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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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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남쪽에 위치한 우라루투는 코카서스 북쪽에 있던 스키타이 세계와 앗시리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그루지아 국경인 예레반의 수도에는 예레부니와 테이시바이니 성곽이 남아 있고, 터키에는 반 호수 부근에 사르두리 II세의 비문이 발견된 성곽이 남아 있다. 우라르투의 수도였던 투쉬파 혹은 시비니 신의 사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투쉬파는 사르두리 II세 이전부터 중심지로 사용되었는데, 사르두르 I세(기원전 844-828년)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가 반 절벽의 서쪽기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아들인 Ishpuini(기원전 828-810년) 왕이 통치할때까지는 늘 앗시리아에 공격을 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철제품의 수준이 올라가면서 암벽을 파서 동굴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생기게 되었고, 요새를 만들 수 있었다. 앗시리아는 우라르투의 수도를 쉽게 공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곳에 우라루투가 수도를 삶은 이유를 환경적인 요인으로 삶는데, 아르메니아 고원은 대륙성기후로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데, 이곳은 겨울에도 그렇게 춥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천연요새의 역할을 했고, 시비니 신의 숭배가 반 암벽과 관련되어 있다는 추측도 있다.

 

사르두르 I세의 아들 Ishpuini 통치 이후 그의 아들 Menua(기원전 810~786년) 아래에서 집중적으로 개발되었다. Ishpuini는 우라르투의 신 칼디를 포함한 사원지를 건설했다. 당시에 동굴을 파고 왕실의 방도 만들어졌다. 여러 층의 건물이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모형화 한 청동유물이 발견되었다. 현재는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졌다(그림 1).

 

 

그림 1. 건물과 탑의 모형물, 청동제품, 탑의 높이는 16.5cm, 건물의 높이는 30.5cm

 

메뉴아는 투시파 주변에 물을 제공하기 위해서 수로를 70km 가량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 호수의 물은 염분이 많았기에 관개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수로는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메뉴아 이후에 Argishti I(기원전 786~764년)과 Sarduri II세가 통치하면서 우라루투는 전성기에 이르렀다. 아르기쉬티 I세와 사루두리 II세는 반 절벽의 다른 면에 자신의 연대기를 비문에 남겼다. 이 비문은 우라루투 설형문자가 남아 있는 가장 큰 것이다.

 

현재 터키 국경에 있는 투쉬파는 기원전 9세기부터 우라루투의 수도로 사용되었으나 요새를 짓기전에는 강력하지 못했고, 요새를 짓고 난 이후 아르기쉬티 I세 지배기 기원전 8세기 경부터 앗시리아를 막아내었다.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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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에 기원전 8세기경 성곽인 예레부니는 기원전 5~4세기까지도 사용되었다. 우라르트는 망하고 페르시아 사람들이 개축해서 사용했던 것이다. 페르시아 문화층에서는 은제 각배가 출토되었다.

 

그림 1. 예레부니 유적에서 출토된 아케메니드 왕조 시대의 각배

 

그러나 예리부니의 우라르트 시대의 문화층에서는 유물이 많지 않다. 가장 많은 것은 토기편인데, 사발과 쿱신이다.

 

유적에서는 포도주를 저장하던 붉은 방이 발견되었고, 땅에 포도주를 보관하던 토기 카라스를 땅에 뭍고 보관하던 것이 발견되었다. 용량을 알기 위한 기호가 표시되어 있다.

 

그림 2. 예레부니 유적의 포도주 저장방, 붉은 색

 

그림 3. 예레부니 유적의 포도주 저장용기, 카라스

 

그림 4. 카라스에 남아 있는 기호

 

이곳에서도 스키타이식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이웃한 테이시바이니 유적보다 늦은 시기의 것들이다. 이를 근거로 예레부니는 테이시바이니 유적보다 더 오랫동안 존속된 것으로 보았다.

 

참고문헌

Оганесян К.Л. Арин-берд. I. Архитектура Эребуни по материалам раскопок 1950-1959 гг// Изд-во АН Армянской ССР, 1961. — 116 с. —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раскопки в Армении, №9).(오가네샨 1961, 1950~1959년 발굴된 자료로 본 아린-베레드 I유적, 예레부니 건축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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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부의 우라르트 성곽인 테이시바이니에서는 스키타이 화살촉이 발견된다. 이 성은 스키타이 화살촉 뿐만 아니라 철제 무기 및 구슬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성벽에서 발견된 엄청난 숫자의 스키타이 화살촉으로 보아서 스키타이 사람들에 의해서 파괴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림 1.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출토된 스키타이 화살촉


비슷한 화살촉이 앗시리아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기원전 7~6세기 스키타이 화살촉이다. 토파흐 칼레, 앗시리아의 수도 아수르 등지에서 발견되어서 스키타이 화살촉을 사용했다.

그림 2. 테에시바이니 유적 스키타이 청동화살촉, 앗시리아에서 발견됨. 1,2,3-하이카베르드, 4-토파흐-칼레, 5,6-아슈르, 7,8-바비론, 9,10-타르스, 11,12-데르아르



처음에 앗시리아에서 이런 유물이 발견되었을 때 화살촉의 경부에 구부러진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방화범의 재료를 부착하는 장치로 설명했다. 하지만 보네트는 이러한 유형의 청동화살촉은 코카서스 부근에서 널리 사용된 것을 지적했다.

무구 중에는 왕의 이름이 있는 것도 발견되었는데 청동으로 된 찰갑이다. 아르기티치 I세라는 명칭이 씌여 있었다. 청동투구도 우라르트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림 3.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청동투구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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