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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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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프르강 유역의 최대 성곽인 스키타이 문화의 벨스크 성곽에서는 특히 동쪽 성에서 토제로 된 인간형상물들이 발견된다. 인간형상물은 남성과 여성 그리고 성을 알 수 없는 유물들도 발견된다. 모든 인간형상물의 출토 위치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지만 집자리에서 발견되었다.

 

누가 보아도 여성을 형상화 한 인간형상물(그림 1-11) 중에 한 점은 집자리 13-25-1974호에서 발견되었다.(집자리 호수가 이렇게 복잡한 경우는 처음본다. 1974는 발굴한 연도이고, 13과 25는 발굴범위내에서 1m간격으로 표시된 격자번호이다. 문제는 발굴평면도가 없어서 동쪽 성의 어디에 주거지가 위치하는지 정확치가 않다.) 13a-25-1974호는 13호 보다 늦게 생긴 것으로 이곳에서는 토기가 출토되었다.

 

 

그림 1. 벨스크 성곽의 동쪽 성내의 집자리 출토품. 1~3: 31-30-1982호 출토, 4,5: 40-26-1976호, 6: 1-19-1969호, 7: 14-22-1973호, 8,9: 8-23-1975호, 10~16: 13-25-1974호, 17~19: 13a-25-1974호

1,7-송곳, 2-무기의 앞부분, 3-주외, 4-칼, 5-날, 6-화살촉, 8-창의 지지대, 10-점토 숟가락, 9,11-인간형상물, 12, 15-소 형상물Bucranium, 13-가죽 가공 용도의 석기, 16-구멍이 뚫린 지지대, 17-동물형상물, 18-토기, 19-긁개(1-2,5,7-8: 철, 4: 철과 뼈, 3,6: 청동, 9~12, 14-17: 점토, 13-석제품, 19-뼈제품)

 

그런데 이 여성형상물이 출토된 집자리는 다른 집과는 다른 장방형평면형태(9.35×5.6m,깊이 1.1m)이고 규모도 크다(그림 2-1).

이 집자리에서는 원뿔 모양으로 된 점토 받침대(그림 2-16)가 발견되었는데, 막대기를 꽂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인간형상물과 함께 발견되었다. 동물모양의 점토인형(그림 2-15)이 함께 발견되었다. 여성형상물의 머리는 훼손된 채 매장되었다. 동물장식은 소를 형상화(букрании, Bucranium)했다고 보고자는 생각했으나 의아하다(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벨스크 유적에서는 좀 더 사실적인 동물모양형상물이 출토되기 때문이다(그림 3).

 

그림 2. 벨스크 성곽의 동쪽 성의 집자리

 

그림 3. 벨스크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모양 점토인형

 

아뭏튼 시람코는 벨스크 성곽의 동쪽 성내에서 발견된 집자리 중에서 13-25-1974호를 특별하다고 생각한 듯 하다. 평면형태가 장방형인 집자리 8-25-1984호(그림 1-2)에서도 인간형상물이 토기 옆에서 출토되었다(그림은 없음).

평면형태가 장방형인 집자리에서는 인간형상물이 출토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일반집과는 무엇가는 다를 수 있다. 일종의 신(神)을 모신 집자리 일 수 있다. 매우 현실적인 종교 생활?이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헬온 도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동유럽 최대의 성곽은 스키타이 시대의 성곽으로써 기원전 7세기부터 존재했으며 기원전 3세기 까지 사용되었다. 거의 4000헥타르에 달하는 이 성곽은 20세기 초 모스크바의 크기와 맞먹는다.

 

벨스크 성곽은 동과 서쪽에 각각의 성곽이 따로 존재하다가 기원전 6~5세기경에 이를 통합하는 성벽이 만들어졌고 이를 볼쇼이 벨스크 성곽이라고 부른다. 북쪽에 있는 쿠즈민 성은 이 후에 생겼고, 현재는 성벽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동과 서의 성곽은 모양도 다르고 그 곳에서 발견되는 구조물의 성격도 다르다. 특히 동쪽에는 토기와 청동기를 만들던 노지가 발견되어서 공방을 주로 담당했던 것 같다.

흥미로운 필자에게는 반가운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토제로 된 인간형상물이 발견되었다. 유물은 성을 구부할 수 있는 유물들이 있다. 남성은 성기(그림 1-1,3~10), 여성(그림 1-13~16)은 가슴이 강조되었다. 물론 애매한 유물도 있다.

 

그런데 토우로 된 남성을 연구자들 대부분은 청동으로 된 파파이(그림 1-2, 그림 2)를 연상한다. 파파이(papai)는 헤로도투스가 전하는 스키타이 신화에서 제우스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그림 1. 벨스크 성곽의 동쪽 성에서 발견된 인간형상물

 

그림 2. 청동 파파이, 그림 1-2와 동일

 

그림 2의 청동으로 된 유물은 드네프르강 하류에서 발견된 유물로 기원전 4세기 유물이다.

2020.12.26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흑해의 전사] - 나무 위의 스키타이 신(神) 파파이(Papai)

 

나무 위의 스키타이 신(神) 파파이(Papai)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흑해 지역에서 발견되는 유물 가운데는 지팡이 끝에 꽂는 방울이 있다. 간두령이라고 하는데, 기원전 7세기부터 발견된다. 기원전 7세기 유물은 방울 끝에 새 혹은 동물문

eastsearoad.tistory.com

 

하지만 토제로 된 유물과 청동으로 된 유물이 같은 인물일 수 있을까? 파파이가 이렇게 많을 수 있을까?

 

필자는 시람코의 저서를 읽으면서 그림 1의 남성 인간형상물을 파파이로 생각할 수 있고, 그래서 동쪽 성 안에 ‘신전’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에 매우 놀랬다. 물론 유적에서 그리스 토기가 발견되기 때문에 헤로도투스의 기록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아직 소개하지 않았지만 이 주변에 거대한 성곽 유적이 16기나 더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 지역이 요새화 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라면, 동유럽의 다른 스텝지역보다는 더 특별한 지역일 수 있다.

그래도 너무 쉽게 러시아 연구자들에 비해서 우크라이나 연구자들은 쉽게, 비판없이 헤로도투스의 기록을 믿는게 아닐까?

 

만약 토제로 된 유물이 스키타이 사람들의 남성신이라고 만들었다고 해도 기원전 7세기 경과 기원전 5세기 유물은 다른 생각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벨스크 성곽이 기원전 7세기 경의 유적이라는 점에서 인간형상물도 그 시기의 유물이다. 헤로도투스가 말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유물로 선사시대 이래로 전해져 오는 조상신 개념일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보는 신화 속의 신과는 전혀 다른 이념일 수 있다. 다만 신의 이름은 참고할 수 있다.

 

 

참고문헌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Дараган М.Н., 2017, Городища-гиганты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в Украинской Лесостепи (особенности расположения и фортификации). Вводные замечания(다라간 2017, 우크라이나 삼림스템지역의 스키타이 시대 거대한 성곽배치의 특징)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헬온 도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0. 12. 18. 13:14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는 유물 속에 인물이 많이 숨어 있다. 평면판 속의 사람들, 입체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은 모두 남성이다. 그런데 여성도 발견되는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는 티아라를 쓰고 있는데, 끝이 뾰족하게 처리된 것이다. 양 손에 연꽃(왼손)과 새(오른손)를 들고 있다. 이 여성은 반지에 음각된 유물로, 도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림 1.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 출토된 반지

 

원통형 관의 끝이 뾰족하게 처리된 것은 페르시아의 티아라와 유사하다. 입체상 가운데 은제품으로 만들어진 남성상은 머리 모양으로 보아서 페르시아 남성으로 추측한다. 평면판 속의 인물가운데 페르시아 티아라를 쓰고 있는 남성(225)과 발견되었다. 그는 오른손에 막대기를 그리고 들고 있다. 같은 모자를 쓰고 있는 241, 254 남성은 너무 대충만들어져 뚜렷하지는 않지만 한손에만 꽃(연꽃)을 들고 있다. 비록 모자는 다르지만 꽃을 든 남성은 236, 238, 239, 242, 243, 244,246, 247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평면판 1

 

그림 3.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평면판 2

 

그림 4.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코로나를 쓴 남성

 

평면판에 표현된 인간형상물이지만 그림 2,3은 평면판에 음각한 것이고, 평면판을 잘라내서 표현한 인물상도 1점 발견되었다(그림4). 그는 역시 반지의 여성과 같은 모자를 쓰고, 왼손에는 꽃을 들고 있다. 발에는 신발을 신고 있는데, 걷고 있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그림 1의 반지속에 인물은 수염이 없고, 복장은 여성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평면판 속의 인물은 수염이 없는데, 수염없는 왕은 종종 다리우스 왕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그래서 다리우스 왕 중에 한명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석제 원통형 도장(석제도장은 그림 1의 상단 그림 참고)에 새겨진 이미지 가운데 비슷한 유물이 있다.

이 유물은 평면으로 된 말과 함께 짝일 가능성이 있다(제이말 1979).

 

아무다리야 유물 속에 여러 인물들은 불명확한 점이 많은데, 의복은 비슷한 경우가 많지만 머리모양이나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들은 표현이 비슷한 것과 다른 것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고대 여러 민족이 모자에 대한 관념이 아닐까?

 

그리고 연꽃 혹은 꽃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신에 대한 봉헌물을 바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이유로 아무다리야 퇴장지는 원래 어떤 신전 혹은 사원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Е.В. Зеймаль 1979,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제이말 1979, 아무다르리아 퇴장지: 전시도록, 에르미타주 박물관)

J. Curtis, N. Tallis. Forgotten empire: the world of ancient Persia (неопр.).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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