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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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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1. 17. 11:05 스키타이 무기

고대 유라시아 초원 지역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스키타이 궁수였다. 그들은 페르시아 궁전의 벽화에 스키타이 사람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군인들과 기타 여러민족의 군인들 허리춤에서 발견될 만큼 강력한 무기였다. 페르시아 궁전의 묘사된 고리투스는 대략 75~100cm 정도로 길지 않다. 흔히들 스키타이 활(the Scythian bow’ 이라고 불리는 활은 나무와 힘줄로 만들어진 것으로 두 가지 소재를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복합 활이라고 불리는데, 그리스에서는 스키티쿠스 아르쿠스(Scythicus arcus)라고 불리는 존재였다. 스키타이 활이라고 알 수 있는 것은 고리투스 위로 튀어나온 구부러진 활의 끝이 돌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궁전묘사 뿐만 아니라 장식판의 스키타이 궁수들의 활도 끝이 구부러진 것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 1. 페르시아 궁전묘사, 고리투스

 

이 부분은 나무로 된 본체에 힘줄을 묶기 위한 장치인데, 이 부분 때문에 스키타이 활이 위대했다고 알려져 있다. 단순한 나무활이나 그냥 나무로 된 활에 힘줄을 뒤로 매단 것과는 달리 스키타이 활은 매우 강력했다. 때문에 스키타이 활을 당기기 위해서는 이 활이 없는 군대와 다른 훈련을 했다는 것은 다 아는 비밀이었고, 인접한 지역 지식인들은 이를 적어 놓았다.

 

그림 2. 쿨-오바 유적의 장식판, 스키타이 궁수

 

 

 페르시아 인들이 스키타이 궁수들이 수행한 훈련 때문에 그리스 군대를 막았다는 것을 아르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가 기록한 바 있다. 기원전 401년에 티그리스 강을 건너려는 그리스인들을 막은 것은 페르시아 궁수들이 강 반대편에서 티그리스 강을 향해 활을 쏘면서 좌절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물자료가 가장 잘 남아 있는 알타이의 무덤에서는 대체로 15~20개 가량의 화살이 한 무덤 안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파지리크 유적 2호에서는 279개의 화살이 한 통에서 발견되었다(루덴코 1953). 바르코바(2013)는 화살 쏘는 실험을 했다. 3분안에 화살 30개를 쏠 수 있고, 15분간 화살을 쏜다면 150개의 화살이 소비될 수 있다고 계산했다. 뭐 그러기 위해서는 15분간 쏠 수 있는 어깨의 힘이 필요하겠지만....

 

 스키타이 활은 기원전 4세기 이후 흉노에서 크게 개선되었다. 길이는 1.5m가 조금 넘었고, 당시 사용된 갑옷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나무로 만들던 활을 뼈나 뿔로된 판으로 보강했다. 활의 양쪽 끝에는 2개, 중앙에는 세 개를 덧대었는데, 접착제를 사용하거나 동물의 힘줄 혹은 자작나무 껍질로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활을 제작하는데 1년 이상이 걸린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합성 활은 큰 묶음으로 제작되었다(맥윈 1978).

 

활에 이용된 골판은 시베리아 투바의 아물루그 XXXI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기원후 2세기 유적으로 흉노시기의 유적이다.

 

그림 3. 아물루그 XXXI유적의 골판

 

참고문헌

E. McEwen, ‘Nomadic archery: some observations on composite bow design and construction’, Arts of the Eurasian Steppelands, ed. P. Denwood. London, 1978: 188–202.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0. 28. 08:15 고깔모자와 코트

 

그리스 토기, 암포라(손잡이가 상하로 달린 물병)에 그려진 스키타이 궁수와 hoplites이다. 호플리트는 창과 방패를 주로 사용하는 그리스 시민 군인이고, 투구와 갑옷을 입고 등장한다. 머리에 쓰고 있는 투구가 이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에르미타주 소장, 암포라, Munich 1410의 그림, 기원전 530~520년. 그는 주로 붉은 바탕에 검은 문양을 그린 사람이다. 검은문양이 유행하던 마지막 시기에 활동했고, 그 이후로 점차 붉은 문양으로 바뀌어 간다.

 

스키타이 궁수가 쓴 모자는 사이악스가 그린 모자와 비슷하게 중앙 부분이 급격히 좁아지면서 뽕긋 솟은 모자이다.

얼핏보면 이 그림은 호플리트와 스키타이 궁수가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스키타이 궁수를 호위하는 장면이다. 창을 든 그리스 군인은 스키타이 궁수를 향해 창을 던지는 장면이 아니다.

 

그리스 토기에 스키타이 궁수들이 왜 등장할까? 그리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4세기에 스키타이 궁수들이 아테네의 경찰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대부분 그리스 토기의 스키타이 궁수들을 경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그냥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암포라의 그림은 기원전 6세기의 것이다. 그리스 토기에 나타난 스키타이 궁수가 반드시 아테네의 경찰을 그린 것은 아니라는 연구자들도 있다. 또 스키타이 궁수가 아테네에 나타난 시점이 기록에 적힌 기원전 5세기 보다 빠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이들은 그리스 토기 화가들이 실제로 유라시아 초원 유적에서 발견되는 실제 스키타이 고리투스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상상해서 그린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아뭏튼 왜 그리스 토기에 스키타이 궁수가 나오는지 궁금증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약간 풀리기도 했다. 호플리트와 스키타이 궁수가 서로를 호위하는 장면도 어느정도 이해가 가지만..... 뭐 누가 알겠는가.

 

아뭏튼 필자의 관심은 그리스 토기 보다는 고깔모자이다. 이 외에도 그리스 토기에서 알 수 있는 스키타이 궁수의 모자가 더 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했던 스키타이 물건은 뽕긋 솟은 고깔모자와 고리투스였던 것은 틀림없다.

 

참고문헌

Ivantchik, Askold (1 December 2006). "'Scythian' Archers on Archaic Attic Vases: Problems of Interpretation". Ancient Civilizations from Scythia to Siberia.

Vos, M. F. (1963). Scythian Archers in Archaic Attic Vase-painting. J. B. Wolters.

Яценко С.А. 2006 : Костюм древней Евразии (ираноязычные народы). М.: 2006. 664 с. («Культура народов Востока»)(야센코 2006, 유라시아의 고대 의복)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서 발견된 남성상은 공통점이 있는데 한 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말을 탄 상태에서 활을 쏘고 있다는 점이다. 나무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벨트 장식 속의 남성만 말을 타고 있지 않다(그림 1).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1716년 가가린 수집

 

1859년 밀러의 발굴품으로 알려진 말탄 전사(그림 2)도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으로 등록된 유물이다. 그 외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벨트 장식에 여러 명의 남성이 나오는데 모두 멧돼지를 사냥하는 장면으로 말 위에서 활을 쏘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그림 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밀러의 발굴품

 

그림 3.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1716년 가가린 수집

 

그림 4.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1716년 가가린 수집

 

그림 5. a,b-그림 3, c,d-4의 말탄 활을 쏘는 전사

 

남성들은 1명을 제외하고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으며, 장발의 남성이다. 휴식을 하고 있는 남성이든, 멧돼지를 사냥하는 남성이든지 남성은 장발이고 코에 수염을 달고 있다.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을 연구한 자비투히나는 이 남성들의 얼굴이 유럽인도 아니고 완전한 몽골로이드도 아닌 혼합된 얼굴로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벨트를 만든 장인은 확실히 몽골로이드와 유럽인종을 구분해서 만들었다. 이것은 나무아래 쉬고 있는 3인의 모습에서 알 수 있는데, 이 여성은 둥근얼굴과 상대적으로 적은 찢어진 눈 덕분에 동양인의 모습을 표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여성이 쓰고 있는 모자는 파지리크 유적 2호분에서 그대로 확인되었고, 2호분의 여성미라는 몽골로이드, 남성미라는 유로포이드로 이미 밝혀진 바 있다(루덴코 1953).

 

자히투히나는 사냥하는 장면이 그려진 벨트의 연대를 기원전 5~4세기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이 남성들의 얼굴모습이 파지리크 유적 5호분에서 발견된 벽걸이 캐노피에서 본 남성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캐노피 속의 남성(그림 6-?)은 상대적으로 높은 코, 수염 등은 분명히 동양인의 얼굴모습은 아니지만 그가 착용하고 있는 무기 특히 고리트(화살통)과 말의 마구 등은 스키타이 문화의 것이었다. 이는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 벨트장식의 남성들도 마찬가지로 고리트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캐노피의 남성(그림 6-2)과 일맥상통한다.

 

그림 6. 파지리크 유적 5호분의 캐노피

 

파지리크 유적에서 남성은 매우 화려한 모자를 썼었다. 표트르 1세의 수집품이든지, 캐노피의 남성이든지 동양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남성(혼혈 혹은 유럽피언)은 1명을 제외하고는(그림 4-b,그림 3) 모자를 쓰지 않았다. 표트르 1세의 수집품으로 알려진 방형의 통에 그려진 전사 5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1716년 가가린의 수집품 가운데 황금나무(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인터넷사이트)

 

참고문헌

Завитухина М.П. 1978 : Коллекция Г.Ф. Миллера из Сибири — одно из древнейших археологических собраний России. // СГЭ. [ Вып. ] XLIII. Л.: 1978. C. 37-40(자비투히나 1978, 러시아 고고학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밀러의 시베리아 발굴품)

М.П. Завитухина Собрание М.П. Гагарина 1716 г. в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 АСГЭ. Вып. 18. Л.: 1977. С. 41-51 (자비투히나 1977,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표트르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https://www.hermitagemuseum.org/

 

Hermitage

 

www.hermitagemuseum.org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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