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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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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프르강 유역에서 가장 큰 무덤중에 하나인 가이모노바 유적은 하나의 봉분 아래에 4개의 무덤방이 설치된 것이다. 1번과 2번은 땅을 파고 무덤방을 설치한 것이고 3번과 4번은 무덤봉분을 파서 만든 무덤이다.

 

특히 2번 무덤방은 땅을 가장 깊게 파고 설치한 곳이다. 무덤평면도에서 2번 무덤방을 중심으로 생토층이 표시되어 있는데, 인간이 손대지 않은 땅을 표시한 것이다(그림 1). 2번 무덤방의 깊이는 7m 정도이다.

 

그림 1. 가이모노바 유적의 평면도

 

2번 무덤방의 중심무덤방은 매우 특이한데 입구는 돌로 막았으며 수직으로 파고들어간 무덤방 아래에 매장주체부를 설치한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 파고 들어가고 다시 옆으로 굴을 파서 무덤을 만든 구조이다(그림 2-라). 무덤방 입구아래에 무덤을 설치하지 않고 굴을 파서 만든 구조는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무덤방의 평면 모습은 다르지만 입구 아래에 바로 무덤방을 만들지 않은 것은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무덤의 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 2. 가이모노바 유적의 2번 무덤방 평면도(가)와 단면도(나~다)(필자편집), 나: 평면도의 I단면, 다: 평면도 II단면, 라: 평면도의 III단면

 

2번 무덤방 입구의 서쪽에는 가짜 입구와 말무덤이 설치되어 있다. 말 무덤을 위해서 구덩이를 파고 한쪽에 돌로 채운 구조인데(그림 2-나) 2번 무덤방 입구 만큼 깊지 않다. 말 무덤 아래로 도굴괭이 다달았다. 도굴괭은 중심무덤방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말 무덤 아래까지만 있었다. 그리고 중심무덤방은 말 무덤, 입구, 도굴괭 보다 가장 깊었기 때문에(그림 3) 2번 무덤방까지 손대지 못하고 말 무덤에서 방향을 틀어서 1번 무덤방의 입구인 2번 무덤방 입구까지 연결되었던 것이다(그림 1).

 

 

그림 3. 가이모노바 유적 2번 무덤방의 단면도

 

기원전 4세기의 스키타이 무덤은 매우 특이한 것이 크게 만들면서도 어느 정도 도굴을 방지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가이모노바 유적에서도 무덤입구 아래에 바로 매장주체부를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무덤방을 여러 개 만들었다는 점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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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봉분을 크게 만들면 후대에 크게 훼손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전통? 혹은 규칙?의 예절? 때문에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참고문헌

Бидзиля В. И., Полин С. В.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Гайманова могила. — К.: «Скиф», 2012. — 752 с. (비드질라, 폴린 2012, 스키타이 차르의 쿠르간 가이마노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드네프르강 유역의 카멘스코예 성곽과 가장 인접한 가이모노바 무덤 유적은 매우 큰 쿠르간이다. 지름이 70m 정도 되는 무덤에는 4개의 무덤방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유물이 남아 있는 곳은 1번 무덤방과 2번 무덤방이다.

 

특히 1번 무덤방은 2개의 입구가 지하의 무덤방과 연결되어 있다. 1호 입구는 연도를 통해서 무덤방으로 들어가며, 2번 입구는 1번 무덤방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1번 무덤방은 2개의 감실이 따로 있고, 남쪽에 매납구덩이도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그림 1. 가이모노바 유적 1번 무덤방의 평면도와 단면도

 

유물은 1번 무덤방은 바닥에 나무판자가 3개 깔았던 흔적이 있는데, 인골 5구, 말 1필이 발견되었다. 인골 1구를 제외하고는 인골은 무덤바닥에서 벗어난 상태인데, 도굴로 인한 것이다. 감실 2곳에도 인골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1번 무덤방은 7인의 무덤과 말 1필이 매장된 것이다. 인골 5구가 나온 중심무덤방과 2번 감실은 유물이 도굴당한 상태여서 주로 소형인 무기 종류만 남아 있다.

 

그림 2. 가이모노바 유적 1번 무덤방

 

반면에 북쪽감실과 1번 무덤방의 남쪽 바닥에는 매납구덩이는 다행히 유물이 남아 있었다.

1번 무덤방에는 인골이 입구쪽에서 발견되었고 유물은 그의 다리와 우측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리스 토기(그림 3의 토기) 및 스키타이 청동 솥(그림 4-3)과 청동받침(그림 4-7), 청동쟁반(그림 4-6), 철제 도끼(그림 4-4)와 철제 창(그림 4-5), 철제 솥(그림 4-2)의 부속품 등이 발견되었다. 손잡이가 달린 투각된 철제 바가지(그림 5-1), 그리스제작방법의 청동 그릇(그림 5-2), 그리스제작방법의 청동주전자(그림 5-3), 스키타이 청동솥(그림 5-7), 그리스 제작방법의 청동통(그림 5-8), 청동제품(그림 5-2)이다.

 

그림 3. 가이모노바 유적 1호 감실(북쪽)

 

그림 4. 가이모노바 유적 1호 감실의 출토품

 

그림 5. 가이모노바 유적 1호 감실의 출토품

 

1번 무덤방에서는 말의 굴레장식이 출토되었는데,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유물이다. 톨스타야 마길라 유적, 오구즈 유적등에서 출토된 유물과 흡사하다(그림 6).

 

그림 6. 가이모노바 유적 1번 무덤방의 굴레장식

 

그럼 이미 소개한 은제 그릇은 어디서 출토되었을까? 1번 무덤방의 아래쪽에 아주 작은 매납구덩이 속에서 8~9점의 각종 그릇이 출토되었다. 이 곳이 눈에 뛰지 않았던 것은 작은 구덩이 이고, 바닥에 잔뜩 그릇을 쌓아두고 그 위를 점토로 덮었기 때문이다.

 

그림 7. 가이모노바 유적의 매납구덩이, 1: 목제그릇의 금제 장식판, 2: 양손잡이 은제 그릇, 3~6: 목제그릇의 4개의 황금장식판, 7~10: 목제 그릇의 4개 장식판, 11: 1번 소형 리톤, 황금판으로 장식됨, 12: 2번 대형 리톤, 13: 은제 쿱신(항아리) 14: 가이모노바 은제그릇(4번 그릇), 14-소형은제항아리

 

그림 8. 가이모노바 유적의 매납구덩이 출토당시

 

그림 9. 가이모노바 유적의 매납구덩이 출토품

 

1번 무덤방의 매납구덩이에서 나온 유물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만약 이 유적이 도굴되지 않았다면 어떤 유물이 남아있었을지 궁금하다. 1번 무덤방은 입구가 2개이고, 상대적으로 무덤방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구조이다. 하지만 2번 무덤방은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입구도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도굴구덩이는 바로 2번 무덤방과 가까운 곳으로 바로 들어갔고 2번 입구와 연결되어 있다(그림 10).

 

그림 10. 가이모노바 유적 2번 입구와 연결된 도굴괭

 

1번 무덤방의 입구에서는 전차 부속품인 바퀴가 1점씩 각각발견되었는데, 다른 부속품은 보이지 않는다. 의례품으로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Бидзиля В. И., Полин С. В.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Гайманова могила. — К.: «Скиф», 2012. — 752 с. (비드질라, 폴린 2012, 스키타이 차르의 쿠르간 가이마노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가이모노바 유적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과 가장 가까운 무덤 유적이다(지도참고). 가이모노바 유적은 1969~1970년에 발굴되었는데 소비에트 당시에 발굴되어서 현재 중요한 유물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유적은 높이 8~9m,지름은 70m로 체르토믈리크 무덤 발굴(1912년) 이후에 가장 큰 발굴이었다(그림 1). 물론 그 이전 부터 잘 알려져서 이미 도굴당한 상태였다.

 

 

그림 1. 발굴당시에 무덤의 사진을 찍는 장면

 

 

그림 2. 가이모노바 유적 발굴장면 1970년 여름

 

18~19세기에 유적은 이미 도굴되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유물은 많이 남아 있었다. 무덤은 지하에 무덤방을 판 구조이고, 입구가 2곳이 발견되었는데 1번 무덤방과 연결되어 있다. 입구와 연결되는 복도에서는 전차의 잔해도 발견되었다. 2번 무덤방은 3번 무덤방과 연결되었는데 무덤방은 4개가 확인되었다(그림 3).

 

 

그림 3. 가이모노바 유적의 평면도, 어제 소개한 은제 그릇은 1번 무덤방의 감실에서 출토되었다.

 

무덤은 가장자리는 돌을 둘렀고 1번~2번 무덤방은 땅을 파고 만들고, 그 위를 4번에 걸쳐서 봉분을 쌓았기 때문에 엄청난 흙이 사용되었다. 3번과 4번은 봉분을 파고 만든 무덤방이다.

그래서 유적 발굴 시에 최초로 불도저와 그레이더를 사용했다. 원래 러시아 고고학에서는 기계사용은 금지 되어 있으나, 러시아 고고학 매뉴얼에서 예외조항을 두고 있는데, 너무 규모가 큰 쿠르간의 경우가 해당된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리프트도 사용되었다.

카멘스코예 성곽과 동시기의 유적으로 규모나 출토유물로 보아서 성내에 거주하던 인물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

 

김재윤 2018, 「러시아의 발굴 -연해주 철기시대 얀콥스키 문화의 바라바시 3유적을 중심으로-」, 『야외고고학』, 31호

Бидзиля В. И., Полин С. В.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Гайманова могила. — К.: «Скиф», 2012. — 752 с. (비드질라, 폴린 2012, 스키타이 차르의 쿠르간 가이마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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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네미로프 성곽은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유적 중에 한 곳이다. 이 성이 위치한 곳은 드네프르강 보다 서쪽으로 부그강의 남쪽인데, 하류에는 올리비아가 위치한 곳이다. 물론 네미로프 성곽은 기원전 7세기부터 설치되어 올리비아 보다 이른 시기부터 있었지만 올리비아와 직접 교류했던 기간도 존재한다.

 

네미로프 성곽의 내성인 짐치크 성곽안에서는 원형 집자리가 발굴되었다(그림 1). 그 중에서 2호는 타원형(남북방향 5.8m)에 가깝고 집자리 안에서는 화덕자리 2기가 확인되었는데, 시기가 다른 화덕자리다.  이 집은 집자리를 두 번 사용한 흔적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집자리의 경계선 중에서 진한 선이 먼저 사용된 집의 경계선이고, 그 위에 흙이 덥힌 뒤에 다시 비슷한 위치에 다시 집자리를 판 흔적이 남아 있다. 약한 선이 두 번째 사용된 집자리의 경계이다.  화덕자리 1호가 먼저 사용된 집자리의 것이고 화덕자리 2호가 나중에 들어선 집자리에 설치된 것이다.

 

그림 1. 네미로프 성곽의 2호 집자리

 

네미로프 성곽은 이러한 원형집자리에 사람들이 살았다. 좀 더 확장해서 말하면 스키타이 문화의 가장 서부 지역에 살던 사람은 원형 집자리에 살았고 목조기둥을 세운 집에 살았을 것이다.

 

네미로프 성곽에서는 스키타이 문화의 토기가 많이 발견되는데, 토기의 외면을 매끄럽게 마연한 토기이다. 구연부(토기의 입구)가 벌어지는 호형(항아리)토기로 어깨선에 점토띠가 부착된 것이다. 마연되었다고 해도 매우 빤질거리는 것은 아니다(그림 2). 또한 드네프르 강 유역의 대표적인 스키타이 토기 중에 하나가 ‘바가지’라고 불리는 손잡이가 하나 달린 토기(그림 3)도 발견되었다. 드네프르강 유역의 바가지 토기는 외면에 침선으로 문양이 새겨지지만 이 유적에는 문양이 없는 토기가 많다. 어찌되었던 그림 2, 그림 3은 스키타이 문화의 토기이다.

 

그림2. 네미로프 성곽의 스키타이 호형토기

 

 

그림 3. 네미로프 성곽의 스키타이 바가지토기

 

 

뿐만 아니라 그리스 토기인 채색토기(그림 4)도 이른 층에서 발견되어서 기원전 7세기부터 무역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림 4. 네미로프 성곽의 그리스 토기

 

네미로프 성곽에는 다른 유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토기도 발견되었는데, 유럽의 초기철기 문화인 할슈타트 문화의 토기(그림 5)이다. 재지의 스키타이 토기와도 다르고(토기의 생김새와 문양) 그리스 토기와는 더 공통점이 없다.

 

그림 5. 네미로프 성곽의 할슈타트 문화 토기

 

성 내에서는 할슈타트 문화의 토기가 상당량 발견되었기 때문에 우연히 발견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러한 물질문화를 근거로 본다면 네미로프 성곽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스키타이 문화 시기에 매우 복잡하게 인접한 지역과 교류했다는 점을 알 수있다.

 

참고문헌

 

Смирнова Г.И., Вахтина М.Ю., Кашуба М.Т., Старкова Е.Г. Городище Немиров на реке Южный Буг. По материалам раскопок в ХХ веке из коллекц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и Научного архива ИИМК РАН

(스미르노바, 바흐티나, 카슈바 2018, 무가 남쪽 강의 네미로프 성곽)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드네프르 강 유역의 모든 성곽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드리고 싶지만 자료가 다 구해질 수 있을 지는 모르겠고 일단 동유럽에서 오랫동알려진 네미로프 유적을 빠르게 소개하고 한다.

 

네미로프 유적은 흑해로 흘러가는 부가 강의 남쪽에 위치한다. 기원전 7세기경에 만들어진 성벽은 스키타이 문화에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유적에는 그 보다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유적(100~110헥타르)은 구글 위성으로도 뚜렷하게 보일 만큼 성벽이 잘 남아 있어서 이미 19세기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성곽의 평면형태는 타원형이고 강을 끼고 북부지역과 남부지역으로 나눠어진다. 남쪽은 거의 늪지대에 가깝고, 북쪽 구역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북쪽 구역 가운데 두 개의 계곡부 사이에 내성인 잠치크 성곽(12.5헥타르)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북쪽구역에는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여 있는데 높이는 5~10m, 깊이는 7m 성벽의 바닥은 큰 돌과 통나무로 보강되었다.사람이 거주한 공간은 중앙의 잠치크 내성에서만 발견되었다.

 

그림 1. 네미로프 성곽 유적

 

성 내부에서는 스키타이 문화의 토기 뿐만 아니라 기원전 7~5세기경의 그리스식 토기가 많이 발견되어서 그리스와 무역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청동으로 만든 스키타이 화살촉과 스키타이 동물장식(스키토-시베리아 문화)이 달린 굴레장식(그림 3-1) 등이 나오면서 스키타이 사람들의 거주지임을 알 수 있다.

 

림 2. 네미로프 성곽 유적의 청동화살촉,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 유물까지 모두 있다.

 

그림 3. 네미로프 성곽 유적 출토의 유물, 1: 골제 굴레장식, 2: 청동제 거울의 손잡이, 3: 골제 빗, 4: 골제 마구 부속품

 

네미로프 성곽이 있는 강을 따라서 내려가면 하류에 위치한 곳은 기원전 5세기경에 그리스 식민도시로 알려진 올리비아가 있다. 이 강을 통해서 그리스와 교류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Смирнова Г.И., Вахтина М.Ю., Кашуба М.Т., Старкова Е.Г. Городище Немиров на реке Южный Буг. По материалам раскопок в ХХ веке из коллекц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и Научного архива ИИМК РАН

(스미르노바, 바흐티나, 카슈바 2018, 무가 남쪽 강의 네미로프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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