우라르트(철기시대) 이전인 순동시대 및 청동기시대(기원전 13~기원전 8세기 어느시점)에도 문화층이 있던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우라르트 문화층을 발견했다.

도시의 명칭은 역시 우연하게 발견된 쐐기 문자에서 발견되었다. 우라르트의 왕인 루스이 II세가 세운 것인데 그는 아르기쉬치 II세의 아들로 기원전 685~639년에 통치했다. 우라르트 왕국의 쇠퇴기에 세워진 도시로 알려졌다. 기원전 714년 아시리아 사람들은 무사시르에 위치한 우라르트 신 칼디의 주요 종교 건물을 파괴한 것으로 알려졌다. 루스이 II세는 우라르트 신의 숭배를 강화해서 이를 군사력 강화로 이으려고 애쓴 왕으로 알려졌다. 종교를 미끼로 대중을 겁박했을 것이다. 루스이 II세 통치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반 호수 북쪽에 위치한 칼디 신을 숭배하는 도시를 건설하고, 전쟁의 신(神) 테이세바의 이름을 따서 테이세바이니 라고 하는 성을 건설한 것이다. 테이시바이니의 경제와 관련된 내용이 적힌 쐐기문자가 적힌 점토판이 남아 있다.

그림 2. 지질학자가 발견한 점토판


이 유적에는 1950년에 촬영한 항공사진이 남아 있다(그림3). 고대 성곽의 도로와 성벽 및 거주구역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림 3. 1950년 촬영, 불가코바가 찍은 항공촬영, 테이시바이니 고고유적발굴조사장면

 

그림 4. 1950년 촬영, 테이시바이니 성내에서 발견된 포도주 보관소(28번), 저장고 중에 한 곳으로 땅을 파고 큰 도가니를 묻은 방법으로 보관했다. 가장 상단에는 포도주의 종류와 보관 날짜를 표시했다.



발굴결과로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멸망은 여름이었다. 소가 고지대 목초지에 있었고 아직 포도가 익지 않은 기간이었다. 그리고 한밤에 공격이 시작되어 서둘러 도시주민들이 거주구역을 떠나 요새내부로 들어갔다고 판단했다. 발견된 화살촉의 방향이 적군은 언덕 경사면에서 공격했다. 거주구역에서는 여성와 아이들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적에게 벗어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성곽 안쪽의 내성에 임시로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결과 화재가 발생해서 요새 지붕이나 천장등이 파괴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테이시바이니가 마지막에 불타면서 붉게 변한 벽돌로 인해서 이 유적이 위치한 곳의 이름이 카미르-브루르(붉은 언덕)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으로 전해진다. 공격으로 멸망한 이유는 요새로 통하는 물 공급시스템이 파괴되면서 더 이상 이 곳에서 생계를 이을 수 없었다고 알려졌다. 이 유적에서는 포도를 재배하는 과수원도 발견되었는데, 물 공급시스템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연구되었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Yk1k5FjnYe1OSn-yRxnY5IuDo9w9PMt&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복사본 복사본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 Б. Город бога Тейшебы // Советская археология. — Москва, 1959. — № 2.(피오트로프스키 1959, 테이세바 신의 도시)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Пиотровский Б. Б. Урартская крепость Тейшебаини (Кармир-Блур) (к 25-летию раскопок) // Краткие сообщения Института Археологии. — 1965. — Вып. 100. — С. 72—78.(피오트로프스키 1965, 우라르트 테이시바이니 요새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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