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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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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에 아무르 지역연구회가 창설되면서, 연해주 성곽연구를 주독하게 된다. 이 연구회는 블라디보스톡과 아무르지역의 연구를 통합한 것으로 중요한 연구들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림 6. 부세


1862년 극동에서 아무르 주의 전시 주지사 탐험기록 담당 사무관으로 근무한 부세(1838~1896)의 연구가 괄목할 만하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우수리스크 까지 기차를 타고 여러 번 여행을 하였는데, 그는 이곳의 경제적인 생산 활동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의 문화와 역사적인 문제까지 깊이 있게 관심을 기울였다. 지역민에 대한 관심은 현존하는 고대 문화유산과 유적들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부세는 아무르지역연구회에서 처음으로 고고학 유적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보고서에는 모두 20여기의 성지를 포함한 97개의 고고학 유적에 대한 것이었다. 부세는 고고학답사를 여러 번 했는데, 그 결과 연해주 남동쪽의 많은 성지를 발견하였다. 우수리스크 지역에서 자파드노-우스리스크 성, 유즈노-우수르스키 성, 아누치노 지역에서 아누치노 성과 노보고르데예프스키 성지, 이바노프카 마을에서 서쪽으로 5.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도로에 대한 것도 포함되었다. 그 외에도 헤니나야 소프카, 니콜라예프스코예, 콕샤로프크소예-1, 파블로프스코예 성지, 수호돌 항구의 크라스느이 곶의 성지 등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 성지들에 남아 있는 방어시설-성벽, 해자, 문, 평면시설-들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그 기록을 남겼다. 부세는 대부분의 성지가 ‘만주, 한국, 중국 사이의 전쟁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이 성지가 668년-발해 건국 초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파라라디 신부의 연구에 의하면 훨씬 오래된 고대성지는 타원형으로 생겼는데, 유즈노-우수리스크 지역에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고 밝혔다(부세 1888).
부세의 연구는 고고학 유적과 유물들 직접 조사한 것으로 사후(1908년)에 출판되었다. 크라포트킨 공작이 부세가 조사한 연해주의 성지를 발표하였다. 아누치노 지역의 브라트 산의 성지, 크라스노야로프스코예 성지와 고대 도로, 보구슬라프스코예, 체르니고프스코예, 노보니신스코예, 노보로스신스코예, 스테큘뉴힌스코예-1, 이즈베스토프스코예 성지 등이다. 고고학 유적들의 분석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4단계로 편년하였다.


1. 선사시대
2. 668~1615년: 만주인과 중국인의 전성기로 이곳에서는 947년 동안이 문화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시대
3. 1615년~1861년까지는 문화의 황폐화시대
4. 러시아의 영토에 영입된 시기
 
부세가 연해주 성곽들의 다양한 형태를 지리학적으로 설명하면서 우수리 강을 중심으로 중세시대에는 하나의 커다란 정치체가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그것은 우수리 강과 아르세네프 강의 수계가 이 정치체의 서쪽 경계가 된다고 하였다(부세 1888: 크라포트킨 1908).
또 한명의 연해주 성지 연구자가 있었는데, 연해주의 산림원에서 근무하던 팔체프스키 엔. 아. 이다. 그는 여러 기의 성지들을 발견하고 아무르 지역연구회에 이를 통보하였다. 그가 발견한 성지는 연해주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한 것으로 에스톤카 성, 루드나야 성, 바튜키 성, 곤차로프카 성, 라조프스코예 성, 예카테리노프스코예 성, 프르세발스코예 성 등이 있다(부세·크라포트킨)(역자 주. 이 책은 출판연도가 없음).


몇 몇의 성지(예를 들면 루드나야 성지)는 현재까지 팔체프스키의 보고만이 남아 있을 뿐 다른곳에는 전혀 보고되지 않은 곳도 있다. 왜냐하면 루드나야 성지는 그 뒤에 루드나야 프리스탄 항구를 건설하면서 완전히 성지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테튜헤 강의 하류에서 북서쪽으로 1verst(역자 주. 러시아의 옛 거리단위. 1verst=1.067km)만 가면 강의 좌안에 작은 장방형 성지(정면이 27×25 shazen)(역자 주17세기에 사용한 러시아 거리단위. 1 shazen=2.16m)가 있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서 루드나야 성지는 평지성으로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크기는 58.2×54m정도로 생각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지난 150년 동안 연해주에서는 150개가 넘는 성곽 건축물을 발견 및 발굴 조사하였다. 건축물에는 성곽, 성벽, 해자 등을 다 포함하며 남쪽의 해안가부터 북쪽의 산악지대와 타이가 지역에 걸쳐 있다.

연해주의 성곽연구는 세 단계에 걸쳐서 발전한다. 첫 번째 중국문헌 분석, 두 번째 향토학자에 의한 연구, 세 번째 고고학자에 의한 본격적인 야외조사이다.

첫 단계- 당연히 연해주 성곽 조사의 첫걸음은 현대에 들어와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은 당시에 주위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 하기 위해서 축조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오랑캐를 무찌르는데 익숙한 중국문헌에서 정보를 얻어서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 연구의 첫 시발점이다. 이에 관해서는 역사서에 아주 많이 남아 있고, 실제 남아 있는 건축물과 허물어진 성지 등도 이를 방증한다.

실제로 직간접 적으로 획득한 인접한 주민들에 대한 일상생활, 전통, 민족의 수 나아가서 국가의 지형, 도로, 성지, 마을, 도시, 방어시설 등도 그 국가에 대한 정보이다. 획득된 정보는 지도, 보고서, 연대기 등을 작성할 수 있고, 이것들은 그 지역에 대한 정치적 상황 등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비추린(1777~1853)(그림 1), 바실레프, 고르키, 로조프, 쿠네르 등이 기술한 동방의 이방인에는 중세 퉁구-만주족의 다양한 성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있었다. 그래서 북서(북서)’94편에는 연해주, 아무르, 만주 등에서 사는 우쯔이 종족에게 성곽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에서 일 천 년기 전반(역자 주1~4세기)·에 각 도시와 마을은 특징적인 고유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비추린 1950). 


그림 1. 비추린(1777-1853). 17세기 부터 동방정책으로 인해서 러시아는 중국 및 만주를 연구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졌고, 18세기에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청나라와 수교하면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그림의 비추린은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북경교회사절단을 파견하게 되면서 중국에서 복무했고, 중국정사25사에 기록된 동아시아역사를 번역하였다. 그의 연구는 러시아 동방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가 번역한 책은 러시아가 한국을 배우는 기본교재이다. 현재도 러시아에서 발해와 여진과 관련된 논문에서 그의 이름은 늘 거론된다. 


말갈족과 그 성지에 관해서는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의 기록에는 ‘645년 당과 고구려가 전쟁을 했다. 고구려 쪽에는 말갈인이 참가하였고, 중국에서는 투르크 인이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곳은 안시성 부근이다. 고구려의 북부욕살 고연수 및 남부욕살 고혜진과 말갈인은 50,000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도왔다. 중국 황제는 만약에 그들이 안시에 들어간다면, 높은 산을 파고, 도시로부터 식료품을 조달받아야 한다. 그러나 말갈인이 우리의 소와 말을 훔치게 둔다면, 우리 쪽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비추린 1950).

여러 역사서에는 여진의 성 축조 기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들에게는 강한 조상이 있는데, 안시라 불리고, 성지를 축조하였다. 후툰장에서 아무르 까지 북쪽으로 80m떨어져 있다(바실레프 1857). 좀 더 늦은 역사서 명나라(1368~1644) 집의 역사(러시아과학원 동양서체연구소 문서국)에도 성에 대한 기록이 있다. 행정관청 중 국가 수입담당기관, 인사기관, 사법기관 등은 성곽 안에 두도록 하고 도로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역사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성곽, 도시, 마을, 국경선, 국경의 항구 등이 구분되어 있을 때이다. 군사-정치-경제적 상황 등이 악화될 때는 국가 안이나 종족 내에서 성을 지어야 했다. 역사서에는 일본 유민이 해안가에 59개의 도시를 짓고 약 58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 거기에 성벽에 대해서 약간 기술되어 있는데, ’...군인들은 성벽위에 터널을 묻었고....’밤에 물을 길어서 도시성벽을 다듬었다. 밤에는 얼어붙어서 그곳에 올라가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러시아과학원 동양서체연구소 문서국).

10~20세기 극동 사람들은 성지축조와 마을 축조 뿐 만 아니라 방어적인 요새나 도로를 만드는 데 아주 능했다. 말갈, 발해, 여진, 고구려 인 들은 성을 축조하였는데, 중국의 역사서에는 아주 정확하게 그들의 입지 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많은 세월이 흘러서도 러시아 연구자들은 이 역사서에 따라서 성지를 찾을 수 있다.

러시아 연구자들은 고대와 중세시대 성지의 입지는 생업과 방어가 용이한 곳을 택한 것으로 생각했다. 높은 입지는 넓은 영역을 관망할 수 있었고, 봉화대의 역할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댜코바 2009)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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