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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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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연구한 노브고르도바는 몽골 민족들에게 가장 오래된 믿음 중에 하나는 사슴에 대한 숭배라고 했다.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입석(立石)에 그려진 사슴은 이를 보여준다. 사슴돌은 스키타이 시대의 무덤 축조에도 사용되는데 봉분의 가장 위에 사슴돌을 세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시베리아 투바의 아르잔-1 유적과 아르잔-2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몽골이나 바이칼 지역(자바이칼)에서 발견되는 ‘사슴돌’은 사슴이 아닌 무기류 혹은 장신구만 그려진 입석도 있는데 대부분 사슴돌로 통칭한다.

사슴돌이라고 불리는 입석물 세우는 전통은 흑해지역에서도 발견된다. 봉분의 꼭대기에 세워두는데, 입석을 대신해서 석인상을 세우는 경우도 있다.

 

시베리아 투바의 아르잔-1호(기원전 9세기)에서 사슴의 존재는 봉분위에 얹었던 사슴돌로 알 수 있다. 아르잔-2(기원전 7세기 중반)호에서는 주인공의 무덤인 5호묘에서 남성과 여성의 모자장식으로 사슴장식이 발견되었다. 흑해지역에서도 기원전 7세기 유적인 켈레르메스 유적, 코스트롬스카야 유적 등에서 사슴장식이 발견되는데 주로 무기를 장식하는 용도이다.

 

기원전 5세기 축조된 세미브라트니예 유적에서 발견된 각배 장식판은 2종류가 있는데, 삼각형 장식판에 동물문양의 방향에 따라 구분된다. 각배장식판을 유기질제 각배에 부쳤을 때를 기준으로 동물이 똑바로 서도록 디자인된 것(그림 1, 그림 2-1)과 동물문양이 누운 것(그림 2-2,3)으로 디자인 된 것이다.

동물문양은 맹수(호랑이, 그리핀, 독수리 등)가 사슴(그림 2-1,3)과 양(그림 1)을 공격하는 장면인데, 사슴은 표현방법이 다르다. 그림 2-3의 사슴은 동물의 근육을 두드러지도록 표현하는 코스트롬스카야 유적 혹은 켈레르메스 유적의 사슴표현으로 흑해지역에서 오랫동안 제작되던 방법이다. 그러나 그림 2-1은 그리핀이나 사슴이 흑해지역과는 다른 페르시아에서 유행하던 동물표현법이다.

 

그림1. 세미브라트니예 유적 출토 각배 장식판

 

그림2. 세미브라트니예 유적 출토 각배 장식판

 

그리고 용?으로 보이는 하이브리드 동물(그림 2-2)은 흑해에서 기원전 5세기 이후에 종종발견되는 문양이다. 하지만 이 용은 근육질의 다리표현이 있어서 다리 없는 용의 초기 모습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턱 아래의 수염, 꼬리부근의 동물표현 등은 ‘하이브리드’라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나라의 것도 아닌 듯 해 보인다.

 

청동기시대 시베리아의 사슴돌의 사슴문양은 하늘을 나는 듯이 보이도록 표현되었고, 스키타이시대 아르잔-2호의 주인공 남녀의 모자장식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문양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알타이에서는 기원전 6세기, 흑해에서는 기원전 5~4세기) 맹수의 포식자로 남아 있다. 이는 맹수가 동물문양장식으로 주요한 문양으로 등장하면서일 것이다.

 

다시 각배로 돌아가서 왜 각배에 장식판을 붙은 것일까? 이것은 켈레르메스 유적의 은제 거울에 붙인 금판의 의미와도 같을 수 있다. 막시모바는 켈레르메스 유적의 거울이 중앙에 꼭지를 다는 스키타이 형식의 거울인데, 장식판만 인접한 국가에 주문제작했다고 연구한 바 있다.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유물들은 스키타이 재지생산품(주로 마구)뿐만 아니라 우라르트, 그리스, 앗시리아 등 당시 인접한 국가에서 온 것이다. 기원전 5세기경에 만들어진 세미브라티니예 무덤에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유기질제 그릇에 금제 장식판을 붙이는 것은 각배 뿐만 아니라 납작한 목제그릇에서도 발견된다. 재지의 물건은 역시 마구와 관련된 유물이다. 뒷시기로 갈수록 누가 누구의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는 현상이 매우 심하게 보인다.

 

참고문헌

Piotrovsky B., Galanina L., Grach N. 1986 : Scythian Art. The Legacy of the Scythian World: mid-7th to 3rd century B.C. Leningrad: Aurora Art Publishers. 1986. 184 p.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М.И. Максимова 1956; Ритон из Келермеса//Советская археология. XXV. М.: 1956(막시모바 1956, 켈레르메스에서 출토된 각배)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유투브에서 환단고기 관련 그리고 그것의 밑바탕이 되는 홍산문화 관련한 내용을 플러그인하는 기능이 막혔다.

실험삼아서, 다른 유투브 동영상은 플러그인이 되는데, 아마도 일부러 막은것이 아닐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미 퍼 놓은 필자의 글에 있는 것을 새로 인용해야 한다.

 

2019/03/14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환단고기와 고고학] - 환단고기 역주본과 유투브

 

 

환단고기 역주본과 유투브

오늘 기사를 보다가 유투브의 파워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국내1위 검색포탈사이트 네이버와 거의 비슷하다.(관련기사링크) https://news.v.daum.net/v/20190314175821694 http://www.dt.co.kr/contents...

eastsearoad.tistory.com

위의 유투브에서 2분이 넘어가면 홍산문화에서 용이 확인되어 중국에서 공작을 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사실과 달라서 알린다.

1. 사해유적은 홍산문화의 유적이 아니라, 홍산문화보다 이전 시기의 흥륭와문화의 유적이다.

 흥륭와 문화는 대략 7500년 전 부터 시작되는데, 가장 이른 절대연대는 흥륭와유적에서 확인된다.

 그렇지만 사해유적은 흥륭와문화의 유적으로 이 유적에서 알려진 절대연대는 1개인데, 대략 7000년 전이다. 

 (필자의 예전 글들이 플러그인이 안되네요..최근 글들은 되는데, 필자의 글 카테고리에서 환단고기비판에서 요서지역 흥륭와문화라고 된 곳을 찾아서 들어가시면됩니다.)  

 

홍산문화는 6000년 전 부터 시작된다.(중국에서는 6500년 전 부터 시작된다고 하나 이는 신뢰할 수 없다. 이는 필자가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2. 사해유적에서 확인된 석소룡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주장이다.

 아래는 사해유적의 유적 평면도인데, 가운데 중앙에 용형퇴석이라고 적혀있는 곳을 이야기 한다.

 사해유적은 수십기의 집터 중앙에 무덤이 있고, 그 옆에 이 집석유구가 확인되었다.

 

사해유적평면도. 중앙에 있는 고불거리는 돌의 집석이 용이라고 주장함. F는 주거지, 집터, M은 무덤, H는 회괭이다. 중국 보고서에는 모두 이런 약칭으로 표시한다.

 

 이를 두고 용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용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용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중국의 측의 내용이다. 중국인의 상상력 정도 된다.

 

3. 그럼 왜 중국에서 용이라고 주장하는가?

  이것은 홍산문화를 정치화 하려는 목적과 일맥상통한다.

 우하량 1지점의 알 수 없는 유구를 여신묘로 주장하려는 내용과 같다.

 

2019/03/06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환단고기와 고고학] - 우하량 유적의 1지점을 왜 여신묘라고 주장했을까?

 

 

 즉 중국동북지방 중에서 적봉일대에 위치한 신석기문화 중 홍산문화 보다 이전 부터 용이 확인되며, 

 이를 홍산문화와 함께 정치화 하려는 수단인 것이다.

 

이러한 배경이 있는 사해유적의 무덤옆의 집석유구를 용으로 해석한 중국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한국역사라고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그들이 한심하기 그지없다.

내가 포스팅을 계속하는 이유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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