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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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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프르강의 지류인 보르스클라 강과 접한 벨스크 성곽은 전체 면적은 4021헥타르이다. 2번 동쪽 성은 첫 번째, 1번 서쪽 성이 두 번째로 만들어지고, 두 성이 합쳐진 것은 기원전 6세기 말~기원전 5세기 초인데, 볼쇼이 벨스크 성곽(그림 1-4)이라고 따로 부른다. 쿠즈민 성곽은 두 성이 합쳐진 뒤에 만들어졌는데 기원전 5~4세기에 만들어졌다. 이 성 전체를 벨스크 성곽이라고 하며 기원전 7세기부터 이곳에서는 사람이 살았다.

동쪽 성곽이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7세기경의 유물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이 시점이라고 추측하고, 서쪽 성곽은 기원전 6~5세기 유물이 발견되어서 서쪽 보다 늦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1. 벨스크 성곽

 

어제 15.4헥타르라고 한 것은 동벽과 북벽이 만나는 사이에 있는 3번인 쿠즈민 성곽의 크기이다. <정정합니다.~> 이 성곽의 면적은 20세기초 모스크바의 크기와 맞먹는다. 2017년 부터는 여름에 이 성곽 내에서 페스티발이 열린다고 한다. 1980년대 자료까지는 러시아어로 된 것이 많은데 그 이후 자료는 우크라이나어이다...T T. 이 성은 우크라이나의 자랑거리 중에 하나이다.

너무 큰데, 또 그에 비하면 정보가 러시아어로 된 것이 충분치 않아서 ,,, 뭣 부터해야 할지 모르겠다. 성 안에는 무덤도 있다.

 

성벽은 동쪽과 서쪽에 다른데, 동쪽은 성벽 앞에 해자가 있다. 해자는 성벽을 따라서 있는 구덩이다. 러시아에서는 환호와 해자를 통틀어 같은 용어를 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에는 환호라고 하고 성벽이 남아 있는 삼국시대에는 주로 해자라는 용어를 쓴다.

 

그림 2. 벨스크 성곽(위키페디아 참고)

 

동쪽 성벽에는 성벽위를 편평하게 다듬지 않고 비교적 뾰족하게 처리했고, 그 앞에는 수직기둥이 박혀 있었다. 성의 벽을 절개해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다. 동쪽성벽의 높이는 3~5m(지점에 따라서 다름), 깊이 1.6~3.5m, 너비는 6.3(상부)~24m(하단)이다. 루보틴 성곽은 성벽의 목축물이 남아 있었지만, 벨스크 성곽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단면과 여러 정황들로 만든 것이다.

 

그림 3. 벨스크 성곽의 동쪽벽 단면도

 

 

참고문헌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이제까지 기원전 7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도네츠 강 유역의 류보틴 성곽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했는데 비슷한 시기 혹은 기원전 7세기 말이 아닌 초반부터 세워진 성곽을 하나 더 발견했다.

 

드네프르강의 왼쪽 지류인 보르스클라 강 변에 위치한 기원전 7세기~기원전 3세기 성곽 유적인데, 동유럽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벨스크 성곽은 전체 면적이 15.4헥타르 이고 전체 벽의 길이가 33833m(약 34km)에 달한다. 동유럽에서 가장 큰 성곽 유적으로 20세기초에 발견되어 발굴되기 시작해서 지금도 발굴한다고 한다. 

 

이 거대한 성곽은 4개의 구조물이 함께 형성된 것이다(그림 1). 서쪽의 성곽(그림 1-1)이 따로 있고, 동쪽의 성곽(그림 1-2)도 별도로 존재하며, 북벽과 동벽이 마주하는 모서리에는 쿠제민 성곽(그림 1-3)이 있고, 이 세 개의 성곽을 연결하는 성벽이 하나로 합처서, 벨스크 성곽(그림 1-4)으로 구성되었다.

 

그림 1. 벨스크 성곽의 전체 평면도

 

그림 2. 벨스크 성곽, 구글 위성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벨스크 성곽은 구글지도에서 볼 수 있는데, 류보틴 성곽처럼 성의 벽면에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림1과 비교해서 보면 알 수 있다.

 

유적에서는 집 뿐만 아니라 청동기와 철기 제작장소가 발견되었고, 인접한 지역과 무역을 했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기원전 7세기말에 유일하게 성벽이 남아 있는 성곽이 류보틴이었다면 그 보다 더 오래된 기원전 7세기의 벨스크 성곽 유적은 그 당시에 성벽이 남아 있는 유적으로 알려졌다.

 

유적이 발견되었을 때 연구자들은 헤로도투스(4권, 108-109)가 말한 ‘헬론’을 연상했다. 헬론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쌓인 목조 도시로, 각 벽은 5.5km에 걸쳐 뻗어 있고 목조주택이 있고, 신전이 있는 성으로 설명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반대 의견도 있다. 헤로도투스가 묘사한 전체 성벽의 길이는 22~25km에 달하는데, 정보가 정확하지 않고 의심스럽다는 주장이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 А. Бельское городище скифской эпохи (город Гелон). К., 1987. (시람코 1987, 스키타이 시대의 벨스크 성곽)

Медведев А. П. 2002 Гелон Геродота: К проблеме соотношения античного нарратива и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их реалий (메드베제프, 2002, 헤로토투스의 헬론, 고대 신화기록과 고고학적 자료의 상관관계 문제에 대해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도네츠 강은 돈 강의 지류로 세베르스키도네츠 강이 공식적인 명칭이다. [세베르스키는 북쪽이라는 러시아어가 뒤에 도네츠 라는 명사가 오면서 형용사로 바뀐 것이다.]

도네츠 강 유역에는 현존하는 스키타이 성곽 중에 가장 오래된 루보틴 성곽이 있다. 성의 평면형태를 특정하게 규정할 수는 없지만(부정형에 가까운) 사면이 있고, 서와 남쪽에 문이 있으며, 성벽은 목재와 점토로 만들어졌고, 성벽 앞에는 환호(해자)시설이 있는 구조이다. 유적에는 목조 구조물이 많이 남아 있어서 성벽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안을 점토로 채워서 만들었다.

 

유적에는 문으로부터 뻗어나온 도로가 있었다는 것을 발굴로 확인할 수 있었다. 유적 내의 공간분할은 일정정도 규칙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은 땅을 파지 않은 것과 땅을 파서 지하 공간을 만든 집이 있다. 집 자체는 둘 다 지상위에 있기 때문에 구덩이를 파고 벽을 지하에 세우는 구조와는 다르다.

루보틴 유적이 기원전 7세기 말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이 유적에서 발견된 집은 그 시대의 스키타이 집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흑해지역에서 발견되는 무덤을 보면 같은 시대여도 무덤 구조가 다른 특징이 있는데, 집의 건축도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장담할 수는 없다. 어쨌든 남아 있는 유적이 루보틴 성곽 밖에 없음으로 그 외는 좀 상상하기 힘들다.

 

스키타이 집의 모습을 시대로 국한 하지 않고 전 시기를 통틀어서 살펴본다면 다양한 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원전 7세기 말 루보틴 성곽 유적 외에도 기원전 4세기 카멘스코예 성곽에도 남아 있었다. 유적에는 집 자리의 평면과 점토내에 짚을 섞은 건축자제가 유적에서 발견되어서 점토벽을 세운 모습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브릴류크(1989)가 뒤에 복원한 모습이 있다(그림 1-4).

 

두 유적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리사야 고라 유적에서는 집에 구덩이를 파고 2칸이 붙은 도 있다(그림 1-3).

 

이 외에도 바이슈테인 유적에서는 집의 모형이 달린 마차모양의 모형(그림 1-1,2)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집의 구조는 유라시아 초원 지역에 기원전 7~5세기 사이에 아주 널리 퍼져 있던 집의 모양이다.

 

그림 1. 스키타이 문화의 다양한 집 모습, 1,2-바인슈테인 유적 출토, 3-리사야 고라 유적, 4~6: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4: 복원도, 5,6-집의 평면도)

 

헤로도투스는 스키타이 사람들이 집 없이 마차를 집을 삼아서 초원을 누비고 다녔다고 했다.

그가 기록을 남길 때 모든 사실을 보고 직접확인한 것은 아니었지 않을까?

아마 그는 집을 실고 다니는 마차 일종의 캠핑카는 보았으나, 스키타이 사람들의 성곽과 집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참고문헌

Гаврилюк Н.А. 1989, Домашнее производство и быт степных скифов, Наукова Думка, 1989. — 112 с (가브릴류크 1989, 초원 스키타이 사람들의 가내공업과 관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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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흑해과 인접한 지역에서 성채의 모습을 알 수 있고 가장 이른 시기의 성곽 유적으로 알려진 곳은 루보틴 유적이다.

유적의 연대는 탄소연대측정을 못한 경우 혹은 했다고 하더라도 유물과 비교해서 확인한다.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그 연대 판단의 근거가 되는 유물은 화살촉이다.

 

앞에서 흑해 지역의 시대별 스키타이 문화의 화살촉 변화를 설명한 바 있다(아래 포스팅). 기원전 7~4세기까지 가장 뚜렷한 점은 화살촉 신부의 단면이었다. 단면의 모양이 달라지는 것은 기술적인 면과 관련되어 있다. 기원전 7세기의 화살촉은 양익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화살촉으로 날개가 양쪽으로만 있는 것이다. 기원전 6세기 이후 부터는 삼익형으로 볼 수 있는 화살촉(그림 1-5~9, 13~19)과 단면이 삼각형인(그림 1-4,10~12) 유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양익형인 화살촉이 있기는 그 중에서 자루끼우는 부분이 없어진 유물(그림 1-3)은 기원전 7세기 유물이 아니라고 한다. 이른 유물과 후대의 유물이 같이 공존하는데, 한 세기는 백년이라는 시간이어서 이 유적을 기원전 7세기라고 못 박기에는 후대의 유물들이 더 많다.

이런 연유로 기원전 7세기 후반(혹은 마지막)에 유적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2021.08.11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성곽, 마을, 생산 유적 등] - 돈 강 유역의 스키타이 성곽에서 나온 화살촉

 

삼익형인 화살촉과 단면이 단순히 삼각형인 것은 화살촉의 몸통 형태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전자는 중앙의 자루끼우는 부분에서 날개 부분이 튀어나오도록 부착된 것이다. 자루끼우는 부분이 숨어 있지 않고 나와 있다. 후자는 자루끼우는 부분이 따로 나오지 않고 삼각형 원뿔모양의 화살촉에 자루를 끼우도록 된 것이다. 청동이라서 철제 보다는 타격력에 차이는 있겠지만, 300년 이상 만들어썼다면 나름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철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 유물은 무기류는 화살촉만 발견되었고 나머지는 장신구류이다. 사실 유물 가운데 많은 부분은 기능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고리는 팔찌, 반지, 귀걸이 등일 가능성이 많지만 그 외에는 단순히 청동유물만으로 용도가 불분명하고 다른 소재(가죽, 직물)와 함께 어떤 기능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림 1. 루보틴 성곽의 청동제품

 

그래서 중요한 것은 청동과 철을 생산한 흔적인데, 이 유적에는 철을 생산한 노와 송풍관, 많은 철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А., Люботинское городище. Сборник научных трудов, Харьков: Регион-Информ, 1998. - 184 с (시람코, 1998, 류보틴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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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앞에서 이미 포스팅한 바와 같이 철기나 청동제품을 생산도 했지만 농경과 가축 사육(유목적 목축)이 이루어졌던 흔적이 있다.

 

농경구로 볼 수 있는 것은 철제와 골제 쟁기 및 철제 수확구(그림 1-12)가 있다. 유적에서는 체리씨와 사과씨도 발견되었는데, 종류가 이 지역에서 재배된 원산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곳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사람들은 밀, 호밀, 보리, 완두콩, 기장, 귀리, 콩을 재배했던 것ㅇ로 알려졌다. 곡물을 분쇄하기 위한 갈판(그림 2) 및 좀 더 가늘게 갈기 위해서 금속제 막대기(그림 1-11)도 사용했다. 곡물을 말리기 위한 장소도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1. 루보틴 성곽의 철제도구, 1: 도끼, 2-톱 편, 3-마치, 4-천공도구, 5,10-송곳, 6-끌개편, 7-송곳(손잡이가 있는)의 날 부분, 8,9-끌, 11-공이, 12-낫?

 

그림 2. 루보틴 성곽의 석제 갈판

 

도네츠 강 유역이 위치한 곳은 남쪽의 스텝과 북쪽의 삼림지대가 혼합된 곳으로 산림-스텦지역으로 당시에 목축하기에 유리했던 환경이다. 소, 작은 굽동물, 말, 돼지, 개, 당나귀(동물뼈 출토) 등을 길렀고 야생동물도 사냥했다.

유적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철제품은 끝이 뾰족한 직선 혹은 굽은 송곳류와 칼인데, 모피가공과 관련된 도구이다(그림 3). 모피가 주요한 교역품이었던 것인데, 주로 남성이 모피와 가죽 생산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신발 등도 제작했고, 마구 및 무기를 제작했다.

 

그림 3. 루보틴 성곽의 모피가 공구류, 철제 칼과 송곳

 

유적에서는 다양한 토제 방추차(그림 4)가 출토되었는데, 실을 직접 뽑았고 직물을 짰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일은 여성들이 담당하였을 것이라고 시람코는 판단했다.

 

 

그림 4. 루보틴 성곽의 토제 방추차

 

흑해지역 스키타이 사람들은 생산 및 무역을 바탕으로 살았다. 그 생살활동은 농경, 유목적목축, 철과 청동 제작, 모피 및 가죽제품 제작 등 이다.  무덤만 보아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А., Люботинское городище. Сборник научных трудов, Харьков: Регион-Информ, 1998. - 184 с (시람코, 1998, 류보틴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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