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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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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눈길끄는 이야기가 없는 이 공간에서 오늘은 약간 흥미로운 유적을 소개드리고자 한다.

필자가 지난 6월에 답사 다녀온 박물관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다.

 

2019/06/24 - [세계의 박물관/중국의 박물관] - 합민망합 유적(哈民忙哈) 박물관

 

합민망합 유적(哈民忙哈) 박물관

올해의 첫 번째 답사를 다녀오고, 두 번째 답사를 준비하면서, 일주일도 안된 기억이 가물해진다. 첫 번째 답사는 주로 중국의 몽골지역인 내몽골지역이었다. 꼭 보고 싶은 유적의 유물이 오늘 소개할 곳이다. 왜..

eastsearoad.tistory.com

 

사실 필자가 앞으로 홍산문화 옥기와 관련해서 많이 자료를 활용할 것인데,

중국 내몽골 통요부근에 있는 하민망합 유적이다.

 

(아래 구글 지도를 클릭하시면, 박물관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 유적 위에 박물관을 지었음으로 그 곳이 유적의 위치도 된다. 구글지도와 포토 기능 너무 좋다....ㅋㅋ, 아래에 붉은 워터마크 표시가 박물관의 입구이다.)

 

https://www.google.com/maps/place/43%C2%B058'45.7%22N+122%C2%B012'59.7%22E/@43.9805481,122.2100397,2115m/data=!3m1!1e3!4m5!3m4!1s0x0:0x0!8m2!3d43.9793694!4d122.2165833

 

 

43°58'45.7"N 122°12'59.7"E

102 Xiang Dao, Keerqinzuoyizhong Qi, Tongliao Shi, Neimenggu Zizhiqu, 중국

www.google.com

이 유적은 5년에 걸쳐서 주거지 78기와 무덤 14기를 발굴했다 한다.

필자가 이 유적에 대한 분석을 끝낸 건 아니지만, 아는 한에서 설명하면

 

유적 전체 분포도

 

 

이 유적은 ‘홍산문화의 주거지+홍산문화에서 볼 수 없었던 토기+홍산문화와 비슷한 옥기+그 외 홍산문화와 다른 석기’로 이해된다. 연대는 5500~5000년 전에 해당되며, 홍산문화의 가장 늦은 시기인 5기(5000~4400년 전, 김재윤 2019)보다 빠르다.

당연히 앞으로의 논점은 이 유적이 홍산문화의 것인지 아닌지. 혹은 홍산문화 자체에 대한 검토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 유적에는 40호 주거지 안에 사람이 98기가 들어간 채로 발굴되었다.

98기는 시신이 완전히 사지가 굽어진 것이다. 사후강직이 일어나기 전에 누군가 98기의 시신을 굽혀서 한 주거지에 넣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우연히 이렇게 한 건 아닐 것이다. 집터를 무덤으로 사용한 것이다.

책에는 전염병이 가능성이 제기 되었다(아래참고문헌). 이 유적에는 여러 집터에 인골이 묻혀 있는데, 40호를 제외하고 6인, 17인, 22인 등이 묻힌 집터도 있다. 무덤에 인골을 집어 넣은 것도 의도적이었고, 집에 불낸 것도 의도적이다. 불난 집은 12채이다. 불난 집 모두가 무덤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보고서가 완간 된건 아닌데,, 하단에 소개해 둘 책으로만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완전히 보고서 나오기 전에 이런 책이 나온 거 보면....이걸로 끝내려는 생각이 있는 것도 같다....)

 

40호 집터 안의 98인이 확인된 정황.
37호에는 22인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화재난 주거지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집터의 가장 하단에 남아 있는 것이 집을 지었던 목재의 흔적이다. 

 

32호는 불은 났는데, 인골을 뭍고 불을 낸건 아니다. 무덤으로 쓰지 않았다. 그러나 불나면서 죽은 사람은 확인되었다.

 

아마 여러방면에 학자들이 연구하면 재밌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같이 유물과 유적중심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보면, 한 가지 더 떠오르는 생각.

 

신석기시대 늦은 시기로 갈수록 무덤과 집은 구분된다(김재윤 2017).

즉 이 단계는 이미 무덤이 마을유적과는 별도로 확인됨으로 이런 현상은 더욱 이래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통요(通遼)는 그간 유적이 많지 않아서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는데....

너무 좋은 유적이 중국에서 보고되고 있다.

너무 좋은? 연구하기에 좋은....슬슬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참고문헌

內蒙古文物考古硏究所, 香港中文大壑中國考古藝術硏究中心, 2018, 『哈民玉器研究』, 中國書房

김재윤 2016, 5000B.P.이후 평저토기문화권 동부지역의 무덤으로 전용된 주거지에 대한 이해, 한국신석기연구

김재윤 2019,  「홍산문화의 편년에 대한 검토-‘압인之자문토기’를 중심으로」, 『고고학』, 18-2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중국에서는 신강의 청동기시대 이전을 「석기시대」라는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이 지역의 세석기문화는 중국 세석기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한다. 특히 감숙성과 녕하 지역의 신석기문화는 토기가 상당히 발달한 문화인데, 만약 신강지역의 세석기가 그 지역에서 기원했다면, 그 지역 토기양상이 신강지역에서 파악되지 않는 점은 그들 연구의 모순이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자국중심의 연구관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지역에서 세석기가 늦게까지 존재한다는 이유로 단순히 석기시대개념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스티- 나림 유적에서는 160,000여점의 골각기와 석기가 출토되었다. 이를 「석기시대」로 단순화 할 수 있을까? 중국 신강성과 같은 문화권을 이룬 카자흐스탄, 몽골, 시베리아 학계에서는 신석기시대 개념을 사용한다. 즉 이 지역은 4500년 전부터 석기양상이나 유사한 것으로 파악되나 국가 별로로 연구되면서 시대개념에 차이가 있다. 문화권별로 연구되었다면 좀 더 적합한 개념에 접근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가 동아시아 신석기시대의 개념을 토기사용이 빈번하지 않는 중앙아시아와 비교하면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한국 및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신석기시대는 토기 등장을 기준으로 한다. 신석기시대는 러복(J.Lubbok)(1865)이 작물재배, 동물길들이기, 토기발명을 시대개념으로 규정하고, 이를 고든 차일드(V. Gordon Childe)는 농경을 기본으로 한 ‘신석기혁명’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시베리아 및 극동의 신석기시대를 조사한 오클라드니코프는 고든 차일드의 신석기혁명이라는 개념이 동아시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최근 전통적인 신석기시대 개념을 반박하는 주장이 좀 더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토기의 발생시기는 후기 구석기시대이고 동아시아에서부터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자료로서 13000년 이상 올라가는 유적이 있는 곳은 아무르강 하류, 일본, 중국(그림15)등이고, 17000년 전 홀로세 이전부터 동아시아유적에서 출토된 예도 있다. 기원지는 새로운 발굴로 바뀔 수 있지만, 신석기시대의 기준이 된 홀로세(전신세)이후에 토기가 발명된 것이 아니라 이미 플라이스토세의 사냥채집민(후기구석기인)들에 의한 것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토기가 모든 지역에서 균일한 시점에 발생되지 않았으며, 신석기시대 개념의 기준이 된 유럽 및 근동 보다 오히려 동아시아에서 빨리 토기가 발명되었다는 점이다(그림15).

 

그림15. 토기발생지역비교(P.Jordan, M. Zvelebil 2010재인용)(김재윤 2019)

 

 따라서 토기등장을 기준으로 한 신석기시대 개념은 유럽, 근동, 중앙아시아 등과도 다른 동아시아 특유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카자흐스탄 동부, 중국신강, 몽골의 4500년 전 지역은 토기 발생 혹은 토기사용을 근거로 한 동아시아의 신석기시대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중국 신강지역이 동북아시아와는 다른 선사문화권임을 증명한다.

우스티-나림유적에서 보이는 유물의 양상은 토기사용이 그렇게 빈번하지 않았거나 토기를 대신하는 다른 저장도구 혹은 조리도구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동아시아 선사시대 연구에서 토기는 시대 및 시기구분, 지역성 등 모든 연구의 기준이 되고 있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이 점이 통하지 않고, 오히려 석기양상이 이 지역의 특징을 대변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본고의 연구대상 시대 이후에는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에도 주요한 유적의 성격은 무덤이라는 점에서 의례중심의 사회이다. 또한 동아시아보다 일찍 금속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청동기시대 카라숙문화에서 본격적으로 청동검이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세 번에 걸쳐 제국을 형성하지만 근대 중국의 대포에 의해서 제국이 굴복되었다는 점은 곧 무기로 인해서 사회가 변화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조합식석인검과 조합식검은 이 사회를 대변하는 유물 중에 하나는 무기로 볼 수 있다. 이후의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 스키타이 문화권 등으로 이어지는 문화에서 청동검이 등장하기 이전에 특징적인 유물로서 유목사회의 연속성이 무기에서도 관찰된다고 볼 수 있다.

조합식석인검과 조합식석검의 분포범위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연구된 바가 없다. 시베리아의 세로보문화 및 글라스코보문화에서 확인되는 조합식검은 가장 동쪽 분포범위가 요서지역의 소하연문화까지 확인된다(김재윤 2018b). 이 문화의 조합식검도 양면떼기 한 석기를 끼워 넣었다.

 

 따라서 중국 신강의 석기시대라고 불리는 시대는 4500년 전께 동아시아보다는 검의 형태를 갖춘 유물이 일찍 확인되고, 석기와 골각기가 주된 유물이며, 토기가 주요하게 사용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 동북아시아 신석기시대 개념과 맞지 않고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중국 내의 문화보다는 오히려 인접한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유라시아 초원사회의 개념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김재윤(2019)에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앞서 살핀 지역에서 신석기시대의 시작연대는 각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표1). 그런데 중국 신강성과 인접한 지역에서 공통적인 문화양상을 보이는 시점은 4500년 전부터이다(그림12).

 

표1. 각 지역의 신석기문화(현재까지 알려진 이 지역의 신석기문화)

중국 신강 3유형과 몽골 1단계는 5500년 전 께 해당되는데, 원통형 및 원추형 석인석핵이 출토된다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내용이 빈약하며, 각 지역에서 뒤를 잇고 있는 신강 4유형, 몽골 2단계의 유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5500년 전께는 뚜렷한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강 4유형이 되면 카자흐스탄 동부의 우스티-나림 문화와 몽골의 신석기시대 2단계는 아주 유사한 유물조합을 보인다(그림12). 원통형(그림12-2,5)과 원뿔형 석인석핵(그림11-1,4), 석핵형 긁개(그림12-3,13)는 이들 지역에서 모두 확인된다.

시묘노프는 원통형과 원뿔형 석인석핵은 규조암을 눌러떼기 방법으로 석인을 잘라내는 가운데 생기는 것으로 구석기시대에는 부정형이다가 신석기시대가 되면서 고착되는 것으로 보았다Семенов С.А. 1968). 끝이 둥글게 처리된 긁개는 석인기법을 이용한 석기로서 신강의 4유형(그림12-11,12)과 우스티-나림(그림12-10) 문화, 몽골 2단계(그림12-13), 3단계에서 동일하게 확인된다. 그 외에 석도는 세 지역에서 확인되는데, 인부가 직인으로 ‘ㄱ자 형 석도(그림12-16,18,22) 및 반타원형에 가까운 석도(그림12-15,19)가 우스티-나림과 신강 4유형, 몽골 3단계에서 확인된다. 마연된 어망추(그림 11-23,24)와 장타원형의 석인 제작도구(그림12-25,28)는 우스티-나림문화과 신강 4유형에서 같은 형태의 것이 각 지역에 출토되었다. 우스티-나림문화와 몽골에서는 유사한 타제 석부(그림12-29,30)가 확인되며, 몽골과 신강에서는 마제 공이(그림12-40,42)도 출토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는 모두 켈테미나르문화의 흔적이 확인된다. 석인 가운데 한쪽변만 잔손질해서 다른 쪽 보다 길게 처리한 뚜르개(그림12-33)는 우스티-나림문화(그림12-36), 신강, 몽골(그림12-41) 모두에서 확인된다. 또한 켈테미나르문화의 석촉(그림12-33)도 신강 4유형(그림12-36)에서 보인다. 평면형태 사다리꼴인 켈테미나르문화와 유사한 형식의 마제석부가 신강(그림12-40), 몽골(그림12-42)에서 출토되었다.

한편 바이칼 유역의 석기는 타제석창(그림12-45)과 유경식 석촉(그림12-46,47)이 신강 유역(그림12-43,44)에서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우스티-나림문화에서는 시베리아에서 가져온 석재로 제작된 석인석핵 및 골각기 가운데 낚시바늘, 납작한 석기, 조합식검이 시베리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Ошибкина С.В.(ред)., 1996,)

또한 몽골에서는 바이칼 유역의 토기 및 조합식검이 바로 북쪽에 위치한 바이칼 지역에서 영향을 받았다(Новгородова Э.А.,1989)

따라서 카자흐스탄 동부~신강~몽골은 석기양상으로 보아서 한 문화권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시점은 4500년 전 부터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몽골, 카자흐스탄 동부, 신강 지역에서 좀 더 이른 시기의 유적이 확인된다면 그 시기는 더 빠를 수도 있다. 또한 이 지역은 바이칼 유역 및 카자흐스탄 동부보다 서쪽인 켈테미나르문화와의 관련성도 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림12).

그림12. 4500년 전 카자흐스탄 동부~신강~몽골 및 관련된 지역의 석기양상

필자가 이 지역을 고고문화보다 좀 더 큰 의미인 문화권으로 설정한 것은 주거양상 및 토기 때문이다. 토기가 많지는 않지만, 지역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스티-나림문화에서는 시베리아 신석기토기와 인접한 켈테미나르문화의 토기가 확인된다(Ошибкина С.В.(ред)., 1996). 신강 지역은 시베리아 토기에 대한 언급은 없고 채색토기가 출토되며(伊第利斯·阿不都热苏勒,1993), 몽골 3단계에도 채색토기(그림7-54~58), 시베리아 토기(그림7-59~65)가 있다. 만약 신강 4유형에 망상문 토기, 첨저토기 등 시베리아토기가 확인되었다면 몽골 3단계와 이 지역이 켈테미나르문화의 영향을 받은 카자흐스탄 동부에 비해서는 더 유사한 지역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주거양상은 카자흐스탄의 켈테미나르문화(그림4) 및 우스티-나림문화가 텐트형주거식(Ошибкина С.В.(ред)., 1996)인 것에 비해서 주거지가 확인된 몽골은 수혈식(그림7-5)이다. 즉 석기양상은 같은 문화권으로 보이지만, 주거양상이나 토기양상에서는 신강지역과 몽골이 더 관련성이 깊다.

 

참고문헌

Семенов С.А. 1968, Развитие техники в каменном веке.(Ленинград:НАУКА, 1968). pp. 46~51.

Ошибкина С.В.(ред)., 1996, Неолит Северной Евразии, Москва, НАУКАIbid. pp.130.

Новгородова Э.А.,1989,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осква:НАУКА, pp. 70~73.

Ошибкина С.В.(ред)., 1996, Неолит Северной Евразии, Москва, НАУКА Ibid. pp.130.

伊第利斯·阿不都热苏勒,1993, 「新疆地区细石器遗存」.『新疆文物』, 4期, pp.15~59.,宋亦箫, 2010, 「新疆石器时代考古文化探論」, 『西部考古』, 第4輯,pp.4~9.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바이칼 유역의 신석기시대는 대체로 7000 년 전~6000년 전(Мамонова Н.Н., Сулержицкий Л.Д. 1986)의 키토이 문화부터, 5200~4700년 전(Горюнова О.И., 2002) 이사코보 문화, 5000~4500년 전(김재윤, 2018a) 세로보 문화로 변화된다. 각각 문화의 토기와 석기양상(그림 9)에 차이가 있지만, 연속적으로 확인되는 유물은 골제와 석제를 결합해서 제작한 조합식검(그림 10,11)이다.

 

그림9 . 바이칼유역의 신석기문화 유물(김재윤 2018b 재편집)(키토이문화의 유물(1:키토이 무덤 비트코프스키 1호, 2~7,14:키토이 무덤 비트코브스키 발굴 6호, 15, 22: 치클로드롬 1950년 10호;                                                                                                                                 이사코보문화의 유물(16: 포노모레보 11호, 17·18: 포노마레보 10호, 19: 포노마레보 12호, 29: 포노마레보 8호);                                                세로보문화의 유물(24~27: 포노마레보 7호, 28: 세레드키노 1호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중국 신강성에서 확인되는 석촉과 석창 가운데 세로보 문화와 관련성이 있는 유물도 보인다(그림12). 또한 몽골이나 카자흐스탄에서 확인되는 시베리아의 망상문 혹은 격자문이 남아 있는 토기는 키토이문화, 이사코보문화, 세로보 문화에서 모두 확인된다(김재윤, 2018b).

세로보 문화는 앞선 문화에 비해선 토기가 좀 더 많이 확인된다. 동체부가 둥글고, 구연부로 올라갈수록 축약되었다가 다시 외반되며, 저부는 원저이다. 파수가 수직으로 구연부와 저부 부근에 달리는 것도 있다. 토기 기면에는 타날문 혹은 그물흔적을 지우고 정면을 해서 매끈하게 처리하였다. 문양에도 다치구를 이용해서 눌러서 시문한 것(그림9-22), 침선문(그림9-21), 구순각목문(그림9-20) 등이 있다. 그 중 침선문 토기는 구연부가 외반하면서 횡주어골문이 시문되었다.

석창은 전면이 타제로 제작된 것이다. 좌우 대칭이며, 세장한 능형이나 삼각형의 형태를 띠고, 횡단면은 대체로 렌즈 모양이다(그림9-28). 인부는 가장자리에 형성되었는데, 잔손질되었다. 창의 용도 뿐만 아니라 칼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석촉은 경부의 모양에 따라서 오목하게 들어가 홈을 이루거나, 다른 하나는 일단경식(그림9-24,25)으로 구분된다. 이사코보 문화에 비해서 슴베가 있는 것이 양이 좀 더 많으며, 석촉의 무게가 크고 무겁다.

세로보문화는 시묘노보, 세로보 유적에서 연대측정 되었는데 대략 5000~4700 년 전에 존재했다(김재윤, 2018a).

조합식 검은 키토이문화(그림 10-1~8), 이사코보문화(그림10-9~16), 세로보문화(그림11)에서 모두 확인된다. 키토이문화의 조합식검은 양면을 떼어낸 석기를 골제와 조합된 조합식검(그림10-1~8)도 출토된다. 이사코보문화에서는 조합식검(그림10-9~12,16)뿐만 아니라 구부러진 뼈를 이용한 조합식도(그림10-13~15)도 확인되되는데, 앞선 키토이문화에서는 볼 수 없었다.

그림 10. 키토이문화와 이사코보문화의 조합식검(키토이문화(1~4: 라스푸티노 5,6: 우스티-벨라야 69-4호, 7·8: 치클로드롬 48-3호 ;                     이사코보문화(9: 브랏스키ㅣ 카멘, 10·12·15: 포노마레보 10호, 11: 샤먼 ,13: 샤먼 3, 14: 베르홀렌스크, 16: 베르홀렌스크 30-4호)(김재윤 2019)

 

참고문헌

 

Мамонова Н.Н., Сулержицкий Л.Д. 1986, “Возраст некоторых неолитических и ненеолитических погребений Прибайкалья по радиоуглеродным данным”,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и этнографические исследования в Восточной Сибири(итоги и перспективы), pp. 19-30.

Горюнова О.И., 2002, Древние погребения могильник Прибайкалья, Иркутск: Издательство Иркут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ен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 pp.14.

김재윤, 2018a, 「요서지역 소하연문화의 재검토」, 『한국상고사학보』, 99호, pp.34~35.

김재윤, 2018b, 「제2장 신석기시대」, 『북방고고학개론』,(재)중앙문화재연구원, pp.62~88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앞서서 중국 신강성의 4500년 전 석기시대문화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중국 신강성과 바로 인접한 카자흐스탄의 동부지역과 그에 인접한 문화를 살펴보았다.

2019/07/03 - [교과서 밖의 역사:유라시아선사시대/신석기시대] - 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의 신석기문화비교1

 

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의 신석기문화비교1

필자가 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로 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인접한 카자흐스탄과 몽골의 신석기시대와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강성의 천산산맥은 동서방향 보다는 약간 틀어져서 비스듬하게 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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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 신석기문화비교2

앞서서 환단고기역주본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중국신강성의 신석기문화에 대해서 설명한바 있다. (앞선 포스팅 참고) 2017/12/20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환국과 신강고고학 자료] - 환국과 신강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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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2 - [교과서 밖의 역사:유라시아선사시대/신석기시대] - 카자흐스탄 동부의 신석기문화

 

카자흐스탄 동부의 신석기문화

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문화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인접한 지역의 자료를 비교하고 있다. 우선 살핀 것은 바로 인접했지는 않았지만, 오늘 살펴볼 카자흐스탄 동부지역과 바로 인접한 지역의 문화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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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신강성의 오른쪽은 몽골과도 접하고 있다.

 

몽골은 지리적으로 바이칼 유역과 가까워 이 지역의 신석기문화와 관련성이 많다(Окладников А.П., 1964,.)

몽골의 신석기시대는 대체로 2~3단계로 구분되는데, 1단계는 기원전 4천년기(6000~5000년 전), 2단계는 기원전 3천년기(5000~4000년 전), 3단계를 기원전 2천년기(4000~3000년 전)로 구분하는 의견(도르지)과 2단계의 문화가 순동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계속된다는 의견(Новгородова Э.А.,1989)으로 구분된다.

1단계는 석기제작소와 주거지가 확인된 쏠론케르 쏘몬 유적이 있다. 원추형의 석인석핵(그림7-2,3), 석핵형 긁개(그림7-1), 조합식검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첨저의 토기도 확인되었다.

2단계는 탐차그-불락유적은 주거유적(그림7-5~9)으로 원뿔형태의 석인석핵(그림7-15), 뚜르개(그림7-26,27), 긁개, 한쪽변만 잔손질 된 세석인석기(그림7-20), 조합식석인검 (그림7-25)등이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골각제인 화살촉과 송곳니로 제작된 장신구 등도 주거지 바닥에서 여러 점이 함께 출토되었다. 주거지 바닥에서는 무덤 4기(그림7-6~7)가 확인되었는데, 피장자가 앉은 자세로 다리를 묶은 채로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 유적을 기준으로 탐차그-불락 문화가 설정되었다. 듀나-2 유적에서도 유사한 유물양상이 확인되었다. 타제석도(그림7-34,36), 타제석부(그림7-37), 마제석부(그림7-38)등이 있다.

3단계는 사라바크-우스 유적의 상층이 대표적인데, 탐차그-불락문화의 유물과 거의 유사하다. 이 유적은 두 층위로 나눠지는데, 아래층은 원추형(그림7-40~42)과 원통형 석인석핵, 뚜르개, 끝이 둥글게 처리된 긁개(그림7-43~45), ㄱ자형으로 처리된 타제석도(그림7-52)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기하학적인 무늬가 침선된 그물문양(그림7-59, 50), 압인(그림7-63~65) 등이 확인되었다. 당시 아래층은 바이칼 유역의 이사코보문화(5000~4700B.P.)와 비교되어서(Окладников А.П., 1964), 2단계에 해당한다.

그림7 . 몽골의 신석기문화유물((1~4: 쏠론케르 쏘몬, 5~9,15~20,23, 25~30: 탐차크-불락유적 ,11,12,21,24,31,33,34,37~39: 듀나-II, 40~52: 사바라크-우수, 53~62: 투그르인-쉬레트, 63~65: 케룰렌강) (노보고르도바 1989 재편집)

상층에서는 석기는 하층과 유사한 바이칼 유역의 토기 뿐만 아니라 채색토기(그림7-54~58)가 확인되면서 3단계로 보았다. 뚜그르기인-쉬레트 유적에서도 비슷한 석기양상(그림7-53)과 채색토기가 확인되었다.

그런데 2,3 단계 유물은 3단계의 채색토기를 제외하고는 석기 및 토기양상이 거의 유사하다(그림7-54~58). 뚜그르기인-쉬레트 유적에서 채색토기가 출토되면서 사바라크-우스 유적의 상층과 같은 3단계로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쉬레트 지역의 듀나-II유적의 출토품이 우스티-나림유적과 비슷하다고 연구되었다(Новгородова Э.А.,1989)(김재윤 2019).

그림8 . 바이칼유역과 몽골의 신석기시대 유적 위치(1: 브랏스키 카멘, 2: 라스푸티노, 3:세로보유적, 4: 베르홀렌스크, 5: 포노마레보, 6: 키토이, 7: 치콜로드롬, 8 뚜그레인-쉬레트, 9: 사바라크-우수, 10: 듀나-II, 11: 쏠로케르-소몬, 12: 탐차크-불락유적(김재윤 2019)

 

 

 

 

참고문헌

Окладников А.П., 1964, Первоытная Монглия-К впросы древнейшеи история Монголя, УБ. pp.39-40

Новгородова Э.А.,1989,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осква:НАУКА, pp.63.

Окладников А.П., 1964, Первоытная Монглия-К впросы древнейшеи история Монголя, УБ.

Новгородова Э.А.,1989,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осква:НАУКА, p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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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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